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
이용한.한국고양이보호협회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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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서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관계인 셈이죠. 따뜻한 봄이 오면 고양이 울음소리가 봄밤에 바람을 타고 들려올 때면,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통에 담기 때문에 길고양이의 습격을 받는 모습도 좀처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싫어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고양이와 같은 환경을 공유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도시공간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길고양이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아이러니하게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 가면 익숙했던 모습이 시골 길고양이들이 밥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저녁 시간에 집 담벼락 구석진 곳에 물과 고양이밥을 놓아두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10마리 남짓한 고양이들이 와서 밥을 먹곤 했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 고양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좀처럼 고양이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어린 시절 먼발치에서 바라본 해 질 녘 고양이 무리들이 밥을 먹는 모습은 포근한 할머니 댁 풍경과 함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밥을 준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도 전 먼발치에서 고양이들이 밥 먹는 모습을 몰래 관찰하며 거리를 두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길고양이 공존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작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의 11,12화 에피소드를 보았을 때입니다. (그 이전에 여러 가지로 사건으로 관심을 받을 법도 했지만, 잔인한 장면들이 시각적으로 들어와서인지 더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시청했던 사람들 중에 많은 분들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의 잔인성을 간접적으로 인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저를'캣맘'의 길에 들어서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는 고양이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며, 도시 역시 도시민만의 공간이 아닌 것을 인지할 필요성을 느낀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도시 공간을 공존하는 도시민으로 읽으면 좋은 책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입니다.

 

고양이를 적대시하는 사람들과 길고양이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사람과 고양이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는 길고양이와 시민 간의 공존을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길고양이에 대한 편견, 길고양이가 왜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공존관계가 형성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사람과 고양이가 모두 행복하고 안락하게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면,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서술했으며, 고양이의 습성과 길고양이만의 독특한 습성을 함께 고려한 점이 돋보인다.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으며 "길고양이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과 "길고양이, 이것이 궁금하다"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길고양이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도시공간에서 바람직한 공존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길어야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삶을 살아가는 고양이들(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15년을 산다고 한다.)이 그 시간조차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웠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지식이 좀처럼 알려지지 않아다는 사실에 또 안타까웠다. 길고양이의 수명이 평균 3년이라는 점에도 놀랐지만 가장 놀라웠던 점은 고양이의 번식 능력이었다.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이를 위해 포획, 중성화 수술 그리고 방생의 과정인 TNR이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캣맘이 아니기에 고양이의 습성에 대한 부분에 대한 부분보다 길고양이가 우리 사회에서 편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부분에서 공감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길고양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가 길고양이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길고양이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 공감했던 문제 제기는 '언어'에 대한 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길고양이 공식 명칭이 '도둑고양이'라는 점은 개선해야 할 점이다.

"국어사전에는 길고양이 대신 도둑고양이가 표준어로 등재되어 있는데, 그 의미 또한 "주인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몰래 음식을 훔쳐 먹는 고양이(표준국어 대사전)."로 정의돼 있다(2017년 말 현재 정의는 "사람이 기르거나 돌보지 않는 고양이."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도둑고양이를 표준어로 유지하는 중이다)."

언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우리 사고에 관여할 여지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보다 '길고양이'나 '길냥이'를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공식 명칭이 길고양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으며, 이를 개선하는 것은 정말 꼭 필요하다. 실제 미국에서도 뒷골목 고양이에서 방랑 고양이로 표현을 순화했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이 문제 제기가 보편화되어 다른 표현으로 순화하길 바란다.
"인간의 성격이 저마다 다양하듯 길고양이 또한 한 마리 한 마리 개성이 다른 '묘격체'"이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그리고 "먹이를 찾아다니는 일과 로드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엄청나지만, 실은 길고양이를 위협하고 위해를 가하는 최대의 적은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 아팠다. 많은 나라에서 "고양이는 학대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공존의 대상"이며, "역사적으로 고양이는 5000년 이상 인류"와 공존해왔듯이 우리나라에서도 공존할 수 있길 바란다.


무엇보다 길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동정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생각을 꼭 함께 나누고 싶었다.
  

 

 


이 책의 수익금 일부는 길고양이 구조와 치료를 위한 지원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책 안에 '길고양이 사료(먹이) 안내'와 '쥐약 및 독극물 살포 금지' 스티커와 길고양이 스티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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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리뉴얼판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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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이 책의 일부분은 - 어쩌면 너무 많은 부분이 -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소설의 목표는 정확한 문법이 아니라 독자를 따뜻이 맞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글쓰기에 대한 책, 난 많이 읽어왔다. 위인이 된 인물들의 글쓰기 비법, 연설문을 쓰는 분이 쓴 글쓰기 비법,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 비법, 논술 강사가 들려주는 글쓰기 비법(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운다』 『대통령의 글쓰기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등)... 글을 잘 쓴다고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쓰고 정리한 비법서들을 많이 읽었다. 또 글쓰기 관련 강좌가 있다면, (가급적이면)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들은 글쓰기 강좌도 제법 많이 있다. 이렇게 글쓰기에 대한 책과 강좌에 관심을 쏟은 이유, 간단하다. "글을 잘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은 건 다른 글쓰기 책을 읽었던 이유와 같았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고, (내가 생각하기에 글을 잘 쓰는) 주변 사람의 추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만 10만 부, 세계적으로 더 많이 팔린) 사랑받은 책이니 특별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아서 읽었다. 스티븐 킹 작가는 《쇼생크 탈출》, 《미저리》, 《그것》의 원작자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에게 독특한 작품으로 각인된 사람이다.  하지만 난 그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고, 그의 작품 가운데 영화화된 작품 역시 한 편도 보지 않았다. 『유혹하는 글쓰기』를  다 읽고 그에 대해 검색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가 정말 아주 많이 유명한 작가라는 사실을. 그리고 안도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면, 난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지 않았을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스티븐 킹을 알고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었을 수도 있고, 혹은 제목에 매료되어서 읽었을 수도 있고,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을 수도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읽게 되었는지는 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유혹하는 글쓰기』를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기억에 남는 것에 이건 모두 있을 것이다. 작가 스티븐 킹이 가진 작가로써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실'의 중요성!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 돈벌이를 위해 지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글을 쓸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건 기자(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과 사실이지만)라고 생각한다. 보통 소설가에게 우리는 '진실'을 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소설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재미'다. 얼마 읽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는 그 마법을 기대한다. 그는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야기의 내용이 독자 자신의 삶과 신념 체계를 반영하고 있을 때 독자는 이야기에 더욱더 몰입하게 된다."라고. 독자가 더 몰입하기 위해서는 더 사실적이고, 진실에 가까워야 몰입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단지 내용을 구성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적이고 공감을 주는 대화문을 쓰려면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망치로 엄지를 내리쳤을 때 사람들이 내뱉는 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점잖은 체면 때문에 '이런 제기랄!' 대신 '어머나 아파라!'라고 쓴다면 그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의 약속을 어기는 짓이다. 여러분은 꾸며낸 이야기를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의 진실을 표현하겠다고 이미 독자들에게 약속한 셈이니까." 그의 소설 속 인물들 대화는 거칠고, 험악하고 억센 표현이 툭툭 나온다. 다듬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가 그렇게 대화문을 구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제와 주목을 받기 위해서 자극적이게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에 대해 글로 발굴하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이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서 표현을 '사실'적으로 할 뿐이다. 표현을 다듬는 순간, 이야기는 금가거나 어느 한 귀퉁이가 잘리기나 유실되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에게 세상에(독자에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이고, 글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한 문장으로 완성된 주제를 두고 살을 붙여가는 것이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주제에 대해 "나의 삶과 생각에서 비롯되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또한 남편으로, 아버지로, 작가로, 또 연인으로 살아온 나의 역할에서 비롯된 관심사들일 뿐이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될 때, 그리하여 한 손을 베개 밑에 넣고 어둠 속을 들여다볼 때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문제들"이라고 말한다.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미 자신의 몸속에 누적된 삶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말이다.

역시 좋은 글이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말하는 '글'은 소설이다. (혹은 시가 될 수도 있다.) 좀 더 큰 범주에서 말한다면, 문학이다. 만약 대학생이 '글쓰기 과제를 잘 하는 법'이나 '교수님에게 유혹적인 글 쓰는 법'을 기대하고 읽었다면, 아마 "이력서"를 읽다가 말았을 것이다. 혹은 이력서가 재미있었다면, "연장통"까지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티븐 킹이 말하는 글쓰기 방법으로 과제에서 요구하는 글쓰기를 할 수 없다. 책을 많이 읽고 내 방식대로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써야 하는데, 교수님은 책을 많이 읽을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도 없고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 글을 평가할 수 없고, 성적을 매기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책이 아니라 성적을 주시는 교수님께 교수님이 높이 평가하는 글이 무엇인지, 성적 평가 기준을 물어보아야 한다. (수많은 글쓰기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글 쓰는 방식이 다르고, 높이 평가하는 글들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성적을 잘 받는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성적을 매기는 교수님께 물어보는 것이 베스트셀러 작가의 글쓰기 책보다 도움이 된다.)
하지만 『유혹하는 글쓰기』는 '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글이다. 책 속 많은 구절에 밑줄을 쳤지만, 가장 좋았던 구절은 아래와 같다.

"나는 사람들의 환경에 의하여, 또는 자기 의지에 의하여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예전에는 나도 그렇게 믿었지만). 작가의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자질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조금씩은 문필가나 소설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며, 그 재능은 더욱 갈고닦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책을 쓴다는 것부터가 시간 낭비일 것이다."

형편없는 작가가 제법 괜찮은 작가로 변하기란 불가능하고 또 훌륭한 작가가 위대한 작가로 탈바꿈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스스로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시의적절한 도움을 받는다면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작가도 훌륭한 작가로 거듭날 수 있다.
_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


글은 결국 '나'에게서 태어나고 멈추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었다. 누군가를 위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첫 번째 누군가는 '나'임을 일깨워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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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나폴리 4부작 4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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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너는 매사에 열정적이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네가 선택한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이 열정에 네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너는 삶의 흐름에 떠밀려 갈 수 있는 거야.

 

 

나는 우리 우정이 끝났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_ 652쪽


약 60여 년의 시간 동안 공고한 듯 연약한 듯 이어져온 우정이 끝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우정이 끝났음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시간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는 먼저 누군가는 나중에 받아들여야 했던 이들 사이에 어떤 부재감과 존재감을 남길까. 

<나폴리 4부작>의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시작해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거쳐 잦아들기보다 증폭되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 소설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쩌면 "소설과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라는 레누의 고백처럼. 진짜 우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는 건 어려울지 모른다. 사람 사이에 무수히 많은 관계가 있고 그 얽힌 관계가 나에게 남긴 것을 명확하게 안다는 건, 나를 잘 안다는 것인데.. '나'에 대해 제대로 안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알게 되지 않은가. 

관계가 남긴, 감정이 남긴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음에도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릴라와 레누. 두 사람과 두 사람 간의 수많은 관계가 남긴 흔적들은 600쪽이 넘는 이야기 속에 흩어진 듯 차곡차곡, 모순된 단어 외에 설명할 수 없는 양상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책의 겉표지에는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의 서사의 핵심을 그려내고 있다. 금발을 한 레누는 아이를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반면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릴라는 홀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 릴라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두 사람과 떨어져 조금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에서 릴라와 레누는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지고, 한 달 정도 차이를 두고 출산한다. 레누는 니노와 함께 임마를 가지고 릴라는 엔초와 함께 티나를 가진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두 연인 간의 관계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3권에 거쳐서 레누가 드러내지 못했던 욕망의 대상이었던 니노는 3권 말미에서 연인으로 관계가 바뀐다. 결국 레누는 남편과 두 딸이 아닌 니노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다. 결국 레누는 이혼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혼을 택하고 데데와 엘사를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올 계획을 하던 중에 니노가 그의 아내와 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레누는 이 사실에 몹시 분노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그의 납득할 수 없는 태도에 대해 단호하게 끊어내지 않고, 그와 아이를 가지는 관계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임마를 출산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레누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누는 그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니노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한다. 니노의 여성편력에 대해 적나라하게 목격하면서, 그녀는 니노와의 사랑을 끝낸다. 

"상대방의 배신은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되지 않으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뭐든 다 용서하게 되거든. 배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어야만 해."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_ 344쪽

레누가 자신의 진짜 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던, 그녀의 첫 연인 안토니오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하게 된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레누의 삶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랑이 끝나서일까. 충족되지 않았던 '사랑'이 만든 삶의 허기나 '사랑'의 만족감이 잦아든 레누에게 찾아온 것은 작가로써 새로운 삶과 릴라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찾아왔지만 하나는 성취했고, 다른 하나는 종료해야 했다. (여기서 종료해야 했는지, 종료할 수밖에 없었던지, 그녀 스스로 종료를 택한 건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레누가 쓴 책이 릴라를 돌아서게 한 것인지, 잃어버린 아이가 릴라 삶에 준 충격이 더는 우정을 지탱하게 어렵게 한 건지 정확하게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레누가 소설 말미에서 밝혔듯이 그녀 스스로 자신이 쓴 '어떤 우정'이 두 사람 우정에 결정적 도화선이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종료해야 했다는 타의에 의한 듯, 자의에 의한 종결어미를 택했다.)  

난 소설을 읽으며 레누가 문학가로써 성공하길 바랐다. 여성으로써 계속되는 한계를 그녀가 이기길 바라며, 그 한계에 금을 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보다 릴라와 우정이 지속되길 더 간절히 바랬다.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는 없다"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영원한 우정을, 60여 년이라는 시간을 지탱해온 관계가 이어지길 바랐다.  어긋난 듯 맞아들어간 두 사람의 우정이 왜 이어지길 바랐을까. 레누가 들은 것 외에 릴라의 생각은 철저히 배제된 레누의 자전적 고백인 이 소설 속의 레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레누가 소중하게 아꼈던 인형 그리고 릴라를 쏙 빼닮은 분신 같은 아이 티나. 인형은 레누에게 다시 돌아왔지만, 릴라의 딸 티나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레누는 릴라가 쓰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해 '어떤 우정'이라는 소설로 세상에 드러낸다. 레누는 소설가로써 재도약에 성공했지만, 레누의 소설에 대해 릴라는 침묵했다. 꽤 긴 시간에 걸쳐온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의 우정을 깬 것은 누구일까. 자신을 철저히 감추며 레누를 이용했던 릴라일까? 릴라를 의심하면서, 그녀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때론 릴라가 싫어하는 선택을 알면서 했던 레누일까? 내가 바랬던 두 사람의 견고한 우정은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결론난 것처럼 끝이나 있었다. 관계가 끝났다는 분명한 결론 속에서도 난 계속 두 사람의 삶이 남긴 관계에서 흘러나온 감정에 '?'를 붙였다. 이건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나폴리 4부작'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옮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명확하게 내려지지 않는 결론과 해결되지 않는 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소설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꼭 물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중심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알아가고 이들의 매력에 빠지고 감정이입을 하고 주인공들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소설이 주는 진정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_ 옮긴이의 말 중에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엘레나 피란테'가 2천쪽 가까이 되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와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맹가리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말했던 고백처럼, 자전적인 소설로 추정되는 '나폴리 4부작'은 작가에게 자신만의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추론에 두고, 끊임없이 질문을 부르는 '나폴리 4부작'이 의미있는 이유는 옮긴이의 말처럼 재미도 크지만,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가볼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의 인물들의 삶의 선택과 결정과 그 인물들의 관계에서 흘러나온 감정들이 어떻게 피어나고 지는지를 살펴보는 과정.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넓어진 것 같은 느낌. 이것이 분명한듯 분명하지 않은 소설 '나폴리 4부작'을 통해 내가 얻은 분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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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와 마녀의 꽃 - 애니메이션 그림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각본.감독, 안혜은 옮김, 메리 스튜어트 원작, 사카구치 리코 각본 / 온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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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이유는 그림 속에 가장 순수한 감정이 함께 담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한 가지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예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군상을 다루는 여타 다른 작품들과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수채화 그림처럼 한 컷 한 컷이 따뜻해지는 지브리풍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그래서 지브리 스튜디오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나의 허전함은 이내 그곳에서 배우고 익혀 자신만의 작품 세계와 작화를 완성해나간 많은 감독들에 의해서 채워지고 있다. 조금 더 지금의 감성에 어울리게 혹은 그림의 디테일이 조금 더 섬세하게 담긴 작품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메리와 마녀의 꽃'은 메리의 수수함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영화였다. 

 

드라마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작품은 영상물로 나와서 시청각적이 즐거움이 있지만, 찬찬히 내가 보고 싶은 속도로 내가 보고 싶은 메시지에 폭 젖어들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종종 영화를 보며 어떤 순간에는 일시정지를 해서 그 순간이 주는 감동을 조금 더 느끼고 싶을 때가 있었다. 관객들이 가장 즐겁게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계산된, 기획된 작품이지만, 그 작품을 나의 삶의 속도에 나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보고 싶은 때가 있다. <메리와 마녀의 꽃>은 그런 나의 마음을 움직인 동화책이었다. 정확하게 애니메이션 그림책이지만. 
어린 시절 한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디즈니 만화영화를 동화책으로 옮겨놓은 책을 친구 집에서 본 적이 있다. 마음속으로 그 시리즈가 우리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만화영화가 책 속에 옮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친구 집에 놀러 가면 그 동화책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난다. 영화 테이프는 마음대로 볼 수 없지만 책은 내 마음대로 볼 수 있으니 이 책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아마 내 책장에 채워진 책들은 만화 영화 시리즈가 아니라 세계의 박물관 유물 도록집 같은 책들이 주로 채워져 있어서 더 부러움이 컸을지도 모른다. (물론, 유물 도록집 역시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준다고 했을 때, 울며 불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며 내 책장에 두었던 책이다. 지금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주었지만.) 
이상하게 집에 동화책이 별로 없었다. 동화책도 별로 없었지만,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책으로 옮겨 놓은 책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그림책이 서점에 놓여 있으면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읽곤 한다. 혹은 이렇게 내 책장 한편에 놓아두거나. 

 

 

자세한 줄거리를 적을 수 없지만, 메리가 자신다움을 서서히 찾아가는 이야기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야기!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던 고민으로, 그 고민을 풀어가는 이야기다. 메리와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는 못하지만, 상상에서 한 번은 해보았을 법한 이야기다. (사실 난 이렇게 흥미로운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메리'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나가는 게 보여서 읽으며 흥미롭기도 했지만 마치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는 듯 기분 좋아지는 시간이었다. 

2017년 크리스마스 마지막 1시간을 이 책과 함께해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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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3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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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깜박이는 순간처럼 삶을 분절적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찰나로 이루어진 삶. 그 찰나들이 모인 삶. 지금 동안 나를 만들어온 것이 과거의 누적된 무게가 아닌, 순간순간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를 글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소설이 삶을 그렇게 바라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찰나의 순간. 순간의 기억들이 주었던 것을 포착한 소설. 바로 그게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시리즈다. 묵직한 3권의 소설로 엮어진 한 남자의 고백은 삶의 순간순간이 미치는 영향을 솔직하게 세상에 외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서사는 이어진 듯 분절되어 있고, 분절된 듯 이어져 있다. 마치 파편처럼 조각나 있다가도 어느 순간엔 꼭 맞춘 퍼즐처럼. 그의 이야기는 조각들이 모인 커다란 하나의 서사다. 

<나의 투쟁 3>은 한 '남자'이기 보다 한 사람의 '남편'으로, 하나뿐인 자식의 '아버지'로 삶에 대한 이야기와 과거의 열정적인 지난날의 모습을 기억하는 젊은 시절을 보내온 만큼 나이 든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의 투쟁 1>의 궁금증 <나의 투쟁 2>의 궁금증에 대한 답은 하지 않는다. <나의 투쟁 3>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생각과 여기서 파생된 이야기들만 이어질 뿐이다. 앞선 두 권의 소설을 읽으며 익숙해진 그의 표현은 <나의 투쟁 3>을 수월하게 읽게 도와주었다. 그의 글이 익숙해졌지만, 그가 말하는 '남편'으로서 삶, '아버지'로서 삶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다른 성별이기 때문일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 답이 불충분했다.
내가 내린 답은 칼 오베라는 남자의 삶의 기록을 부분 부분 끊어서 보아서. 그의 지독하리만큼 쏟아내는 마음속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고 순간순간에 북받친 감정이 많았다. 특히 아이의 출산 앞에선 그의 감정 상태는 린다에 의해서 혹은 다른 상황에 의해서 계속 달라졌다. 달라진 모든 모습이 칼 오베였지만, 그 다른 모습 속에서 진짜 '칼 오베'의 모습을 찾으려 애쓴 나의 시선이 그를 더 파편화했고, 그 파편 조각 속에서 다시 재배치하며 내가 생각하는 칼 오베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 생각에 맞추어서 해석한 칼 오베인데, 나는 오히려 그런 칼 오베의 모습이 낯설었다.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경계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독자인 나의 모습에 보였고, 그러다가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는 그의 모습. 어떤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인지. 내가 믿고 있는 원래라는 것이 진짜 원래 칼 오베의 모습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길게 칼 오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름 일관된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진정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눈앞의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페이지 수의 소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쓴 기록물을 이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그 주인공을 파악할 수 없다는 건,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쉽게 너를 이해한다,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며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삶의 파편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칼 오베라는 남자가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우리의 감정과 기분, 우리의 움직임과 목소리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짜증을 내면서 린다와 말다툼을 하다가 거의 동시에 아이를 바라보면서 밝은 미소를 짓다 보니,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누군가의 삶에 들어갔다 나오는 그 느낌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의 섬세함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섬세함이 조각낸 자신의 생각, 삶 자체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3>은 조각난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순간순간 그가 했던 생각들은 현대사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고민의 흔적이기도 했고, 칼 오베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그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인간의 목소리 속에 담겨 있는 슬픔과 불만, 만족감과 기쁨, 우리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건드려보고 싶어 했고, 깨워보고 싶어 했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는가.

나는 차라리 우연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맡기고, 어떤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그 일을 해결하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삶은 바로 그런 것이지 않은가.

투레 에릭은 자주 "과거는 다만 수많은 미래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벗어나고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과거의 경직성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역동성을 배양해내야 하는 예술이 경직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예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동시대를 표현하는 이른바 현대 예술이기 때문이다. 역동성을 느끼지 못하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요점은 시각과 관점의 차이라는 거야. 이 시각으로 보면 세상이 즐거워 보이고, 저 시각으로 보면 세상에 가득한 슬픔과 비애만 보일 뿐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중요한 것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배운 것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얼마든지 기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항상 세상에 무언가를 요구해왔다. 그러다가 생각한 대로 잘 안되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세상과 주변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소설의 말미에 가면, 작가로서 '글'에 대한 '소설'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고민의 결과가 <나의 투쟁>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의 깊이가 좀처럼 얕지 않아서, 그 폭이 좁지 않아서 <나의 투쟁>이 그 결과라는 답을 알 수 있지만, 그 답이 시사하는 바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였던 걸까? 현실을 모방한 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을 옮긴 소설의 서사가 가진 힘. 그 힘이 무엇일까? 그 힘이 작가 개인에게 무엇을 주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겐 무엇을 주는 것일까. 
나는 조각난 이야기에서 그 가치를 찾았다. 임신 기간, 육아, 친구와의 만남, 가족 간의 만남, 작가로서의 진지한 성찰들이 뒤엉킨 삶의 기록. 이어지지 않은 조각난 기록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고 굳게 믿는 과거조차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난 시간 속의 나 역시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토대가 아니라, 낯선 무언가로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0대의 나는 지금의 내 속에 얼마나 남아 있는가.
도시의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별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의 내게 선 20대의 내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나라는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없다면 그것을 감히 예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보이는 세상의 풍경은 우리의 지난 시각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 발견에는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가능성이 담기지 않았을까. 과거조차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에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발터 벤야민의 변증법적 시선과 같은 어떤 가능성이 포함된 힘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발견한 것이고 아마 작가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냉정한 자기 판단의 결과물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투쟁>이라는 긴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 속 저자의 깊은 눈매에 담긴 무게가 보였다. 멋지다, 분위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만든 깊음. 그 깊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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