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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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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종교, 광신, 폭력, 테러…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조명한 소설!
상실을 복구하고 상처를 회복할 길이 없어 고립되고만 모든 청춘들의 초상!
녹스허스트를 비롯해 뉴욕주 곳곳에 있는 빌딩 다섯 군데가 폭파로 완전히 무너졌다. 초기 보도에 따르면 폭발물이 적재된 트럭들이 각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벽 옆에 세워졌다고 했다. 윌은 마치 폭발 현장을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최대한 그날의 생생한 그림을 떠올리려 한다. 연기가 신의 숨결처럼 솟아오른 뒤에 잇따르는 정적, 잠시 후 승리감에 찬 무리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오고 이내 와인 잔을 부딪치며 ‘제자’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때 존 릴이 다가와 피비의 어깨를 감싸며 말할 테지. 잘했다고,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행동해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조금 더 나가야 한다고……. 윌은 피비가 왜 그곳에 있어야만 했는지 이해하고 싶지만, 그날 이후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정작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돌아올 길이 없는 물음만 상상 속에 실어 보낼 뿐이다.
인센디어리스(Incendiary의 복수형): 방화의, 불을 지르기 위한, 선동적인
폭발하는 에너지를 담은 강렬한 표지, 컬트 종교와 테러라는 소재를 활용한 과감한 시도,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주목받는 작가 4인’에 선정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첫 데뷔작. 이 3박자의 조합만으로도 이목을 끄는 『인센디어리스』는 이미 『애프터 양』과 『파친코』의 코고나다 감독 연출로 드라마화가 결정되어 화제성·작품성을 입증한 작품이다. 소설 속에는 회복되지 못한 상처를 짊어진 불안한 영적 존재들, 어디에도 이해받지 못해 여기저기 외로이 떠도는 청춘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품어줄 구원의 대상을 찾아 나서지만 끝없는 상실과 위태로운 욕망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귀속되지 못한다. 한때는 하나님에게 삶을 맡기겠다는 생각으로 신앙에 몰입했으나 가장 필요한 순간에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뒤로 신앙을 버린 윌,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피아노 신동으로 자라났으나 목표를 상실한 뒤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피비. 이들은 사랑을 통해 서로를 구원하고자 하지만, 대충 무마하거나 결정적일 때 입을 다물어버린 진실 때문에 서로의 육체만을 그러안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무렵, 한 낯선 남자가 그들 앞에 나타난다. 신앙을 갈구하는 자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 존 릴이다.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근육이 경직된 채 나는 일어났다. 그때부터 내게 하나님 모양의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었는데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피비에게 말할 걸 그랬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신물이 났던 까닭은 오히려 그분을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내가 지어낸 유령을 잃고서 마치 진짜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기 때문이었다고. / 65p
그는 이야기를 들었다. 옥상에서 열린 신입생 파티 때 피비는 떨어질 위험에도 불구하고 11층 높이에서 공중곡예사처럼 두 팔을 벌리고 난간 위를 걸었다고 했다. 그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살았다. 매번 요란하게, 증거를 남기듯 폭소하면서. 그는 수소문을 했다. 피비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남들 앞에서 내세우는 모습은 그들의 실제 자아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욱더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 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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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을 낭비하는 게 지겨워지면 연락하세요. 존 릴은 피비에게 쪽지 한 장을 내민다. 그는 중국에 숨어 있는 탈북자들이 서울로 도망치는 것을 돕는 일을 하다 북한 공작원에게 붙잡혀 수용소에 갇힌 적이 있다고 말한다. 억류된 지 세 달이 지났을 때 얼어붙은 강을 건너 겨우 살아 돌아왔지만 수용소에서의 충격적인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는 그곳에서 터무니없는 이유로 벌을 받으면서도 친애하는 수령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듯 폭군을 믿는 수용소 사람들을 바라보며 신앙에 대해 생각했다 한다. 어디에든 누군가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라고, 다만 독재자가 자기 제자들이 믿는 만큼 올바른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큰 것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만약 그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한때 신앙에 신실했던 윌은 존 릴의 이야기 곳곳에서 예의 사이비 종교에서 발견되는 거짓말의 징후를 읽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구원하고 인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존 릴의 종교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피비를 붙잡기란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변했어요. 변하는 게 가능하더라고요. 종종 존 릴이 즐겨 하던 말을 생각했어요.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듯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면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그는 말했죠. 사랑이란 단지 잘 상상하는 것입니다. / 200p
존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고통의 밖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거하신다고 말했어요. 내가 상처 입힌 사람들을 되새기고 내가 실패한 시간들을 열거하는 일은 곧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해요. 그리스도께서 내리는 정화의 불길은 고통이 아니라 죄예요. 모든 상실에는 보상이, 모든 악에서는 용서가 포함되어 있지요.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나는 사고를 냈고, 사람들이 차를 들어 올렸고, 나는 이 죄책감이 내 몫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만약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만약 내가, 그리고 여러분이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면, 여러분과 내가 얼마나 강해질지 생각해보세요. / 242p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싸우기로 맹세했고, 그는 신앙이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신앙은 손 한 번 내밀어서 고스란히 받아 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비록 긴 햇살이 발치에서 아첨할지라도, 수북이 쌓인 잔해들 사이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전리품이요, 힘겹게 쟁취한 보상이었다. 다가올 전쟁은 성스러운 치유가 될 것이고, 순수한 이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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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는 없었던 걸까? 이제 윌은 가까이 있었음에도 서로를 알지 못했던 피비의 시간으로 돌아가 그때의 마음을 되짚어본다. 화해하지 못한 과거, 채워지지 않는 결핍, 서로의 본심에 다가갈 수 없어 그저 부유했던 관계의 어리석음을 그때 제대로 직시할 수 있었더라면 ‘선동된 믿음’의 환대 앞에서 마냥 무기력하지는 않았으리라. 다만, 늦게나마 피비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이해를 시도해봄으로써 윌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성을 얻어 볼 뿐이다.
이처럼 『인센디어리스』는 컬트 종교에 연루된 여성과 그녀를 사랑한 한 남성의 엇갈린 진심을 담고 있지만, 상실을 복구하고 상처를 회복할 길이 없어 고립되고만 모든 청춘들의 초상이다. 여기에 이민자, 성소수자, 성폭력, 낙태라는 사회의 무거운 주제들까지 섬세하게 아우를 줄 아는 작가의 통찰력이 빛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컬트 종교, 광신, 폭력, 테러는 우리 사회의 가장 불온한 존재이지만 이 역시 인간의 산물임을 비추어보면, 이 소설은 그 이면에 가려져있는 인간의 감수성에 대한 이해를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