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와 마녀의 꽃 - 애니메이션 그림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각본.감독, 안혜은 옮김, 메리 스튜어트 원작, 사카구치 리코 각본 / 온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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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애니메이션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이유는 그림 속에 가장 순수한 감정이 함께 담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예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군상을 다루는 여타 다른 작품들과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수채화 그림처럼 한 컷 한 컷이 따뜻해지는 지브리풍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브리 스튜디오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나의 허전함은 이내 그곳에서 배우고 익혀 자신만의 작품 세계와 작화를 완성해나간 많은 감독들에 의해서 채워지고 있다. 조금 더 지금의 감성에 어울리게 혹은 그림의 디테일이 조금 더 섬세하게 담긴 작품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메리와 마녀의 꽃'은 메리의 수수함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영화였다. 

 

드라마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작품은 영상물로 나와서 시청각적이 즐거움이 있지만, 찬찬히 내가 보고 싶은 속도로 내가 보고 싶은 메시지에 폭 젖어들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종종 영화를 보며 어떤 순간에는 일시정지를 해서 그 순간이 주는 감동을 조금 더 느끼고 싶을 때가 있었다. 관객들이 가장 즐겁게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계산된, 기획된 작품이지만, 그 작품을 나의 삶의 속도에 나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보고 싶은 때가 있다. <메리와 마녀의 꽃>은 그런 나의 마음을 움직인 동화책이었다. 정확하게 애니메이션 그림책이지만. 
어린 시절 한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디즈니 만화영화를 동화책으로 옮겨놓은 책을 친구 집에서 본 적이 있다. 마음속으로 그 시리즈가 우리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만화영화가 책 속에 옮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그 동화책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난다. 영화 테이프는 마음대로 볼 수 없지만 책은 내 마음대로 볼 수 있으니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아마 내 책장에 채워진 책들은 만화 영화 시리즈가 아니라 세계의 박물관 유물 도록집 같은 책들이 주로 채워져 있어서 더 부러움이 컸을지도 모른다. (물론, 유물 도록집 역시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고 했을 때, 울며 불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며 내 책장에 두었던 책이다. 지금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주었지만.) 
이상하게 집에 동화책이 별로 없었다. 동화책도 별로 없었지만,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책으로 옮겨 놓은 책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그림책이 서점에 놓여 있으면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읽곤 한다. 혹은 이렇게 내 책장 한편에 놓아두거나. 

 

 

자세한 줄거리를 적을 수 없지만, 메리가 자신다움을 서서히 찾아가는 이야기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야기!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던 고민으로, 그 고민을 풀어가는 이야기다. 메리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는 못하지만, 상상에서 한 번은 해보았을 법한 이야기다. (사실 난 이렇게 흥미로운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메리'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나가는 게 보여서 읽으며 흥미롭기도 했지만 마치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는 듯 기분 좋아지는 시간이었다. 

2017년 크리스마스 마지막 1시간을 이 책과 함께해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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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3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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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박이는 순간처럼 삶을 분절적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찰나로 이루어진 삶. 그 찰나들이 모인 삶. 지금 동안 나를 만들어온 것이 과거의 누적된 무게가 아닌, 순간순간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를 글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소설이 삶을 그렇게 바라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찰나의 순간. 순간의 기억들이 주었던 것을 포착한 소설. 바로 그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시리즈다. 묵직한 3권의 소설로 엮어진 한 남자의 고백은 삶의 순간순간이 미치는 영향을 솔직하게 세상에 외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서사는 이어진 듯 분절되어 있고, 분절된 듯 이어져 있다. 마치 파편처럼 조각나 있다가도 어느 순간엔 꼭 맞춘 퍼즐처럼. 그의 이야기는 조각들이 모인 커다란 하나의 서사다. 

<나의 투쟁 3>은 한 '남자'이기 보다 한 사람의 '남편'으로, 하나뿐인 자식의 '아버지'로 삶에 대한 이야기와 과거의 열정적인 지난날의 모습을 기억하는 젊은 시절을 보내온 만큼 나이 든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의 투쟁 1>의 궁금증 <나의 투쟁 2>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하지 않는다. <나의 투쟁 3>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생각과 여기서 파생된 이야기들만 이어질 뿐이다. 앞선 두 권의 소설을 읽으며 익숙해진 그의 표현은 <나의 투쟁 3>을 수월하게 읽게 도와주었다. 그의 글이 익숙해졌지만, 그가 말하는 '남편'으로서 삶, '아버지'로서 삶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다른 성별이기 때문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 답이 불충분했다.
내가 내린 답은 칼 오베라는 남자의 삶의 기록을 부분 부분 끊어서 보아서. 그의 지독하리만큼 쏟아내는 마음속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고 순간순간에 북받친 감정이 많았다. 특히 아이의 출산 앞에선 그의 감정 상태는 린다에 의해서 혹은 다른 상황에 의해서 계속 달라졌다. 달라진 모든 모습이 칼 오베였지만, 그 다른 모습 속에서 진짜 '칼 오베'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 나의 시선이 그를 더 파편화했고, 그 파편 조각 속에서 다시 재배치하며 내가 생각하는 칼 오베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 생각에 맞추어서 해석한 칼 오베인데, 나는 오히려 그런 칼 오베의 모습이 낯설었다.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경계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독자인 나의 모습에 보였고, 그러다가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는 그의 모습. 어떤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인지. 내가 믿고 있는 원래라는 것이 진짜 원래 칼 오베의 모습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길게 칼 오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름 일관된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진정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눈앞의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페이지 수의 소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쓴 기록물을 이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그 주인공을 파악할 수 없다는 건,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쉽게 너를 이해한다,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며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삶의 파편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칼 오베라는 남자가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우리의 감정과 기분, 우리의 움직임과 목소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짜증을 내면서 린다와 말다툼을 하다가 거의 동시에 아이를 바라보면서 밝은 미소를 짓다 보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누군가의 삶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 느낌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함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섬세함이 조각낸 자신의 생각, 삶 자체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3>은 조각난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순간순간 그가 했던 생각들은 현대사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고민의 흔적이기도 했고, 칼 오베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그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인간의 목소리 속에 담겨 있는 슬픔과 불만, 만족감과 기쁨, 우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건드려보고 싶어 했고, 깨워보고 싶어 했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는가.

나는 차라리 우연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떤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그 일을 해결하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삶은 바로 그런 것이지 않은가.

투레 에릭은 자주 "과거는 다만 수많은 미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벗어나고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경직성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역동성을 배양해내야 하는 예술이 경직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예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동시대를 표현하는 이른바 현대 예술이기 때문이다. 역동성을 느끼지 못하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요점은 시각과 관점의 차이라는 거야. 이 시각으로 보면 세상이 즐거워 보이고, 저 시각으로 보면 세상에 가득한 슬픔과 비애만 보일 뿐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중요한 것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배운 것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얼마든지 기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항상 세상에 무언가를 요구해왔다. 그러다가 생각한 대로 잘 안되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세상과 주변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소설의 말미에 가면, 작가로서 '글'에 대한 '소설'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고민의 결과가 <나의 투쟁>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깊이가 좀처럼 얕지 않아서, 그 폭이 좁지 않아서 <나의 투쟁>이 그 결과라는 답을 알 수 있지만, 그 답이 시사하는 바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였던 걸까? 현실을 모방한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을 옮긴 소설의 서사가 가진 힘. 그 힘이 무엇일까? 그 힘이 작가 개인에게 무엇을 주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겐 무엇을 주는 것일까. 
나는 조각난 이야기에서 그 가치를 찾았다. 임신 기간, 육아, 친구와의 만남, 가족 간의 만남, 작가로서의 진지한 성찰들이 뒤엉킨 삶의 기록. 이어지지 않은 조각난 기록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고 굳게 믿는 과거조차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난 시간 속의 나 역시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토대가 아니라, 낯선 무언가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0대의 나는 지금의 내 속에 얼마나 남아 있는가.
도시의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별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의 내게 선 20대의 내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나라는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없다면 그것을 감히 예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보이는 세상의 풍경은 우리의 지난 시각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 발견에는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가능성이 담기지 않았을까. 과거조차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에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발터 벤야민의 변증법적 시선과 같은 어떤 가능성이 포함된 힘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발견한 것이고 아마 작가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냉정한 자기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투쟁>이라는 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 속 저자의 깊은 눈매에 담긴 무게가 보였다. 멋지다, 분위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만든 깊음. 그 깊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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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2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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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처음에 <나의 투쟁 2>를 읽으며 기대했던 내용은 위 내용(실제 내용)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해 꽤 긴 서사로 풀어낸 <나의 투쟁1>의 연장선 상의 이야기가 될 줄 알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풀어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는 내 기대였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나의 투쟁2>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연애. 결혼. 육아. 
한 사람의 연인이 되고, 한 사람의 동반자가 되고, 세 아이의 부모가 되어 사는 일상 중에  좀처럼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백이 <나의 투쟁 2>의 줄거리다. 이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그 한 사람의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속마음을 좀처럼 다룬 문학 작품이 많이 접하지 못했기에, <나의 투쟁 2>는 나에게 특별한 소설이 되었다. 

그의 일상 속에 느끼는 생각은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간중간에 툭툭 나온다. 누구나 한 번쯤 아니, 매일매일 해본 것이다. 길을 걷다가,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잠을 자기 직전에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누군가와 마주치면서,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우리는 계속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글로 서술해두지 않을 뿐, 생각은 끊임없이 한다. 오베도 마찮가지다 자신의 곁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2명의 아이에 대한 생각, 태어나지 않은 태아와 함께 하는 아내 린다에 대한 생각, 친구와의 대화, 길가에 걸어가다 만나는 사람들을 보며 드는 생각을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의 말하기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과거에 아내를 만났을 때를 회상할 때도 마치 회상이 아니라 그 순간에 그가 있는 듯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같은 조건으로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접하는 외부적 환경 때문에 저마다 다른 인성을 형성한다고 하는 말은 진실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진실은 이와 정반대다. 인간은 저마다 아른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외부적 환경에 따라 서로 비슷비슷하게 또는 평등하게 변해간다.
34쪽

나는 성인이 된 후 타인과의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과 느낌으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가 종종 있는데, 그때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거나 나를 거부하게 되면 나는 순식간에 내면의 폭풍을 경험하게 되고 고통스러워한다. 
70쪽

내가 현실을 혐오하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무의미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115쪽

내가 대도시에 사는 이유는 전적으로 혼자 있고 싶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특정 대다수의 낯선 얼굴들 속에선 마음의 문을 닫고 거리를 두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낯선 얼굴들의 파도 속에서 혼자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은 대도시의 장점이기도 하다. 온갖 형태의 사람이 모여드는 지하철역. 기차와 거리와 카페 그리고 대형 쇼핑센터
거리감, 거리감. 나는 이 거리감이 아무리 커도 만족할 수가 없을 정도다.
142쪽

책을 읽지 않으면 읽지 않을수록, 넘기는 책장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독서를 향한 마음의 장벽이 높아진다. 
154쪽

그러면서 죽음은 삶에 너무나 가까이  닿아 있기에 우리가 소유한 것들과 매 순간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삶에선 이러한 의미의 죽음이 배제되어 있어 찾아보기 힘들다.
158쪽

한 인간이 그간 익숙해 있던 세상이 아닌 또 다른 낯선 세상을 만날 때에는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모든 익숙함을 버려야 그 세상으로 잦아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202쪽

그의 삶은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생각은 묘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아마도, 그의 생각들의 끝에 다다른 결론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만, 동시에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심리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때로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고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욕구는 오베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에 따르면 "함께"있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멀어지고 싶어 하는 그의 솔직한 고백은 조금 독특하게 느껴진다. 자신과 닮았지만 또 다른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피곤해하고, 미친 듯이 사랑했던 연인이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멀어지게 되는 관계를 볼 때면, 관계가 살아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특히 오베와 린다의 이야기를 보며, 인간관계의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순간들을 목격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표현은 그가 이전에 표현했던 생각과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모습을 발견했다. 시니컬하고 차갑게 말하기 바빴던 오베가 린다를 생각하며"오, 나는 얼마나 그려를 사랑하는가. 그런데 왜 이리도 마음이 아픈 거지?"라는 말을 할 때 이질감을 느끼며 동시에 인간미가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내게 어떤 사람인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편지에 적어놓은 글 그대로. 그녀의 입술과 눈동자와 걷는 모습 그리고 그녀가 사용한 단어들. 나는 비록 그녀를 잘 알지 못하나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 그녀와 세상 끝까지 함께 있고 싶다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녀뿐이라는 것. _353쪽

그의 마음은 내가 약 1000쪽 가까이 읽었던 그의 삶의 이야기 중 가장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순간이었다. 홀로 사랑한다고, 자신만 좋아한다고 생각한 남자의 치열한 사랑의 고백은 그 마음이 커질수록 그 감정의 폭이 격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내 세상에 대한 불쾌함으로 가득했던 남자가 달라지는 과정이 말미에 쏟아져 나오는 것도 잠깐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완벽한 행복감을 맛" 보았다는 고백 이후에 린다와 그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틀어지지만 끊어지지 않은 관계는 다시 책 앞부분의 모습과 겹쳐지며 소설이 끝난다. 긴 호흡의 서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이야기의 마무리는 아쉬운 듯 끝이 나고 또 <나의 투쟁 3>을 기다리게 만들며 이야기는 끝난다. 

 

그의 고백의 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3권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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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로 읽는 세상
김일선 지음 / 김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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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단위 체계를 만들어보려는 과정은 
사실 신뢰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달성된다.

 

 

 

 

쉽게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위에 대한 모든 것! <단위로 읽는 세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위'가 가진 의미를 쉽게 풀어 놓은 책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얼마나 많은 단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지 좀처럼 인지하기 쉽지 않다. 지금 블로그에 글을 쓰기 위해 올린 사진의 용량을 나타내는 '바이트'나 몇 시인지 확인하는 '시' '분' '초' 그리고 공간의 너비를 나타내는 '평' '제곱미터', 소리의 음역대를 나타내는 '헤르츠' 등등 이외에도 많은 단위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용하고 있는 단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위로 정의 내린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대로 생활한다. 사용하고 있는 단위의 정당성에 대해 물어보지 않은 채 말이다. 정확하게 단위에 대해 질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단위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연함은 편리함이라는 효용이 있기에 사용한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내 안에 내재화되어 있었다.

<단위로 읽는 세상> 속 저자는 나의 생각에 절반 정도는 동의하고, 절반 정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과학이 가지는 '합리성'에 기초한 단위의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만들어져 사용하고 있는 단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인 타당한 근거에 의해서 만들어진 단위가 있는 반면, 인간의 의도가 개입된 단위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시간'이다.

지구의 자전에 기반을 둔 개념인 하루와, 공전을 기준으로 하는 1년은 천문학적인 기준이므로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한 시간과 한 달은 하루와 1년을 어떤 식으로 '자를' 것인지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달력이나 시간을 둘러싼 접근은 나누기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보다는 있는 것을 적절하게 나누기가 훨씬 어려운 법이고, 시간이 바로 그랬다.

시간은 과학적 근거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이를 나누는 것에는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또 1시간을 60분으로 나누고 1분을 60초로 나누는 것은 시간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속도"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그 의미는 크다. 단위의 탄생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소통이 순수한 편리함을 기반으로 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중요하다. 
<단위로 읽는 세상>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난 개념은 부르디외의 이론들이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담긴 함축 의미를 만들어 내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무의식적인 수용에 대해 경계했던 그의 이론과 '단위'에 대한 접근이 동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위는 같은 숫자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개념이다. 가령, 방사능에 대한 단위는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X-ray를 찍을 때 받는 방사능의 수치와 원자폭탄이나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났을 때 노출된 방사능의 수치를 다루는 단위가 다르다. 이처럼 어떤 단위에 대해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위험성이 더 부각되게 마련이다. 물리량, 나아가 과학은 본질적으로 무색무취하다. 하지만 방사능 관련 단위는 미지의 공포감을 발산한다." 단위에 대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단위가 비합리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떤 단위에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니다. 많은 단위들은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간이지만, 이 기술을 인간이 완벽하게 통제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계가 아닌, 기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점이 <단위로 읽는 세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단위의 등장과 이 단위를 활용할 때 인간은 기존에 유지해온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 <단위로 읽는 세상> 속에 등장한 많은 사례들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말한다. 즉 우리는 기술을 활용하지만 동시에 기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소리의 높이로 길이와 부피의 기준을 정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신체 부위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체계적이고, 국가라는 조직의 틀이 잡혀야만 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발한 방법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어떤 방식으로 제도를 운용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소리'라는 주관적인 요소가 단위와 결합하는 순간 체계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율, 음역대 역시 임의적으로 만든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리를 측정하고 구체화할 때 우리는 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소리에 대한 측정은 악보의 탄생, 절대 음감에 대한 생각, 녹음 등 다양한 음악적 활동과 음악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우리는 오선지와 서양식 8음계에 익숙하다. 이렇게 측정한 음악적 단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게 음악은 선율보다 박자가 더 중요할 수 있고, 어떤 민족에게는 화음을 어떻게 구현하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음악을 도식화하고, 측정할 때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면 음악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비트나 화성을 측정하는 단위, 기술 역시 존재하며 이를 토대로 우열을 가르지는 않지만, 음악에 있어서 대중음악과 예술로서 음악에 대해 선험적 구분을 하고 있다. <단위로 읽는 세상>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어떤 단위를 선점하고 하나의 통용 언어화되었을 때 어떻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책 곳곳에서 하고 있다. 

<단위로 읽는 세상>은 기술을 이용하는 측면의 시각에서 기술(

단위)의 시각에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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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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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확실히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을 대단히 풍성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
여러 세기에 걸쳐 선택되어왔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 세계에서 석유보다 더 부족한 게 되었다. 우리가 최소한 아주 약간만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말 '공감의 시대'일까?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우리 사회, 인간 사이의 관계에 공감이 넘친다는 의미라면, 동의하기 망설여진다.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공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뜻이라면, 우리의 시대정신에 '공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동의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가리켜 경쟁 사회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소비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생물학자는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단어들 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경쟁은 미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치열하게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 요즘 공감은 성립할 수 없는 것 혹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공감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재화'처럼 여겨진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재화를 생산한다 해도, 내게 다시 돌아올지 불확실한 재화. 그렇기에 공감과 이해, 배려가 점점 줄어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게까지 보인다. 주말드라마의 어떤 캐릭터는 "역지사지"를 우리가 아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풀었다. "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 안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내 주변을 향한 배려가 담긴 공감이 부재했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이자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공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한다.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 공감

 

"우리는 공감을 억누르거나 정신적으로 차단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기에 실패할 수는 있지만,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의 질문된 적 없지만 아주 기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왜 자연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장단을 맞추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면 괴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기쁨을 느끼도록 인간의 뇌를 디자인했을까? "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에게 '공감'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다. 멘델의 유전법칙과 같이 기존 자연과학적 법칙의 핵심 테제였던 "생존경쟁"이 아닌 "공감" "공공성" "이타성"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동물행동학과 진화론의 관점에서 타당성 있게 분석한다. 영장류를 비롯한 포유류와 조류 등의 동물들을 분석하며, 공감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화된 본능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용과 이익을 합산해서 도울지 말지, 공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걸 우린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오며 몸으로 체화했다.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 행동의 결과를 반영하면서 자연 선택은 영장류가 적절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감 능력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망설인다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데이터 대신 근시안적 데이터만을 고려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판단과 먼 비합리적인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우기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일지 모른다.

"자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특성들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낙관적인 사회적 성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공감이 줄어들고 있고 이는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한 일이라는 가정. 공감은 회복해야 하는 우리의 소중한 옛 가치라는 이야기. 그 전제에는 '공감'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사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의심은커녕, 심지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경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본성 중의 하나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만 있지 않고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감하는 인간, 이타적인 인간의 모습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홀로 살지도,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살지 않았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공동체 안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사회적 삶에 맞게 만들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지난 역사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에게 가하는 가장 큰 형벌이 "독방 감금"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사회와의 단절을 가하는 것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큰 지 반추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모든 사회는 이기적 동기와 사회적 동기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 그 사회의 경제가 바로 그 사회에 확실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경쟁만으로 우리 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도 만들 수도 없다. "자유시장 체제"의 선두에 서있는 미국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 더 나은' 사회일까? 초현대 사회의 미국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빠르게 발전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경쟁이 낳은 수많은 문제가 미국 사회를 병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의 본성 공감에 대한 강조가 균형을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더 나은' 공감은 무엇일까?


높은 수준의 공감은 자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자아의식의 여부는 거울 실험으로 알 수 있다.

 

프란츠 드 발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감에 있어서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에게 동화되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만약 이때 개인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타인 지향적인 공감"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기쁨을 얻지만 이때 얻는 기쁨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문제는 만약 이렇게 이루어지는 공감은 타인에 의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타인에 의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에 휩싸일 여지도 크다. "자아의식은 닻과 같이 자기 자신의 배를 감정의 파도 속에서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불만, 불안, 혼돈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 타인을 도울 때 일어나는 공감, 타인을 돕지 않으면 나까지 불쾌해지기에 하는 공감은 자신에게 이익처럼 보이지만 해가 되는 공감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 공감은 개개인의 자아의식이 존재 속에서 각자의 자유와 자율성 및 공감에 대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내려진 공감이 진화되어 온 공감이 더 발전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자아의 결정에 따라 공감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이 시대에 공감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감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지금의 상황에 돌아온다. 프란스 드 발은 "진화는 공감과 동정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있든 없든 작용되는 독립형 메커니즘"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즉, 공감은 우리가 익숙한 경제학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사회적인 다리와 이기적인 다리라는 두 개의 다리"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인 다리를 쓰려고 하니 나만 쓰는 것 같아 아깝고 억울한 것 같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올까.  두 개의 다리 중에 하나의 다리로 걷기를 희망한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 걸음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에 많이 힘들기에 다른 선택을 하길 진화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이용해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저자가 공감을 말하지만, 무조건적인 공감을 말하고 있지 않다. "공감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것이라는 데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을 본다. 그렇다면 공감이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발달될 확고한 특성이며, 그래서 사회가 공감에 의존하고 공감을 포용해서 키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공감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공감에는 우리가 반응해야 할 것을 걸러주는 필터와 꺼버리는 스위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감정적 반응이 그렇듯 공감에도 전형적으로 공감을 촉발하거나 우리가 공감의 촉발을 허락하는 상황, 즉 '정문'이 있다."

하지만 공감의 보편성의 전제는 자기 정체성, 자아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즉, 나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정문 지킴이는 바로 '주체성'이다. 자신만의 rational이 확고하게 자리한 고유한 정체성이 중요하다. 


우리의 '공감'은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 있을까. 하강의 기점에 서 있는 것일까.

 

공감은 오랜 시간 진화 과정을 거쳐오며 인간의 본성의 영역에 장착된 메커니즘이 되었다. 물론 지금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 불필요한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 개개인의 자아의식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공감은 불필요한, 무용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인류가 진화한 시간으로 볼 때, 지금의 고민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공감'이 나아가는 발걸음을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 나는 공감이 어디로 향하길 바라고 있을까. <공감의 시대>를 읽으며 공감한 난, 공감이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있길 바라는 공감하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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