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숲이 있다 -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은 여자 인위쩐 이야기
이미애 지음 / 서해문집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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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하면 뭔가는 된다’ 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저 멀리 중국의 내몽고의 사막에서 인위쩐이라는 여인에 의해 이루어질 줄이야.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4년 전 몽골 여행을 갔었다. 울란바타르에서 엘승타슬라헤(작은 고비라는 몽골어)사막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밤새 달렸다. 엘승타슬라헤에 도착하니 막 일출이 펼쳐졌다. 내 고향이 바다가 있는 도시라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일출을 봤다. 남들은 몇 시간씩 차를 타고와 추위에 벌벌 떨며 일출을 기다리는데 나는 집베란다에서 동해의 일출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사막에서 펼쳐지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수평선이 아닌 지평선 저 끝에서 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던 그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몇 시간 후 밤 내내 쉼 없이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사막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일출의 장관도 금세 잊힐 정도로 황량하고 거친 사막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생애 처음으로 직접 보고 만지고 걸어본 사막이기에 감회는 남달랐지만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물 한 줌 없는 사막이 무섭기도 했다. 다행히 한 나절 정도 있었기 때문에 낙타를 대여하기 위해 들린 게르(몽골 유목민의 전통 집)에서 만난 몽골 유목민들의 고충은 털 끝 만큼도 알 수 없다.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막에서 숲을 만들어낸 여인의 이야기는 「사막에 숲이 있다」라는 제목만으로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우리나라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황사의 발원지인 마오우쑤 사막, 그곳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징베이탕의 외딴 집에 사는 인위쩐과 남편 바이완샹.

내가 경험했던 몽골의 엘승타슬라헤 사막보다 훨씬 크고 더 척박한 마오우쑤 사막에 숲을 만들어낸 기적을 두 손으로 일구어낸 사람들이다.

 

“열 그루를 심으면 적어도 여덟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다. 사막 생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무가내 식 투쟁을 시작한 지 무려 7년 만의 일이다." (p.85)

 

“목수도 미장이도 없이 오직 두 사람만의 힘으로 집을 다 짓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p.91)

 

어느 날 갑자기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인위쩐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내가 처한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만들자’라는 말도 안 되는 다짐과 의지로 사막에 나무 묘목을 심는다.

 

7년 만에 제대로 된 나무군락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정도로 갖은 고생과 역경을 온 몸으로 견뎌냈다. 아이를 유산하기도 하고 피땀 흘려 심은 묘목들이 한 순간의 모래바람에 모두 뽑혀나가고, 겨우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나무들은 흉악한 나무도둑들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토굴과도 같던 집을 흙집으로 만들고 흙집을 제대로 된 집으로 만들기까지 두 사람은 꼬박 3년이 걸렸다고 한다. 멀리 시내까지 나가 벽돌 한 장 한 장을 사모아 부부가 직접 만든 집이다.

 

“인위쩐은 나무를 자식처럼 위했다. 누가 나무 한 그루를 벤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p.66)

 

포기하려고 마음먹기를 수백 번. 하지만 인위쩐은 나무를 자식처럼 위하는 마음으로 이것들을 이겨낸다.

 

“인위쩐과 바이완샹이 그들의 두 손으로 심은 나무만 80만 그루! 총 1400만 평의 모래 언덕이 숲이 되었다.” (p.128)

 

 

결국 두 사람이 기적을 두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냈다. 80만 그루의 나무. 1400만 평의 숲. 1400만 평은 여의도공원의 200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여의도 공원은 약 6만9천 평) 일부러 국가정책으로 특정한 산에 나무를 심는다 해도 여의도 공원의 200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사막에서 해냈다. 적어도 내가 본 사막은 생명이 생존하기에 가장 열악하고 힘든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어내었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이다.

그러나 인위쩐, 바이완샹 두 사람은 해냈다.

 

곱디곱던 처녀였던 인위쩐의 얼굴과 손이 거칠어지고 갓난아이 젖 먹이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까워 나무를 계속 심었던 인위쩐이라는 여성의 강건함과 위대함. 그리고 남편인 바이완샹은 인위쩐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을 때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위로해주고 함께 해주었다. 그래서 인위쩐이 사막의 황폐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다리 뻗고 쉰 날이 없었다. 잘 먹지도 못했다. 밥보다 모래를 더 많이 먹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니 폐나 기관지가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p.64)

 

“숲의 규모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지금도 살충제는 쓰지 않는다. 여전히 차통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오늘은 이 언덕 내일은 저 언덕에서 한 마리씩 잡아 없애는 것이다.” (p.167)

 

 

 

 

책에 수록된 사진만 보면 이곳이 정말 사막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 사막에서 저런 초록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기적과 같은 일이 방송에 앞 다투어 보도되고 중국 정부로부터 상과 지원도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았다.

 

사실 책의 마지막 이 부분을 읽으며 걱정이 되었다. 어떠한 좋은 일이든 방송을 통해 많이 알려지면 꼭,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두 사람에 대한 큰 소식은 없었다. 내가 제대로 찾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탈 없이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책에서의 강인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전히 이 둘은, 여전히 숲보다 훨씬 더 넓은 사막을 이겨내기 위해 하루하루, 매 시간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나마 강인하고 위대하며 용기 있는 두 부부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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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고맙다 - 상담가 폴라 다시의 감성 에세이
폴라 다시 지음, 안진이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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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절친한 후배와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평소 활발하고 늘 밝게 웃고 다니던 녀석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내어 식사하고 난 후 오랜 시간 대화했다.

그러나 대화를 한 시간만큼 그 후배의 진짜 어려움과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보다 뭔가 말을 돌리고 진실을 내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미 없는 대화의 종지부를 찍으며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을 때, 그 후배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형~! 형은 부모님이 이혼하신 그 느낌을 알아요? 모르잖아요! 그러면 소용없어요”

소리치지도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그렇게 내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텐데 후배는 체념하듯 말했다.

분명히 기억한다.

아무런 희망이나 낙관이 담기지 않은 공허한 단어와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문장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두고 후배는 서둘러 버스를 타기 위해 내달렸다.

 

그 후론 어떠한 사람을 만나도 ‘내가 다 이해하고 있는 척’, ‘내가 다 아픔을 헤아리는 척’, ‘내가 다 해결할 수 있는 척’ 하지 않는다.

내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가진 철칙이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아픔과 상처 내지는 경험에 대해서 상담을 한다느니, 해결해 준다느니 하며 거들먹거리는 것은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에 다름 아닌 일이라 치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께서 6년 정도 대장암 투병을 하고 계신다. 지금은 다행히 90% 완치된 상태시다. 그러나 지금의 결과가 좋다고 해서 6년간의 투병생활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겪었던 가족들의 아픔과 상실감, 상처와 배신감 등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친척이나 주위 절친한 이웃들조차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오로지 투병생활을 오롯이 지켜보고 감내해 온 아버지와 가족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여 의미 없는 격려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과 말을 가볍게 받아 넘길 때가 많다. 물론, 그들도 아버지와 가족을 위로하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선의겠지만 종종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지는 그들의 말에 또 한 번 상처받고 마음 아파할 때가 있다.

 

폴라 다시의 책 「세상에 고맙다」를 최대한 아버지 투병생활을 생각하며 읽었다. 나와 작가의 아픔의 정도를 산수로 계산해 저울에 달아 누가 더 힘들고 아팠나를 따져볼 수는 없다. 하지만 가족의 부재가 우리가 겪는 스트레스 중 가장 높은 수치라는 결과도 있듯이 작가는 최고의 상실과 절망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아주 작은 렌즈를 통해 삶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며, 지금까지 굳게 믿어온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 그 메아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커지고 있었다.” (p.80)

 

“‘본다는 것’은 대단히 불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사물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우리의 추측은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도 흐릿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미리 정해놓기 때문이다.” (p.89)

 

하지만 작가는 책을 통해 나의 외부를 둘러싼 불편하고 아프고 상처 되고 상실감이 느껴지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를 권유한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방어하고 애써 반응하는데 쏟는 에너지를 완전히 나의 내부로 돌리기를 또한 권유한다.

 

특히 우리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것인지 책의 곳곳에서 지적하는데 굉장히 공감이 많이 갔다.

 

 

‘나의 바깥’보다 ‘나의 안’을 집중하고 그 안에서 나와 너, 너와 세상을 바라보고 관계 맺었을 때 경험한 놀라운 신비에 대해서 소개해 놓고 있다.

 

“그 순간 눈보라 속의 어떤 존재가 나에게 다가와 명령했다.”

“멈춰.” (p.164)

 

물론, 눈보라에 파묻혀 같이 가던 친구도 잃어버리고 죽음의 갈림길에 있을 때 작가가 들었다던 ‘멈춰~’라는 신비로운 음성 같은 것은 전혀 이해되지 않고 마음에 와 닿지 않았지만 어떠한 역경과 곤란함 가운데에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잃지 않고 처한 외부적 환경에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으로 나름대로 해석해 이해했다.

 

바쁘기도 바쁘고 신경 쓸 것도 많은 현대를 살아가며 작가의 권면대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의 가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쓸데없고 배부른 소리 정도로 취급받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문득 하게 된다.

 

좀 천천히 살고 자세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아버지의 투병생활 중 겪은 여러 가지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것들로부터 하나하나 나 자신을 구출해 내는 진지하고 솔직한 내면의 과정과 시간을 가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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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5회 그들답다.

주키니와 김감퇴에 대한 입장정리도 그들답게 마무리한다.

비겁하지도 쪽팔리지도 않게 그들만의 방법대로 대응한다.

 

정봉주 전 의원을 보내고 주진우 기자를 잡아 넣으려 온갖 방법을 쓰고 있지만 잘 안되고 있다.

최소한 4월 총선까지는 계속 이런 스탠스를 유지하겠지.

 

그동안 나꼼수에서 제기한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 기성 언론에서(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보도를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실명을 거론한단다.

정말 미친짓이다.

저들에게는 빌미를 주는 것인데도 그렇게 한단다.

잡아 넣으려 혈안이 된 놈들에게는 잡을 구실을 마련하는 것인데도 그렇게 한단다.

그러면서 쫄지 말란다.

쫄지만 말란다.

 

참 미친사람들 아니면 저렇게 못 살텐데  

4월 전까지 엄지와 검지 힘만 키워 놓으란다.

 

그들만의 방식대로

시시덕 거리고 조롱하며 버티는 것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하긴 뭐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한치의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기에

나도 시시덕 거리며 엄지와 검지 단련을 시작하려 한다.

 

그래서 찬란한 4월 눈부신 햇살을 등에 업고 인고의 단련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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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제국의 빛과 그림자 - 찬란한 성공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요코다 마스오 지음, 양영철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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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대구의 번화가는 동성로이다. 몇 해 전 유니클로 매장이 생겼을 때는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다. 지상 2층에 심플한 브랜드 로고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유니클로 옷이 가격도 싸고 디자인도 괜찮대~”

평소 심플한 디자인의 옷을 좋아하던 나는 유니클로 매장을 방문했다. 듣던 대로 싼 가격에 심플한 디자인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플리스 제품이 한창 인기를 끌던 때라 플리스 제품과 형형색색의 양말 몇 켤레를 샀다. 나름 괜찮은 쇼핑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이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유니클로 매장 1층 쇼윈도 바깥 층계에 외국인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미권 외국인들 말이다.(동남아권 외국인들이 모여 있으면 소문조차 나지 않았겠지만) 그들이 외국의 카페 테라스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자유롭고 여유롭게 차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며 담소를 나누는 그 모습처럼 그 유니클로 쇼윈도 바깥 층계에 모여들었다. 지금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알고 있는 외국인 지인 중 한명의 얘기로는 유니클로 매장 앞에서 약속을 많이 잡는다고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니클로가 일본 브랜드인지 몰랐다. 올랜도 블룸과 평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인 샤를리즈 테른이 유니클로 전면광고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자연스레 ‘영미권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광고효과가 있었나 보다’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외국인 친구의 말로는 “싸고 품질로 괜찮아서 입는 거야”라고 했다.

 

어쨌든 지금도 대구 동성로의 유니클로 매장은 늘 사람으로 붐빈다. 그리고 큰 아울렛에 입점한 유니클로 매장도 꽤나 인기가 많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유니클로의 인지도는 상당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책 「유니클로 제국의 빛과 그림자」는 처음의 책소개와 표지의 부제만 봐서는 유니클로에 대한 대단한 심층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원료 조달에서 제조 및 소매까지 한 회사가 해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인 SPA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 GAP과 ZARA, H&M 모두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의 결과라 생각한다.

사실 소비자는 그렇게 질이 떨어지지 않는 제품을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만원짜리 셔츠와 3만원짜리 팬츠를 사며 중국과 동남아에서 착취 받는 노동자의 고단함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유니클로의 저렴한 셔츠와 팬츠를 구매하는 자신조차도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여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하도급 노동자 내지는 근로자이기 때문이다.

 

“야나이 회장은 함께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나이 회장의 방식은 함께 일하는 사람을 탈나게 만들죠” (p.112)

 

“매장에 나올 때는 사내 규정상 항상 유니클로 옷을 입었지만, 쉬는 날에는 유니클로 옷에 손도 대기 싫었어요” (p.175)

 

“중국에서는 경비가 오르고 있는데 유니클로의 매입 가격은 최근 수년간 내려가고 있다. 생산 현장을 효율화하는 것만으로 이를 채우기는 너무 어렵다.” (p.193)

 

 

그래서 이 책을 쓴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유니클로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이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일본의 유니클로 매장에서 힘겹게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시급이 우리 돈으로 만원 가까이나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편의점에서는 이보다 반도 안 되는 시급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그들의 고충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유니클로 제품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한 취재도 한국인인 내게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국의 내놓으라 하는 의류 브랜드 대부분의 제조 공장은 이미 제3세계 국가에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유니클로의 중국 현지 생산 공장에서의 불합리와 열악한 환경 보다는 나을 거라 기대하는 이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나 또한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이 책은 일본 독자들이 많이 봐야 한다.

그래야 더 피부에 와 닿을 내용이다.

 

비슷한 디자인과 품질의 티셔츠가 있다면 나는 고가의 한국 브랜드의 티셔츠나 미국 브랜드의 티셔츠가 아닌 유니클로의 저렴한 티셔츠를 구매하겠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물론 초고가의 외국 브랜드 티셔츠를 사 입을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은 그것을 구매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한 번씩 언론에서 “한국은 명품의 천국”, “명품 매장 장사진”, “외국보다 더 비싼 가격의 명품 한국의 백화점에서는 불티나게 팔려”등의 보도를 보면 어이가 없다.

결국,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저런 현상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자기 돈 주고 자기가 사 입는다는데 누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나. 언제는 앞 다투어 소비를 조장하고 입고 먹고 두르는 것의 값어치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값어치가 되는 현실을 수수방관 하던 자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나.

 

그래서 「유니클로 제국의 빛과 그림자」가 어떻든지 간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유니클로의 제품을 구매할 것이다.

예쁘고 질 좋은 제품을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아름다운 현실을 굳이 참아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찬란한 성공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은 유니클로 말고도 한국에도 수두룩하다.

이름을 거명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재벌들과 자동차, 조선회사들, 언론사들 등등

 

최소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고 이런 책을 쓰는 사람과 인터뷰를 한 유니클로 회장의 배짱과 아량 또한 한국의 현실과는 차이가 많다.

 

한국에서는 거의 금기시 되어 있고 성역과도 같은 존재들 아닌가.

특히 세 개의 별.

온갖 편법과 비리와 악행에도 여전히 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

세 개의 별. 그들.

 

그들에 비하면 차라리 유니클로는 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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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리, 잠든 교실을 깨워라
리처드 위트마이어 지음, 임현경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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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메이저리그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MLB.com(메이저리그 공식 웹사이트)을 들락거린다. 30개의 팀이 어느 주, 어느 도시에 있는지 구글 검색을 해서 캡처해 둘 정도다. 팀의 주축선수가 누구인지 매년 관중 동원 순위는 어떻게 되는지도 주요 관심사다.

[Washington Nationals]라는 팀이 있다. 200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연고 이전을 하면서 팀명도 바꾸게 된다. 그 때 ‘팀이름이 내셔널스가 뭐야~ 수도를 연고로 두고 있다고 그런가? 참 팀이름 촌스럽네~’생각했다. 내셔널스는 전신인 엑스포스가 그랬던 것처럼 늘 하위권을 맴도는 팀이었다. 수도를 연고로 하고 있는데 여전히 팀의 성적이 부진하고 관중 동원이 잘 되지 않는 것이 궁금했다. 우연히 내셔널스 경기를 중계해주는 캐스터의 입에서 “워싱턴에는 흑인 수가 월등히 많죠~!”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는 사람, 권력, 돈, 힘이 모두 모이는 곳인데 그래서 오죽하면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는 말도 있는데, 전 세계의 중심·전 세계의 주인인 미국의 수도에 백인보다 흑인이 훨씬 많다니. 이상했다.

 

이 책 「미셸 리, 잠든 교실을 깨워라」를 읽으며 워싱턴D.C.와 미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물론, 마음에 두고 있던 궁금증도 해소됐다.

 

워싱턴 D.C.가 미국의 수도이고 미국 입법·행정·사법부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산업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인구 구성의 70%이상이 흑인이고 빈부의 격차와 학력의 격차가 주변 대도시권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 그리고 다른 도시들처럼 주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연방정부에 의한 지원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싱턴 D.C.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97퍼센트가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p.172)

 

가장 심각한 것이 교육문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사람이 바로 미셸 리 교육감이다. 몇 해 전 한국에서는 ‘한국계 교육감 미셸 리’라 해서 앞 다투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교육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에 있어서 그녀의 생각과 내 평소 생각이 일치했다.

나는 한국의 공교육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교사의 정년 보장’이라고 생각한다. ‘철밥통’이라는 직업인식이 깨지지 않는 이상 공교육 문제의 해결은 요원한 일이라고 본다. 50·60의 나이인 교사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사들의 구태의연하고 반복되는 교수방식과 내용이다. 긴장감이 없으니 가르치는 것도 아이들 상담하는 것도 대충대충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사가 더 많을 거라 희망을 가져보지만 아이들에게 직접 듣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더 심각하다.

 

“교육제도를 떠받들고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기둥은 바로 고정 급여, 종신 재직권, 근속 연수입니다. 하지만 교수 능력, 성적에 대한 책임, 실력의 토대 위에 교육제도를 바로 세우지 않는 이상 성공할 수 없습니다.” (p.106)

 

“웨인가튼을 비롯한 미국 교원노조 지도부가 보기에 미셸 리는 도심 지역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면 실력 없는 교사들을 쓸어 없애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기회주의적인 교육 개혁가들의 우두머리였다.” (p.173)

 

미셸 리가 진단하는 워싱턴D.C. 교육제도의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미국의 수도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사회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 요소인 읽기와 숫자 셈에 있어서도 미 전국 최하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학생’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교육시스템’이라고 진단했다.

나는 미국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는 학교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상의 미국 학생들과 교사들은 격의 없는 대화와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 뭔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교실의 모습 등이었다. 수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모든 수단과 방법과 힘을 동원해 아이를 미국에 유학 보내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낯선 진단이었다.

물론, 책을 통해서 미국은 각 주와 도시마다 교육수준이나 환경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흔히들 이해하고 있고 예상하고 있으며 기대하고 있는 장밋빛 학교의 모습이 100% 진실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약 4년 동안 워싱턴 D.C. 교사들 중 대략 절반이(해고,사임,퇴직 등으로)자리를 떠났고, 교장 중 3분의 1이 해고당해 워싱턴 D.C.를 떠났다.” (p.300)

 

미셸 리는 과감히 철퇴를 가했다. 시의원과 강력한 힘을 가진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낸다. 학생 수도 없이 교육예산만 깎아먹는 학교를 폐교하고 무능한 교사들의 자리를 없애버렸다.

 

잠깐 머무르다 떠나는 교육감들은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변화를 일구어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p.36)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학교가 변했다. 도저히 수업환경 조성이 되지 않았던 공립초등학교의 분위기가 바뀌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교사들의 수업으로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시장, 시의원, 교육청 직원,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좋아할 일이었다. 하지만 확연한 반대를 이겨낸 정책들은 예상치 못했던 지속적이고 졸렬할 정치적 공세에 탱크같이 밀어 붙이던 그녀도 질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미셸 리의 논리도 인종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워싱턴 D.C. 유권자들에게는 소용없었다.” (p.251)

“왜 가장 먼저 ‘자신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냐’는 것이 아마 시의원들의 본심이었을 것이다.” (p.255)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한국에는 미셸 리 같은 교육감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진보적 교육감이 몇 명 등장하기는 했지만 무상급식 같은 당연한 논리조차도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빨갱이라 공격받는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교육문제 관련 책이 출간되고 수많은 해결책이 난무하지만 ‘교사 정년제 폐지나 무능 교사 해지’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제 살 깎아 먹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공론화와 진단·해결 방안이 없는 이상 쏟아지는 정책들은 ‘모래위에 쌓는 성’일 뿐이다.

또한 정치적 분위기에 가장 먼저 휘둘리는 것이 교육 정책인 한국에서 정치권 눈치 안보고 정말 아이들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두둑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나올 리 만무하다.

 

미셸 리가 한국에서 교육감을 했다면 절대로 워싱턴D.C.에서 했던 것처럼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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