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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21020_11.jpg)
정의를 둘러싼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공정과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갈망이 계속되는 한 이 책은 계속 읽힐 것 같다!
그야말로 공정이 범람하는 시대다. 한 포털사이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17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공정이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어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서는 ‘편법과 잘못에 대한 공정한 처벌이 이뤄지는 사회’가 1위,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대가가 치러지는 사회’가 그 다음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에 관한 이슈는 가장 민감한 화두 중에 하나다. 신재용 교수의 책 『공정한 보상』에 의하면 ‘부도 신분도 대물림되는, 출구가 없는 이 세대(MZ)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확보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레토릭’으로 공정은 이 시대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판매부수만 놓고 보더라도 국내에서만 영미권의 20배가 넘는데다,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읽히는 것을 보면 공정과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갈망이 얼마나 깊은지 느낄 수 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정의에 관한 질문들
지난 달, 한전의 임직원들이 받은 성과급에 관한 기사가 화제로 떠올랐다. 올해 상반기에만 14조 3천 원의 적자를 기록한 한국전력공사(한전)와 자회사들이 5년간 약 2조 5천억 원의 성과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매년 적자난을 겪는다며 전기요금을 올리더니 그렇게 걷은 국민의 혈세를 남의 돈처럼 펑펑 쓴 이들에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2008년 월스트리트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160억 달러의 보너스를 나눠준 적이 있다. 당시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7천억 달러의 구제 금융 승인을 의회에 요청한 상태였고, 이 돈이 납세자들로부터 나왔기에 미국인들의 공분을 샀다. 이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는 분노의 핵심은 그들이 실패를 포상했다는 점이다. 방만한 경영과 무분별한 투자로 기업을 파산으로 몰고 간 이들은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보편적인 견해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경기가 좋았을 때 시장으로부터 부여받은 포상은 과연 정당한가? 부진한 작황이 날씨 탓이라면 날이 좋을 때의 풍요로운 수확이 유능한 경영자들 덕분이라고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오늘날 정치를 움직이는 공정과 정의의 문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습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선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명예와 포상을 누릴 미덕이 무엇이며 좋은 사회가 장려해야 할 생활 방식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 위한 수많은 상황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정의와 부당함,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을 둘러싼 주장들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성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책이다. 다양한 사례와 도덕적 사고의 근간이 되는 철학가들의 사상을 통해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사회의 기반이 되는 태도와 기질, 인격을 길러내는 일이자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옳은 행위에 대한 견해나 확신에서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근거가 되는 원칙을 찾는다. 그다음 그 원칙에 반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이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다.
이러한 긴장에 직면했을 때, 옳은 행위에 대한 판단을 재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 새로운 생황에 직면하면, 자신의 판단과 원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판단에 비추어 원칙을 재조정하기도 하고, 원칙에 비추어 판단을 재조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성의 영역에서 행동의 세계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근간을 형성한다. / 53p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접근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다. 영국의 도덕 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이 주장한 공리주의의 핵심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아야 한다’는 데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잘 알려진 이 개념은, 개인의 행복을 총합한 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는 견해에 입각하여 어떤 법이나 정책을 집행할 때 정부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할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정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 판단하려면 사회 전체의 복지를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옳은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비롯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다양한 가치를 하나의 잣대 즉, ‘더 나은’ 것을 묻는 이득이란 개념으로 획일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반박 또한 피할 수 없다.
때로는 도덕적 신념들이 서로 충돌하며 도덕적 딜레마가 생긴다. 예를 들어 전차 이야기에서 가능하면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는가 하면,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또 다른 원칙이 적용된다. 많은 생명을 구하자니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직면한다. 상황에 따라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적절한지 가려내야 한다. / 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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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세계적인 부자들의 돈을 그들의 동의 없이 가져간다면 그 이유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강제 행위이자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 자기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근거로 재분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자유지상주의자’라고 부른다. 공리주의가 공동체의 이익을 중요시한다면 자유지상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요시하는데, 이것이 책에서 설명하는 정의를 접근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데, 이는 경제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때문이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우리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자유주의자의 대표 철학자 칸트 역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녔으며 자율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존중하고, 도구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대 철학 사조에 들어서 자유주의는 특히나 각광을 받고 있지만, 여기에도 결함은 있다. 인도의 대리 출산과 앤드루 카네기가 남북 전쟁에서 자기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처럼, 경제적 이유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 선택이 완벽히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낙오자들을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간섭받지 않는 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이 배제된 최소 국가, 합의를 완벽한 행위로 칭송하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합의한 식인 행위나 노예 매매 등)마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무지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존 롤스는 자신의 인종이 무엇인지, 사회적 지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무지의 장막)가 된다면 ‘어쩌면 내가 억압받는 소수에 속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혹은 자신이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이익에만 동기 부여 되어 움직이지 않을 거라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느 누구도 우월하지 않고 평등한 위치에 있다면 우리가 합의한 원칙은 정당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존 롤스는 기회 균등 및 자유 시장을 보장하는 자유지상주의 정의론을 주장하면서도, 자유 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배분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됨으로 이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질 수 있는 기회 즉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이른바 ‘차등의 원칙’에 따라 가난한 사람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수 있게끔 조세 및 재분배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선진 민주주의 복지 철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정치적 자유주의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최소화하려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정치이념이 발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을 택하게 될까? 자신이 지독히 가난한 처지에 있을 경우에 대비하여, 처음에는 소득과 부의 완전 균등한 배분을 선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윽고 그보다는 나은 방법, 심지어 가장 하층 사람들에게도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약간의 불평등을 인정(예를 들어 의사에게는 버스 기사보다 더 높은 보수를 주는 식)하는 대신 빈곤층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등 환경 개선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사회에서 가장 약자에 속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롤스의 소위 ‘차등 원칙’을 우리는 받아들일 것이다. / 228p
롤스는 기회 균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자유 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배분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 체제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부분은 “분배되는 몫이 도덕적으로 봤을 때 대단히 임의적인 요소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는 상황이 허용된다는 점이다.”
이 부정의를 바로잡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경제적 불리함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다.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는 제도적 기회 균등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조치들로 이를 실현하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공정성을 해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풍요로운 가정 출신 학생과 똑같은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교육 기회를 고르게 제공한다. ‘헤드 스타트’ 프로그램(저소득층 대상 교육 지원 프로그램-옮긴이), 아동 영양 보건 프로그램, 교육 및 직업 훈련 프로그램 등을 통해, 모든 사람이 계층이나 가정환경에 관계없이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 2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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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이어 우리가 정의를 이해하기 위한 세 번째 접근법은 ‘정의란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 즉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방향으로 재화를 배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란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시민의 미덕이 탁월한 사람, 공동선을 고민하는 데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치란, 사람들에게 좋은 인격을 기르게 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따라서 정의에 관한 논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상적인 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인 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결국, 국민의 정치의식(미덕)을 성숙시켜 그들의 판단력을 기르게 하고 공동선과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보살피도록 독려하는 데 의의를 둔다. 마이클 샌델은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주의’라는 개념에 힘을 싣는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현실의 인간은 고립된 주체가 아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정의라는 문제도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 풀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으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 있다고 말이다. 시민들이 사회 전체를 염려하고 공동선에 헌신하는 태도를 함께 고민하며 정치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기를 독려하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선의 가치를 묻고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토론할 수 있을 때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길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지만, 그래서 마이클 샌델이 책에서 던진 정의를 향한 화두는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응답해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사실 ‘정의’를 명확하게 논하기란 쉽지 않고, 이 책 역시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리뷰라기보다는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가들의 입장에서 정의라는 주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해보고, 나의 생각을 정립해보는 과정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또 우리 사회의 정치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하고 정착해왔는지 살펴보는 과정 역시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진입장벽이 어려운 것은 분명하나,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고 또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혹시나 이 책이 책장 한 곳에서 묵묵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한 번쯤은 꺼내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정의를 논하는 일이란 결국 좋은 삶을 살기 위한 고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