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분명해지는 낯선 언어의 감각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언어를 사유하는 일은 번번이 좌절감을 불러일으켰지만묘하게도 저 세계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주아나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너무도 마르고 조숙한연약하지만 살아 있는 자신의 작은 알이 언젠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을 때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당혹하게 하다못해 급기야 도망치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사물과 사물 사이시간과 시간 사이보이지 않는 것들을 끊임없이 더듬어 만지려는 이 아이를심연의 그늘 속에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이 아이를억눌린 힘을 모조리 발산하고 싶은 이 야수 같은 아이를자신의 온 존재가 세상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아이가 이해받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생의 열렬함은 곧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임을 감각하는 자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것 뿐그저 저기 무덤 위에 핀 꽃처럼 살고살아가는 수밖에.

 

 

 

데 프로푼디스(심연)… 데 프로푼디스

 

 

  “작은 악마 같아……그 애는 독사야차가운 독사.”

  숙모는 책을 훔치고서도 도리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주아나의 당돌한 모습에 아연해진다이따금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를 더 이상 거둬 키울 자신이 없다이 아이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걱정되었던 아버지행복해지는 건 무얼 위한 거냐는 아이의 질문에 얼굴을 붉혔던 선생님, “넌 너와 함께 느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던 또 다른 선생님, “난 당신을 알아요당신의 악함이 얼마나 뿌리 깊은 건지 알아요라던 남편의 전 약혼녀 리디아, “당신은 늘 나를 혼자 뒀다고 말하는 남편 오타비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해불가능한 돌연함으로 가득 차 있는 주아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예민하게 지각하지만 그래서 심각한 갈증을 느껴야했던 주아나의 삶은 온통 결핍의 연속이었다가만 보면 주아나의 생 전체가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시를 짓는 작업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무슨 일이 일어날지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하면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후의 시간 한 줌 속에 있게 되는 거야알겠어그녀는 먼지투성이 마룻바닥 위에서 맨발의 움직임을 즐기며 그 어려운 생각을 밀어냈다발을 비비면서아버지의 곁눈질로 살피며아버지가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시선을 던져 주기를 기다렸다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아무진공청소기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 14p

 

 

눈을 감고 두 손을 내밀고서 가구에 닿을 때까지 걸어갔다그녀와 사물들 사이엔 무언가가 있었지만그 무언가를 파리처럼 잡고서 살짝 훔쳐보면-아무것도 도망치지 못하게 조심했는데도-눈에 보이는 건 자신의 장밋빛 손실망한 손뿐이었다그래공기나도 공기를 알아하지만 소용없었다그걸로는 설명이 안 되니까그건 그녀의 비밀들 가운데 하나였다그녀는 절대로아버지에게조차도자신이 그것을 손에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그녀는 진짜 중요한 것들에 대해선 말할 수가 없었다. / 16p

 

 

내가 말했지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왜냐하면 그들의 그…… 그 계획들은비료 없이는 절대로 번성할 수 없는 토양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제가요?”

세상에아니지……넌 번성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야.” / 79p

 

 

 




 

 

 

 

  이처럼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현실이라는 생생한 감각을 누구보다도 깊이 내면화하는그래서 어디에서도 완전히 머무르지 못하는 한 여성의 정신적 디아스포라를 다룬 작품이다뚜렷한 서사에 기대지 않는 몽유병 같은 문장들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한 투쟁의 언어들을 의식의 흐름에 기대어 쓴 이 소설은 우리가 사용하는 정형화된 언어가 삶의 본질을 다 담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이는 우리가 아는 상식이나 정의의 바깥에우리가 아는 단어의 뜻 바깥에 있는 마음들을 주로 탐구하기 위한 을유문화사 암실문고판의 기획 의도와도 맞닿아있다.

 

 

 

별들별들나는 기도한다그 말이 나의 이 사이에서 연약한 파편들로 쪼개진다내 안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기에나는 별이 되고 싶다나를 조금만 정화하면 비 뒤에 숨은 저 존재들을 무더기로 가질 수 있으리라지금솟구친 영감이 온몸을 들쑤신다한 순간만 지나면 그것은 영감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이고그러면 나는 공기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 지금의 질식할 듯한 행복감 대신에 선명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영감 이상의 것을 갖게 되고그 너머를 향해 움직이고존재 그 자체를 소유하게 될 때마다 그렇게 느낄 것이다그렇게 진짜 별이 되는 거야그곳을 향해 이끄는 건 광기광기다. / 104p

 

 

데 프로푼디스무언가가 말하고 싶어 했다……데 프로푼디스…… 자신의 말을 들어심연의 가장자리에서 가볍게 춤추는 저 덧없는 기회를 잡아데 프로푼디스의식의 문을 닫아처음엔 썩은 물을어지러운 말들을 지각하지만그 다음엔 그 혼란 속에서 순수한 물줄기가 거친 벽을 타고 떨리며 흐른다데 프로푼디스……. / 318p

 

 

 




 

 

 

 

  재독에 재독을 거듭하며 문장을 곱씹고 곱씹어본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분명한낯선 세계로의 진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비록 나의 얄팍한 언어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언어를 사유하는 일은 번번이 좌절감을 불러일으켰지만묘하게도 저 세계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페이지 한 장 한 장 매겨놓은 플래그의 숫자를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매번 새로운 독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문장의 향연이라니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와중에 스무 살 - 제1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대상 수상작 창비교육 성장소설 7
최지연 지음 / 창비교육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처투성이인 내면아이와 화해하지 못하고 자라난 이 시대의 많은 청년들을 대변한 이야기!

이 소설이 우리 사회의 많은 은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기를!

 

 

 

 

 ‘'엄마는 정말이지 내 마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스무 살새로운 시작과 아름다운 미래라는 꿈을 품기에 마땅한그래서 지난한 과거와는 쿨하게 이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꿈에 젖어들기 딱 좋을 나이주인공 은호는 스무 살이 되면 자신의 인생이 조금은 새로워질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엄마라는 중력은 너무도 강력해서 오늘도 꼼짝없이 휘청이고 만다교내 상담사에게 엄마에게 남자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라고 한건 엄마가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보단 불편한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은호에게 스무 살 전까지는 연애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그랬다가는 인생 조지는 거라고 말했다심지어 엄마는 은호와 동생인 현호를 기르는 내내 아빠 욕을 했다. “네 아빠가 겁탈해서 네가 들어섰다.” 네 아빠처럼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인간은 없을 거라는발정 난 개도 그렇게는 안 돌아다닐 거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아이러니한 건 그 모든 말을 견디면 견딜수록 그 사실을 제공한 아빠보다 몰라도 될 사실을 굳이 자신에게 말하는 엄마가 더 미웠다는 거다그렇다고 해서 네 엄마처럼 애교 없고 독한 여자랑 만나서 다 망했다.”고 말하는 아빠화목한 가정에 대한 환상은 잔뜩 있었지만 가장의 책임감은 없었던 아빠로 인해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야 했던 엄마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오히려 엄마가 또 자신을 버리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인해 엄마가 떠나지 않도록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기로 한 건 그조차도 붙잡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으리라.

 

 

 

술 취해서 휘청거리는 것들이 제일 한심해.”

엄마의 잣대는 너무 엄격했고 그만큼 비난은 날카롭고 견고했다그런 비난을 들으면 나 역시 그 기준에 어긋나는 건 아닐지 긴장됐다그리고 말 끝에 꼭 아빠 얘기가 나왔다엄마 인생의 모든 비극의 근원에는 아빠가 있었다술 취한 손님이 화장실 바닥에 토해 놓은 걸 치워야 하는 자신의 신세도서울에 널린 수없이 많은 집 중에 자기 집 한 채 없는 형편도식당 불판에 손가락을 덴 사고까지 모두, “그 인간만 안 만났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 63p

 

 

은호야아빠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거든그런데 애교 없고 독한 여자를 만나서 다 망했어다 망해 버렸어네 엄마 때문에.”

그놈의 네 엄마네 아빠대체 내게 왜들 이럴까아빠는 이런 자기가 딱하지 않냐고도 물었다아빠는 자기를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아내도자식들도 아닌 자기 자신을 제일 가여워하는 사람그게 내 아빠였다. / 69p

 

 

 



 

 

 

 

  소설 이 와중에 스무 살은 스무 살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시작한 은호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이다은호는 우리 사회가 흔히 ‘K장녀로 일컫는가족을 정서적으로 지지하고 과도한 책임을 떠안고 자라난 청년들의 자화상이다뭘 좋아하고뭘 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볼 여유 없이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딸삶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제자리걸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때론 후퇴하기도 한다는 것을 엄마의 지난한 삶을 보고 일찍이 철이 든 딸엄마를 두고 끊임없이 밖으로 나도는 아빠를 보며 연애를 할 때마다 늘 상대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딸무턱대고 찾아간 교내 상담실에서 부모와의 관계가 어떠냐는 질문을 들은 순간예상치 못한 훅을 맞은 것처럼 눈물을 쏟아낸 은호는 자신의 삶에서 결여된 것들 혹은 막막한 현실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강의 중간에 나온 게 벌써 후회됐다나만큼 진로 컨설팅이 필요한 학생이 어디 있다고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달리다가 눈가리개를 떼고 나니 여기가 어디지하며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는 것이 지금 내 상태니 말이다엄밀히 말하면 지금 내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느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아가도 되는지에 있었다어쩌면 뒤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 21p

 

 

모르겠다세상이 바쁘게 몰아붙이는 대로익숙하고 무난한 방식으로 살았을 때 이르게 될 뻔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어쩌다 생겨났는지는쓸데없이 책만 많이 읽은 나는 회사에 기생하는 일이 아닌 더 의미 있는 일이자본가가 떠구는 콩고물을 받아먹는 삶이 아닌 더 의미 있는 삶이말하자면 일과 삶을 일치시킬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싶다는 환상까지 품고 있었다.

문제는그 욕구와 환상을 실현할 과감함과 결단력이 내게 없다는 거였다내 속의 반항심과 소심함은 너무나 사이좋게 손잡고 있었다. / 23p

 

 

 

  설상가상 이혼을 하겠다며 서울로 올라온 엄마는 은호의 좁은 방을 비집고 들어온다덕분에 고단한 엄마의 한숨과 날선 감정들은 고스란히 은호에게 전이되고감정의 웅덩이가 커지고 깊어지다 못해 드디어 폭발하게 된다짧은 가출과 자살인줄 알았던 소동이 몇 차례 지나고 난 뒤은호는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하지 못해 경계설정을 명확히 하지 않은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된다또 엄마가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느라 보지 못했던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칼처럼 품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엄마의 시간을 이해하게 된다어쩌면 엄마는 최선을 다해 우리 곁에 있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저렇게 살면 안 된다며 주변 사람들을 험담했던 건 때론 편한 길로 가고 싶었을 엄마가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아울러 은호는 자기 자신의 문제는 외부에서 찾을 게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성장의 의미를 성찰하게 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내가 누군지어떻게 살고 싶은지진짜 살고 있긴 한 건지외부의 답이 아닌 내 안의 답을 찾으려고 지금도 계속 고민하니까누군가는 답도 없는 고민을 한다고 한심하게 보겠지만 답이 있는 고민만 하는 건 인간적이지 않잖아인간은 고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고민하는 순간이야말로 살아 있는 순간이고그러다 보면 믿어 왔던 통념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낯설고 불편한 것 쪽으로 기꺼이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거지.” / 54p

 

 

나를 붙잡으려는 상대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날 원하면 저럴까 싶었다나는 그런 식으로 사랑을 확인했던 것이다내가 얼마나 상대를 괴롭혀 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만나는 동안 헤어지자는 말로 상대를 긴장시키며 내 곁에 매어 두다가 결국 먼저 떠나곤 했다는 것을사랑받고 싶어 했으면서도 결국 상대의 마음을 불신했다는 것을.

내가 나를 괜찮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지 못하면 그 인정을 외부에서만 찾게 되죠그 과정에서 사실 가장 괴로운 건 자기 자신이고요.” / 110p

 

 

 




 

 

 

 

  은호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때 어른들의 인정과 칭찬이 전부였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먹먹했다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기대를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나의 생각은 거의 신념에 가까웠기에 늘 괜찮은 척아프지 않은 척내 안의 불안을 끊임없이 단속했다때문에 나는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는 데 보다 열심이었다안타까운 것은 나와 더불어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이와 유사한 관념과 환경 속에서 성장했고신체적으로는 독립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상처투성이인 내면아이와 화해하지 못하고 자라난 이 시대의 많은 청년들을 대변한 이 이야기가 제 1회 성장소설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건 어쩌면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그만큼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어떤 사람인지 고민해 볼 틈도 없이 성장해버린 청년들의 그늘과 갈증을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한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또한 다정한 위로와 새로운 가능성의 기회를 균형감 있게 전하는 작가의 필력 또한 안정적이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많은 은호들에게 가 닿아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들의 마음공부 : 부모 편 - 부모에게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 생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오소희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딸이자엄마이자여성인 나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부모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사랑과 더 나은 세상을 주고자 하는 여성들의 진솔한 이야기!

 

 

 

 

  그 날은 내가 난생 처음으로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었다아무리 떠올리고 떠올려 봐도 그 날 내가 왜 학교에 가지 않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다만엄마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고평소 떼 한 번 쓰지 않던 아이가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서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다그날 저녁나는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밥상머리 앞에서 꺼내놓았나 보다당시가 초등 1학년이었으니 아마도 큰 사달이 날 것이란 예상 따윈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아빠는 대노하셨고 나는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나 때문에엄마가 아빠에게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들어야 했다그것은 곧 내 안에 일종의 부채감으로 자리잡았다그렇게 학교를 결석한다는 건 우리 집이 반으로 쪼개지는 위험천만하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이후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고 착실히 등교했다학교에서만이 아니었다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아니 그 날 아빠의 얼굴에서 보았던 냉정한 시선과 으르렁댔던 목소리가 내내 나를 따라다니면서 엄격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 날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어린이집을 등원하다 또 하지 않기를 반복하던 아이가 어느 날등원복을 보더니 까무러치기 시작했다나는 애원과 윽박을 번갈아가며 아이의 옷을 입혔고겨우 옷을 입혔을 즈음 아이는 신고 있던 양말을 거의 잡아 뜯다시피 벗어던졌다이미 나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해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나는 이를 꽉 깨문 채 기어코 어린이집 버스에 아이를 실어 보냈다그렇게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니 발목이 잔뜩 늘어난 아이의 양말이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양말을 주섬주섬 챙기다보니 눈물이 치솟았다너덜너덜한 양말이 꼭 내 마음 같아서였다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를 그렇게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무조건 보내야할 의무도 없었는데 왜 나는 아이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단념하지 못했을까어쩌면 그건 지난 날그 사달이 있어났던 그 날의 트라우마 때문은 아니었을까엄마인 내가 과거와 화해하지 못한 이유로 오늘의 내 아이가 상처를 입었으니 참 미안한 일이었다.

 

 

 

내 세계의 통행증은 내가 관리한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두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하느라 정작 나 자신은 돌볼 줄 몰라 깊은 우울감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읽게 된 책 하나가 나를 건져 올려주었는데 그게 오소희 작가의 엄마는 20이었다오소희 작가는 세상의 엄마들에게 당신을 든든히 지켜줄 당신의 세계를 가꾸기를 독려하며 엄마라는 자리는 끝이 아닌시작임을 일깨워주었다덕분에 이 책은 줄곧 내가 손에 꼽는 에세이 중에 하나가 되었으며 주변의 많은 엄마들에게 자녀교육서보다 더 많이 권하는 책이 되었다그로부터 몇 해가 흘러 최근오소희 작가의 신작 언니들의 마음공부(부모 편)이 출간되었다부모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사랑과 더 나은 세상을 주고자 하는 여성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그들의 진정한 자아찾기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어릴 적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기꺼이 대면하고함께 치유하고용감하게 나아간 이들의 이야기는 비슷한 상처를 지니고 있는 여성들의 아픔까지 함께 보듬으며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모든 글에는 치유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신뢰하는 사람들과

특별한 방식으로 나누기만 한다면. / 16p

 

 

 

  2019여성들의 활동 플랫폼 언니공동체를 개설한 오소희 작가는 <‘를 찾는 글쓰기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참가자들은 저마다 다른 배경에서 성장했고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약 90퍼센트가 부모라고 답했단다뜻밖이지만한 사람의 성장과 인생에 있어 부모 혹은 가족만큼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또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럴 만한 결과다.

 

 

 

부모가 아들과 딸을 차별하고 키운 경우

맏이에게 어릴 때부터 어른 역할을 지운 경우

부모의 꿈을 아이가 대리 성취해주길 바란 경우

아이가 보는 데서 부모가 수시로 싸운 경우

아빠가 엄마와 아이를 때리고 강압한 경우

엄마가 아이에게 신세한탄을 하고 때린 경우

 

 

 

  작가는 우리의 부모님들은 밤낮으로 일해 자식들에게 밥을 먹이고 학교를 보내주셨지만정작 포옹과 응원위로와 지지의 말 같은 것들 혹은 그저 곁에 가만히 앉아 잠시 체온을 나눠주는 공감의 순간 같은 것들이 부모의 역할에 포함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한다결국 그 자식들은 위장의’ 허기는 채웠을지 몰라도 정서적’ 허기를 지니게 되었으니이제라도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부모 자식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이에 각 사례마다 참가자가 직접 쓴 자전적 글작가와 참가자가 <치유의 3단계 매뉴얼>로 삶을 정리하고 재구성하는 과정그것이 다시 참가자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확인하는 마무리 글을 통해 상처에서 긍정을 발견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과 대화를 할 줄 몰랐어대화를 하려면 상대방이 다섯 살 어린아이라 해도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는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해등에 짊어진 의무이거나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잘 지내보고 싶고 그러기 위해 더 알고 싶고더 알아내기 위해 꾸준히 눈을 맞추며 소통의 노력을 하는 독립적인 인격체하지만 그 당시 시절의 부모에게 자식이란 의무나 소유물에 가까웠지.

지금도 어엿이 성인이 된 자식에게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부모님들, ‘중요한 결정은 내가 내려줘야 한다며 개입하는 부모님들이 많은 건 여전히 자식에 대한 정의가 거기 머물러 있어서야. / 32p

 

 

정서적 소녀가장이 한 일은 아무도 눈치를 못 채그 오랜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노동을 혼자 하면서 낑낑댔어무심하고 둔감한 사람들 사이에서 민감한 주파수로 불행을 시시각각 감지한다는 것몹시 피곤한 일이야어린 깜냥으로 대책을 강구했다는 것무력한 일이야그 수고로움에 아무도 중요한 일을 한다라거나 고맙다거나 애썼다고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엄청난 좌절이지. / 190p

 

 

 



 

 

 

  <치유의 3단계 매뉴얼>은 대면과 이해의 과정인 1단계위로와 긍정의 과정인 2단계마지막 3단계인 퉁치기와 경계설정의 과정으로 나뉜다여기서 대면 단계즉 치유의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서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듯하다작가는 이를 지구 위에서 보기라고 말하는데우주인이 지구를 내려다보듯 멀찍이서 상처를 받았던 당시를 내려다보는 방법이다새롭게 확보된 너른 시야로 자신이 상처를 받았던 시절의 사회적 특징을그것이 가족에게 준 영향을그 영향 안에서 각 개인들이 어떻게 다르게 반응했는가내게 상처를 준 사람의 능력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일이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를 위로하고 고통에도 긍정의 지점의 있었음을 알아봐줄 수 있게 된다.

 

 

 

실패한 건 실패한 거야.

부모 자식 관계라 해도,

애착관계조차 맺지 못한 관계,

혹은 엉성하게 맺다가 만 관계,

그런 관계도 있을 수 있는 거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또한

꼭 필요한 치유의 과정이야. / 61p

 

 

이 작업은,

하나엄마와 너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당시에 살아남기 위해 맺었던지금은 필요 없어진 비상시 팀워크를 해체하고,

팀워크를 유지하느라 네가 억눌렀던 맞는 감정과 감각을 뒤늦게라도 불러와 너의 내면아이를 충분히 위로하며,

감정과 감각을 억누른 대가로 얻어낸 생의 자원들로써 억울함을 퉁쳐 보내고,

다섯지금부터는 맞는 감정과 감각을 지니며 살 수 있도록 자원을 여유롭게 활용하는 동시에,

여섯엄마와 새롭게 경계설정을 하는 거야이로써 엄마와 더 바람직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부모님에 대해서 좋은 말만 해야 한다는 조선시대 억압은 변기에 쏟고 물 내려.

부모와의 관계에서 뒤죽박죽된 부분을 정리하지 않고 대충 뭉개서 사랑으로 미화하고 살면 그 잘못된 방식이 다른 소중한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돼연인에게배우자에게특히 자식에게 되물림되지. / 114p

 

 

 

  오소희 작가는 말한다어릴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감정과 감각의 이름들을 익히고 시시각각 그것을 알아봐주는 연습이 필요하다고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문제없는 척그런 척들로 나의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려할 때 파묻어버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의 감정을 바라봐주라고어린 시절 적정한 말과 스킨십으로 마음 챙김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면 지금이라도 특정한 상황에 맞는 감정과 감각은 무엇인지그에 알맞은 대처(표현)법은 무엇인지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내가 당황한 거구나.’ ‘지금 난 혼란스러운 거야.’ ‘이 감정은 우울이야.’ 2외국어를 익히듯 적절한 감정과 감각의 이름들을 익히다보면비록 더듬거릴지라도 매일 꾸준히 사용하다보면 내 아이에게는 그것이 모국어가 된다고.

 

 

 

  “엄마는 사랑스러워사랑해.” 감정 표현에 서투른 엄마인지라 사랑한다는 말에 여전히 낯설어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서슴없이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온다덕분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줄 수 있게 된다. “엄마속상해미안해.” 아이가 뭔가를 엎지르거나 실수를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고 있으면 아이들은 나보다 먼저 나의 감정을 읽어준다덕분에 나는 속상해하지만 괜찮아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하고 내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된다비록 나는 아이들을 통해 상황에 맞는 감정과 감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지만오소희 작가의 말처럼 더듬거릴지라도 매일 사용하다보면 나의 언어가 되고 가족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가 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각각의 사연들은 조금은 사정이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 모두가 겪었던 상처들 중에 하나였다읽는 내내 몇 번이나 마음이 뭉클했고나의 기억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해서 울컥했다이 책으로 하여금 많은 여성들이엄마들이딸들이 를 제대로 바라봐주는 법을 배우고 보다 더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2 - 전2권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민진 작가의 탁월성은 이제껏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 하나하나에 고유의 서사를 불어넣으려는 시도들 속에서 빛난다!

 

 

 

내 어린 시절은 이민과 계급인종젠더 문제에 끊임없는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는 이민 1세대와 2세대 인물들을 등장하는데,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미국의 이야기라는 정의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세상 그 어떤 나라와도 다르게 미국은 이민정책과 초기 식민지 역사라는

태생적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원주민과 노예의 후손들을 제외하면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생애는

궁극적으로 이민자의 여행기와 연결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469p

 

 

 

  17년 전미국이 건국 200주년을 맞던 해에 케이시네 식구들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유능한 젊은 여성으로서 케이시 한은 번듯한 삶과 성공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뉴욕 퀸스의 허름한 동네에서 자라난 한국인 이민자로서학과에서 1등을 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의 로스쿨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하더라도맨해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근면하지만 힘겨운 삶과 소수민족을 향한 혐오를 동시에 뛰어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케이시의 분투는 집안에서도 예외는 없었다이곳은 뉴욕 퀸스때는 1993년이지만 케이시의 가족은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1953년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전쟁은 잔혹한 것빈곤은 잔인한 것.’ 케이시는 아버지가 겪은 고난을 결코 무심히 여기지 않았지만이제는 정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특히 내가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너를 키우고 좋은 학교까지 다 보내줬는데 넌 왜 이것밖에 못해?’ 라고 말할 것 같은 아버지의 저 냉담한 시선 속에선자식은 부모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데서 오는 죄책감으로 늘 죄인이 되었다반드시 한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엄격한 결혼관과 법률-경영-의대라는 안정된 선택지 외에는 다른 선택지란 없는 미래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요원해보였다자식의 기를 꺾기 위해 의식처럼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의 입장을 이제 더는 헤아릴 수 없다고그저 멍하니 서서 얻어맞지 않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가진 것 없는 이민자의 딸이 부모와 다른 인생을 꿈꾸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인 걸까이렇듯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인 케이시의 삶을 통해 미국인도한국인도 될 수 없는 이민자 2세대의 고뇌와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나간다.

 

 

 

자신만의 서사를 써나가고 싶었던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 그리고 애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파친코로 주목받은 이민진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두 번째 장편소설인 파친코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을 다뤘다면 이 소설은 19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국계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여기에는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귀결되는 미국식 낙관주의나 역경을 이겨낸 극복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얼마나 복잡다단한 인물인지 너무나 보여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 케이시를 비롯해 소설 속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불완전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인종과 계급이민젠더의 정치학’ 속에서 마모되는 현실을 재현한다.

 

 

 

돈을 벌고 싶으면 경영대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의대.” 법률경영의대라는 세속적인 삼위일체가 이 도시의 유일신인 것 같았다뉴욕 출신 이민자 여학생이 감히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려 하다니 오만한어쩌면 경솔한 짓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케이시는 설령 모호한 꿈이라도 단지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17p

 

 

엑서터나 하치키스 같은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아이들부모님이 컨트리클럽 회원이고 아버지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뭐든지 해결되는 그런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어떤 건지 아세요학과에서 일등을 해도 저 애는 집안이 보잘것없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어떤 건지 아세요아버지가 세탁소를 한다고 했더니 제가 무슨 더러운 빨랫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러서는 아이들도 있었어요말로는 동등하다는 사람들이 저를 마치 속에 지저분한 것을 가득 채운 유리 인형처럼 바라보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아시겠어요?” / 27p

 

 

케이시가 볼 때는 소수민족을 인종주의자라고 부르거나여자에게 성차별한다고 하거나가난한 사람에게 물질만능주의라고 한다거나성소수자에게 동성애 혐오 딱지를 붙이거나노인에게 노인을 차별한다고 비난하거나유대인에게 반유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았다학교에서는 이런 온갖 딱지들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붙었다하지만 케이시는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도 가능하며 다른 사람을 더욱 쉽게 혐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혐오는 자체적인 공생의 논리를 지닌다. / 61p

 

 

 




 

 

 

 

  이를 테면 케이시는 주머니 사정은 늘 빈곤하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의 아름다움과 이미지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고친구인 엘라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나머지 자신의 결혼 문제조차 케이시로부터 확신을 얻으려 한다텍사스 출신 한국계 미국인 은우는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지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대박과 쪽박이라는 확률게임에 번번이 무릎을 꿇는다계급과 인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의 엘리트로 도약하겠다는 야심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던 테드 김은 부유한 집안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여성에게 시선을 돌린다케이시의 어머니 리아는 가부장적인 사고관을 지닌 남편 조셉 한이 자신의 딸을 때려도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도리어 남자는 화를 내도 괜찮지만여자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다이렇듯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편견과 배제인종의 장벽이라는 녹록치 않은 현실과 외롭게 싸우느라 어디에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지만서로를 보듬고 아픔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난 우리 모두가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했단다알고 있니난 널 정말 많이 사랑해케이시.”

케이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만 삼켰다그녀의 부모님은 평생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한국인들은 사랑에 대해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케이시와 티나는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들을 듣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136p

 

 

이런 피부색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백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굳건한 미국식 낙관주의로 무장한 제이는 케이시가 좋은 의도와 분명한 대화로 모든 상처를 덮을 수 없는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어쨌든 그녀의 부모님에게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그들은 한(많은 한국인이었다제이의 잘못은 아니지만그가 어떻게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케이시에게 부모님의 슬픔은 너무나 오래된 것이었다. / 264p

 

 

“1분 1초가 소중해텔레비전을 켜고극장에 가고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살 때마다한국 여자 머리는 예쁘다는 둥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남자와 같인 술집에 앉아 있을 때마다잘못된 남자와 자고 그의 전화를 기다릴 때마다넌 그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네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네 인생은 소중해케이시. 1분 1초가내 나이쯤 되면매일매 순간나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내가 갖고 있었던 시간내게 주어졌던 시간을 낭비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그 순간은 사라졌어단 한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아.” / 288p

 

 

 




 

 

 

 

  성공과 기회자유가 보장된 듯한 이 땅에도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더 고군분투해야 했던 이민자들의 냉혹한 삶이 존재했다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 하나하나에 고유의 서사를 불어넣으려는 이민진 작가의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실제 이민 2세대로서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꼈던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이를 긴 호흡으로 끌고나가는 힘에서만큼은 탁월하다는 느낌이다다만불륜이나 외도를 통해 타인에게서 끊임없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캐릭터가 상당히 일관되게 나타나는 점남성과 여성의 관계 설정이 대부분 육체적인 관계로 귀결된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그것이 아무리 미국적인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짜 사랑과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과정에 늘 육체적인 관계가 끼어든다는 설정 자체가 불편함을 준다물론 이런 흠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진 작가가 지닌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은 계속해서 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상징성이 있다현재 마지막 3부작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라 하니 이 또한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복 입는 CEO - 일상에 행복을 입히는 브랜드 리슬의 성장 철학
황이슬 지음 / 가디언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계가 없다는 말은 결국 실천하는 자의 몫이다!

도전과 좌절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내실을 다져가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책!

 

 

 

  365일 한복 입는 CEO, 방탄소년단 한복을 만든 사람전 세계 모던한복 판매 1모던한복으로 밀라노 패션쇼에 오른 브랜드이 모두가 모던한복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선두 브랜드 리슬과 디자이너 황이슬 대표를 가리키는 수식어다무엇보다 전통한복을 재해석하여 21세기 현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일상에서 패션처럼’ 입는 옷으로 재탄생시킨 리슬의 슬로건이야말로 단연 인상적이다. ‘한복한 인생.’ 어쩐지 엉뚱해 보이지만 유쾌하고소박한 듯하지만 한복을 대중화하는 데 앞장서고 싶은 황이슬 대표와 리슬의 포부가 느껴지는 슬로건이다.

 

 

 

  실제 그녀가 쓴 한복 입는 CEO와 SNS, 리슬의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유머러스함과 남다른 호기심거침없는 실행력 그리고 자신만의 특별한 스토리를 발견할 줄 아는 황이슬 대표만의 번뜩이는 창의력이 눈에 띤다. 1인 기업으로 시작해 전통을 파괴시킨다는 각종 오해를 돌파해가며 한복을 향한 자신의 애정과 소신을 잃지 않은 그녀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물이다덕분에 나는 그녀와 브랜드의 발전을 응원하는 팬이 되었다.

 

 

 

상상하는 크기가 내 실현의 크기다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만화 동아리에 가입한 황이슬 대표는 좋아하는 만화책 을 보고 한복을 코스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복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비전공자에 옷감 구매처도 제대로 모르는 한복 무경험자였지만어깨너머로 미싱을 보고 배운 19년 경력의 이불집 딸내미답게 첫 작품에서 친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그 일을 계기로 한복을 또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아예 한복을 만들어 팔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 그녀는 도서관을 찾아 창업서를 몇 권 읽고는 그 길로 구청에 방문해 덜컥 손짱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판매 사업자 등록을 했다첫 한복을 만든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산림자원학과에 입학한 대학생이 뜻밖에도 한복 디자이너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책 속에는 6개월간의 사투 끝에 더듬더듬 첫 브랜드 손짱의 영문 홈페이지가 탄생하고비전공자에 독학으로 내놓은 근본 없는 한복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의류학과 대학원 과정을 밟는 등 순탄치 않았던 리슬의 탄생 과정이 쓰여 있다. ‘작업지시서’ 작성 시 거듭되었던 착오와 수정 작업으로 작업 자체가 공중분해 되기도 하고코로나19가 터지면서 여행 앤 리슬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마련한 한복과 여행이라는 콘셉트까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등 위기 속에서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그 중에서도 대량 생산 체제의 컬래버레이션플라스틱을 이용한 친환경 소재 마련한복의 유니폼화, 5m 크기의 대형 한복메타버스 등 다양한 도전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 황이슬 대표의 모습은 그 자체가 리슬의 비전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계를 두지 말 것상상하는 크기가 내 실현의 크기라는 말 역시 결국은 실천하는 자의 몫임을 그녀를 통해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매일 조금씩 버튼을 바꾸고 디자인을 입혀가며 6개월간의 사투를 이어갔다비전문가가 더듬더듬 홈페이지를 만들다 보니 완성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주변에서는 우려를 표했다. “한국인도 안 입는 한복을 외국인이 사겠어?”, “한국에서 배송 보내려면 비쌀 텐데배송비가 비싸서 경쟁력이 없지 않을까?”, “한복은 너무 시장이 작아서 수요가 없을 것 같은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가장 혼란에 빠뜨린 말은 이것이었다.

시장조사 해봤어?” “구글에 쳐보니까 해외로 배송되는 한복 쇼핑몰이 하나도 없던데?” “하나도 없다고아무도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 안 해봤어?” / 24p

 

 

그것 하나가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는 얇은 선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 주름 치마가 플레어 치마가 되기도 하는 것이 생산 현장이었다.

메모 하나숫자 하나선 하나만 잘못 기록하거나 누락해서 사고가 난 옷도 부지기수다손해로 따지면 몇천만 원 이상은 까먹었을 것이다그 경험이 나에겐 수업료였다사고가 나면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한편으로 이런 손품발품이 곧 나의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면 고생 역시 자처하게 된다내가 이토록 한복을 사랑하지 않았다면이런 고생 2년 하고 진즉 그만뒀을 것이다. / 37p

 

 

집에서 입기 좋은 한복실내에서 입을 수 있는 한복 상품을 늘려갔다코로나를 기회 삼아 한복 홈웨어라는 새로운 아이템이 생긴 것이다만약 기존에 준비한 여행용 한복을 고집하고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면 어땠을까아찔하다아마 고정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홍대점은 물론이고 전주 본점까지 강제로 문을 닫았을 것이다. 3년이 넘도록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 54p

 

 

 



 

 

 

 

  “저게 한복이라고?” “한복이 한복 같지 않잖아.” 모던 한복이 세상 힙한 패션으로 성장하기 전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복의 과감한 변신에 다소 뚱한 반응을 보였다나만 하더라도 TV에서 연예인들이 한복을 개량해서 입고 나올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어딘지 한복스럽지 않다는 것왠지 전통을 훼손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은 전통 그대로 이어나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황이슬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전통은 소중한 것이지만책과 박물관 안에서만 보이게 된다면 옷으로서의 수명은 끝나는 일이다전통한복을 만드는 장인명인분들의 역할이 따로 있고 한편에서는 창의성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시대와 소통하는 한복을 만드는 역할을 할 때 한복의 저변이 더 넓어질 것이다후자의 역할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애니메이션대중문화관광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일본의 복식을 친숙한 대상으로 만든 것처럼전통을 그대로 보존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한복도 일상 속에서 대중과 친해지는 경험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한복을 둘러싼 중국의 동북공정작업이 심화되고 있는 요즘과연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입지 않으면서 그저 한복의 옛 전통방식만 고집하고 있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물어볼 일이다그런 의미에서 있는 그대로를 답습하는 전통이 아닌리슬로 하여금 젊은 전통을 세워나고자 하는 그녀의 소신을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전통한복과 모던한복은 서로 상생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전통 양식 그대로는 오늘날 우리가 입을 수 없다대신 친숙하게 형태를 변화시켜 당장 입을 수 있는 패션으로 만들자는 취지다전통은 소중한 것이지만책과 박물관 안에서만 보이게 된다면 옷으로서의 수명은 끝나는 일일 테니 말이다전통한복을 만드는 장인명인분들의 역할이 따로 있고 한편에서는 창의성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시대와 소통하는 한복을 만드는 역할을 할 때 한복의 저변이 더 넓어질 것이다후자의 역할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은 변화하는 것이다. ‘한복은 ○○해서는 안 된다라는 틀을 깨고 넘어설 때 비로소 우리 생활에 섞일 수 있다고 믿는다리슬은 있는 그대로를 답습하는 전통이 아닌 젊은 전통’ 만들어가는 중이다. / 65p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번져간 한복 사진 한 장이 나에게는 천군만마와 같다왜곡된 글을 올리는 네티즌들을 향해 반박하고 글로 싸우는 것보다도 어쩌면 한복을 한 번 더 입는 것이 훨씬 더 강력히 한복을 지키고 알리는 일이다. / 106p

 

 

SNS에 개인의 생각과 가치를 꾸준히 올리면 퍼스털 브랜딩이 되고브랜드가 그렇게 되면 브랜딩이 된다브랜딩을 한마디로 목표를 말하고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리슬은 한복을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만들겠다라는 목표를 세웠고 이것을 증명해내는 과정을 사진으로 또는 영상으로 기록하고 남기는 중이다우리 목표가 이거야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단번에 그것을 공감하거나 믿어주지 않는다소비자는 그 말이 진심인지포장된 환심인지 그 의도를 오랜 시간 지켜본다. (한두 번 기록한 것으로 사람들이 왜 날 알아주지 않을까 초조해하지 말자묵묵히 한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무성히 잡초로 덮여 있던 숲길이 반듯하게 닦여진 길이 되어 있을 것이다. / 197p

 

 



 

 

 

  주제는 한복이지만 소규모 브랜드 창업자 혹은 1인 기업이 참고하기에 좋은 책이다자신의 성공 법칙을 나열한 여느 CEO들의 저서와 달리도전과 좌절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내실을 다져가는 젊은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책이다브랜드의 진정성은 내가 만드는 대상을 깊이 사랑하는가에서부터 출발한다는 황이슬 대표의 말처럼 나를 포함해 많은 창작자들이 나만이 가진 특별한 스토리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