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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1~2 - 전2권 ㅣ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11월
평점 :
이민진 작가의 탁월성은 이제껏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 하나하나에 고유의 서사를 불어넣으려는 시도들 속에서 빛난다!
내 어린 시절은 이민과 계급, 인종, 젠더 문제에 끊임없는 영향을 받았다.
이 책에는 이민 1세대와 2세대 인물들을 등장하는데,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미국의 이야기라는 정의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세상 그 어떤 나라와도 다르게 미국은 이민정책과 초기 식민지 역사라는
태생적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원주민과 노예의 후손들을 제외하면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의 생애는
궁극적으로 이민자의 여행기와 연결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469p
17년 전, 미국이 건국 200주년을 맞던 해에 케이시네 식구들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유능한 젊은 여성으로서 케이시 한은 번듯한 삶과 성공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뉴욕 퀸스의 허름한 동네에서 자라난 한국인 이민자로서, 학과에서 1등을 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의 로스쿨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하더라도, 맨해튼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근면하지만 힘겨운 삶과 소수민족을 향한 혐오를 동시에 뛰어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케이시의 분투는 집안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이곳은 뉴욕 퀸스, 때는 1993년이지만 케이시의 가족은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1953년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전쟁은 잔혹한 것, 빈곤은 잔인한 것.’ 케이시는 아버지가 겪은 고난을 결코 무심히 여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가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너를 키우고 좋은 학교까지 다 보내줬는데 넌 왜 이것밖에 못해?’ 라고 말할 것 같은 아버지의 저 냉담한 시선 속에선, 자식은 부모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데서 오는 죄책감으로 늘 죄인이 되었다. 반드시 한국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엄격한 결혼관과 법률-경영-의대라는 안정된 선택지 외에는 다른 선택지란 없는 미래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요원해보였다. 자식의 기를 꺾기 위해 의식처럼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의 입장을 이제 더는 헤아릴 수 없다고, 그저 멍하니 서서 얻어맞지 않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진 것 없는 이민자의 딸이 부모와 다른 인생을 꿈꾸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인 걸까. 이렇듯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인 케이시의 삶을 통해 미국인도, 한국인도 될 수 없는 이민자 2세대의 고뇌와 아픔을 생생하게 그려나간다.
자신만의 서사를 써나가고 싶었던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 그리고 애환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파친코』로 주목받은 이민진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두 번째 장편소설인 『파친코』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을 다뤘다면 이 소설은 199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국계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귀결되는 미국식 낙관주의나 역경을 이겨낸 극복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는 한국계 미국인들이 얼마나 복잡다단한 인물인지 너무나 보여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 케이시를 비롯해 소설 속의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불완전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인종과 계급, 이민, 젠더의 정치학’ 속에서 마모되는 현실을 재현한다.
“돈을 벌고 싶으면 경영대, 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의대.” 법률, 경영, 의대라는 세속적인 삼위일체가 이 도시의 유일신인 것 같았다. 뉴욕 출신 이민자 여학생이 감히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려 하다니 오만한, 어쩌면 경솔한 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시는 설령 모호한 꿈이라도 단지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17p
“엑서터나 하치키스 같은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아이들, 부모님이 컨트리클럽 회원이고 아버지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뭐든지 해결되는 그런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게 어떤 건지 아세요? 학과에서 일등을 해도 저 애는 집안이 보잘것없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친구로 지내는 것이 어떤 건지 아세요? 아버지가 세탁소를 한다고 했더니 제가 무슨 더러운 빨랫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러서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말로는 동등하다는 사람들이 저를 마치 속에 지저분한 것을 가득 채운 유리 인형처럼 바라보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아시겠어요?” / 27p
케이시가 볼 때는 소수민족을 인종주의자라고 부르거나, 여자에게 성차별한다고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만능주의라고 한다거나, 성소수자에게 동성애 혐오 딱지를 붙이거나, 노인에게 노인을 차별한다고 비난하거나, 유대인에게 반유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이런 온갖 딱지들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붙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이 자신을 혐오하는 것도 가능하며 다른 사람을 더욱 쉽게 혐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혐오는 자체적인 공생의 논리를 지닌다. / 61p
이를 테면 케이시는 주머니 사정은 늘 빈곤하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의 아름다움과 이미지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하고, 친구인 엘라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나머지 자신의 결혼 문제조차 케이시로부터 확신을 얻으려 한다. 텍사스 출신 한국계 미국인 은우는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지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대박과 쪽박이라는 확률게임에 번번이 무릎을 꿇는다. 계급과 인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의 엘리트로 도약하겠다는 야심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던 테드 김은 부유한 집안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여성에게 시선을 돌린다. 케이시의 어머니 리아는 가부장적인 사고관을 지닌 남편 조셉 한이 자신의 딸을 때려도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도리어 ‘남자는 화를 내도 괜찮지만, 여자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렇듯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편견과 배제, 인종의 장벽이라는 녹록치 않은 현실과 외롭게 싸우느라 어디에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지만, 서로를 보듬고 아픔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난 우리 모두가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상상했단다. 알고 있니? 난 널 정말 많이 사랑해, 케이시.”
케이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만 삼켰다. 그녀의 부모님은 평생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한국인들은 사랑에 대해,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케이시와 티나는 자기들이 듣고 싶은 말들을 듣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136p
이런 피부색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백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굳건한 미국식 낙관주의로 무장한 제이는 케이시가 좋은 의도와 분명한 대화로 모든 상처를 덮을 수 없는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의 부모님에게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恨) 많은 한국인이었다. 제이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가 어떻게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케이시에게 부모님의 슬픔은 너무나 오래된 것이었다. / 264p
“1분 1초가 소중해. 텔레비전을 켜고, 극장에 가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살 때마다, 한국 여자 머리는 예쁘다는 둥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남자와 같인 술집에 앉아 있을 때마다, 잘못된 남자와 자고 그의 전화를 기다릴 때마다, 넌 그 모든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네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거야. 네 인생은 소중해, 케이시. 1분 1초가. 내 나이쯤 되면, 매일, 매 순간, 나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 내가 갖고 있었던 시간, 내게 주어졌던 시간을 낭비했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 순간은 사라졌어. 단 한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아.” / 288p
성공과 기회, 자유가 보장된 듯한 이 땅에도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더 고군분투해야 했던 이민자들의 냉혹한 삶이 존재했다.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한국계 이민자들의 삶 하나하나에 고유의 서사를 불어넣으려는 이민진 작가의 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실제 이민 2세대로서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꼈던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이를 긴 호흡으로 끌고나가는 힘에서만큼은 탁월하다는 느낌이다. 다만, 불륜이나 외도를 통해 타인에게서 끊임없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캐릭터가 상당히 일관되게 나타나는 점, 남성과 여성의 관계 설정이 대부분 육체적인 관계로 귀결된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이 아무리 미국적인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 하더라도 ‘진짜 사랑’과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과정에 늘 육체적인 관계가 끼어든다는 설정 자체가 불편함을 준다. 물론 이런 흠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진 작가가 지닌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정체성은 계속해서 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상징성이 있다. 현재 마지막 3부작을 집필하고 있는 중이라 하니 이 또한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