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무튼, 순정만화 - 그때는 그 특별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ㅣ 아무튼 시리즈 27
이마루 지음 / 코난북스 / 2020년 2월
평점 :
순정만화라. 내가 처음 순정만화를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단짝이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책을 통해서였다. 한참 <궁>이 유행했고, <하백의 신부>가 사랑받던 중학생 때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사랑하는 길을 걸었지만 유독 내가 잘 못 읽는 분야가 만화였다. <그리스 로마신화> 시리즈, <각종 극한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를 제외한 만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난독증으로 인해, 순정만화를 읽겠다는 생각도 그 존재도 몰랐다. 드라마 <궁>을 재미있게 보았지만, 원작 만화에 관심을 가지기까지 1년의 시간이 걸렸으니. 그렇다. 나에게 순정만화는 멀고 먼 존재였다. 그리고 빠져있던 시기도 참 짧았다.
"어른이 된 우리가, 더 이상 영원을 믿지 않게 된 우리가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
그때만큼은 시간이 멈추고, 이 세상에 우리밖에 없고 이 순간이 무엇보다 진실되며 꿈같고, 찰나이면서 영원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날의 우리 마음속에 확실히 영원은 있었다."
그 장면을 상기하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은 진짜니까 괜찮다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굳이 예측하며 지금의 상황마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다.
_ 12쪽
<신의 물방울>, <유리가면>, <궁>, <하백의 신부>, <오디션>을 비롯한 천계영 씨 작품이 내가 읽은 순정만화의 전부다. 그래도 《아무튼, 순정만화》는 읽고 싶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제법 도톰한 만화책 종이를 넘기는 즐거움을 맛보았던 중학교 때 내 마음을 콕콕 건드려주는 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위 글을 읽고, 책을 구매해서 읽기로 결심했다. 만화를 읽다가 마음이 저릿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고, 그때 내가 느끼는 감정에 거침없던 때 나라면, 깊이 공감할 문장이었다. 내가 순정만화에 빠졌던 때, 그때 그 시절 나라면 말이다. 물론, 지금 만나면 어떻게 그렇게 순수하고 귀엽니 하고 괴롭히고 싶지만.
《아무튼, 순정만화》를 읽으며 서글픈 건 그 모든 것이 바래진 추억 속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떤 면에서 잔인하다. 대가 없는 애정을 쏟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특별한 이유나 계기도 없이 느닷없이 그 마음을 철회해버리니까."라는 말처럼. 이유 없이 나도 순정만화가 재미없었다. 만화보다 내 상상력을 자극하는 로맨스 소설이 더 좋았다. 완결을 단숨에 확인할 수 있는 소설과 달리,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궁>의 연재 기간도 나의 순정만화에 대한 사랑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일상이라고 여겼던 어떤 시간들이 아주 사소한 이유로 곧 비일상이 된다."라는 말처럼. 궁금했던 마음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에겐 짧게 지나갔지만 순정만화가 주는 설렘을 느꼈던 시절이 있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순정만화와 함께 반짝였던 시절과 그 시절에 배운 '세상을 향한 애정과 신뢰'가 삶에 묻어난 글에서 내 이야기도 떠올랐다. 나에겐 무엇을 남겼을지 말이다. 그러다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나는 아직도 만화를 잘 못 읽을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궁>에서 채경이 선택을 이해할지. 궁금하다. 순정만화는 그때 그 시절 그 모습으로 남아있고 나는 달라졌으니. 무언가 다른 걸 읽어내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내가 읽었던 순정만화를 다시 읽고 싶었다.
믿음직한 동행을 찾았다면 운이 좋은 것. 하지만 나를 완전하게 채워줄 누군가가 등장하길 바라며 평생을 결핍감 속에 사는 것보다는 혼자, 성큼성큼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때로는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밭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가 되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알려준 감정들이 나를 자라게 했으니.
_ 103쪽
그리고 지금 나에게 맞는 순정만화도 읽어봐야겠다. 특히, <도쿄 후회 망상 아가씨>는 도쿄 올림픽이 시작하기 전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왠지 공감하며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