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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 타인을 대상화하는 인간
존 M. 렉터 지음, 양미래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5월
평점 :
보다 넓은 지형으로 바라본 악의 본성!
나와 타인의 경계,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성찰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책!
존 M. 렉터는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제시한 ‘동굴의 비유’로 포문을 연다. 플라톤은 ‘인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깊은 동굴에 갇혀 사는 죄수와 같으며, 그 깊은 동굴에서도 목과 다리에 족쇄가 채워진 채 똑같은 저리에만 머물기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동굴 벽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라 했다. 이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경험하지만 그것들의 표면만 보는 경향이 있으며, 어떤 존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가 그 존재의 진실을 대변한다고 섣불리 가정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이 비유야말로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에서 강조하는 핵심 개념, 즉 ‘대상화’와 연관된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화란, 타인을 주체가 아닌 사물로 바라보고 사물처럼 대하는 심리적인 과정이다. 저자는 타인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타인을 총체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뜻이며,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이 지닌 심오한 진실까지 왜곡하게 되어 악이 실현될 가능성을 증대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대상화의 본질을 비롯해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나 의식·무의식적인 활동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로 인해 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저 플라톤의 동굴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인간이 타인을 대상화하는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자, 역설적이게도 선을 지향하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어떨지를 상상해보는 행위는 인간성의 핵심을 이룬다.
이는 연민의 본질이자 도덕의 시작이다. - 이언 매큐언 / 43p
타인을 수단화한다는 의미에서 대상화는 경미한 수준에서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를 아우른다. 대상화 스펙트럼의 가장 최저점에 위치한 ‘일상적 무관심’은 대부분의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에 경험하는 현상이며, 이때 우리는 극히 소수의 타인만을 소중한 주체로 간주한다고 한다. 대상화 스펙트럼에서 가장 넓은 중간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유도체화’는 타인을 우리의 필요, 욕구, 두려움, 소망에서 파생한 한낱 대상으로 간주하는 현상이다. 유도체화 과정이 진행되면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타인을 희생시키면서(여성을 대상화한 광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유도체화가 극단적으로 발현될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감정적 둔화’라 하는데, 전시 상황 혹은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발현되거나 정상적인 공감이 불가능한(정신병) 무능의 부차적인 결과로 나타난다고 한다.
대상화 스펙트럼의 최고점에 위치한 비인간화는 극단적인 대상화를 가리키며, 특정 사람들의 인간성을 부인하고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로까지 간주하는 현상을 말한다. 대체로 제노사이드의 전조를 여기에 분류한다. 이처럼 넓고 다양한 수준의 대상화 스펙트럼을 살펴보다보면 우리 내면에 이토록 다양한 자아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삶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균형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사는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특히, 누스바움이 제시하는 ‘대상화가 구현되는 일곱 가지 방식’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의식의 여부와 상관없이 수시로 타인을 대상화하는 일을 빈번하게 해왔음을 직시하게 된다.
대상화가 구현되는 일곱 가지 방식을 설명한다.
- :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본인의 목적을 위한 (한낱) 도구로 대한다.
- 부정: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이 결여된 존재로 대한다.
- :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행위성이 없거나 행동을 취할 역량이 없는 존재로 대한다.
- 가능성: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대한다.
- 가능성: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경계 완전성이 결여되어 침해하거나 망가뜨려도 되는 존재로 대한다.
- :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거나 사고팔 수 있는 존재로 대한다.
- 부정: 대상화의 주체가 타인을 마치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경험과 감정(존재한다면)을 지닌 존재로 대한다. / 40p
어떤 집단은 다른 집단의 인간성을 부정한다. 인간성이 부정된 집단에 속한 이들은 동물, 해충, 곤충, 질병 따위와 동일시된다. 비인간화는 인간이 살인에 대해 느끼는 정상적인 혐오감을 압도한다. 비인간화가 이루어지는 수준에서는 피해집단을 비방하기 위한…… 혐오의 프로파간다가 동원된다. - 그레고리 H. 스탠턴 / 70p
우리가 타인을 대상화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애착과 갈망, 분리, 나는 옳고 타인은 그르기를 바라는 욕구,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삶 등 타인을 대상화하는 경향에 기여하는 인간의 기질적(내적) 요인과 더불어 상황적(외적) 요인에 주목한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 대상화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이 모의 교도소 실험은 학대적인 교도소 환경이 각 교도관과 수감자가 지닌 성격에서 기인한 부산물인지 아니면 유해한 환경이 낳은 결과물인지를 파악하고자 실시된 것이다. 선발된 실험 참가자들은 24명의,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젊은이들로 동전 던지기를 통해 수감자와 교도관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 교도소 내에서 행세를 해야 하는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6일 차가 되던 날, 이 실험은 돌연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 실험을 진행할 수 없을 만큼 교도관 역할을 맡은 이들이 대상화 스펙트럼 중에서도 상당히 진행된 유도체화 수준으로 가혹한 폭력과 성적 학대를 일삼았고, 수감자 역할을 한 이들은 그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기력과 우울, 의존적이며 수동적이며 억압받는 경험들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원래 선하거나 악한 것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상황적 조건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좋은 자아는 언제나 나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통념에 경고를 날리는 사례로, ‘악이란 단지 사이코패스나 폭군, 도착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밟게 될 수 있는 지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우리가 악을 선의 반대 개념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가해자가 받아들이는 권력의 의미가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을 설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변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강제수용소처럼 절대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머지않아 폭력이 새로운 언어로 군림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지역이 고립되어 있을수록 폭력의 하위문화는 더 거리낌없이 발전할 수 있다. 강제수용소-특히 폴란드에 위치한 강제수용소들-에서 복무한 나치스 친위대원들은 전쟁 이전의 삶을 보냈던 익숙한 풍경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민간의 생활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본래 일종의 규제로 작용했던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은 이렇게 고립된 환경에서 전능감을 느꼈다. / 72p
애착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부정적인 혹은 적대적인 감정적 몰두라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원한에 사로잡히거나 누군가를 증오 또는 원망하는 감정에 극도로 몰두할 수도 있다. 한편 일상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깊은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애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애착은 주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인지하고 인정할 때,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인지하고 인정할 때, 어떤 사물이나 사람 없이는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고 여길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핵심은 욕망하거나 경멸하는 사물 혹은 사람 그 자체보다도 그러한 사물 혹은 사람에게 투영된 감정의 유형 및 깊이와 결부되어 있다. / 188p
삶을 평가하는 기준을 물건의 소유와 동일시할수록 우리는 자아의 영향과 세상을 대상화하는 경향에 더 쉽게 좌우되며, 이에 따라 우리 자신과 타인의 본질은 흐려진다. 반면 존재의 실존양식은 취득과 소비보다 존재, 경험, 관계를 강조한다. 존재의 실존양식에서는 경험의 풍요로움을 다른 무언가를 위한, 보다 갈망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본다. 그러므로 존재의 실존양식은 모든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는 깨달음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타인을 대상화하려는 우리의 경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해독제를 제공해준다. / 227p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플라톤의 동굴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저자는 이를 유신론과 비신론적 접근법, 이른바 깨달음의 스펙트럼으로 지칭되는 일상적 관심과 상호연관성 그리고 합일의식 등을 제시한다. 여기서 가장 높은 스펙트럼에 위치해있는 합일의식이란 경계를 초월하여 세계와의 연결성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사실 이 세계와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고, 존재의 다른 측면과 통합되기를 제안한다. 이러한 방법은 자칫 심오하고 종교적이며 낭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으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는 느낌을 자주 나누고 참된 감사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의 경험에 마음 깊이 몰두하는 순간들 체화하다보면, 우리는 타인을 대상화하려는 경향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작’들과 (대중서나 ‘한번 읽고 마는’ 문학작품과 상반되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는 행위는 인간됨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문학작품의 독서는 독자가 이야기에 몰두하기만 한다면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한층 북돋아준다. 위대한 문학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주제를 다루고 깊이와 모순을 지닌 인물들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오래도록 유지된다. 더불어 독자들이 주인공은 물론 악인과도 동일시해보고 본인의 내적 복합성과 천사 같은 경향 혹은 그림자도 조명해보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타인을 더욱 섬세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383p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던 것처럼 얼마든지 외부 환경과 꼬리표 이미지, 사회 역할에 따라 악의 평범성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대상화 문제는 일상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일이고,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우리는 대상화에 동일시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악의 본성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와 타인의 경계,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성찰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유의미한 책이다.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고, 참신한 해결책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아쉬울만한 면면도 있는 책이다. 하지만 유독 자아를 강조하는 현 시대에 경계 너머의 세계와 합일을 독려하는 책의 메시지는 아무리 낡은 것이어도 지속적으로 전해져야 하지 않을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