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2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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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처음에 <나의 투쟁 2>를 읽으며 기대했던 내용은 위 내용(실제 내용)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해 꽤 긴 서사로 풀어낸 <나의 투쟁1>의 연장선 상의 이야기가 될 줄 알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풀어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는 내 기대였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나의 투쟁2>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연애. 결혼. 육아. 
한 사람의 연인이 되고, 한 사람의 동반자가 되고, 세 아이의 부모가 되어 사는 일상 중에  좀처럼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고백이 <나의 투쟁 2>의 줄거리다. 이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그 한 사람의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 속마음을 좀처럼 다룬 문학 작품이 많이 접하지 못했기에, <나의 투쟁 2>는 나에게 특별한 소설이 되었다. 

그의 일상 속에 느끼는 생각은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간중간에 툭툭 나온다. 누구나 한 번쯤 아니, 매일매일 해본 것이다. 길을 걷다가,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잠을 자기 직전에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누군가와 마주치면서,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우리는 계속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글로 서술해두지 않을 뿐, 생각은 끊임없이 한다. 오베도 마찮가지다 자신의 곁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2명의 아이에 대한 생각, 태어나지 않은 태아와 함께 하는 아내 린다에 대한 생각, 친구와의 대화, 길가에 걸어가다 만나는 사람들을 보며 드는 생각을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의 말하기는 그 순간뿐만 아니라, 과거에 아내를 만났을 때를 회상할 때도 마치 회상이 아니라 그 순간에 그가 있는 듯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같은 조건으로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접하는 외부적 환경 때문에 저마다 다른 인성을 형성한다고 하는 말은 진실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진실은 이와 정반대다. 인간은 저마다 아른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외부적 환경에 따라 서로 비슷비슷하게 또는 평등하게 변해간다.
34쪽

나는 성인이 된 후 타인과의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과 느낌으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때가 종종 있는데, 그때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거나 나를 거부하게 되면 나는 순식간에 내면의 폭풍을 경험하게 되고 고통스러워한다. 
70쪽

내가 현실을 혐오하는 이유는 현재의 삶이 무의미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115쪽

내가 대도시에 사는 이유는 전적으로 혼자 있고 싶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특정 대다수의 낯선 얼굴들 속에선 마음의 문을 닫고 거리를 두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낯선 얼굴들의 파도 속에서 혼자 헤엄칠 수 있다는 것은 대도시의 장점이기도 하다. 온갖 형태의 사람이 모여드는 지하철역. 기차와 거리와 카페 그리고 대형 쇼핑센터
거리감, 거리감. 나는 이 거리감이 아무리 커도 만족할 수가 없을 정도다.
142쪽

책을 읽지 않으면 읽지 않을수록, 넘기는 책장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독서를 향한 마음의 장벽이 높아진다. 
154쪽

그러면서 죽음은 삶에 너무나 가까이  닿아 있기에 우리가 소유한 것들과 매 순간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삶에선 이러한 의미의 죽음이 배제되어 있어 찾아보기 힘들다.
158쪽

한 인간이 그간 익숙해 있던 세상이 아닌 또 다른 낯선 세상을 만날 때에는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모든 익숙함을 버려야 그 세상으로 잦아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202쪽

그의 삶은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생각은 묘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아마도, 그의 생각들의 끝에 다다른 결론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만, 동시에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심리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때로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싶고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욕구는 오베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사랑하는 연인이 함께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에 따르면 "함께"있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멀어지고 싶어 하는 그의 솔직한 고백은 조금 독특하게 느껴진다. 자신과 닮았지만 또 다른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피곤해하고, 미친 듯이 사랑했던 연인이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멀어지게 되는 관계를 볼 때면, 관계가 살아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특히 오베와 린다의 이야기를 보며, 인간관계의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순간들을 목격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표현은 그가 이전에 표현했던 생각과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모습을 발견했다. 시니컬하고 차갑게 말하기 바빴던 오베가 린다를 생각하며"오, 나는 얼마나 그려를 사랑하는가. 그런데 왜 이리도 마음이 아픈 거지?"라는 말을 할 때 이질감을 느끼며 동시에 인간미가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내게 어떤 사람인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편지에 적어놓은 글 그대로. 그녀의 입술과 눈동자와 걷는 모습 그리고 그녀가 사용한 단어들. 나는 비록 그녀를 잘 알지 못하나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 그녀와 세상 끝까지 함께 있고 싶다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녀뿐이라는 것. _353쪽

그의 마음은 내가 약 1000쪽 가까이 읽었던 그의 삶의 이야기 중 가장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순간이었다. 홀로 사랑한다고, 자신만 좋아한다고 생각한 남자의 치열한 사랑의 고백은 그 마음이 커질수록 그 감정의 폭이 격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내 세상에 대한 불쾌함으로 가득했던 남자가 달라지는 과정이 말미에 쏟아져 나오는 것도 잠깐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완벽한 행복감을 맛" 보았다는 고백 이후에 린다와 그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틀어지지만 끊어지지 않은 관계는 다시 책 앞부분의 모습과 겹쳐지며 소설이 끝난다. 긴 호흡의 서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이야기의 마무리는 아쉬운 듯 끝이 나고 또 <나의 투쟁 3>을 기다리게 만들며 이야기는 끝난다. 

 

그의 고백의 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고 3권은 또 다른 서사의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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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로 읽는 세상
김일선 지음 / 김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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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만한 단위 체계를 만들어보려는 과정은 
사실 신뢰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고, 
이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달성된다.

 

 

 

 

쉽게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위에 대한 모든 것! <단위로 읽는 세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위'가 가진 의미를 쉽게 풀어 놓은 책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얼마나 많은 단위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지 좀처럼 인지하기 쉽지 않다. 지금 블로그에 글을 쓰기 위해 올린 사진의 용량을 나타내는 '바이트'나 몇 시인지 확인하는 '시' '분' '초' 그리고 공간의 너비를 나타내는 '평' '제곱미터', 소리의 음역대를 나타내는 '헤르츠' 등등 이외에도 많은 단위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용하고 있는 단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단위로 정의 내린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대로 생활한다. 사용하고 있는 단위의 정당성에 대해 물어보지 않은 채 말이다. 정확하게 단위에 대해 질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단위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연함은 편리함이라는 효용이 있기에 사용한다는 암묵적인 인식이 내 안에 내재화되어 있었다.

<단위로 읽는 세상> 속 저자는 나의 생각에 절반 정도는 동의하고, 절반 정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과학이 가지는 '합리성'에 기초한 단위의 측면도 있지만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만들어져 사용하고 있는 단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인 타당한 근거에 의해서 만들어진 단위가 있는 반면, 인간의 의도가 개입된 단위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시간'이다.

지구의 자전에 기반을 둔 개념인 하루와, 공전을 기준으로 하는 1년은 천문학적인 기준이므로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한 시간과 한 달은 하루와 1년을 어떤 식으로 '자를' 것인지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달력이나 시간을 둘러싼 접근은 나누기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보다는 있는 것을 적절하게 나누기가 훨씬 어려운 법이고, 시간이 바로 그랬다.

시간은 과학적 근거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이를 나누는 것에는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고 또 1시간을 60분으로 나누고 1분을 60초로 나누는 것은 시간을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을 살아가는 속도"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그 의미는 크다. 단위의 탄생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소통'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소통이 순수한 편리함을 기반으로 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중요하다. 
<단위로 읽는 세상>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난 개념은 부르디외의 이론들이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담긴 함축 의미를 만들어 내는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무의식적인 수용에 대해 경계했던 그의 이론과 '단위'에 대한 접근이 동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위는 같은 숫자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개념이다. 가령, 방사능에 대한 단위는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X-ray를 찍을 때 받는 방사능의 수치와 원자폭탄이나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났을 때 노출된 방사능의 수치를 다루는 단위가 다르다. 이처럼 어떤 단위에 대해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위험성이 더 부각되게 마련이다. 물리량, 나아가 과학은 본질적으로 무색무취하다. 하지만 방사능 관련 단위는 미지의 공포감을 발산한다." 단위에 대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단위가 비합리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떤 단위에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 것은 아니다. 많은 단위들은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인간이지만, 이 기술을 인간이 완벽하게 통제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계가 아닌, 기술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점이 <단위로 읽는 세상>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단위의 등장과 이 단위를 활용할 때 인간은 기존에 유지해온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 <단위로 읽는 세상> 속에 등장한 많은 사례들이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말한다. 즉 우리는 기술을 활용하지만 동시에 기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소리의 높이로 길이와 부피의 기준을 정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신체 부위의 크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체계적이고, 국가라는 조직의 틀이 잡혀야만 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발한 방법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어떤 방식으로 제도를 운용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소리'라는 주관적인 요소가 단위와 결합하는 순간 체계성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율, 음역대 역시 임의적으로 만든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리를 측정하고 구체화할 때 우리는 이에 영향을 받게 된다. 소리에 대한 측정은 악보의 탄생, 절대 음감에 대한 생각, 녹음 등 다양한 음악적 활동과 음악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우리는 오선지와 서양식 8음계에 익숙하다. 이렇게 측정한 음악적 단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게 음악은 선율보다 박자가 더 중요할 수 있고, 어떤 민족에게는 화음을 어떻게 구현하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음악을 도식화하고, 측정할 때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면 음악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비트나 화성을 측정하는 단위, 기술 역시 존재하며 이를 토대로 우열을 가르지는 않지만, 음악에 있어서 대중음악과 예술로서 음악에 대해 선험적 구분을 하고 있다. <단위로 읽는 세상>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어떤 단위를 선점하고 하나의 통용 언어화되었을 때 어떻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책 곳곳에서 하고 있다. 

<단위로 읽는 세상>은 기술을 이용하는 측면의 시각에서 기술(

단위)의 시각에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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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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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확실히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을 대단히 풍성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
여러 세기에 걸쳐 선택되어왔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 세계에서 석유보다 더 부족한 게 되었다. 우리가 최소한 아주 약간만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말 '공감의 시대'일까?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우리 사회, 인간 사이의 관계에 공감이 넘친다는 의미라면, 동의하기 망설여진다.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공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뜻이라면, 우리의 시대정신에 '공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동의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가리켜 경쟁 사회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소비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생물학자는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단어들 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경쟁은 미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치열하게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 요즘 공감은 성립할 수 없는 것 혹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공감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재화'처럼 여겨진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재화를 생산한다 해도, 내게 다시 돌아올지 불확실한 재화. 그렇기에 공감과 이해, 배려가 점점 줄어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게까지 보인다. 주말드라마의 어떤 캐릭터는 "역지사지"를 우리가 아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풀었다. "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 안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내 주변을 향한 배려가 담긴 공감이 부재했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이자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공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한다.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 공감

 

"우리는 공감을 억누르거나 정신적으로 차단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기에 실패할 수는 있지만,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의 질문된 적 없지만 아주 기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왜 자연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장단을 맞추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면 괴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기쁨을 느끼도록 인간의 뇌를 디자인했을까? "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에게 '공감'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다. 멘델의 유전법칙과 같이 기존 자연과학적 법칙의 핵심 테제였던 "생존경쟁"이 아닌 "공감" "공공성" "이타성"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동물행동학과 진화론의 관점에서 타당성 있게 분석한다. 영장류를 비롯한 포유류와 조류 등의 동물들을 분석하며, 공감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화된 본능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용과 이익을 합산해서 도울지 말지, 공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걸 우린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오며 몸으로 체화했다.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 행동의 결과를 반영하면서 자연 선택은 영장류가 적절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감 능력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망설인다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데이터 대신 근시안적 데이터만을 고려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판단과 먼 비합리적인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우기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일지 모른다.

"자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특성들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낙관적인 사회적 성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공감이 줄어들고 있고 이는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한 일이라는 가정. 공감은 회복해야 하는 우리의 소중한 옛 가치라는 이야기. 그 전제에는 '공감'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사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의심은커녕, 심지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경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본성 중의 하나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만 있지 않고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감하는 인간, 이타적인 인간의 모습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홀로 살지도,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살지 않았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공동체 안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사회적 삶에 맞게 만들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지난 역사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에게 가하는 가장 큰 형벌이 "독방 감금"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사회와의 단절을 가하는 것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큰 지 반추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모든 사회는 이기적 동기와 사회적 동기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 그 사회의 경제가 바로 그 사회에 확실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경쟁만으로 우리 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도 만들 수도 없다. "자유시장 체제"의 선두에 서있는 미국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 더 나은' 사회일까? 초현대 사회의 미국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빠르게 발전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경쟁이 낳은 수많은 문제가 미국 사회를 병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의 본성 공감에 대한 강조가 균형을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더 나은' 공감은 무엇일까?


높은 수준의 공감은 자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자아의식의 여부는 거울 실험으로 알 수 있다.

 

프란츠 드 발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감에 있어서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에게 동화되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만약 이때 개인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타인 지향적인 공감"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기쁨을 얻지만 이때 얻는 기쁨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문제는 만약 이렇게 이루어지는 공감은 타인에 의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타인에 의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에 휩싸일 여지도 크다. "자아의식은 닻과 같이 자기 자신의 배를 감정의 파도 속에서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불만, 불안, 혼돈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 타인을 도울 때 일어나는 공감, 타인을 돕지 않으면 나까지 불쾌해지기에 하는 공감은 자신에게 이익처럼 보이지만 해가 되는 공감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 공감은 개개인의 자아의식이 존재 속에서 각자의 자유와 자율성 및 공감에 대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내려진 공감이 진화되어 온 공감이 더 발전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자아의 결정에 따라 공감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이 시대에 공감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감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지금의 상황에 돌아온다. 프란스 드 발은 "진화는 공감과 동정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있든 없든 작용되는 독립형 메커니즘"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즉, 공감은 우리가 익숙한 경제학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사회적인 다리와 이기적인 다리라는 두 개의 다리"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인 다리를 쓰려고 하니 나만 쓰는 것 같아 아깝고 억울한 것 같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올까.  두 개의 다리 중에 하나의 다리로 걷기를 희망한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 걸음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에 많이 힘들기에 다른 선택을 하길 진화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이용해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저자가 공감을 말하지만, 무조건적인 공감을 말하고 있지 않다. "공감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것이라는 데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을 본다. 그렇다면 공감이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발달될 확고한 특성이며, 그래서 사회가 공감에 의존하고 공감을 포용해서 키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공감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공감에는 우리가 반응해야 할 것을 걸러주는 필터와 꺼버리는 스위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감정적 반응이 그렇듯 공감에도 전형적으로 공감을 촉발하거나 우리가 공감의 촉발을 허락하는 상황, 즉 '정문'이 있다."

하지만 공감의 보편성의 전제는 자기 정체성, 자아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즉, 나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정문 지킴이는 바로 '주체성'이다. 자신만의 rational이 확고하게 자리한 고유한 정체성이 중요하다. 


우리의 '공감'은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 있을까. 하강의 기점에 서 있는 것일까.

 

공감은 오랜 시간 진화 과정을 거쳐오며 인간의 본성의 영역에 장착된 메커니즘이 되었다. 물론 지금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 불필요한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 개개인의 자아의식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공감은 불필요한, 무용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인류가 진화한 시간으로 볼 때, 지금의 고민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공감'이 나아가는 발걸음을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 나는 공감이 어디로 향하길 바라고 있을까. <공감의 시대>를 읽으며 공감한 난, 공감이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있길 바라는 공감하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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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 - 대한민국 최고의 힙합 아티스트 12인이 말하는 내 힙합의 모든 것
김봉현 지음 / 김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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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죠.
늘 음악 듣고, 생각하고,
작업하고, 음악도 틀러 가고.
힙합에 대해 한 가지의 정의를 만들어서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 가짜라고 말하는 행위는
저에겐 더 이상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의미 없는 세상이기도 하고요.

 

 

빈지노, 스윙스, 산이, 타이거 JK...
내가 아는 아티스트는 이 4명뿐이었다.

도끼, 더콰이엇, 팔로알토, 제리케이, 허클베리피, 딥플로우, JJK, MC메타...
내가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될 아티스트가 8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설레하며 읽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힙합 노래 (심지어 그 노래들도 힙합 단독 곡인 경우는 거의 없다.) 정도만 알고 있으며 힙합 장르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더 솔직하게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을 읽으며 '힙합'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편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글을 읽는 건 좋아하면서, 그 어떤 음악보다 가장 많은 텍스트를 들려주는 힙합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아니, 의식적으로 피했던 음악 장르였다. 내가 자라온 환경이 힙합 음악을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고 힙합 가사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음악은 익숙함의 결과다. 어떤 음악을 들었고, 어떤 음악적 환경에 있었는지에 음악에 대한 생각은 결정된다. 난 '선율'이 주를 이룬 음악을 음악이라고 여겨지던 환경에 자라온 사람이었다. '비트'가 주를 이룬 음악은 낯설었고 그 낯섦은 거부감으로 바뀌었다. 우연히 힙합 노래를 들을 때면 낯선 말과 욕설이 불편했고 때로는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따금씩 들었던 힙합 노래는 발라드 중간중간에 빠르게 쏟아내는 랩이나 빠른 비트의 노래 혹은 아이돌 음악의 중간에 등장하는 랩이 전부였다. 길게 서술했지만, 짧게 줄으면 "난 힙합을 전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을 읽으며, 12명의 아티스트의 노래를 1곡 내지는 2곡을 들었다. 음악을 들은 이유는 간단했다. 비트를 텍스트로 옮겨진 것을 보고 비트를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어떤 음악이기에, 어떤 가사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장르를 좋아하고, 이 가수의 음악에 공감하는 것일까. 순수하게 궁금해서 들었다.

도끼 <치키차카초코초>
더 콰이엇 <Came from the Bottom>
빈지노 <January> <Aqua man>
팔로알토 <Forrest Gump> <Seoul>
제리케이 <축지법>
스윙스 <황정민>
허클베리피 <Everest>
산이 <아는 사람 얘기>
딥플로우 <양화>
제이제이케이 <결>
타이커 JK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MC 메타 <무까끼하이>

다른 듯 닮은 듯 생경한 노래를 들으며 읽다 보니 "힙합을 아주 조금 알게 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아주 조금 알게 된 사람 말이다.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에 나온 12명의 아티스트는 '아티스트'라는 자신의 수식어에 어울리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술가로써, 힙합이라는 문화에서 음악을 생산하는 예술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것이 좋은 음악이며, 어떤 것이 좋지 않은 음악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힙합을 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가진 무게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힙합이라는 장르가 주는 자유로움이라는 이미지 속에 책임을 감추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마음속의 마음의 별과 저 하늘에 떠 있는 이상이라는 별 사이의 조화로움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아티스트'들이었다.

본인이 내키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할까요.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서 본인이 내키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 가짜라고 생각해요.
……
저희도 많은 경험을 해왔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살고 있거든요. 더 좋은 뮤지션이 되기 위해,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더 애를 쓰죠.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하나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힙합은 '무책임한' 음악이었다. 자유로움을 표현하며,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한없이 인정되는 음악 장르, 그렇기에 책임감이 없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했다. 욕을 하고 디스를 하고, 순간의 감정이 주는 것을 토로하는 음악. 사회에 예술이라는 형태로 무언가를 내놓으면서 책임감이 크지 않은 음악. 하지만 12명의 아티스트는 인터뷰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힙합을 하며 자유로움은 방종이 아닌 자유였다. 책임이 동반된 자유. 팔로알토의 인터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만드는 음악을 사람들이 듣고 영향을 받잖아요. 이런 부분을 다들 어느 정도는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의 생각에는 방종을 노래하는 힙합이라는 편견과 달리, 책임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장르였다. 그렇다면, 힙합이 예술로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을 다 읽고 나서 난 힙합 팬이 되지는 않았다. 힙합 음악을 더 듣게 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내 플레이어 리스트의 상단에는 김동률, Ed Sheeran, 아이유, Coldplay, 태연, Sweet Sorrow, Ellie Goulding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힙합 음악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즉, 나도 모르게 배제하며 거부했던 힙합을 그 '음악'장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생에서 100퍼센트 행복한 일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걔도 카페를 하면서 어려운 부분도 있고 스트레스도 받겠죠. 하지만 꿈을 이루며 사는 삶이라고 해서 100퍼센트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꿈을 이루는 것과 행복한 것은 어느 정도 별개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고 할까. 꿈을 이루든 그렇지 않든 둘 다 마냥 행복할 수는 없겠죠.

앨범에 넣을 가사를 공들여 쓰는 일은 마치 조각상을 깎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하면서 정교한 완성품을 만들잖아요.

존중, 존경, 동경 이 세 개가 다 담겨 있는 거죠. 제가 생각해보니까 리스팩트를 한국말로 온전히 담아낼 단어가 없더라고요. 리스펙트의 의미는 ‘난 널 존중해‘로는 부족해요. 또 ‘존경해‘는 너무 센 말일 수 있죠. 존중, 존경, 동경 이 세 개가 적절히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래퍼들은 자신의 삶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저의 삶에 저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삶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이야기에 담게 돼요. 그러다 보니 다른 래퍼들이 나의 삶과 나의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는 다른 누구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이죠. 늘 음악 듣고, 생각하고, 작업하고, 음악도 틀러 가고. 힙합에 대해 한 가지의 정의를 만들어서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 가짜라고 말하는 행위는 저에겐 더 이상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의미 없는 세상이기도 하고요.

어떨 때는 서울이 지긋지긋하고 너무 각박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저는 서울에 살면서 팔로알토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집도 사고 행복하고 좋은 일도 많았죠. 또 공연하러 가거나 클럽에 음악 틀러 가면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일을 같이 하면서 진실된 감정을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어떨 때는 그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이 모든 것이 거품이고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마치 서울이란 도시가 나와 ‘밀당‘하는 듯한, 그런 감정을 표현한 가사였어요.

무언가에 대해 길게 얘기하면 ‘설명충‘이라고 하고, 진지하면 ‘진지충‘이라고 하고. 이런 게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정서가 됐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다 바보가 되고 있는 거예요. 래퍼들도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든 한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야 하고, 자기가 무얼 하든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면서 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살인도 당연히 불법인 거고요. 우리 모드가 ‘human being‘이니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힙합도 당연히 마찬가지죠. 생각하는 것을 차단하고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어버리면서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며 쾌락만을 좇으면 안 된다고 봐요. 나의 내 가족, 내 사람,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동체가 행복하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가사를 쓸 때 그 공간에 같이 있는 사람이 같이 써도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주체가 자기가 되어야겠지만, 남이 써준 가사로 랩을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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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점기행 (보급판)
김언호 글.사진 / 한길사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길을 가면서, 여행하면서
책을 생각하고 책을 기획한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란
언제나 즐거운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서점에 가는 건 내 여행의 필수코스다. 만약에 서점을 가지 못하면, 공항 면세점 서점이라도 기웃거리며 그 나라의 그 도시의 책이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곤 한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우리나라 서점은 익숙하고 푸근하다.
더디게라도 읽을 수 있는 영어권 서점은 낯설기보다 반갑다.
읽을 수 없는 언어로 가득찬,
가령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책이 주로 있는 서점은 신비롭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어떤 이유로든, 서점은 나에게 반가운 공간이고 수많은 책속에 둘러 싸여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된다.

그런데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세계 서점 기행> 저자 김언호다. 세계 곳곳의 서점을 다니며 서점의 이야기, 책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기록한 책을 냈으니 더 할말이 있을까? 책을 읽다보면, 그가 서점을, 책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소중히 여기는 마음 속에 깃든 책에 대한 철학까지 옅볼 수 있다. <세계 서점 기행> 책에서 그가 소개한 22곳의 서점 가운데 난 2곳을 다녀왔다. 책에서 다시 2곳의 서점을 만나니, 올 여름 여행 중간에 나에게 쉼을 주었던 '돈트 북스'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떠올랐다.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돈트 북스


"건물이 아름답다고 명문서점은 아닐 것이다. 비치하고 있는 책과 그 책을 골라내는 서점인들의 철학과 헌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런던 시민들의 안목과 성원이 돈트 북스를 명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

"수준 있는 책을 잘 비치해놓는 것이 우리 일입니다. 독자들이 편안하게 책을 살펴볼 수 있게 하려 합니다."
 

여행자들의 천국, 여행자들을 위한 서점이 바로 돈트 북스다. 영국 여행을 하고 있다면 꼭, 들려보길 권한다. 한참 영국 여행을 하고 있던 나에게 돈트 북스는 좋은 여행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여행 초반에 이 서점에 가서, 런던에 대한 책,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콘월에 대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별로 정리된 책의 세계"를 비치한 곳이 돈트 북스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유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채광과 함께한 돈트 북스는 "자연의 빛을 몸과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휴고 보스와 샤넬의 광고 모델인 르페르는 이 사진에서 명품 핸드백 대신 녹색과 흰색의 린넨 천으로 만든 돈트 북스의 쇼핑 가방을 들고 있었다. 친환경 천가방이 패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돈트 북스는 일약 세계인에게 알려졌다. 세계의 서점으로 그 명성이 확고해졌다. 돈트 북스는 30파운드 이상의 책을 사면 작은 가방을, 70 파운드 이상이면 큰 가방을 선물한다."

이 사실을 알고 가며 마음 속으로 돈트 북스 굿즈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30파운드어치 책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런던에 대해 수채화 풍경을 그리듯 그린 책과 영국 전역에 대한 여행 소식을 담은 책의 가격을 합치니 70파운드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30파운드 쯤은 금방 넘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 2권의 책을 가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가지고픈 마음보단 가벼운 어깨의 소중함이 더 크단 걸 알았다.

또 런던에 온다면, 제일 먼저 이곳에 가야지. 이곳에서 내가 갈 여행 장소에 대한 책을 사고, 내 여행 내내 돈트 북스 쇼핑백을 들고 다녀야지.

언젠가 반드시 이뤄지리리라 굳게 믿으며 아쉬움 한자락을 남기며 난 서점을 나왔다. 내가 이 바램을 꼭 이를 수 있도록 "품격있는 서점"으로서, "서점은 오직 '좋은 책'으로 존재하고 일어선다"는 가치를 잊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주길 바래본다.



신성한 공공기구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젊은이들의 이 짧은 자서전들은 자신들의 고백록 같은 것이다. 쌓여 있는 자서전에는 삶과 죽음, 꿈과 절망을 담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청춘의 고뇌를 보여주는 일종의 사회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입구 계단에는 '인류를 위해 살아라'라는 구절이 보인다. 바닥엔 '배고픈 작가들을 먹게하라'고 새겨놓았거 2층으로 오른느 머리 쪽에는 '낯선 사람을 냉대하지 마라. 그들은 천사일지 모르니'라는 성서 한 구절을 새겨놓았다."


신성한 공공기구를 기대하고 방문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이전에 숱한 역사 속에서 변화했던 파리와 같이 변화했듯이 살벌한 유럽의 분위기와 닿아 있었다. 서점 입구를 지키고 선 보안 요원을 보고, 파리 어디를 들어갈 때든 만났음에도 이 곳에서 만났을 때 더 씁쓸하게 느껴진건 이 서점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서점기행>의 내용처럼 서점을 지금도 일구고 있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서점이기보다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오랜 자리를 지켜온 책들이 자신의 몸에 쌓아 놓은 먼지를 눈으로만 가늠하기도 비좁은 이 공간은 마치 보들리안 도서관 투어처럼 눈으로만 이 장소를 담게 했다. 적어도 1층은 그랬다.


하지만 2층은 달랐다. 피아노가 놓인 방의 나무로 엮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어느 남자가 들어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끄러미 보는 내 눈치를 본건지 건반 몇 개를 누르는 것에서 꽤나 듣기 좋은 멜로디를 갖춘 선율을 마치고 미소를 짓고서 서점을 내려갔다. 그 순간의 경험은 영화에서, <세계서점기행>에서 내가 상상했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가 실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어에 대한 콧대가 가장 높은 파리에서 만난 영어권 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이 곳은 낯선 프랑스어에서 천지인 파리에서 반가운 서점이었다.
이곳은 수많은 예술가를 머무르게 했듯이, 수많은 여행자들을 머무르게 하는 서점이다.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납득할 수 있으나, 피아노 연주를 듣던 그 순간이 내 머리에만 있으니. 참 아쉽다.)


독자들과 함께
왜 책인가
책 읽기란 무엇인가
왜 서점인가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싶다.

진지한 고민 하나하나가 담긴 22편의 여행기를 읽으며 책과 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에게 서점은 편안한 쉼이고 세상과 만나는 교차로이고 수많은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샘이다. 시간이 지나 책과 서점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책과 서점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으니까. 그 변화가 사라짐으로 나아가는 건 두려운 일이다. 나중에 책과 서점이 '옛날의 향수'에 젖어든 씁쓸함이 아닌 여전히  '현재와 호흡하는 담론의 장'으로 존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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