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쟁 3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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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박이는 순간처럼 삶을 분절적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찰나로 이루어진 삶. 그 찰나들이 모인 삶. 지금 동안 나를 만들어온 것이 과거의 누적된 무게가 아닌, 순간순간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를 글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소설이 삶을 그렇게 바라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찰나의 순간. 순간의 기억들이 주었던 것을 포착한 소설. 바로 그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시리즈다. 묵직한 3권의 소설로 엮어진 한 남자의 고백은 삶의 순간순간이 미치는 영향을 솔직하게 세상에 외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서사는 이어진 듯 분절되어 있고, 분절된 듯 이어져 있다. 마치 파편처럼 조각나 있다가도 어느 순간엔 꼭 맞춘 퍼즐처럼. 그의 이야기는 조각들이 모인 커다란 하나의 서사다. 

<나의 투쟁 3>은 한 '남자'이기 보다 한 사람의 '남편'으로, 하나뿐인 자식의 '아버지'로 삶에 대한 이야기와 과거의 열정적인 지난날의 모습을 기억하는 젊은 시절을 보내온 만큼 나이 든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의 투쟁 1>의 궁금증 <나의 투쟁 2>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하지 않는다. <나의 투쟁 3>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생각과 여기서 파생된 이야기들만 이어질 뿐이다. 앞선 두 권의 소설을 읽으며 익숙해진 그의 표현은 <나의 투쟁 3>을 수월하게 읽게 도와주었다. 그의 글이 익숙해졌지만, 그가 말하는 '남편'으로서 삶, '아버지'로서 삶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다른 성별이기 때문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 답이 불충분했다.
내가 내린 답은 칼 오베라는 남자의 삶의 기록을 부분 부분 끊어서 보아서. 그의 지독하리만큼 쏟아내는 마음속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고 순간순간에 북받친 감정이 많았다. 특히 아이의 출산 앞에선 그의 감정 상태는 린다에 의해서 혹은 다른 상황에 의해서 계속 달라졌다. 달라진 모든 모습이 칼 오베였지만, 그 다른 모습 속에서 진짜 '칼 오베'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 나의 시선이 그를 더 파편화했고, 그 파편 조각 속에서 다시 재배치하며 내가 생각하는 칼 오베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 생각에 맞추어서 해석한 칼 오베인데, 나는 오히려 그런 칼 오베의 모습이 낯설었다.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경계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독자인 나의 모습에 보였고, 그러다가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는 그의 모습. 어떤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인지. 내가 믿고 있는 원래라는 것이 진짜 원래 칼 오베의 모습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길게 칼 오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름 일관된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진정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눈앞의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페이지 수의 소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쓴 기록물을 이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그 주인공을 파악할 수 없다는 건,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쉽게 너를 이해한다,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며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삶의 파편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칼 오베라는 남자가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우리의 감정과 기분, 우리의 움직임과 목소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짜증을 내면서 린다와 말다툼을 하다가 거의 동시에 아이를 바라보면서 밝은 미소를 짓다 보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누군가의 삶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 느낌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함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섬세함이 조각낸 자신의 생각, 삶 자체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3>은 조각난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순간순간 그가 했던 생각들은 현대사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고민의 흔적이기도 했고, 칼 오베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그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인간의 목소리 속에 담겨 있는 슬픔과 불만, 만족감과 기쁨, 우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건드려보고 싶어 했고, 깨워보고 싶어 했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는가.

나는 차라리 우연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떤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그 일을 해결하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삶은 바로 그런 것이지 않은가.

투레 에릭은 자주 "과거는 다만 수많은 미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벗어나고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경직성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역동성을 배양해내야 하는 예술이 경직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예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동시대를 표현하는 이른바 현대 예술이기 때문이다. 역동성을 느끼지 못하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요점은 시각과 관점의 차이라는 거야. 이 시각으로 보면 세상이 즐거워 보이고, 저 시각으로 보면 세상에 가득한 슬픔과 비애만 보일 뿐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중요한 것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배운 것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얼마든지 기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항상 세상에 무언가를 요구해왔다. 그러다가 생각한 대로 잘 안되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세상과 주변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소설의 말미에 가면, 작가로서 '글'에 대한 '소설'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고민의 결과가 <나의 투쟁>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깊이가 좀처럼 얕지 않아서, 그 폭이 좁지 않아서 <나의 투쟁>이 그 결과라는 답을 알 수 있지만, 그 답이 시사하는 바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였던 걸까? 현실을 모방한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을 옮긴 소설의 서사가 가진 힘. 그 힘이 무엇일까? 그 힘이 작가 개인에게 무엇을 주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겐 무엇을 주는 것일까. 
나는 조각난 이야기에서 그 가치를 찾았다. 임신 기간, 육아, 친구와의 만남, 가족 간의 만남, 작가로서의 진지한 성찰들이 뒤엉킨 삶의 기록. 이어지지 않은 조각난 기록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고 굳게 믿는 과거조차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난 시간 속의 나 역시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토대가 아니라, 낯선 무언가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0대의 나는 지금의 내 속에 얼마나 남아 있는가.
도시의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별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의 내게 선 20대의 내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나라는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없다면 그것을 감히 예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보이는 세상의 풍경은 우리의 지난 시각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 발견에는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가능성이 담기지 않았을까. 과거조차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에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발터 벤야민의 변증법적 시선과 같은 어떤 가능성이 포함된 힘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발견한 것이고 아마 작가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냉정한 자기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투쟁>이라는 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 속 저자의 깊은 눈매에 담긴 무게가 보였다. 멋지다, 분위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만든 깊음. 그 깊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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