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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가까이 ㅣ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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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분명해지는 낯선 언어의 감각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언어를 사유하는 일은 번번이 좌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묘하게도 저 세계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주아나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마르고 조숙한, 연약하지만 살아 있는 자신의 작은 알이 언젠가 껍질을 부수고 나왔을 때 주변의 모든 것들을 당혹하게 하다못해 급기야 도망치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끊임없이 더듬어 만지려는 이 아이를, 심연의 그늘 속에서 늘 새롭게 태어나는 이 아이를, 억눌린 힘을 모조리 발산하고 싶은 이 야수 같은 아이를, 자신의 온 존재가 세상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아이가 이해받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의 열렬함은 곧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임을 감각하는 자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 것 뿐. 그저 저기 무덤 위에 핀 꽃처럼 살고, 살아가는 수밖에.
데 프로푼디스(심연)… 데 프로푼디스
“작은 악마 같아……. 그 애는 독사야, 차가운 독사.”
숙모는 책을 훔치고서도 도리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주아나의 당돌한 모습에 아연해진다. 이따금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를 더 이상 거둬 키울 자신이 없다. 이 아이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걱정되었던 아버지, 행복해지는 건 무얼 위한 거냐는 아이의 질문에 얼굴을 붉혔던 선생님, “넌 너와 함께 느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던 또 다른 선생님, “난 당신을 알아요. 당신의 악함이 얼마나 뿌리 깊은 건지 알아요”라던 남편의 전 약혼녀 리디아, “당신은 늘 나를 혼자 뒀다”고 말하는 남편 오타비우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해불가능한 돌연함으로 가득 차 있는 주아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예민하게 지각하지만 그래서 심각한 갈증을 느껴야했던 주아나의 삶은 온통 결핍의 연속이었다. 가만 보면 주아나의 생 전체가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시를 짓는 작업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하면, 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후의 시간 한 줌 속에 있게 되는 거야, 알겠어? 그녀는 먼지투성이 마룻바닥 위에서 맨발의 움직임을 즐기며 그 어려운 생각을 밀어냈다. 발을 비비면서, 아버지의 곁눈질로 살피며, 아버지가 초조하고 짜증스러운 시선을 던져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무. 진공청소기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 14p
눈을 감고 두 손을 내밀고서 가구에 닿을 때까지 걸어갔다. 그녀와 사물들 사이엔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 무언가를 파리처럼 잡고서 살짝 훔쳐보면-아무것도 도망치지 못하게 조심했는데도-눈에 보이는 건 자신의 장밋빛 손, 실망한 손뿐이었다. 그래, 공기, 나도 공기를 알아!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걸로는 설명이 안 되니까. 그건 그녀의 비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절대로, 아버지에게조차도, 자신이 ‘그것’을 손에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진짜 중요한 것들에 대해선 말할 수가 없었다. / 16p
“내가 말했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들……. 왜냐하면 그들의 그…… 그 계획들은, 비료 없이는 절대로 번성할 수 없는 토양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제가요?”
“너? 세상에, 아니지……. 넌 번성하고 싶어서 못 견디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야.” / 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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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현실이라는 생생한 감각을 누구보다도 깊이 내면화하는, 그래서 어디에서도 완전히 머무르지 못하는 한 여성의 정신적 디아스포라를 다룬 작품이다. 뚜렷한 서사에 기대지 않는 몽유병 같은 문장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한 투쟁의 언어들을 의식의 흐름에 기대어 쓴 이 소설은 우리가 사용하는 정형화된 언어가 삶의 본질을 다 담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는 ‘우리가 아는 상식이나 정의의 바깥에, 우리가 아는 단어의 뜻 바깥에 있는 마음들을 주로 탐구’하기 위한 을유문화사 ‘암실문고’판의 기획 의도와도 맞닿아있다.
별들, 별들, 나는 기도한다. 그 말이 나의 이 사이에서 연약한 파편들로 쪼개진다. 내 안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기에, 나는 별이 되고 싶다. 나를 조금만 정화하면 비 뒤에 숨은 저 존재들을 무더기로 가질 수 있으리라. 지금, 솟구친 영감이 온몸을 들쑤신다. 한 순간만 지나면 그것은 영감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공기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 지금의 질식할 듯한 행복감 대신에 선명한 무기력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영감 이상의 것을 갖게 되고, 그 너머를 향해 움직이고, 존재 그 자체를 소유하게 될 때마다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게 진짜 별이 되는 거야. 그곳을 향해 이끄는 건 광기, 광기다. / 104p
데 프로푼디스? 무언가가 말하고 싶어 했다……. 데 프로푼디스…… 자신의 말을 들어!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가볍게 춤추는 저 덧없는 기회를 잡아. 데 프로푼디스. 의식의 문을 닫아, 처음엔 썩은 물을, 어지러운 말들을 지각하지만, 그 다음엔 그 혼란 속에서 순수한 물줄기가 거친 벽을 타고 떨리며 흐른다. 데 프로푼디스……. / 3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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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에 재독을 거듭하며 문장을 곱씹고 곱씹어본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분명한, 낯선 세계로의 진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나의 얄팍한 언어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언어를 사유하는 일은 번번이 좌절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묘하게도 저 세계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페이지 한 장 한 장 매겨놓은 플래그의 숫자를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매번 새로운 독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문장의 향연이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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