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나무 숲 - 완전판
하지은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열린 결말. 난 좋아하지 않는 결말이다. 나의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는 작가님의 텍스트 기반으로 만든 세상을 머릿속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야기의 서사 만큼은 단단하게 꽉 닫힌 결말을 좋아한다. 《얼음나무 숲》은 그런 점에서 외전을 통해 주인공의 과거까지 잘 닫아준, 아주 아주 내가 마음에 드는 결말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예술가의 열망과 질투, 우정을 유치하지 않게 엮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며, 음악가의 연주를 글로 설명한다는 건 더욱 쉽지 않다. 이 소설은 그 어려움을 잘 넘긴 작품이었다. 작가의 섬세한 표현력이 좋았고, 진부할 수 있는 갈등에 미스터리를 적절하게 넣은 점도 훌륭했다. 가장 좋았던 건, 소설을 읽으며 고요와 대비되는 바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외전이었다. 외전으로 소설을 읽으며 "왜?"라는 의문도 잘 풀어준 점이 난 좋았다.

그를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스스로 구원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굳게 결심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겠다고. 벗어나 더 넓은 곳으로 가겠다고. (중략) 그를 기다리고 있을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 _ 550~551쪽

"아무리 찾아봐도 한 사람이 없었어. 내 곡을 이해해 줄 사람, 내가 말하는 바를 온전히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 진정으로 나의 음악을 '들어줄 사람 (중략) 나는 오직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연주하고 있는데." 라고 말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옐과 "나는 자네의... 단 하나의 청중이 되고 싶단 말일세"라는 말을 삼켰던 (천재) 피아니스트 고요. 그리고 두 사람의 친구, 트리스탄.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좋아한다는 감정은 한 단어 안에도 참 여러 감정이 담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마음에 닮아가려는 열망일 수도 있고, 결코 닿을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슬픔일 수도 있고, 동경과 불안을 느끼는 이중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과연 고요 같은 사람이 나에게 있다면 행복할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바옐 같은 성격이 아니라면, 고요를 감당하지 못할 듯싶다. 반대로 내가 고요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단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임을 알고, 그 다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바옐의 행복에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일그러져도 괜찮을 수 있을까. 그럴리가. 환상 문학은 환상문학이다. 나는 바옐도 고요도 그렇다고 트리스탄도 되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여름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아무튼 시리즈 30
김신회 지음 / 제철소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시절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여름만 되면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나, 왠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나, 온갖 고민과 불안 따위는 저 멀리 치워두고 그 계절만큼 반짝이고 생기 넘치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한다고 자신했는데, 『아무튼, 여름』을 읽으며 자신할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난 여름 덕후였다. 여름은 나에게 겨울과 달리 시골 할머니 댁에서 합법적 장기 거주가 가능한 계절이었다. (겨울엔 설에 잠깐 갔다가, 새 학년 준비로 바빴다.) 덕분에 옅어져서 잘 보이지 않는 내 몸에 크고 작은 흉터는 죄다 여름에 만들어졌다. 풀숲을 뒹굴다가 풀독에 오르고, 계곡에서는 흉터를 만들고 돌아왔으며, 사과나무에 올라가려다 떨어지고, 온갖 벌레에 몸을 기꺼이 내주었으며, 큰 강에서 떠내려가 구급차 신세를 2번이나 겪었던 파란만장한 사건이 일어난 계절은 모두 여름이었다. 그렇게 매년 다쳤으면서도 여름이 돌아오면 과거보다 더 큰 스케일의 사고를 쳤던 나의 호기심과 패기는 여름에 자라나는 잡초처럼 무성했다. (어쩌다 지금은 호기심 반 걱정 반 어른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좋아하는 계절을 닮은 사람과 좋아하는 계절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동안 혼자로도 충분했던 여름의 순간들이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색깔을 덧입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는 것처럼 이 사랑도 끝이 날 거여. 난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할 거야."

여름에 시작한 사랑이란 이야기에 영화 <귀를 기울이면>이 생각났고,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도 떠올랐다. 나도 은연중에 여름에 시작하는 풋풋한 사랑을 기대했던 적도 있었단 생각에 피식 웃었다. 그외에 작가의 여름 사랑은 곳곳에 닿아 있다. 초당 옥수수에 닿았을 때, 홀린 듯 초당옥수수를 택배로 결제했고, 평양냉면이 맛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는 난 옥천 냉면 부분에서 올여름 꼭 먹어볼 음식 리스트를 하나 추가했다. 수입 맥주 4캔이 주는 즐거움, 책을 안주 삼는 패기, 레몬소주 찬양론, 낮술에 이르는 술. 술. 술 에피소드에 『아무튼, 여름』 속에 『아무튼, 술』이 외전으로 담아 있는 줄 알았다.

여름에 반짝반짝 빛나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는 에세이였다. 진지함보다 유쾌한 이 글은 시원한 에이드(누군가에겐 맥주)를 닮았다. 해가 길고 길어진 덕분에 하루에 보너스 몇 시간을 더 얻은 것만 같은 이 계절에 책 속 이야기를 열쇠 삼아 내 여름날 추억을 꺼내 볼 수 있어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여름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아무튼 시리즈 30
김신회 지음 / 제철소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 추억 솔솔 떠오르는 책! 재미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박이서 등 16명 지음 / 푸른약국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갑자기 고백하자면 이 책의 리뷰를 쓰는 것이 좀 부담스럽다. 행여 내가 쓴 감상이 누군가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을지, 내가 어떤 작품의 정수를 빼먹지는 않았는지, 모든 소설을 고르게 다루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16개의 소설 중 몇 가지만 골라 서평을 쓰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알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이 소설집의 훌.륭.한. 가치를 다 녹여낼 수 없다는 걸. 그런데도 마음이 쓰인다는 건, 그만큼 이 소설집에 애정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책과 함께 인생의 단계를 비교적 모범생처럼 차근차근 밟아온 나의 다음 스텝이 '작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의 시초가 된 모집 댓글에 영광스럽게도 태그를 받은 난, 깜박했다고 했지만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자신 안에 고인 이야기를 꺼낸 분들의 글을 읽고 생각했다. '내볼까 고민만 해서 다행이다.'라고.

첫 소설부터 아주 좋아서 출근길 내내 책을 손에 붙잡고 있었고, 점심 먹으면서 또 읽고, 퇴근길에 드디어 다 읽었다. 이 좋은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서평을 쓰고 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에는 각자의 삶과 함께 열심히 읽어온 책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알랭 드 보통, 허수경 시인 등. 이외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작가의 글과 작품이 독자였던 작가의 손끝에서 이야기되어, 아직도 독자에만 머무르고 있는 내 마음에 닿았다.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읽을 때면 컴컴했던 영혼이 빛으로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의 플래시는 어둠의 영역에 존재했던 내 안의 오래된 기악과 생각들을 끄집어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유라는 이름의 비눗방울은 투명한 빛으로 한참을 부유하다가 어딘가에서 터졌다. 책은 끝없는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내 영혼을 자유롭게 했으므로 나는 책 읽기를 사랑했다."

나는 무심하게 넘겼던 페이지 너머에서 머뭇거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잘 모으다니. 정말, 왜 이제야 보여주느냐고 투정을 할 뻔했다. 이 책은 이야기가 지닌 힘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만든 이들이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정말 많이 읽으며 머뭇거렸을 이 이야기에 담긴 따뜻함이 좋았다. 그 마음을 감히 짐작하며 읽다 보니 혼자 독백하던 이야기가 이젠 방백이 되어 책을 읽는 나에게 닿을 수 있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자신을 덜 어려워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여느 성장만화의 대표적인 클리셰처럼. 이 소설집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내건 소설집 출간으로 이어지는 작가님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기 위해 이 책이 널리널리 읽혀야 하는데. 부디 아독방의 재미난 프로젝트가 2020년 지난 추억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길 바라며. 난 에세이도 구매했다고 한다. 출판 프로젝트의 최고 후원은 가치 있는 책을 사는 것에서부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도 의학은 어렵습니다만 - 개인의 일상과 세계의 역사를 바꾼 의학계의 발견들 저도 어렵습니다만 3
예병일 지음 / 바틀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틀비 출판사의 베스트셀러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에 이은 새 시리즈가 나온 걸까? 《저도 의학은 어렵습니다만》을 읽었다. 의학은 생로병사와 뗄 수 없는 영역이지만, 참 낯선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의학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저자는 책 제목을 재미있게 지었다. "저도 의학은 어렵습니다만". 처음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책을 읽으며 알았다. 의학을 잘 모르기도 했지만 의학을 오해하고 있었구나.

의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건강에 대한 기준은 엄격해지고, 이를 충족시킬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게 된다. _ 24쪽

1장부터 5장까지 일상에서 발견한 의학부터 의과대학에서 의학교육학 교수로 일하며 떠올린 것,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의학사, 병원과 제도 그리고 의학의 미래까지 고루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2장이 다른 장들보다 저자의 개성이 드러난 듯싶어 재미있었고, 흥미로운 건 1장과 3장 부분이었다. 최근 코로나 19 사태로 의학에 대한 궁금증이 많아진 사람들을 위한 교양을 꽉꽉 채운 책이다. 개인적으로 의대에 진학을 희망하거나, 의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청소년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첫 글부터 임팩트가 남달랐다. "의사들은 두통도 해결 못 하잖아"라니. 책을 읽다 보면 비틀어서 의학을 바라본 저자의 시선이 담긴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왜 의과대학을 졸업해야만 할까?", "인문학을 가미한 의학", "백신으로 암을 정복할 수 있을까" 등. 의학이란 영역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관찰해 들어간 글이 인상에 많이 남았다. 의학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교양서라고 해서 딱딱할 것이라는 오해는 넣어두고 우선 읽어보면 좋겠다.

약을 쓸 때는 적절한 양을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분들에게만 사용하는 것이 내성균주의 출현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상대로 인류가 숨바꼭질하듯 물고 물리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이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_ 189쪽

모두가 의사인 듯 쉽게 진단을 내리고, 정보를 알려주고, 처방까지 내린다. 때로는 아픈 몸을 고치지 못한다고 돌팔이란 말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위험한 것은 없다. 이 책은 그 무의미함과 위험성을 상기시켜준 책이었다. 의학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렇다더라"는 카더라 통신에 휘둘리지 않을 상식이 많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