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명저기행 - 책으로 읽는 조선의 지성과 교양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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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지만 모르는 세계,
명저 (名著) 속으로!

 

 

"독서라는 행위도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일이다. 낯선 길일수록 귀한 친구를 만나는 법이다."

 

名著. '이름난 저서'일 수밖에 없는 '훌륭한 저술'이라는 뜻이다. 책 이름 앞에 '명저'란 수식어가 붙은 책을 우린 많이 알고 있다.

 

《목민심서》 《경국대전》 《난중일기》 《연려실기술》 《발해고》 《동사강목》 《열하일기》 《하멜 표류기》 《표해록》 《성호사설》 《택리지》 《북학의》 《동의보감》 《침구경험방》 《동의수세보원》...

 

우리나라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위 책들 이름 가운데 적어도 10개는 눈과 귀에 익을 것이고, 5개 정도는 저자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위 책들 가운데 많은 책들을 들어보았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는 알고 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단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난중일기》는 몇 차례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반납을 했고, 《열하일기》는 그 안에 <호질>과 <허생전> 정도만 국어 시간에 배웠고, 읽었다.  위 명저 가운데 길이가 가장 짧은 《발해고》는 고등학교 때 읽었지만 좀처럼 그 내용이 자세히 생각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조선시대 명저의 딜레마가 있다. 누구나 이름을 알고 있지만, 정작 열혈 애독자는 정말 소수뿐인 책이라는 것이 조선 명저의 그림자다. 이름과 저자는 잘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을 통해 책의 가치를 확인한 사람은 소수라는 점. 다시 말해, 명성은 높지만 그 명성에 비해 현대 독자들의 사랑이 적은 아이러니가 《조선 명저 기행》을 완성했다.

 

"필자는 이런 책들이 현대인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우리 역사나 문화 또는 역사 인물에 대한 무관심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책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제는 접근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

 

저자는 명저가 대중에게 멀어진 이유를 "접근의 어려움"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가보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미지의 세계가 주는 낯섦이나 막막함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여행객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서문을 읽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내가 이 훌륭한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책을 손에 들기까지는 쉽지만, 책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 바로 낯섦 때문이었다. 단일 왕조로는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유지된 나라였던 조선은 자신만의 색이 분명한 국가였다. 2018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나에게 조선은 다른 나라 만큼이나 낯선 세계가 또 조선이다. 당대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글은 같은 한글이라 읽을 수 있지만, 그 맥락까지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화적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을 《조선 명저 기행》은 한결 가볍게 만들어준다. 마치 낯선 외국에 갈 때 가지고 가는 가이드북과 같이 말이다.

 

*

 



그의 책들 중에는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것도 많았고, 비록 빛을 본다 하더라도 너무 늦게 세상에 나온 탓에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표출한 개혁 사상과 학문에 대한 열정, 그리고 백성에 대한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_ 목민심서 가이드 중에...



《조선 명저 기행》은 명저를 그 책만의 각도에서 바라본다. 정치, 역사, 기행(여행), 실학(과학), 의학이라 분류한 뒤 서술했지만, 《목민심서》와 《경국대전》은 같은 정치서이지만 다르게 다룬다. 《목민심서》는 열여섯 살 때부터 서른 살 때까지 아버지를 따라 지방관의 삶을 체험하고 스스로도 지방관으로 돌아다녔던 경험이 곳곳에 묻어난 지방행정 총서이고, 《경국대전》은 조선시대의 국가철학을 보여주는 '나라 경영을 위한 대법전'으로 오늘날 헌법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 같은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책의 주제도 완성한 작가도 작가가 살아간 시대상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저자는 각 권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가이드가 되어 설명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행정을 공부한 사람들의 필독서로 손꼽히는 책이다.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꼭 읽어보길 권면하셨던 책 중 하나였다. 대학에서 행정을 공부했지만, 《목민심서》를 완독한 적은 없다. 한 번은 어떤 책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교수님의 추천을 받고 책부터 집어 들고 읽었다. 결국 재미없다고 볼멘소리를 하며 책을 내려놓았던 기억이 난다. 《목민심서》의 제목에 대해서 목민이란 곧 치민, 즉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고 '심서'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담은 글'이란 걸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수령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사이에서 어떤 치열한 고민을 했는지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또 정약용의 생의 대부분이 녹아진 책이란 걸 알고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글에서 수령이었던 정약용이 향관들에게 당하기도 하고, 또 이들을 잘 통솔하기도 했던 모습을 상기하며 생생하게 읽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목민심서》의 두께에서 읽어야 할 양이 이렇게 많다며 불만을 말하기 보다 이 정도로 세밀하게 말할 정도로 부패했던 조선의 암울한 모습을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완성된 연도를 보고, 이 책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늦었단 걸 정약용과 함께 가슴 아파했을 것 같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나라 경영을 위한 대법전'이라는 뜻으로 조선의 성문 헌법이다.

 

《경국대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읽으며, 사극을 보기 전에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선시대의 직제와 왕실과 관련된 관청에 대해 속속 알아볼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귀에 읽었던 관원들의 직책의 소속이 어떻게 되고, 누가 겸임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하, 통촉하여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왕의 정책에 반대를 하는 신하의 목소리에 힘을 싣게 하는 구조에 대해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법전이기에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친근하고 읽기 쉽게 서술하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 재미있게 보았던 사극 속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싶었다. 형장에서 처벌받던 죄인들의 재판이 어떤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왕실 친인척은 누가 관리를 하는 것인지 사극 속에서 다 말해주지 않았던 그 당대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전함 위에 앉아 부하들과 함께 생선회를 곁들인 술잔을 기울이며 흥겨워하고, 품을 추며 시를 읊는 부하들의 흥겨운 몸짓만으로도 행복감에 사로잡히는 그저 평화를 사랑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기'라기보다는 '일지'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은 《난중일기》에서 저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군 이순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아버지 이순신의 슬픔, 아들 이순신의 슬픔, 나이 많고 자신보다 먼저 무과를 급제한 선배를 지휘해야 했던 상관 이순신의 고충에 대해서도 함께 서술한다. 그리고 전쟁 중이란 급박한 상황 중에 기록으로 남긴 난중일기는 《징비록》처럼 임진왜란에 대해 스스로 징계하여 반성하고 후환을 경계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전쟁 중에 조선의 병폐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소중한 기록이었다.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그림과 같았다. 옛날의 영주처럼 아름다웠다."

 

비록 두 문장으로 된 짧은 내용이지만 《난중일기》를 통틀어 이순신이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거의 유일한 내용이다. 전쟁을 앞둔 장수지만 산야에 핀 꽃과 막 피어오르는 봄풀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마치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한 장면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난 《난중일기》에서 저자가 찾아낸 인간 이순신에 대한 부분들에서 일지가 아닌 일기로 남은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용감한 장군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었던 이순신은 산천의 아름다움에 젖어들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사람이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적과 맞서 싸운 조선의 명장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산천의 아름다움을 다시 기록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바다 위에서 숨을 거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극히 천한 똥 덩어리나 지푸라기일지라도, 밭에 거름으로 주면 아름다운 곡식을 기를 수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아름다운 반찬을 만들 수 있다. 이 책도 잘 살펴보는 자가 그런 점을 채택한다면,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성호사설》의 겸손한 서두다. 이익의 말이 지나친 겸손임을 저자는 《성호사설》 가이드로 알려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이익이 겸손하게 말하지 않고, 과감하게 조선에 밝힐 수 있는 생각들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어쩌면, 러시아의 12월 혁명과 같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종에게 제사 지내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보다 이를 부끄럽게 바라보는 시선 앞에 당당했던 이익의 생각을 부분 부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가진 태도를 넘어,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글뿐만 아니라 책 전체로 말하고 있었다. 바로 "겸손함"이라는 삶의 태도를 말이다.

 

역사서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어느 한쪽의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명저 기행》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역사서는 아니다. 조선 명저를 뜻깊게 읽을 수 있도록 가이드 하기 위해 저자는 종종 자신의 생각을 더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가이드가 자신의 경험을 풀어 설명한 말이 더 기억에 남곤 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어머니의 경험과 함께한 《동의보감》 설명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한의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연결점이 되었다. 역사서나 객관적인 명저에 대한 이해는 명저를 읽는 내 몫으로 남겨 두었다. 명저를 위한 가이드로  《조선 명저 기행》을 뜻깊게 읽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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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유물에 있다 - 고고학자, 시공을 넘어 인연을 발굴하는 사람들 아우름 27
강인욱 지음 / 샘터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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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인연을 잇는,
고고학 이야기

 

 

 

고고학자들에게는 화려한 보물보다는

한자리에서 살아온 수천 년 인간의 역사가 더 소중하다.

 

 

난 역사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다. 위인 전기도 좋아했지만, 세계 박물관 도록을 모아 놓은 듯한 시리즈 책을 이따금씩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이집트 미라를 사실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초등학교 1학년이 읽기에 적절한 책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역사 탐구 수업을 방과 후 학교로 들었는데 "역사 스페셜"을 보고 난 뒤에 역사 교과서 외의 역사를 살펴보는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좋았고, 수업은 더 좋았기 때문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사학과"를 가고 싶어 했을 정도니. 나의 역사 사랑은 미취학 아동 때부터 10대 시절 내내 이어졌다. 그 사랑 덕에 가졌던 꿈이 "고고학자"였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 금방이 되고 싶었던 꿈이 되었지만. 지금도 아직 알아내지 못한 시간을 구체화하는 고고학자란 직업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진실은 유물에 있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동경했던 고고학자란 직업을, 매력적인 고고학이란 학문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고학의 목적은
화려한 보물 찾기가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삶을 밝혀내는 것이다.


고고학이란 흙무더기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유물이란, 빛나는 것들이라 이런 생각이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유물에 있다』를 읽으며 고고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고고학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유물을 통해 밝히는 학문"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저자 강인욱씨의 '고고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깃든 글들 덕분이었다.

 

 

고고학의 목적은 황금이 아니며, 고고학은 과거의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히는 인문학이다. 거대한 건축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건물을 만들고 살았던 사람들을 공부한다. 자그마한 유물에서 과거와의 인연을 찾고, 또 그 속에서 과거의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유물만큼 좋은 재료는 없다. 우리는 역사를 '글'로 이해한다. 하지만 역사 기록, 글은 사실 중심으로 되기 어렵다. 진실을 오로지 담았다고 믿고 싶지만 이는 바람일 뿐이다. 역사를 아무리 생생히 기록하더라도, 인간만의 삶의 숨결, 짧은 순간 관통하는 복합적인 감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다 담기는 어렵다. 글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 바로 유물이다. 또 동시에 역사의 바탕이 되는 것 역시 유물이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우리는 무심결에 지나칠 수 있는 공간에 서서 천천히 역사를 찾아보고 기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살았던 땅이었고 시대마다 공간에 인간은 삶의 자취를 남겼다. 그 자취가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몇 만년의 시간을 지나 분절된 시간을 이어주었다. 역사의 진정한 복원은 우리의 소망일 뿐, 불가능한 꿈이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한 글과 글 유물과 유물 사이에 놓인 시간을 조금씩 채워나갈 수 있는 건 유물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기록이다. 이를 발견할 사람, 그 시간을 이어주는 사람들이 바로 고고학자다. 이렇게 고고학과 고고학자를 바라보니, 조금 딱딱해 보이는 학자 이미지에서 흙냄새 묻어나는 친근한 이웃 같은 느낌이 든다.

 

 

고고학자가 무덤에서 발굴하는 것은 대개 말라비틀어진 뼛조각, 그리고 토기 몇 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무덤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던 과거 사람의 슬픔, 그리고 사랑이 깃들어 있다. 수천 년간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 속에서 그 사랑의 흔적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고고학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실제 고고학자들의 마음엔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기여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가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것, 아주 일상적인 삶의 조각들을 이어 맞추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무덤에서 돈을 바란 도굴꾼의 마음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던, 옛사람들의 마음이 유물에 어떻게 깃들어 있는지 찾아낸다. 일상 모습은 어떤지 살펴본다. 작은 도구에서, 그들의 일상이 어떤 모습이었고 그 일상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고고학자들에게는 화려한 보물보다는 한자리에서 살아온 수천 년 인간의 역사가 더 소중하다는 저자의 말이 문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글로 다가온다.

 

이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만약 고고학자가 황금을 발굴하길 기대한다면, 그건 도굴꾼과 다름없지 않을까." 또 화려한 유물만을 기대했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웠다. 『진실은 유물에 있다』는 인간이라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과 공감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고고학자라는 걸 여러 글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역사적 진실이란 생각까지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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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하자! 푸른도서관 79
진희 지음 / 푸른책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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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싱그러운 소설

 

 

 

내 꿈의 선택권은 내가 쥐고 있는 거다.

다섯 편의 이야기 속 청소년을 보고 청소년은 어떻게 생각할까? 청소년 타이틀을 잃은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난 이질감을 느꼈다. 아주 기분 좋은 이질감을 말이다. 청소년이라는 나이대의 학생들을 위한 소설은 역시 특유의 느낌이 있다. 그 소설들만의 느낌 말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다. 그 이유는 "행복"과 "희망"을 다루는 방식이 싱그러워서다. 특히 『데이트하자!』는 더 싱그러운 소설이었다.
 
자신을 모욕한 선생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과를 요청한 이야기 「사과를 주세요」, 짝사랑하는 오빠의 할머니와 데이트를 한 계획적인 그리고 신기한 인연 「데이트하자!」, 가출이 의심되는 쌍둥이 남동생을 찾다가 오히려 자신의 삐딱함과 만난 「삐딱이를 만났어」, 집을 떠나, 세상을 떠나고 싶어서 떠나고 나서야 무언갈 찾은 「가출 기록부」, 짝사랑하듯 꿈을 쫓는 청소년의 끝자락 「짝사랑 만세」. 10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음 마주했을 법한 고민들이 한 편 한 편 담겨 있었다. 물론, 그 고민이 풀리는 방법은 평범하지만은 않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소설처럼 들여다보면, 특별하고 소중하단 걸 상기하면 평범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선 귀찮고 입장 곤란하니까 선심 쓰듯 던져 주는 사과는 진짜 사과가 아니라는 얘기지, 내 말은. 시간에 정성을 대해서 상대가 왜 상처받았는지 알아가는 게 먼저. 사과는 그런 다음에 진심으로 다가서는 일이어야 해. 가능하다면 여러번, 그리고 지식해서. 성가시니까 치워 버리기 위해서 부끄러우니까 잊어버리고 묻어 버리기 위해서, 먹고 난 종이컵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리듯이 한 번 쓱 해치우는 행동이 아니라.

 

『데이트하자!』는 중요하지만,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상기해주는 소설이다. 사과가 무엇인지, 이웃으로서 가지는 책임이 무엇인지,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등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놓쳐버리기 쉬운 것을 꽉 잡아준다. 특히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을 오가는 학생들이나 바쁜 일상 속에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것 같은 이들의 마음에 담기면 좋을 이야기다. 꼭 청소년을 모델로 했기에,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기에, 청소년 소설로 묶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막 청소년에 들어선 사람이 읽어도, 청소년을 벗어난 사람이 읽어도, 혹은 청소년이 되기 직전의 사람까지도 포함한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근래에 학생들 사이어서 벌어진 사회적 사건들과 조금씩 붙어있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고, 마음에 오묘한 감정을 주었다. "어른"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고 어려운 난, 해밀의 먹먹한 마음을 읽고, 미안함을 느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아이들의 모습과 동시에 아이와 학생이라면 미숙한 존재라고 여기며 그들의 말과 생각에 귀기우리지 않았던 내 모습이 보였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학생인 때가 있었고, 그때 난 "학생이라니까, 어리다니까"라는 이유로 체념하기 바빴다. 이런 나의 10대 시절과 달리,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부당하다고 느낀 것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소중한 감정에 대해 무시하지 않고 그 감정을 느낀다.  방법의 모습은 다섯 명 보다 다른 모습이다. 1인 시위로, 할머니에게 건넨 한마디로, 친동생에게 툭 건넨 말로, 솔직한 고백으로, 꿈을 향한 도전으로. 누군가를 흉내내거나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을 실천으로 옮긴다.  용기내서 세상에 솔직한 나의 마음을 드러낸 모습이 기특했고, 부러웠다.

 

별들이 하나둘 돋아나고 있었다. 영롱했다.

 

부러움이라는 감정 뒤에는, 나는 지나갔지만 이제 처음 그 시절을 보내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우려야 겠다는 생각이 따라왔다. 끝까지 다 듣지도 않고, "아, 그건 말이야."하며 토를 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 아이들의 말을 공감하며 들어주는 것 말이다. 내가 보낸 그 시절과 지금 혹은 앞으로 누군가가 보낼 그 시간은 다르니까. 그 다름의 온도를 『데이트하자!』에서 느꼈으니, 똑같은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의지처럼 의지있는, 나래처럼 솔직한, 이유처럼 깊이 이해하는, 해밀이처럼 공감하는, 재현이처럼 꿈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대화하고픈 상대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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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잘 풀리는 철학적 사고술 - 니체가 알려주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법 아우름 28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샘터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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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올바른 속도로 읽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나의 문장은 모두 천천히 읽혀야 한다.
by. 비트겐슈타인 - 시라토리 하루히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장을 하는 상대와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친절, 즉 사랑이 없다면 상대의 주장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지식을 얻어 상대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철학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 유려한 문장이 인생과 동떨어져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어렵게 배배 꼬인듯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곤 한다. 역사적인 철학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전공 수업으로 근현대 철학자들의 책을 몇 번 읽으며, 난 졸음과의 사투,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느라 사투를 벌이곤 했다. 하지만 치열하고 힘겨운 읽기만은 아니었다. 글을 읽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문장 하나가 마음에 사르르 번져나갈 때면,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인생이 잘 풀리는 철학적 사고술》의 저자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철학을 공부하며 내가 이따금씩 느끼던 감동을 좀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 책을 읽다가 맞이하는 기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곧 잔잔한 밤의 바다를 조용히 나아가는 보트의 노 끝에서 야광충이 빛을 내듯 머릿속의 수많은 별들이 왁자지껄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언어가 자신의 머릿속을 울리는 느낌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그가 만난 비트겐슈타인, 니체는 어떤 모습일지. 그가 철학 책을 읽고 생각하며 얻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왠지 그가 경험한 세계를 공유하다 보면, 나만의 감동과 생각이 전해질 것 같았다.

 


인생이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비탄하는 것도 아니다.
강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의 생각에 물리적인 언어를 결코 빠뜨릴 수 없다"고 지적한 철학자는 20세기 중반에 활약한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이다. 그는 "언어로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이 비로소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철학에 대한 2차 서적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철학 책 원전 못지않게 어려운 책도 있고 혹은 아주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책도 있다. 《인생이 잘 풀리는 철학적 사고술》는 여느 철학에 대한 2차 서적과 다르다. 오히려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는 철학자의 말을 옮겨 해석해주기 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답답한 순간에 읽으면 좋을 이야기를 한다. 철학자의 말을 우리의 인생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중에 잠깐 쉬어가듯 볼 수 있는 말로 들려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언어"에 대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언어화하는지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때로 함부로 말하는 나의 언어습관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말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머리 안을 맴돌던 생각이 언어화되는 순간, 글이 되는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놓쳤던 부분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나의 언어로 글로 완성하는 순간은 마음에 담고 있는 때와 머리를 맴돌던 때와 다른 사고가 이루어진다는 말을 지금 서평을 쓰면서 다시금 느낀다. 책을 읽을 때의 나와 책을 읽고 난 뒤 이를 정리할 때 나의 생각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예를 들어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속에 누군가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한 글을 읽고 수많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면 또 다른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생각 속에 저장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계속 생각한 결과물이다. 어쩌면 가장 나의 생각과 가까운 것과 마주할 수 있다.


"인생은 고정관념을 배우고 익히는 시간이 아니다. 내 방식으로 살아가는 시간이고 장소이다."라는 저자의 말에는, '나'가 '타인' 혹은 '환경'에 의해 함몰될 수 있는 요즘 필요한 책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고통도 받아들이고 이를 감내해 자신을 윤택하게 만들라는 이야기는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좀처럼 자신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누군가에게 좌지우지되지 않고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내린 삶의 순간이라면 저자는 충분히 이를 존중해줄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그저 되는대로 문법에 맞춰 사용해서는 아름답지도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한다. 즉, 사람의 귀를 간질이기는 해도 사람의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게끔 하고, 그 사람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언어는. 다듬고 또 다듬어진 사고, 혹은 심오한 인생 경험이나 깊은 고독과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의 붓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이 잘 풀리는 철학적 사고술》은 철학을 정리한 여느 책보다 가볍고 쉽다. 우리가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어서 가볍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알고 있는 사실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이유는 적절한 말로 정리된 글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글은 그가 마음에 담은 글과 그 글을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글은 그에게 감동을 주거나,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순 있지만 나의 인생을 바꾸는 글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인생을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이 기준이 되어, 인생을 바라보라는 따뜻한 격려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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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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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한복판에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차라리 생각이란 걸 하지 않으면, 더 편하고 즐거울 거예요.

하지만 내 맘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더군요.」

 

이제는 절대로 닿을 수도, 갈 수도 없는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투가 펼쳐진다.
하지만 《얼어붙은 바다》를 읽는 순간, 그 치열한 싸움은 내 생각 속에서 '현재'가 된다.

 

낯선 소설이었다. 그리고 친근한 소설이었다. 말도 안되는 두 가지 느낌이 교차하는 소설, 그런 소설이었다. 《얼어붙은 바다》는.

 

낯설다는 표현은,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욕설과 비속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불쾌했다. 이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바다》의 배경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 삼았던 시대, 고래기름에서 등유로 연료가 교체되던 때로 추론컨대 아마도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 일  때였다. 이것만으로도 낯선데, 영국 중북부 지방에서 배 한 척이 북쪽 바다로 고래를 사냥하러 떠나는  배에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나는 겪어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 모든 것이 낯선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친근했다. 소설 속 텍스트를 읽다 보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얼어붙은 바다》는 멀리 떨어져서 지나간 이야기를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마치 내 눈앞에 펼쳐진 듯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이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소설 속 문장에 담겨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진행되는 일인 양 서술한 이야기 구조, 과거 회상조차 현재성을 띠는 듯한 문장들은 지금 나와 가장 동떨어진 소설 속 상황을 내 앞에서 펼쳐진 문제로 끌어 놓는다.

 

바깥은 영하 18도, 남실바람이 불었고,

바다는 진창으로 변한 런던의 눈과 같은 색깔, 같은 점도였다.

영국 해안가 러윅에 정박한 볼런티어(Volunteer) 호가 북쪽 바다로 출항한다. 고래를 잡아, 그 기름을 채취하는 것이 주목적인 포경선답게 이 일에 필요한 선원들을 배에 태운다. 작살꾼, 난파를 대비한 목수, 선장 그리고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북극해를 향한다. 인도에서 돌아온 전직 군의관 패트릭 섬너, 작살꾼으로 고래를 사냥하는 헨리 드랙스, 선장 브라운리, 일등 항해서 캐번디시 등 이들은 추위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 위라는 극한 상황에 놓인다. 이 극한 상황을 모두가 함께 극복하는 모습을 그려도 좋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언 맥과이어는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마치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처럼 갑작스러운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라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했듯이 이언 맥과이어의 《얼어붙은 바다》는 북극해 위에 포경선 위에서 동일한 질문을 한다.

 

 

섬너는 가끔 궁금하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주변의 세상이 거짓인가?

걱정과 비통, 지루함과 걱정의 세상 말이다.

섬너가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 둘 다 진실일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거친 바다 위 배 위에서 자신의 작은 손길에도 기쁨을 느끼지만 항해 중간중간 잔인하고 추잡한 행동을 일삼는 선원들은 섬너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다리, 팔, 몸통, 머리. 그가 관심을 갖고 걱정한 것은 그들의 육체뿐이었다. 선원들의 나머지 다른 부분 - 그들의 도덕적 성격과 영혼 -에 섬너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선원들을 교화해 유덕한 존재로 끌어올리는 것은 자신의 임무나 과업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을 판단하고, 달래고 위무하며, 친구가 되는 것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번 항해는 그저 남다른 겨울 바다 항해일 뿐이다. 북극곰, 고래, 바다표범, 바다코끼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동물원을 가대했지만, 겨울 바다는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감도는 공간이 아닌 고래의 피와 사람의 피가 뒤엉킨 바다 그 자체였다.

 

 

분노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과 해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격렬한 분노가 위세를 더하며 그를 집어삼켰다.

회색의 기다란 파도가 에너지를 응축해,

마침내 해안을 덮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야생 동물원을 기대한 군의관 섬너는 인간의 야생성을 목도한다. 섬너를 찾아온 열세 살  남짓의 한 소년 사환 조지프가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누구라도 저질러서는 안되는 폭력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인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바꿀 수 없는 명백한 사실도 함께 알게 된다.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이때도 그의 관심 대상은 도덕적 성격과 영혼이 아니다. 그는 폭행과 살인이라는 명백한 범죄 행위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자신이 조금 더 조지프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질 때 살인범이 자신을 노리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도 그에겐 없다. 그는 오로지 사실과 범죄 그리고 진범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공허한 자유가 그를 휘몰아쳤고,

분명 그는 이를 즐겼다. 사실 그것은 부랑자나 짐승의 자유였다.

 

《얼어붙은 바다》를 처음부터 읽은 사람이라면 그 범인이 누군지 알 것이다. 작살수로 승선한 드랙스가 그 범인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간으로 저질러서는 안되는 잔혹함을 거침없이 드러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미 승선하기 전, 바닷가 부두에서 한 소년을 성폭행한 그가 이 배 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속 범인이다. 하지만, 배 안에 있던 게이인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받는다. 자신이 잡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마치 그 마수에서 벗어난 듯 그는 당당하게 행동한다.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그의 행동과 심리를 읽을 때면, 인간이 이렇게나 잔인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집요한 섬너의 추리로 인해 드랙스는 자신의 팔뚝에 남은 조지프의 이가 결정적 증거로 돌아와 그는 잡힌다. 그는 선장을 죽이는 잔인무도함을 보인다. 만약 이렇게 소설이 끝났다면, 권선징악이라는 보편적 이야기로. 선의 경계에 선 선과 완전한 악의 대비가 드러난 소설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끝내지 않는다. 갑자기 배는 난파하게 되고 드랙스는 제한적 자유를 얻게 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드랙스는 거친 언사와 인간의 추잡함이 난무했던 배이지만 최소한의 인간다움과 이성이 존재했던 배와 낯선 야만의 땅에 공포와 두려움을 불어넣는다.

 


분노는 신속하고 예리하지만,

갈증은 시간을 길게 끌며 오래 지속된다.

분노에는 항상 끝이 있다. 피범벅의 피날레 말이다.

하지만, 갈등이 바닥을 알 수 없고, 무한하다.

날씨가 맹렬하고 험악했는데도

은밀한 안온함을 느꼈다는 것이 확실히 이상했다.

마치 저승 같았다.

실제 세계는 잊어버리고, 그와 관련 없는 별개의 세계인 것 같았다.

뱅글뱅글 휘몰아치는 눈발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섬너 자신뿐이었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 범인보다 더 두려운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언젠가 자신들이 구조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들은 점차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선원들은 《15소년 표류기》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다. 생존을 위해 떠나는 사람과 생존을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리고 섬너는 이 모든을 의사인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이성을 따라 곰을 사냥하기 위해 떠난다. 그는 걸으며 이 모든 상황의 예측하고 꿈으로 꾼 사람의 이야기가 마음으로 생각한다.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현실화되자, 그는 혼란을 느낀다. 자신을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과 자신의 감정 앞에 섬너는 조지프의 죽음 때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과 마주한다.

 

 

내게 화난 모양이라고, 섬너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섬너가 연민과 부끄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헝클어진 수염 가장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섬너는 자신이 약화돼, 형체를 잃고,

슬픔과 후회가 뒤범벅된 죽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섬너가 극한의 상황에 본 소년은 누구였을까. 조지프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을까. 혹은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가 흘린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그는 부끄러워했을까. 이 대목을 읽을 때 난 섬너의 눈물이 철저히 자신만을 생각한 자신, 타인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돌아본 것일까. 혹은 스스로가 억울했던 순간 그 이후 세상을 원망했던 것이었을까.

이 생각은 《얼어붙은 바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을 때 반전처럼 머리를 쨍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론이었다.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가 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 과정은 정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정말 얼어붙은 바다에 혼자 서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 소설이었다.

글을 쓰며 든 생각인데, 《얼어붙은 바다》는 한번 읽어서 알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 속에 담긴 것들이 많아, 생각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지금 한 번 읽고 난 뒤, 생각이 얼어붙은 듯,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인물에 주목해서 보느냐에 따라 바다에서 잔인함을 발견할 수 있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신비로움을 발견할 수 있고, 고독을 발견할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면이라고, 이언 맥과이어는 《얼어붙은 바다》를 통해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다움은 다음에 읽을 땐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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