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그건 소설이라고 할 수 없어.
칼 오베!
이야기를 풀어놓으라고.
서사가 바탕이 되어야 해.
이야기를 해, 칼 오베!

한 남자는 계속 이야기한다. 자신의 지난 하루하루를, 자신의 지금의 하루하루를, 지난날의 감정을, 지난날의 감정을 기억하는 나의 감정을 계속 이야기한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계속 쌓여가는 이야기, 그것이 <나의 투쟁 1> 속 칼 오베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여느 소설과 다르다. 끊임없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 특별한 사건도 주인공이 부각되는 일도 나타나지 않는다. 일상적이라는 표현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일상을 끊임없이 따라가는 이야기가 많지 않아, 일상에 대한 나열 자체가 흥미로운 소설이 <나의 투쟁 1>이다. 처음에는 일상이라는 계열축들이 만들어낸 통합축의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문학을 많이 읽어왔기에. '그냥'이나 '이유 없이'나온 문학을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면, 소설이라면 이는 생각 속에 잡혀있는 그런 개념과 참 달랐다. 마치 중학교 때 처음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고 느낀 생경함처럼 <나의 투쟁 1>은 낯설었다. 의식의 흐름이 더는 낯설지 않지만, 처음 의식의 흐름을 만났을 땐 이야기가 심심했고, 이상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고백을 해나가는 게 비슷해서 박태원의 소설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적인 서사가 없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와 비슷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이야기 내 상징물들이 파편화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는다. 계속 지독할 정도로 일상만을 이야기한다.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하는 일은 <나의 투쟁 1>에 없다.

"나는 수년 동안 내 아버지에 대해 글을 써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마 내 삶에 너무나 가까운 소재였기에 문학이라는 틀 안에 가두어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한 가지 법칙은 이야기를 다듬어 문학이라는 형식과 틀 안에 가두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체, 구성, 플롯, 주제 등 문학을 이루는 세부적인 요소가 문학이라는 틀보다 더 클 경우 그 결과는 보잘것없다. 흔히 문체나 주제에 강한 작가들을 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학은 허약하고 미미하다."

<나의 투쟁 1>이 작가에게 특별하다는 것은 소설 곳곳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40년의 삶을 모두 담아낸 그의 '자화상 같은' 소설"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정도로 이 소설은 마치 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나의 투쟁 1> 속 일상의 묘사는 납득할 수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마치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보이는 풍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리게 만든다. 내가 주인공을 스토킹하듯이 그의 삶의 순간순간 경험을 채집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한 남자의 삶의 순간순간을 이토록 자세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모순적이지만, 그의 자전적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롭지만 <나의 투쟁 1>이 작가 칼 오베의 이야기이든 또 다른 칼 오베의 이야기이든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자전적 고백일지 모르는, 혹은 작가의 순수한 창작물 속 인물의 고백이 '나'라는 개인에게 어떻게 전해지는 가가 중요하다.

"나는 이것들에게서 죽음을 느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이것들에게서 저항감을 느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삶과 생명을 종식시키는 개념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숨결이 부재된 개념의 죽음이다."

<나의 투쟁 1> 속에서 큰 사건이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건의 계열들의 축에는 아버지가 놓여있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과정을 참 길게 이야기한다. 길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과 아버지의 사이가 멀기에. '아버지'도 '죽음'이라는 것 모두 멀리 있는 것인데, 두 가지가 합쳐진 건 얼마나 '나'에게서 멀리 있겠는가. 길지 않고 짧은 이야기였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물리적 공간을 공유했지만,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마음속 정서적 영역을 공유하지 못했기에 600여 쪽을 이야기하고도 다 하지 못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야기가 참 길다. 680쪽. 숫자로 적으면 참 쉽지만, 손에 잡히는 묵직한 책의 두께 촘촘하게 매워진 종이 속 글자들을 보면. 숫자와 다른 길이감이 묵직하게 마음에 내리 앉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살아있는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오직 타인을 통해 전해진 울림으로만 접해지는 그 죽음, 알 수 없는 죽음을 우리는 너무 신성한 영역으로 막아두지 않았는가.라는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죽음은 그저 죽음 자체이며, 그 죽음과 주인공은 마주 서기 위해 '이야기'를 꺼낸다. 아주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일상을 통해 서서히 죽음에 다가간다. 세밀한 일상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잊힌 아버지의 죽음은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미뤄지기도 하고, 다시 일상으로 편입한 죽음은 '신성한 의미, 꺼내기 쉽지 않은 무언가'라는 의미와 다른 의미로 서서히 다가온다.
저자는 꽤 긴 이야기와 일상을 말했음에도 죽음을 모두 다 꺼내지 않았다. <나의 투쟁 1>에서 죽음은 언어가 다른 언어 속으로 자신의 의미를 숨겨나가듯이 일상에서 또 다른 일상으로 미끄러져 도망친다. 하지만 그 도망친 자리자리마다 남긴 이야기가 '생'의 파편들은 나의 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항상 더 밝게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새롭게 시작되는 다음 날의 빛 앞에서는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7년 영국 
1936년 스페인 

두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해 만나는 그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 바로 <뮤즈>다. 제시 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를 읽었기에, 그녀의 신작은 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주인공이 '나'를 깊이 생각해 나가는 서사를 탁월하게 표현한다. <뮤즈>에서도 오델과 올리브가 자신의 욕망을, 열정을 피워내는 과정 속에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미니어처리스트>보다 훨씬 쉽게 마음 속으로 이야기가 전해졌다.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내 안에서 꺼내는 방식이 저마다 다를 뿐,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일상 속 대화로, 누군가는 나만 보는 일기장으로,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는 말로, 누군가는 문학으로, 누군가는 회화로, 누군가는 음악으로,  또 누군가는 죽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수신되길 바라며 이야기를 전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발신만이 목적이 될 때도 있다. <뮤즈> 속 오델과 올리브가 자신의 "이야기(욕망)"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하는 방법은 '예술'이다.
 
<뮤즈>의 오델은 글(시에서 소설까지)로. 올리브는 회화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기를 원한다.

예술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내 놓은 적은 없지만,  예술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한다는 건 내 안에 담긴 고독한 무언가와 정면대결하는 과정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다고 일반화 할 수 없지만 <뮤즈> 속 오델과 올리브는 그랬다. 그리고 그 고독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가 바로 '뮤즈'였다. 오델이 사자 소녀 그림을 보고 느낀 강렬함을 그녀가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올리브는 오델에게 파르나소스 산(아폴론과 뮤즈가 살았던 산)에 함께 가는 동행인이었을 것이다. 오델이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걸어주는 동행인. 뮤즈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뮤즈는 요정처럼 짧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다. 뮤즈가 어떤 순간적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면, 올리브의 이야기를 길게 다룰 필요가 없었다. 올리브의 이야기가 비슷한 비중으로 풀어가는 이유는 제시 버튼에게 뮤즈란, 순간의 존재가 아니라 과정을 함께 하는 친구라는 걸 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예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하려는 것. 그리고 이를 막는 사회 통념이라는 벽. 하지만 이 벽 앞에서 좌절하기에 그녀들의 열정은 더 절박하게 간절하다. 그 간절함이 오델의 앞에 올리브가 나타난 이유일것이다. 그 연결을 보면, 정말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성별이 '여성'이었다는 건 특별하다. 제시 버튼 역시 이를 강조한다. 여성 예술가가 예술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느꼈던 억압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두 사람의 성별은 두 사람이 예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와 관련있다. 이때 두 사람이 느꼈던 억압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로 부터 받는 억압에서 자기 자신이 막는 것까지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이는 1936년 스페인과 1967년 영국의 것으로만 멈추지 않고 2017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까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성'과 '여성'이 이어진다는 것은 여성이기에 느꼈던 그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30년이라는 시간동안 달라진 변화, 그 변화가 여성이라는 틀에 가두어야 했던 것을 풀어버리기에, 특별하다. 

오델과 올리브,

두 사람을 보며 겹쳐지는 작가들이 있었다. 혹시 제시 버튼에게 이어지는 작가가 그 작가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작가들은 그녀와 같은 영국 사람이니, 그럴 가능성이 왠지 더 더 더 클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기억은 그 순간의 일을 즉시 남기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전의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 속에는 나의 주관과 주체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좋았던 기억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나의 의식 속에 담아 둔다. 반대로 나빴던 기억은 공포나 두려움으로 의식 속에서 괴롭히는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억 자체를 지워버린 채 기억을 망각한다. 또 시간에 따라 기억은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엔 선명했던 장면, 가슴을 일렁이던 감정들은 사그라들고 바래진 필름처럼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다. 또 한편으로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이, 예기치 못한 순간 튀어 나오기도 한다. 기억은 이렇듯 그 모습을 순간순간 바꾼다. 이렇듯 개인에게도 매 순간 그 모습을 바꾸는 기억을 여러 개 중첩하여 놓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8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만나면서 겪은 강렬한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을 엮은 책, 이 바로 <매혹당한 사람들>이다. 


여성만이 모여,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던 미사 판즈워스 여자 신학교에 존 멕베니가 등장하며 평온했던 학교에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에너지가 감돌기 시작한다. 두 명의 선생님, 다섯 명의 학생 그리고 한 명의 흑인 노예와 적군인 존 멕베니의 만남은 미국 남북전쟁 상황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남북전쟁이라는 물리적 상황에서 겪는 갈등이 <매혹당한 사람들>의 핵심은 아니다. 남북전쟁이라는 배경은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다시 말해 9명의 사람들 모두 판즈워스 신학교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주는 긴장관계를 고조시킨다. 


적군. 부상병. 존 멕베니와의 첫 만남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알 수 없는 존재이자, 총을 겨누어야 하는 상대이자. 오래전 판즈워스 자매의 남동생이 떠난 뒤 금남의 구역화된 판즈워스 신학교에 남성의 등장에 대해 보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 이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이내 두려움에 대한 감정을 멀리하기보다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 생각의 변화의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의 변화 과정이 멕베니를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며 두려움 대신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운다는 점이다. 그 다른 감정이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 감정을 사랑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랑에 층위가 있다면 얕은 층위의 사랑의 감정일 수 있지만, 고귀한 형태의 사랑이 두려움의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이들이 두려움 자리 대신 채운 것은 자신의 결핍에 기초한 욕망이었다. 

멕베니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 믿었지만, 이들은 멕베니를 통해 자신의 결핍된, 상처받은 부분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그를 대했다. 제때 학비를 내고, 부유한 아버지의 밑에 있었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꼈던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 몰락의 가운데 있었던 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만나지 못했던 이, 자신 없는 외모 대신 내면을 쌓았다 믿는 이... 이들은 모두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해결될 기미가 없는 마음속 공허한 부분을 멕베니와의 관계를 통해 채워나갔을 것이다. 멕베니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주변 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낯선 상대에게 말이다. (어쩌면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멕베니는 이들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멕베니 스스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실현할 수 있는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8명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멕베니의 속마음이 8명처럼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몇몇 대화 지점에서 그의 욕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단한 상황 이후에 그의 태도는 8명의 기억 속에서도 명확하게 달라진다.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생각했던 8명이 결말에 이르러서 내리는 결정에서 이들의 감정이 숭고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과정은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에 대해 저자는 세밀하게 개인의 감정의 단면을 서술한다. 그래서 8개의 기억이 중첩된 마지막 결말의 충격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런 행복이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제 그런 생각은 안 해."
"다시 행복이 오면 기쁠까요?"
"음…… 그럴 것 같아.
하지만 똑같진 않겠지.
불행을 알게 된 순간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지거든.
그건 오직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원주의(pluralism).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어 중 하나다.

 

"사회는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 (네이버 지식백과)

 

이 단어가 과연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을까? 다원주의 사회의 원칙이 통용되기 위해서는 Property(경제적 이익), Power(정치적 힘), Prestige(사회적 명예)가 각각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3가지 요인의 분리가 다원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뉴스를 보면 3가지를 다 가지려다가 또 다른 P, Prison(감옥)에 가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2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1820년에는 세계 인구의 94%가 극도의 빈곤에 빠져 허덕였지만 1981년에 들어서면서 그 비율은 44%까지 떨어졌고,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현재는 10% 미만이다(12-14쪽)
네덜란드와 미국처럼 1800년 당시 가장 부유한 국가조차도 기대수명은 2012년 건강 지표상 최저인 시에라리온보다 짧았다(14쪽)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예전의 과거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세상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이뤄지는 디즈니 영화와 같지 않다. 현실은 차갑고 냉혹하며 성공과 실패도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인 극심한 무한 경쟁의 장이다. 수많은 스펙을 쌓았음에도 취업은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에 종사하며, 설사 정규직이 되더라도 몸과 마음은 탈진하기 일쑤다. 연애, 결혼, 출산만을 포기하던 3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는 가짓수가 점차 늘어 9포까지 이르렀다.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경제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바꾸기 힘든 현실 속에서 자기계발, 힐링, 성공 사례(창업, 벤처기업, 창직 성공)의 가치를 통해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극소수의 몇몇만 성공할 뿐 대부분은 좌절하거나 실패한다.

 

저자는 오늘날 사회 원인이 "유토피아의 부재"에서 왔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비현실적인 디즈니 영화 속 세상이 아니다. 냉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환상이 아니다.

 

“유토피아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재가 엉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완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상과 희망이 살아 있고 꿈틀거리는 세상이다.’” 33쪽

 

유토피아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청사진이다. 그리고 그 청사진의 조건은 특정한 사람들만 꿈꾸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중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 내용은 파격적이다.


1. 기본 소득 보장
2. 주당 15시간 노동
3. 국경 없는 세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하지만 저자는 단언한다. 오늘날에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AI 로봇이 보편화되어간다면 실현 못할 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선입견과 우려를 이미 증명된 사례를 토대로 차근차근 반박해나간다. 인간은 게으른 존재이고, 나태해질 것이라는 편견, 노동을 신성시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국경이 무너지면 세계 질서가 무너진다는 우려에 대해 반박한다. 저자는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내 삶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상황, 이데올로기, 힘의 논리를 올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 그 모순으로 인한 악순환에 대한 무지가 지금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혹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나, 그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생각하지 못한 채 지금의 구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이는 점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혹은 무기력한 태도가 반복될수록 유토피아는 멀어진다. "진보는 유토피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회의 모순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잘 못 자리 잡은 편견을 깨닫게 해주며 끝으로 사회를 바로 통찰할 수 있는 근거를 알려준다.

 

읽고 난 뒤에 생각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조건은 "삶 속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타인과 주변 환경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파악하고.
그 영향에 휘둘리지 않는 것.

 

이렇게 변화한 개인들이 많아진다면 "헛되다(futility, 가능하지 않다.), 위험하다(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 사악하다(디스토피아를 초래할 것이다)는 이유"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 공격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결국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는
시장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회이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경로를 결정하는 요인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형성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22쪽


읽다가 멈칫 몇 번을 놀랬는지 모른다.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했다. 레누와 릴라, 두 사람의 20대에서 30대의 이야기는 하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엄마와 함께 읽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엘레나 페란테의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이야기는 20대의 나의 감수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내가 살아온 적이 없는 시간 속의 적나라한 고백들이 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일 때 겪을 수 있는 자신의 자식을 낳는 출산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로 사는 삶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부분의 감정의 전개에 있어서 난 레누와 릴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라면,  나와 다른 이해의 폭을 가지고 이 작품을 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결혼 그리고 출산, 엄마로서 삶과 작가로서 나의 삶. 그리고 금지된 사랑.

레누와 릴라. 순조로운 삶의 순간에는 마음이 불안했고, 험난한 일이 일어날 때면 마음까지 조급해진 마음은 두 사람의 삶을 걷잡을 수 없는 풍랑 속으로 이끌었다. 흥미로운 점은 레누와 릴라 모두가 잘 되고, 모두가 험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레누와 릴라의 인생 그래프의 간격은 평행선처럼 일정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두 사람의 우정의 거리만큼인 듯싶다. 마음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친구에게 다 보이지 못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우리 엄마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읽으면 분명 지금과 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떠나가도. 머물러 있어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레누와 릴라는 서로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최악의 최악을 더해가는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별거를 했음에도.
하나뿐인 아들을 자신의 품에 두었음에도.
아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할 때도.
부당한 노동환경에 대항할 때도.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바라봐 주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음에도.
릴라는 불안해한다.

후회할 지난 일을 글로 풀어내며 한 꺼풀 벗겨냈음에도.
처음 쓴 소설이 대 유행을 했음에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남편과 그의 가족과 가족이 되었음에도.
유년시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가졌음에도.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레누는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은 쉼표도 없이 하루하루 시간 속에 함께 한다. 그 불안한 감정이 글 속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런데 마냥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불안한 감정을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다층적으로 표현한다. 두 사람의 삶과 연관된 여러 사람들의 관계가 바뀌고 그 변화의 흐름에 사회도 한몫을 하고 있다. 1968년도 68혁명이 두 사람의 삶을 자꾸만 비틀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존재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결혼하며 깨어있는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의 보수적인 모습에 레누는 좌절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접고 원하지 않았던 때의 임신과 출산을 한다. 결국 작가 레누는 점차 작가 세계에서 잊혀간다. 릴라도 다르지 않다. 별거를 함에 따라 경제적인 상황이 궁핍해지고, 생활을 위해 공장과 같이 노동시장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자산의 생각과 마음을 발산하던 릴라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사회의 변화 속에 두 사람의 존재는 묻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그 변화 속에서 저마다의 모습을 살아간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하는 고민의 깊이는 더 깊어져가고 그 깊은 사유 속에 단단하게 쌓여가는 것이 있다. 물론 그 쌓인 것들이 내가 생각한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이야기 서사다.
앞선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보다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진 이유는 레누의 변화 때문이다. 1,2권에서 레누는 자신 스스로 자존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릴라라면"을 놓지 않았다. 물론 이 생각은 3권에서도 이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레누는 점차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물론 그 생각의 끝이 니노와의 사랑이라는 점이 파격적이지만. 레누의 변화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서사의 핵심이다. 그리고 릴라는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처럼 자신의 빛을 잃은 듯 그 빛을 감추어둔 듯 지내다가 본능적으로 미래지향적인 결정을 내린다.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예술적인 자아 표현을 하는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컴퓨터 기술을 익히는 등의 행동을 한다. 그리고 <나의 눈부신 친구>의 초반부에서 확인했듯이 릴라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사라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레누의 태도는 니노의 손을 잡고 떠날 때와 달랐다. 그 변화의 간격을 4권에서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하다.

얼른 11월이 되어 4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