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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
에이미 하먼 지음, 김진희 옮김 / 미래지향 / 2023년 2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302010_11.jpg)
한번 손에 들면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놀라운 작품!
가슴 저미는 러브 스토리와 미 서부개척시대의 장엄한 서사를 아우르는 경이로운 소설!
1840년대,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여 캘리포니아를 매수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빈 땅에 가까웠기에 연방정부는 안보를 위해서라도 동부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쳐 서부개척시대를 열었다. 골드러시가 그 중 하나였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동부에 전해지자 이듬해인 1849년 한 해 동안에만 일확천금을 꿈꾸는 8만 명 이상의 남자들이 육·해로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후에도 수천 명의 이주민들이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려 2천 마일에 걸쳐 평야와 산과 강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땅 위에 바퀴 자국과 발자국을 남겼다. 재산과 지위와는 관계없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꿈은 동일해 보였다. 땅, 행운, 멋진 인생 그리고 사랑.
하지만 그 여정에 무엇이 있을지 그들이 알 수 없었던 것만큼, 우리 역시 그들이 겪은 가혹한 삶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이 책에서 존과 나오미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따름이다. 낯선 땅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해 길을 열어 보여준 용기와 수고로움을, 시시때때로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을, 그리고 위대한 헌신과 사랑을. 나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그들만의 역사가 아님을 안다. 이건 먼저 이 땅의 수많은 길을 개척한 자들의 이야기이면서, 그 길로 걸어 들어간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또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의 뼈대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길 잃은 자들이 떠도는 곳』은 바로 그들이 보여준 장엄한 여정에 바치는 헌사다.
실존인물과 미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주인공인 존 라우리는 백인인 아버지와 원주민인 포니 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어머니 부족의 원주민들은 그를 ‘두 발’이라고 불렀다. 한쪽 발은 백인의 발, 다른 쪽 발은 포니 족의 발이라는 뜻이었지만, 그 두 세계 모두에 걸쳐져 있다는 이유로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내쫓긴 이후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그의 노새 사업을 도왔고 그 안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늘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심하느라 삶의 의미와 목적 사이에서 방황해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과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그는 1849년, 골드러시를 향한 서부 이주 호황에 발맞춰 이주민들을 캘리포니아로 안내하는 사업을 하던 그랜트 애벗을 돕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이주민 일행인 나오미 메이라는 백인 여성에게 끌리게 된다.
19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 동참했었지만 일확천금을 움켜쥐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껏 오리건 준주까지 세 번 왕복했고, 이제는 모피 판매나 사금 채취보다 서부 이주 호황에 뛰어드는 것이 더 큰 돈을 버는 길이라고 결정 내린 모양이었다. 덧붙이자면 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질이었다. 그가 나에게 커니 요새까지 같이 가자고 설득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노새들을 몰고 플랫 강 바로 아래에 있는 커니 요새까지 다섯 번을 왕복했다. 나는 그곳에 가 갈 때마다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계속 더 가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매번 세인트조의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왔었다. / 28p
나의 아버지는 나의 존재에도 편안해한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 자신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긴장하게 했다. 나를 조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늘 조심하게 했다. 나 스스로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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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메이는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남편을 병으로 잃고 과부가 되었지만 부모님을 따라 캘리포니아 이주 행렬에 동참하기로 한다. 쾌활하고 자신의 감정에 누구보다 솔직한 그녀지만 임신한 엄마와 어린 두 남동생을 책임감 있게 돌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단하고, 험난한 여정을 묵묵히 견뎌낸다. 그리고 그 여정을 끈기있게 이끌어주는 존 라우리에게 사랑을 느낀다. 2천 마일에 이르는 서부로의 대이동 속에서 목숨을 위협하는 콜레라, 어디로 떠밀려나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강, 수많은 이탈자들과 죽음, 이따금 밀려오는 권태로움과 끊임없이 맞서 싸워야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는 용기와 희망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또한 서로를 향한 헌신과 사랑 안에서 내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나간다.
“미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해. 미워하는 게 간단하고 편해 보일 거야.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생각보다는 단순해. 그것들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바로 우리야. 우리는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복잡하게 만들면서 살아.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초월에 쏟을 수 있게 되지.”
“초월이요?”
“그래.”
“그게 뭔지 저에게 설명해 주셔야 해요, 엄마. 저는 초월이 뭔지 모르거든요.”
“네 손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너의 정신이 머무는 곳이란다.” 엄마가 설명했다. “이곳을 넘어선 세계이고 장소야. 한계를 뛰어넘는 곳이지.” / 70p
“앤더슨 부부는 노르웨이 사람들이에요. 맥닐리 부부는 아일랜드 사람들이고요. 요한 그루버는 독일 사람이에요. 당신은 일부분은 인디언이고, 나는 과부예요.” 나오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모두 서로가 필요해요. 우리 모두 서로의 곁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서로 똑같을 필요는 없다고요.” / 94p
“우리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야.” 위니프레드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모든 것이 중요하다면 목적이 없는 거지. 요령을 말하자면, 그 사이에서 단단한 땅을 발견하는 거라네.”
“저는 의미도, 목적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냥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건 대부분 날들의 삶을 훨씬 단순하게 만들어주지.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잠잘 곳이 필요하고, 따뜻함도 유지해야 하지. 그런 것들은 중요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먹여줄 사람이, 재워줄 사람이, 따뜻하게 해줄 사람이 자네 곁에 없다면, 그런 것들 전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자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이 없다면, 왜 밥을 먹나? 왜 잠을 자나? 왜 걱정을 하나? 그러니 내 생각에 그건 무엇이 중요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중요하냐의 문제인 거야.” / 2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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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존과 나오미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인 존 라우리가 남편의 5대 조부님으로, 실제했던 인물임을 밝힌다. 또한 존 라우리와 나오미를 도왔던 와샤키 추장 역시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영토를 보유했던 몇 안 되는 원주민 추장 중 한 명이었다고 소개한다. 덕분에 우리는 미국 토착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 점점 자신들의 영토를 잃고 길 잃은 민족으로 전락해가는 원주민들의 애환을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절대로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 관계 속에서도 아름다운 우정과 연대를 보여준 이 책의 놀라운 서사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 거기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윌리엄.” 엄마가 말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갈 곳은 없다고요. 만약에 되돌아간대도…… 아비가일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 우리의 미래는 저기에 있어요. 우리의 아들들은 캘리포니아에 도착할 거예요. 우리가 남겨두고 온 인생보다 더 나은 인생을 아이들이 살 거라고요. 두고 보세요.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 113p
하루는 로 하이드라는 지류에서 휴식을 취했다. 어느 백인 남성이 품에 아기를 안고 있는 원주민 여성을 죽인 죄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곳이었다.
애벗 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엘메다는 헉 소리를 냈고, 콜드웰 씨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야만인 새끼들.” 그가 말했다. “전부다 야만인 새끼들이야.” 그러더니 존을 쳐다보았다.
“누가 더 야만적인가요?” 애벗 씨가 물었다. “어린 아기 엄마를 죽인 사람인가요? 아니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한 사람인가요? 저는 그렇게 당해도 싸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정의의 실현은 빠르게 실행되는 편이거든요, 콜드웰 씨. 물론 우리는 산 채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껏 수많은 마차 행렬에서 살해 혐의가 있는 일행을 기꺼이 목매달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정의의 실현이죠.” / 187p
“원주민의 피와 백인의 피가 함께 흐르게 될 거야. 하나의 민족. 나는 그걸 본 적이 있어.” 그 말을 와샤키의 목소리를 행복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체념한 듯 보였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와샤키에게 예전에 나오미가 나에게 했던 거북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땅과 물 양쪽 모두에 사는 거북이. 와샤키는 웃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가 될 거야. 그러면 우리 모두 길 잃은 민족이 되겠지…… 나의 어머니처럼 말이야.” / 381p
너의 에너지를 네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넘어서는 데 사용하렴, 나오미. 마음 단단히 먹고. / 390p
마치 골드러시를 쫓아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장엄한 여정의 한 가운데로 직접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프롤로그 때의 긴장감을 마지막장까지 놓을 수 없을 만큼, 꽤 오랜만에 서사에 압도되는 기쁨을 느꼈다. 고단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우정과 용기, 사랑과 연대, 헌신을 보여준 소설 속 주인공과 실제 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