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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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보고,
"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라고 읽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읽고 떠오른 단어가 있다. '프로불편러'다. 이 단어에 담긴 뉘앙스와 맥락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 '프로불편러(pro+불편+er)'는 사이버 공간에서 '불편하다'는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동조를 이끌어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_ 네이버 국어사전 (오픈사전) "

 

처음 오찬오 교수의 책을 읽으면, 내가 프로불편러가 된 기분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찌나 불편하던지. 그의 말에 토를 달고 또 달았었다. "꼭 그렇게 생각해야 하나?"라는 토를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처음 읽고서, 내 생각과 머리를 관통했던 그 울림이 기억난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차별적이었는지. 나를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줄도 몰랐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이미 책을 통해 그를 만나서일까.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읽고서 "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진짜 프로불편러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말하는 불편함을 불만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감정적 호소로 토로하는 불만과 다른 "불편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불편함은 "사회적·역사적으로 통용된 옳음의 기준을 준수하고,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할 이타성이 공존하는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불편함은 무엇일까.

 

 

Part 1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만

 

 
첫 장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하나로 요약한다면, "염치 잃은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층간 소음 앞에 내세운 이기심, 페미니즘 앞에 날선 논리들, 무뎌진 차별에 대한 인식에 대해 그는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염치 잃은 사회의 단면을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설명한다. 단지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도 않고, 사회의 문제로 뭉뚱그려 설명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불쾌한 상황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그 논리에 담긴 모순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어떤 행위에 '선'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순간, 나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끊임없이 의미 작용을 하며 나아가게 된다. 그것이 실제로 옳든 옳지 않든 말이다. 옳지 않았던 일이 옳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개선된다면 참 좋겠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옳지 않은 일을 옳은 일이라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에 거기에 '무뎌진 차별 감수성'은 부채질하며 이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차별 감수성이 무뎌진 데, 난 혐오가 만연해진 것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좀비 놀이에 대해 문제 제기에서, 현재 우리가 일상 속에서 혐오 단어가 만연하게 사용되는 점이 떠올랐다. 한때 "(아이유, 쿨) 병, (급식, 진지) 충"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일상 대화 속에 비난과 비아냥 거리는 단어가 만연해 그 단어의 수준이 점점 더 거칠어졌었다. 난 이 단어들과 그 단어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몹시 불편했다. "논리는 결핍되어 있고, 합당한 이유도 없이, 심지어 웃으며 타인을 비난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설사 그 이유가 있다 해도 동의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난 "진지충"이 되기에.

나만 이런 불편함을 느꼈을까. 저자만 이런 불편함을 느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안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불편함을 느꼈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분위기'라서. 진지충으로 낙인찍히기 싫어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며, 염치를 잃은 우리에게 염치를 되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자신의 아집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한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 힘듦은 환희와 함께이기에 마냥 힘든 것만은 아니란 이야기도 저자는 빼놓지 않고 있다.

 

 

Part 2 그게 다 강박인 줄도 모르고

물론 스스로를 헐뜯는 자기혐오의 부정이 있다면 개선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외부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여 부당한 것에 대한 '정당한' 감정을 가지는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이 긍정부터 하라는 이들의 분위기에 눌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건 하나도 괜찮지 않은 사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그럼, 항상 염치없이 사는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한국인들에게는 '뜨거운 에너지'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뜨거워야 할 때는 모른다면 그 에너지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저자의 말처럼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려야 할 때를 모르고, 엉뚱한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문제는 그 부끄러움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내가 괜찮기 위한 노력이 우리를 괜찮지 않게 만든다.

'혼자'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혼자'가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배경을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 제기에 공감했다.

"혼자는 중심으로부터 '배제된 홀로'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을 잠시라도 거부하는 '적극적 자아'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하고 함께하지 못하는 소극적 인물이 아니라 평범을 가장한 일상의 폭력을 연속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단절한다."

맥락의 중요성에 대해 저자는 강조한다. 왜 우리가 부끄러워하는지, 그 부끄러움을 긍정의 논리로 포장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 누군가 성공을 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양성평등이 실현되기 힘든 사회적 맥락, 누군가 혼자서 있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그 맥락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맥락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앞에 당면한 현실이라는 맥락이다.

 

Part 3 감정 오작동 사회, 나와 너를 성장시키는 법

 

 

Part 2까지 읽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So What?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저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풀 수 없는 고르디아스의 매듭과 같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이다.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는 방법으로 풀은 알렉산더 대왕 같은 답을 오찬오 교수는 이야기한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이 주체로 선다는 건 무엇일까.
가장 먼저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기준,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정체성"이다. 사회 시류에 휘둘리는 유행 같은 생각이 아니라, 나만의 가치가 담긴 생각 말이다. 내가 나로 존재할 때, 내가 나만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을 때 그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을 분위기에 따라 하지 않고, 내가 결정하기 위해서 '개인이 주체'로 서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용기 내길, 다른 길을 향해 발을 내딛길 저자는 적극 권면하고 있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구매하면, 책 속에 있는 메시지가 담긴 키링을 받을 수 있어요! '알라딘'에서는 책 표지 그림의 핀버튼과 스티커를 함께 받을 수 있답니다. 개인적으로 핀버튼이 예쁘기도 하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 같아요. 누가 "이거 뭐야?"라고 물어보면, 해줄 이야기가 정말 많으니까요.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보고, '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진짜 프로불편러가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가 진짜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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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헤르만 헤세 지음, 추혜연 그림, 서유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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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기 자신,
오로지 자기의 운명만 원할 수 있을 뿐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는 책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한다. 그건 아마 유연하게 생각을 연결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생각을 하고 누가 읽던 그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지닌 걸 '명작'이라고 한다.
데미안은 여러 번 읽었지만 늘 새로웠다.


재미가 없어서, 재미가 있어서, 슬픔에 잠기게 해서, 기쁨을 누리게 해서, 나를 돌아보게 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해서...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데미안은 주었다. 이번에도 데미안은 이전과 다른 감동을 주었다.

 

조금 다른 지점을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위즈덤하우스 《데미안》만의 독특한 구성도 한 몫했다. 위즈덤하우스 《데미안》은 군더더기 없이 단백하게 데미안을 담아냈다. 작가의 이야기, 번역자의 해석이나 이야기 없이. 데미안만을 그린다. 텍스트로 그리고, 다른 데미안에서 볼 수 없었던 일러스트로 데미안을 담아 낸다. 마치 만화를 보는 듯한 그림은 결정적인 장면에 등장해 이야기의 강하게 잡아준다.
  

 

처음 데미안을 만났을 때.
싱클레어가 방황했을 때.
두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이야기 서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그림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그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예쁘게 보여준다. 사진으로 찍지 않았지만, 소설 맨 마지막 장 그림이 난 가장 마음에 든다.

 


헤르만 헤세의 자화상 같은 소설, 데미안


오랜만에 데미안을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려한 문장은 눈과 머릿속을 즐겁게 맴돌았다. 예전엔 그가 하는 이야기가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낯설었고, 모호한 그의 표현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불편하게 느꼈고, 그 불편함이 헤세가 전하고픈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그의 이야기는 하늘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뜬구름 같다. 하지만 그 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태양이 함께 보인다. 그래서 구름 가장자리에 눈부시게 빛나는 "silver lining"이 보였다. 난 데미안이 그의 자화상, 내면에 켜켜이 쌓아 놓은 걸 말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어느 소설보다 빛나는 소설이다. 그 이유는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작가의 이야기보다 나에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나 자신의 이야기이며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_ 《데미안》 8쪽

 

세상에 헤르만 헤세라는 대작가의 명성을 내려놓고, 자기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소설이 데미안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데미안은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를 사랑하는 독일 문학계는 싱클레어가 헤르만 헤세임을 밝혀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도전이 실패한 건 아니다. 그의 도전 결과가 시간을 넘어, 국경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알'을 깨려는 도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단 한 가지뿐이었다.
데미안을 읽지 않았더라도,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알 것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동일인물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싱클레어 자신의 내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 데미안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동일인물 간의 내적 대화라고 보는 쪽으로 난 읽었다.) "이런 자극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로부터 왔으며 언제나 두려움과 속박과 양심의 가책을 동반했다. 늘 혁명적이었고 내가 기꺼이 머물고 싶었던 평화를 위협했다."라는 싱클레어의 말처럼 그는 누군가의 영향 하에 있는 '나'에서 독립적인 '나'로 존재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 독립된 자신만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과정이 바로 데미안 이야기의 핵심 서사다. 정체성을 가진다는 건, 개인이 홀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한 세계나 한 공동체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데만 헤르만 헤세는 "정체성"을  세우는 이야기를 했을까. 난 그가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지금도 유효한 메시지다.


아름답지만, 지금 여기저기서 성행하는 공동체는 전혀 그렇지 않아. 진정한 공동체는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새로 형성될 것이고 한동안 세계를 변화시킬 거야. 지금 있는 공동체들은 그저 패거리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서로에게로 도망치는 거야.
정체성과 홀로서기에 대한 이야기는 서두와 데미안이 끝날 무렵 두 번에 거쳐 분명하게 말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에게 당면한 '전쟁'이라는 문제 앞에  나눈 대화가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존재하는 공동체는 위태로우며, 필연적으로 해체와 와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각 개인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될 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공동체가 공허한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공감대가 상실되었고 그 자리를 채운 건 두려움과 폭력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여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은 미쳐 날뛰면서 죽이고 말살하고 스스로도 죽기를 원했다.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야 했다." 그는 죽음과 부재 사이에 태어나는 것에 주목했다. 두려움과 폭력의 분출은 견디기 벅찬 '운명'의 힘이 비틀려 나온 흔적이며, 그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봤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으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라고 말한 첫 장의 마지막과 이어진다.


그렇다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동일인물이고 이 소설의 싱클레어의 이야기, 두 사람의 대화 모두 싱클레어 내면에 있었던 거라면.
헤르만 헤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자기 자신을 해석하는 내적 대화가 아닐까.
그래서 스스로를 해석한 개인들 간 대화가 보편적인 사회를 그는 꿈꾼 게 아닐까.
이를 신인 작가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던 건, 명성을 가진 작가로 그 대화를 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개인으로, 막 등단한 작가로,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며 해석한 개인의 자격만으로 '서로'를 꾸려나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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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일주일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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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치키 스타는, 지극히 소박한 곳이지만 자신의 의견으로는 아주 평화로운 치유의 장소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도 뉴욕에서 일할 때 해마다 그리고 돌아와 휴가를 보냈다고. 걷고 또 걸으며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러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항상 뭐든 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손님도 그런 느낌을 받기 바란다고 말했다.

 

마음에 몽글몽글 온기가 사르르 퍼지는 느낌.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을 간질거리는 느낌.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난 뒤 내게 남긴 여운이었다. 오랜만에 가슴이 깊숙이 행복해지는 책을 만났다. 이렇게 책을 읽어본 게 얼마 만인지. 좋은 책을 만났다는 강한 확신이 드는 책이었다. "온갖 사연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치유 공간 호텔 스톤하우스, 이곳의 다음 손님은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는 깊이 고민하며 읽어야 하는 책도 아니었고, 휘리릭 읽는 가벼운 책도 아니었다. 문장은 슥슥 쉽게 읽히고, 마음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리는 소설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는 티저 북으로 처음 만났다. 3명의 인물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감동을 받지 못했다. 다시 차분히 치기, 리거, 올라의 이야기를 읽고 일주일간 스톤하우스에 머문 손님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지금과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고로, 혹시 티저 북을 읽고 2% 아쉬움을 느낀 분이 있으시다면, 《그 겨울의 일주일》을 완독하길 강력 추천한다. 나 역시 티저 북을 읽었을 때, 감동을 받기 보다 호기심이 생긴 독자 중 한 명이었다.

《그 겨울의 일주일》을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이 소설을 읽고 이토록 행복할까?


《그 겨울의 일주일》의 무엇이 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한 권의 책을 읽고 좋았던 이유를 적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 받은 감정에 충실하게 그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옮긴이는 메이브 빈치의 유작인 《그 겨울의 일주일》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유작이 된 이 소설은, 그래선지 그녀가 지금껏 살면서 경험한 모든 일과 그녀가 만나온 모든 사람과 그 순간순간의 모든 비밀이 압축된 하나의 집약체라 해도 될 듯하다. 그녀의 눈길이 가닿은 자리마다 한 포기 풀이 자라고 한 송이 꽃이 피어날 것처럼 그녀는 모든 만남을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 장면이나 인물을 스케치하고 디테일을 넣어 만들어낸 풍경이 하나둘 모여 더 큰 풍경, 점점 더 큰 풍경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인간 존재라는 큰 풍겨, 세상살이라는 큰 풍경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떼어내면 그녀가 그래는 장면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부각되어 나타날 것이다."
_ 옮긴이의 말 중에 《그 겨울의 일주일》 464쪽


정연희 선생님은 그림처럼 이 소설을 묘사했다. 원어로, 이를 다시 한국어로 읽어서일까. 참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난 메이브 빈치가 《그 겨울의 일주일》의 인물들을 그린 종이가 셀로판지가 아닐까 싶었다. 나에게 《그 겨울의 일주일》은 사물과 빛을 투과하는 투명한 색비닐지에 메이브 빈치가 그린 그림 같았다.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하얀 도화지에 대해 세밀하게 그려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그린 것이 아니라 셀로판지에 네임펜으로 투박한 선으로 그리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은 섬세하게 그린 느낌. 그래서 그 그림은 한 장 한 장 살펴보았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림과 겹쳐서 볼 때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주었다.
치키, 리거, 올라 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위니에서 프리다까지)의 이야기로 옮겨질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각 장의 서두는 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가기도 하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망설이다가, 여행 일정이 어그러져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유는 달랐고, 삶의 모습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스톤하우스에 있었다. 12명의 '지금' 그리고 앞으로 1주일 정도의 시간은 스톤하우스에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각 인물은 자신의 셀로판지 속 주인공이었지만, 때론 다른 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배경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건네는 조언가가 되기도 했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 겨울의 일주일》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어떤 한 인물 때문에 좋았던 게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가 모였을 때, 《그 겨울의 일주일》을 다 읽었을 때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왜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건,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겹쳐져 따뜻한 빛을 비추는 순간에 마음에 온기가 탁 들어와서, 그래서였다. 마치 셀로판지 한 장 한 장에 손전등을 비추었을 때 다른 색 빛을 내지만 모두를 겹쳤을 때 하얀 빛을 내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가 모였을 때 새하얀 빛이 마음을 비춘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빛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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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겨울의 일주일》의 주인공을 굳이 꼽으라고 한다면, '치키'가 아닐까. 모든 인물을 스톤하우스로 모여들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오가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으니까 말이다. 치키의 마음이 단단해지는 걸 가장 먼저 읽어서일까. 그녀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 배경으로, 조언해주는 사람으로, 침묵으로... 다양한 관계에서 그녀만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면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마치 오랜 시간 언덕을 지켜온 '스톤하우스'와 그 바다를 보고 치키가 느낀 편안함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그런 편안함이 느껴졌다.


"설명해야겠지요. 아버지는 늘 분명하고 정중했으니까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아버지의 꿈에 대해서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그 꿈이 제 꿈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려고요."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넘쳤다.
치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치키는 많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상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이 주는 위로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꿈과 자신의 꿈 사이에서. 성공이라고 믿고 싶은 것과 진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한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던 안데르스에게 그녀는 몇 마디를 해주었다. 그리고 안데르스 스스로 행복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한 뒤, 그의 결정에 끄덕임으로 지지를 표했다.
빙긋 짓는 미소 한 번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작은 행동이 주는 감동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그 능력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요. 미래에 대해 뭐든 모호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세요. 사람들이 별점에서 기대하는 것도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 능력도 길이 들어서 해롭지 않게 될 거예요. 제가 지금 보기로는, 그런 환시 때문에 죄의식에 빠져 계신 것 같아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려고 해보셔야 해요. 사람들한테 생각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것도 그냥 생각이에요. 그뿐이에요."


때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한 사람의 고민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 정말 태산처럼 커다란 고민이었는데. 그 사람 앞에만 가면, 별거 아닌 작은 게 되는 신기한 경험.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의 크기를 줄여주는 사람. 치키는 프리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프리다 역시, 리키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작게 만들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그 간단한 마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했다.)


모두 잘 될 것이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다 읽고 나면 모두가 잘 될 것 같은 이야기였다. 마음이 따뜻해져서 힘을 얻는 느낌이다. (비슷한 소설을 찾아보자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주는 느낌과 비슷하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지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훌쩍 지난 1월의 혹은 2월의 어느 일주일 동안 읽어도 행복해질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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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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퐅랜(포틀랜드), 그냥 좋은 그곳에 대하여

 

예전에 일본의 작은 소도시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동안 일본 도시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책, 사진을 통해 봤지만, 내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우리 동네에서도 볼 수 있는 한적함이었다. 고요하기도 하고 간간히 사람들의 시선에는 여행자인 나를 향한 낯섦이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서 별거 아는 일상 속 모습을 찍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일본 소도시를 찾아간 나에게 몇몇 친구들은 이렇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관광하러 가는 곳에 안가고 왜 그리로 가느냐."고 말이다. 그때 난 "그냥, 좋잖아"라는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들은 눈치였지만 이내 내가 선물하는 작은 기념품에 시선을 돌리는 친구를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소도시에서 끝내 발견한 것은 익숙함이었지만, 처음부터 익숙함이 눈에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 찾은 도시의 첫인상은 언제나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달랐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면 그 도시에서의 삶도 떠나온 곳에서의 삶과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론 반가웠고, 다른 한편으론 아쉬웠다." 난 장기 여행이 아니어서 이와 같지 않지만, 도시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그 도시만의 독특한 점을 발견하는 것도 다 좋았다. 서문에 적혀있던 저 문장을 보고서 난 퐅랜만의 독특한 일상 그리고 특별함을 기대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다니 그 도시의 익숙함이 보였다.


이유가 특별히 없다면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아닐까. 어쩌면 새로움과 낯섦을 찾아 헤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적일지 모른다.


비내리는 곳, 파월 북스가 있는 곳, 세인트 존스 다리에서 볼 수 있는 불꽃놀이,타투와 문신한 사람들이 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곳, 마리화나 연기 속을 조깅하는 사람들. 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 포틀랜드에는 있다. 이우일씨의 표현처럼 "이곳 사람들이 유별나다". 처음에 낯선 모습들이 보인다. 그 낯섦이 지금의 포틀랜드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고 이우일씨의 생각을 확인하다 보면, 그곳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란 사실이 선명히 보인다. 이우일씨만의 생각은 화려한 수식이나 묘사가 없는 대신 단백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가본적없는) 포틀랜드와 닮아 있어 보인다. 어느 새 자신의 또다른 집이 된 포틀랜드에 대한 만화가 이우일의 글에는 포틀랜드 일상 속에 그가 얻은 소소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중간중간에 있는 삽화는 피식 웃게 하기도 하고, 그 곳의 풍경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나는 작고 아담한 이 도시가 좋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크기가 안정감을 준다. 퐅랜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도시이고, 그래서 살아보니 정이 간다. 나와 도시를 조화시킬 수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와 우연히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자신의 삶의 크기와 속도와 들어맞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축복이다. 이우일씨에게 포틀랜드는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물론 행운과 축복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동이 옅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퐅랜의 특별함이 익숙함으로 바뀌어도 싫지 않다. 아마도 그 마지막에 대해 이우일씨는 명쾌한 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
끝이 있으니 우린 즐기며 살 수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나는 여기서 내가 일본 소도시에서 발견했던 일상을 발견한 이유를 찾았다. "그냥."이라는 한마디가 아닌 조금 더 구체적인 이유를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가서 발견한 일상이 싫지 않고 그냥 좋았다는 말 대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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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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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에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이 질문에서 시작된 세상 어디에도 없는(Nowhere)에 대한 여정이 펼쳐진다. 에레혼(Erehwon)이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 《에레혼》에 펼쳐져 있다.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세우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명성을 떨쳤던,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어느 식민지 (추론하자면, 뉴질랜드)의 양치기 소년의 모험담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든 생각은 에레혼이라는 어떤 지역 혹은 나라에 대한 참여 관찰지(민족지) 같았다. 문화인류학이 학문적 분과로 태동했을 무렵과 맞물려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마치 한 사람이 에레혼에 대해 관찰한 것과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느낌이 들었다.

모험 소설, 《에레혼》

영국은 판타지 소설과 모험 소설이 유명하다. 어느 서점에 가도 판타지 코너와 모험 소설 코너에 한가득 책이 꽂혀 있다. 판타지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 나니아 연대기의 C. S 루이스, 해리 포터의 조앤. K. 롤링이 있고, 모험 소설에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나라는 다르지만 걸리버 여행기의 조너선 스위프트 등이 있다. 《에레혼》은 제목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어디에도 없는 (nowhere) 판타지와 같은 나라에 대한 모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어느 식민지에 있는 한 남자는 양떼가 풀을 먹는 초원 너머의 산맥을 바라본다. 그 산맥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궁금해하면 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을 가보는 것, 그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는 것이 그에겐 이루고 싶은 목표가 된다. 아무도 가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는 산맥 너머를 향해 걸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승리이건만. 아직은 이런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양치기 소년은 자신이 볼 수 있는 시선 너머의 그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양치기로써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달리 자신을 벅차게 만드는 그곳에 대한 동경 끝에 그는 모험을 시작한다.

 

사실 이토록 대단한 목표를 눈앞에 두고도 목숨이 아까워 고개를 돌린다면 대체 목숨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에레혼에 가는 길은 마치 유토피아에게 가는 듯하다. "협곡의 한쪽 면이 어스름한 저녁 그림자에 푸른빛을 띤 사이사이로 숲과 절벽, 언덕, 산 정상이 어렴풋이 보였고, 맞은편에서는 아직 황혼의 금빛이 반짝였다. 넓고 화려한 강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고, 강의 작은 섬들 근처에 몰려 있는 아름다운 물새들은 워낙 유순해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다."라는 수려한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풍광 끝에 에레혼이 있다. 에레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자연에 대한 묘사는 특히 아름답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거기에 가 있는 기분이 든다."라고 했던 주인공의 말이 책을 읽고 있는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싶었다. 에레혼에 들어가기 직전의 묘사가 극적이라,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에레혼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전해진다. 마치 어디에도 없는 곳이지만 어딘가에 꼭 있는 곳처럼 말이다.

풍자 소설, 《에레혼》

버틀러는 에레혼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통해, 제국주의가 팽배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비판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레혼》을 가리켜 풍자소설이라고 한다.  좋은 소설은 시대를 넘나드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단지 한 시대만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몇 세기가 지나서도 유효한 소설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한다. 《에레혼》이 명작이자 고전으로 평가 받는 건, 빅토리아 시대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유효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걷는 듯한 풍경 끝에 닿은 에레혼에 대한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 수록 지금 이시대를 말하는 것 같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것이 미덕이며, 병들게 되면 감옥에 갇히는 곳. 실용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무능함을 가르치는 대학과 인간의 다양한 감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곳. 이상한 곳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 우리 사회가 가진 병폐와 닮아 있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말이다.

 

에레혼 사람들이 도덕적 결함을 성격이나 환경상의 불운 탓으로 돌리면서도 영국에서라면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되었을 불운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상했다.

가장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인 사람들이 모인 유토피아인 에레혼의 모습은 오히려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거나,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 사회 그 자체였다. 버틀러는 빅토리아 시대에 기술 발전과 산업화로 인해 사람들 간의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상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의 내적 심리를 있는 에레혼 사람들의 행동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상실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방문자이자, 에레혼 사람들에게 주시를 받고 있는 주인공은 조금씩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지만, 이내 그의 논리는 불온한 생각으로 치부된다. 그 역시 자신의 생각을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는 에레혼의 논리처럼 말한다. 그의 내적 발화와 실제로 그가 실제로 (에레혼 사람들에게) 듣는 발화 사이의 충돌은 우리가 사회의 모순을 목도했을 때 발생하는 내적 대화와 닮아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존중할 만한 대상은 오직 행운뿐이라는 말이 널리 인정될 때까지 이처럼 조야하고 반사회적인 사례가 가끔씩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나 운이 좋아야 이웃들보다 더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는 대략 시장의 흥정에 따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야만적인 힘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쨌든지 간에 어느 누구도 매우 적절한 범위 이상으로 불운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논리적이라 할 것입니다."라는 부분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 불편함이 만연한 사회가 단지 에레혼 속 세상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른 결의 불편함을 느낀다. 다른 두 개의 불편함의 마주침이 이 책속 주인공과 에레혼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마치, 주인공이 에레혼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생각했던, "매 순간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까지 내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 점점 더 섬뜩한 의구심이 찾아왔다."는 구절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에레혼에 기계는 전부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기계가 없는 곳에서 기계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라졌다고 믿는 인간성 상실을 부각한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들이 기계 자체가 불러올 인간의 삶의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은 또 다른 점에서 관심이 갔다. 에레혼 사람들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당연하게 느끼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인간다움을 상실한 인간들이 자신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어쩌면 버틀러는 인간성 상실과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별개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은 인간다움의 가치가 여러가지일 수 있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주려했던 것은 아닐까. 비이성의 대학에서 기계의 책까지 내용은 기계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과 이성을 상실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에레혼에서 교정의 대상이자, 무시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 인간과 기계의 욕망이 충돌할 일도 없을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기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에레혼의 모습은 어쩌면 AI시대를 당면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비슷해보인다. "기계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듯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계다. 인간은 현재의 다양한 고통을 겪거나 아니면 점차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에 의해 스스로 대체되는 것을 보는 두 가지 길 가운데 선택해야 하며, 그러다가 들짐승이 인간과 비교가 되지 않듯 인간도 기계와 비교가 되지 않을 때가 온다." 이는 기계의 책에 대한 내용은 기계가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버틀러의 통찰을 확인할 수 있다. 에레혼 사람들이 왜 기계에 대해 공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까. "기계의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 때문에 인간의 삶이 노예화되고 비참해질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들은 기계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 뒤에 놓인 기본 법칙 자체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아마 버틀러가 차용한 다윈의 이론(종의 기원)이 그 뒤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에레혼》

나에게 《에레혼》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 에레혼. 하지만 그곳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할 수 있는 기계 문명이 움트지 못한 곳이었다. 이 모순된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기계를 원천적으로 봉쇄된 에레혼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 자체였기에. 어쩌면 인간성이 상실은 기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새로운 가정을 던졌다. 물론, 이 가정에 대한 결과값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기계 문명이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라는 명제는 깨졌다. 난 인간성 상실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기계문명이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된다는 단편적인 생각에서 인간다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에레혼》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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