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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30124_111.jpg)
이 책은 아주 오랜 세월 사랑하고 연대하고자 했던 모든 여성들을 위한 한 편의 신화다!
오드리 로드의 별빛 같은 언어에 빚을 진 이유로, 나는 그것이 실현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자미』는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시인, 흑인이자 페미니스트이며 레즈비언으로 평생 인종주의와 성차별, 동성애혐오에 맞서 싸운 전사이자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던 오드리 로드의 자전신화다. 니그로, 슈바르츠, 다이크 등 그 시대에서 가장 불온한 이름으로 불려야 했던 유색인종이자 소수자의 딸로서, 흑인이자 여성이자 동성애자로 사는 것이 형벌이었던 시대 속에서, ‘지배자의 도구’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결연히 나아가고자 했던 그녀는 놀랍게도 분노나 저항이 아니라 사랑을 이야기한다.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저마다 나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내 목소리에 담긴 힘을, 멍든 살갗의 수포 아래서 문득 거품을 일으키듯 부풀어 오르는 강인한 나를 만들어준 이들은 누구인가? 내 생존의 상징들을 만들어준 이들은 또한 누구인가? ‘오늘의 나’라는 여성이 되기까지 나는 어떤 이들에게 빚을 졌는가. 질문하고 확인하고, 부서져도 무너진 것들을 다지며 끊임없이 자신만의 집을 지어나가려 했던 여정 속엔 오직 사랑만이 가득하다. 꽉, 껴안음으로써 몸에 새겨진 사랑의 흔적, 그 고유의 힘으로 불가해한 역사를 뛰어넘고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한 흑인여성해방운동가의 분투기가 아닌 아주 오랜 세월 사랑하고 연대하고자 했던 모든 여성들을 위한 한 편의 신화가 된다.
마디빈, 프렌딩, 자미(서인도제도의 속어로
레즈비언을 지칭하는 단어다), 캐리아쿠 여성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레나다의 전설이며,
그들의 힘과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 29p
오드리 로드는 줄곧 자신의 정체성이 캐리아쿠의 여성들과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캐리아쿠 여성들은 바다로 나간 남편 없이도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생존에의 힘을 키울 줄 알았으며, 이웃하는 여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함께하는 삶을 영위했다. 문을 열면 상쾌한 아침과 뜨거운 정오에 풍기던 과일 향기가 달큼하게 밀려들어오던 그 신비로운 낙원에서, 여성들의 강한 연대 속에서 단단하게 성장했던 나의 어머니. 그래서 오드리 로드는 자신 역시 어머니처럼 강한 여성이 되기를,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진 가장 강하고 풍부한 면모들을 받아들여 지구가 언덕과 산봉우리를 품듯 자신의 몸에 골짜기와 산맥이 공존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오드리 로드는 지도 위에 포착해내지 못한, 목을 졸라 교과서의 페이지 사이에 가두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그들만의 공간 캐리아쿠를 늘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상상이 무너진 자리에는 늘 소음과 흥건한 땀으로 가득한 할렘의 현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인종봉기 이후 할렘의 ‘똥통’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 바로 그곳에서 이민자로, 흑인으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의 연속이자 결코 단순해질 수 없는 삶의 반복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국에서 흑인들이 겪는 현실과 미국의 인종주의라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아이들을 가장 안전히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그것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거나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을 택했다. 백인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그들이 품은 악의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마치 관심을 주지 않으면 그 일들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하지만 세인트캐서린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흑인 학생이자 반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이라는 자부심 따위가 반장선거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니그로에게 집을 빌려주는 신세가 됐다는 허탈감 때문에 집주인이 자살을 한 일을 전교생 모두가 알게 되었다면? 인종주의란 결코 무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일찍이 알아버린 그녀는 ‘내 심장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느라 아프고 또 아팠다’고 자신의 유년시절을 고백한다.
나는 어둠 속 내 자매들 옆에 눕는다, 길에서 나를 알아보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스쳐 지난 자매들. 이 중 얼마만큼이 벗겨지지 않는 보호용 마스크의 역할을 맡은 거짓 자기부정이고, 또 얼마만큼이 우리를 갈라놓고자 계획된 증오일까? / 103p
나는 젊고, 흑인이고,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한다. 대체로 내가 진실과 빛과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괜찮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순전히 지옥 같았다.
우리한테는 어머니도 자매도 영웅도 없었다. 우리는 아마존의 자매들처럼, 다호메 왕국에서 가장 외딴 전초기지의 기수들처럼, 뭐든지 홀로 해내야 했다. 우리, 젊고 흑인이고 괜찮았고 동성애자였던 우리는 점심시간에 속마을을 털어놓을 학교 친구나 회사 동료 하나 없이 첫 실연을 이겨내야 했다. 우리가 행복하고 비밀스러운 미소를 짓게 하는 그 이유를, 실재하는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줄 반지가 없었듯, 우리의 실험실 보고서나 도서관 문서에 얼룩지는 눈물에는 어떠한 이름이나 이유가 주어지지도, 공유되지도 못했다. / 3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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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드리 로드는 어머니의 망명지였으나 이제는 어머니가 아는 것보다 거리 구석구석을 더 잘 알게 된 이 나라에서 그저 쓰라린 감정이 아니라 생산적인 소득을 얻고자 마음먹었다. 집을 떠난 뒤 그녀는 자신을 살아가게 해주는 여성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다른 사랑을 배웠다. 아픔이 무감각보다 낫다는 것을 가르쳐준 ‘낙인찍힌 자들’, 사랑만이 지속된 결핍의 아픔을 치료해줄 수 있을 거라 믿는 굶주린 여자들, 한데 모이면 뇌우가 되어 터지는 요소들처럼 짧은 시간이지만 흠뻑 젖은 채 하나가 되어 에너지를 교환하고 전류를 나누었던 연인들. 그들은 비록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불안전한 존재들이자 혐오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적대적이기만 하던 세상 속에서 서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행위만이 자신들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유색인종이자 레즈비언이기도 했던 오드리 로드는 ‘관계’와 그들과 나누는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재정의하고, 그들로부터 얻은 반향의 힘을 타투처럼 정서에 새겼다. 20년 뒤 여성운동에서 새로운 개념으로서 등장하게 될, ‘상호지지’라는 관계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그 안에서 탄생되었다.
우리는 스스로가 유별나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사용하는 특이한 잉크와 깃펜을 자랑스러워하는 ‘낙인찍힌 자들’이자 ‘과격한 주변인들’이었다. 고지식한 무리를 조롱하는 법을 배웠고, 우리가 가진 집단적인 편집증을 퇴학당하지 않을 선에서 멈출 수 있는 본능적인 자기보호에 이르도록 계발시켰다. 모호한 시를 쓰고, 불복종의 전리품인 우리의 괴상함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통과 거부가 상처를 준다는 걸 배웠지만, 그럼에도 그런 것들이 치명적이지는 않으며, 또 피할 수 없기에 쓸모 있다는 걸 배웠다. 우리는 아픔이 무감각보다 낫다는 걸 배웠다. 그 시절엔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미덕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기에 ‘낙인찍힌 자들’이 되었다. / 141p
나는 유령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나는 살지 못한 삶들의 희망이었고
나는 텅 빈 공간 그리고 텅 빈 빵 광주리 안 공간이
남긴 사고의 산물이었고
나는 태양을 향해 뻗는 손
위안을 구하려 까맣게 타들어간……
그리고 애도의 나무 위에 그들이 날 매달았네
성난 사람들의 길 잃은 감정이
나를 매달았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죽어갔는지
얼마나 오래 불멸로서 버텼는지
잊은 채로
내가 얼마나 쉽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잊은 채로.
1952년 4월 20일 / 2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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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제멋대로, 자신들에게 유리하지만 우리에게는 해가 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정의하고 말 것”이라 했던 오드리 로드. 그 별빛 같은 언어에 빚을 진 이유로, 나는 그것이 실현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나만의 불꽃을 빛내고 있을 이들에게 이 책이 부디 귀한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