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혼종성 - 뒤섞이고 유동하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
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 이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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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혼종성(Cultural Hybridity)라는 단어는 낯설다. 하지만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 혼종성은 상존하고 있다.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분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내가 가진 의식 구조 안에서는 혼종성이 다문화주의의 하위개념인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 「문화혼종성」에서는 분명히 혼종성과 다문화주의를 구별 짓는다.

 

다문화주의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하나의 퍼즐판 안에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조화의 개념’이라면 혼종성은 ‘실재하는 개별적인 문화·집단이 한쪽으로 흡수·통합·모방·적응하면서 계속해서 진행되는 보편적인 문화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책을 두 번 읽으며 나름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혼종성’이라는 용어는 ‘미친 듯이 유연하다.’고 평가받아 왔다.” (p.59)

“혼종화 과정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문화적 경향에만 한정했다.” (p.17)

 

 

 

다문화주의

나의 이전 리뷰나 포스트에서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가깝게 지내는 몽골가족이 있다. 부부인 민데형과 디마누나, 딸 너모 이렇게 세 가족이다.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8년 몽골여행 때 민데형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부터이다. 그때의 여행 중 가장 놀랐던 것은 민데형의 외모였다. 몽골여행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중 봤던 몽골 남성의 일반적인 외모와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체격도 좀 왜소하고 눈도 크게 쌍꺼풀도 짙어서 동남아 남성의 외모와 비슷했다. 다음 번 여행에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는데, 민데형의 고향은 몽골의 서북쪽 카자흐스탄 국경 인근이었다. 그 곳에는 지리적인 특성 상 카자크족이 많은 데 자신이 카자크족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반만년 단일민족의 역사만을 배워온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몽골이라는 한 나라 안에서도 수많은 종족이 상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울란바타르 시내를 가보면 외모가 많이 다른 몽골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여러 민족이 한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문화주의다.

단지 혈통·인종만이 아니라 유럽의 경우 한 국가 안에 극좌인 공산당부터 극우인 파시스트당까지 국회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이 다문화주의의 개념이다.

 

 

 

혼종성

혼종성도 다문화주의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많다. 먼저 책에 소개된 것은

 

“대중음악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통 요소의 조합이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재즈이고, 브라질 음악 역시 잘 알려진 사례이다.” (p.43)

 

음악이다. 이 책에서는 혼종성의 여러 하위개념 중 문화적인 측면에만 집중하고 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재즈의 근원은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재즈의 근원이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음악과 부딪히고 협상하면서 “문화적 혼성”을 일으킨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태동된 그 음악과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태동된 그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만들어 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계속 진행되며 새롭게 혼종된 재즈라는 음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형·발전 되는 것이다.

 

“마테오리치는 그가 전파하려는 종교 사상이 중국인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유교 학자의 복장을 입었고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 제사 관습을 종교 의식이 아닌 사회 풍습으로 해석함으로써 개종자들이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p.71)

 

유명한 마테오리치는 중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중국의 문화와 혼종된 것이다. 그래서 혼종성의 개념이 갖는 주요한 특징은 ‘제국주의적 지배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에의 동화’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마테오리치의 행위는 책에서 분석하는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직접 그들의 복장을 입고 그들의 고유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고 모방해 적응하는 것은 분명한 ‘혼종성’의 개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단순한 용어로 사고해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콜럼버스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p.68)

 

사고의 구조를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맥도널드는 우루과이에서[달걀을 깨어 삶아서 얹은] 맥우에보(McHuwvo)를, 멕시코에서는 맥브리토(McBurrito)를, 인도에서는[소고기를 양고기로 대체한] 마하라자 맥(Maharaja Mac)을 판매한다.” (p.83)

 

몽골과 네팔, 체코의 프라하, 독일의 드레스덴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어 보았다. 전 세계 매장에 공통적으로 있는 세트메뉴를 시켜 먹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된 맥우에보나 맥브리토 같은 그 나라 고유의 혼종된 맥도널드는 먹어보지 못했다. 메뉴에 있었으나 내가 찾지 못했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우루과이와 멕시코, 인도의 혼종된 맥도널드 메뉴는 또 하나 ‘문화혼종성’을 이해할 수 있는 포인트를 제공한다.

맥도널드라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음과 동시에 각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 또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독립적인 문화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p.154)

 

우리가 사는 현재는 이미 전 지구화된 사회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부터 들었던 것이 ‘글보벌화, 세계화’라는 단어들이다.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은 문명의 고도화와 첨단화를 가져왔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지 않아도 내 손안에서 뉴욕을 검색할 수 있고 런던의 뉴스를 볼 수 있다.

내 책장에는 한국의 작가가 쓴 책만큼 외국 작가가 쓴 책이 꽂혀 있다. 미국, 폴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웨덴, 일본, 스페인, 터키, 이집트, 독일 등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기 때문에 한국어로 그들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먹고, 입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서 단일한 한국만의 것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은 미래에 더 심화될 것임도 분명하다.

 

반 만 년 단일민족이라는 개념도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 엄청난 숫자의 결혼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 존재하고 외국인 근로자도 많은 숫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립적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뒤죽박죽의 결과라고 얘기한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각 문화가 경계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 언제든지 혼종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내포되어 있다. 그 경계가 급격히 무너질 것인지, 서서히 무너질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미래의 지구 문화에 대한 주요한 가능성 혹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문화적 균질화’ 이다.

 

두 번째는 저항 혹은 ‘반(反)-전지구화’ 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국가 단위의 지역역사수업, 아일랜드어나 바스크어 의무 수업 등 지역 문화와 지역정체성에 대한 강조와 교육이 실시되고 있지만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앞서 말한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문화적 양층언어’ 이다. 이것은 전 지구적 문화와 지역 문화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에는 전 지구적 문화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이중 문화권 내지는 복수의 다중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비극으로 끝맺지 않도록 여전히 우리(자신)만의 지역 언어를 유지함으로써, 세계 문화에 참여하는 동시에 지역 문화를 보존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네 번째는 ‘새로운 혼합체의 등장’ 이다.

요약하자면, 지금 현재 경계의 영역에 있는 각 문화 간 혼종이 점진적으로 계속되고 이 혼종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 간 배치는 결국 재배치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혼합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크레올’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원래 ‘크레올’은 [신대륙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과 프랑스인의 자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수세기에 걸친 문화 혼종화를 대체하는 개념이 ‘크레올’이었다면 미래의 그것은 ‘새로운 혼합체’ 즉, ‘새로운 크레올의 등장’이다.

 

“새로운 질서의 탄생, 새로운 지역유형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결정화” (p.172)

 

지금까지와는 다른 문화적 현상을 예견한다. 가시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고 등장했었다.

 

분명 ‘다문화주의’의 개념과는 다른, 그 개념을 탈피한 ‘혼종성’의 개념일 것이라 주장한다.

“콘비벤시아(convivencia) ‘공존’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동안 이슬람교도, 유대인, 기독교도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며 상호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통치가 시작되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이 성공을 거두어 1492년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보루였던 그러나다까지 탈환하면서 이 시기는 막을 내리며, 이때부터 대대적인 이슬람교도·유대인 박해와 추방이 이루어졌다.” (p.123)

 

지금은 극도로 대치되어 갈등하는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기독교도가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일정 지역에서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평화롭게 공존했던 문화사적 배치가 존재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문화적 혼합체는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새로운 문화로 재배치되었다.

 

이후 7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미래에 펼쳐질 다변적인 문화의 양태가 저자의 주장처럼 ‘혼종성’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저자가 비판하는 ‘다문화주의’의 개념으로 전개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미래’라는 것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도 하나의 학설일 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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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개의 별
김광호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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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 영화를 보면 CIA요원들은 참 멋있게 나온다. 반대로 FBI나 경찰은 야비하고 거만하게 그려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보요원, 스파이, 이중간첩 따위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도 남는다.

 

한국의 국정원은 군사독재시절 독재자와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강압적·폭압적인 고문과 의문사 등으로 점철되어 온 역사가 있기에 국내에서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중앙정보부, 안기부는 단어만으로도 굉장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몇 개의 신분과, 직업을 가지고 극비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 내부의 모습을 알고 싶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예전 독재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개혁진영의 정부10년이 흐른 지금의 정부에서는 또 다르게 국정원의 모습이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52개의 별」을 쓴 작가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 정권 시절 국정원에서 일했던 요원이다. 반 세기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정권은 북한과의 갈등 해소와 위기 제거를 위해 힘썼기 때문에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정권에서는 예전의 그 국정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테지만.

실제로 국정원에서 근무를 했었고 주요 모티브가 되는 남북장관급 회담도 역사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인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민주정권이 들어서고 그 정권의 임기말에 그간 해 놓은 대북정책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 남북장관급 회담이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노선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당시 남북기류는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기도 한 대북화해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중국에서 남북장관급 회담을 하기에 이른다. 국정원 내에서도 촉망받는 요원이었던 주인공은 이 회담의 전반적인 안전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이 회담만 잘 마무리 지으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 터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회담에서 북측회담 인사로 참석한 고위급 인사 김만길의 갑작스런 망명요청을 듣게 된다.

 

“나는 국정원 요원으로서가 아니라 양심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판단을 내렸다.” (p.243)

“정말로 나 때문에 잰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내게도 명분은 있었다.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김만길을 끝까지 지켜내야 했다.” (p.252)

 

남북장관급 회담 중 북측인사의 망명요청은 자칫 회담파기는 물론 남북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중대사안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상관과 국정원, 청와대의 지시를 기다리지만 결국 망명요청을 미루고 회담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국정원 정예 요원이던 주인공은 여기서 국정원과 청와대의 지시를 무시하고 김만길의 망명을 돕는다.

회담 전 북경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결국 그 동창생은 CIA요원임이 밝혀지고 이 모든 과정이 미국측의 철저한 계산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매너 좋은 미국인 지점장의 사심 없는 호의라는 말을 믿기도 했다. 그것이 내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191)

“김만길 국장의 망명을 유도해서 전쟁을 발발시키려는 것이 CIA의 전략이었던 건가요?”

“대답할 수 없습니다.” (p.283)

 

아프간을 침공하고 공식적으로 북한을 적대국가·불량국가라고 떠들어 댄 미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제외한 채 남과북이 물밑에서 회담을 진행하고 제3국이자 유일한 자신들의 라이벌인 중국의 도움을 받아 성과를 꾀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국정원 정예요원이기 이전에 뜨거운 인간애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도움과 호의를 베풀려 했던 주인공의 용기와 희생은 결국 뉴스 한 줄 나지 않고 끝나 버린다.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CIA가 모든 것을 백지화 시켜 버리고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한국에 돌아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고 결국 국정원에서 사임하게 된다.

CIA의 계획에 넘어가 한국으로 망명하려 했던 김만길은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의해 압송된다.

 

“나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혼자 싸웠던 것인가. 그냥 돈키호테 같은 기행을 벌였을 뿐인가...” (p.303)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내에게조차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았던 주인공에게 아내는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국정원 요원이기에 가족에게조차 자신을 숨기며 희생하고 헌신 봉사했지만 한 순간의 돈키호테 같은 기행으로 인해 국가에게도 버림 받은 것이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

 

소설은 여기까지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난픽션인지 알수는 없지만 정보기관 특유의 날선 긴장감과 복잡미묘한 사건 전개 등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것 같다. 하지만 국정원 요원이라는 작가의 전직 자체가 주는 호기심이 크고 실제 했던 역사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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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지는 사람들 -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셰리 터클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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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나도 열광했다. 486, 8282 등은 삐삐용어다. 비오는 밤 괜히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모르는 삐삐 번호가 뜨면 공중전화까지 뛰어간다. 줄지어 서서 기다리며 ‘누굴까? 누굴까?’하는 마음에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수화기를 들고 삐삐 번호와 비밀번호를 듣고 저장된 메시지를 듣는다. 이런 젠장~!! 모르는 아저씨가 잘못 보냈다. 다시 비를 맞으며 자취방까지 뛰어간다.

 

대학 1학년 때 나는 삐삐를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 중 씨티폰을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휴대폰이 나왔다. 더 큰 충격이었다. 걸어 다니면서 자유롭게 통화한다는 개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가끔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냉장고만 한 휴대폰이 아니었다. 손바닥 안에 쏘옥 들어오는 말 그대로 휴대할 수 있는 전화기였다. 폴더폰이 나오더니 슬라이드 폰이 나오고 사진 기능도 탑재되고 더 작아지고 더 얇아지고 인터넷도 할 수 있게 되더니 얼마나 똑똑하고 편리하면 이름이 ‘스마트폰’인 휴대전화도 나오게 되었다.

 

                             (이 책에 많이 등장하는 "블랙배리" 스마트폰)

 

“오늘의 젊은이들은 온전히 묶인 삶에서 네트워크와 더불어 성장했다.” (p.85)

“10대들은 자신을 등교시키려 운전을 하거나 함께 디즈니 비디오를 보는 와중에도 모바일 기기를 끌 줄 모르던 부모와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p.238)

 

아주 어린, 세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능숙하게 엄마의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TV의 “~~가 달라졌어요.”에서 코칭을 해주는 전문가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강하게 말했다. 밥을 먹을 때도 소파에 앉아 있을 때도 가족여행을 왔을 때도 심지어 운전을 할 때도 스마트폰을 사용해 메시지를 보내고 인터넷을 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폰 만지지 마라. 폰 수거할 테니 가지고 와라.” 라고 하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 당연하다.

 

“스마트폰, 인터넷에 하루 종일 접속해 있는 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새롭고 자유로우며, 다른 면에서는 새롭게 얽매인 상태다. 우리는 지금 다 사이보그들이다.” (p.53)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젊은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다들 자신의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식당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등산 중에도!!! 스마트폰에 접속해 있는 것이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 있다.’ 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스마트폰에 빠져 산다. 책에서 말한 대로 사이보그들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로봇에 관한 책이 아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접촉하는 행위의 대체물을 테크놀로지가 제공할 때 우리가 어떻게 변하느냐를 다룬 책이다.” (p.34)

“우리가 테크놀로지를 만들면, 그 다음에는 테크놀로지가 우리를 만든다. 그러므로 모든 테크놀로지에 대해 우리는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의 인간적 목적에 부합하는가?’ 이 목적이 무엇인지를 재고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p.47)

 

 

 

이 책 「외로워지는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로봇에 대한 책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를 30년 넘게 연구해 온 저자의 연구 결과가 담긴 책이다. 도저히 인간의 의식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편의성과 자극에 따라 인간의 의식과 행동 나아가서는 집단이 어떻게 변하느냐를 다루는 책이다.

 

그래서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는 수많은 실제 사례가 담겨 있다. 저자의 30년 동안의 연구 결과에 대한 산 증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내 얘기, 내 친구 얘기 같은 느낌이 들어 신뢰가 갔다. 물론, 대부분의 사례가 미국인들에 대한 것이지만 동일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유대가 가능하기에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다.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겠지만, 테크놀로지를 만드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테크놀로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효용과 가치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공감한다.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주체와 객체에 대한 혼동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책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SNS와 (사교)로봇에 대해 살펴본다.

 

 

 

1. SNS

사실 나는 슬로우어답터라고 할 수 있다. 모두들 스마트폰에 난리가 났을 때에도 여전히 4년 째 쓰던 폴더폰을 쓰고 있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놀려 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내 삶에 크게 유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초 아끼던 디지털카메라를 분실한 후 새 카메라를 살까 고민하다가 디지털카메라 정도의 해상도를 탑재 한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일단, 사진을 찍기 위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수고를 안 해도 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잠깐 하기는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9/11의 상흔은 연결성 문화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다. 세계무역센터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사람과 통신에 대한 전례 없는 수준의 감시를 받아들였다……. 휴대폰은 신체적·정서적 안전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무역센터 폭격 이후, 그 동안 자녀에게 휴대폰을 사줄 이유를 찾지 못했던 부모들이 한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바로 지속적인 접촉이다.” (p.205)

 

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만 휴대폰과 SNS에 빠져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9/11의 상흔과 휴대폰을 통한 지속적인 접촉의 상관관계를 이 정도로 설득력 있게 분석한 글은 보지 못했다.

 

                                                        (대표적인 SNS "플락소")

 

“미국인들이 갈수록 불안해하고 고립되고 외로워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물리적 유대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연결성은 자기만의 페이지,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p.61)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하릴없이 여기저길 기웃거리죠.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뭔가를 놓치게 될까 봐’ 겁이 나서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불안은 새로운 연결성의 일부다.” (p.197)

 

 

단지 미국인들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점점 외부로부터 차단되고 자신만의 페이지와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 앉은 사람에게 현실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마이스페이스, 플락소 등 많은 SNS페이지는 현실의 나를 포장하고 위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매개가 된다. 현실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이겨낼 수 있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나만의 대화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늘 마음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이 SNS와 연결된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사진을 찍어서 내 SNS페이지에 올린다. 기쁜 일 슬픈 일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도 SNS의 소재가 된다. SNS를 하는 사람 중 모두가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내 페이지에 댓글이 얼마나 달리는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이 불안이 새로운 연결을 낳는다.

 

                                                            (게임 "세컨드 라이프")

“‘진짜’ 아내인 앨리슨한테 불안한 심경을 털어놓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제이드에게는 말할 수가 있다……. 제이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내 경혼 생활과 가정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p.65)

 

SNS뿐만 아니라 리얼게임의 경우도 그렇다. 이 분야는 한국에서는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았는데 미국의 세컨드 라이프나

 

                                                    (리얼 게임 "더 심즈 온라인")

 

더심즈온라인(세컨드 라이프의 청소년 버전) 같은 리얼게임 같은 경우에는 SNS의 ‘내 페이지’를 더 심화시킨 개념이라 보면 된다.

 

내가 아닌 가상의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실생활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나와는 또 다른 내가 온라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아내 앨리슨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세컨드 라이프에 있는 아내 제이드에게는 모두 털어놓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2. 로봇

 

“하워드는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감으로도 로봇이 멀찍이 앞서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위험해요. 로봇은 안전하고요.’” (p.305)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다마고치, 퍼비, 아이보, 마이리얼 베이비)

 

초등학교 때 다마고치가 처음 나왔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도 나는 이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유치하게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사실 속내는 별 다를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특히 여자 아이들이 다마고치에 푹 빠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로봇공학자들은 좋은 의도에서 그들의 발명품이 인간관계 기술을 연습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p.348)

 

퍼비나 마이리얼베이비, 아이보 같은 로봇은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사실 한국이 로봇공학 분야에서는 한참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져보지는 못했지만 책에 소개된 수십 편의 사례를 읽으니 마치 직접 내가 퍼비와 놀고 마이리얼베이비를 키우고 아이보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온 느낌이다.

 

저자의 말대로 로봇은 인간을 돕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로봇은 의료분야 뿐 아니라 군사무기, 자원탐사, 방송분야 등 수많은 분야에 이미 진출해 인간을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사교로봇에 대해 다룬다. 정말 로봇의 탄생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로봇분야라 할 수 있다.

 

                                             (노인들의 친구가 된 로봇 "파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노인들이다. 이 로봇은 보살핌을 요구하는데, 노인들은 이로써 자신들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p.388)

“그들은 이주 노동자들에게 노인을 돌보게 하는 대신 그 일을 할 로봇을 제작하기로 했다.” (p.389)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로봇은 일본에서 만든 로봇 ‘파로’이다. 주로 보살핌이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물론, 어린아이들과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로봇이다.

 

“‘엘리자 효과 ELIZA effect (컴퓨터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와 비슷하다고 무의식적으로 가정하는 경향)” (p.457)

 

‘파로’의 효과는 엄청났다. 실의에 빠지고 의욕이 없던 요양원의 노인들의 표정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다. 자연스레 삶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파로’가 마치 살아 있는 동물, 내지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엘리자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파로’가 없을 때 극도의 불안 증세를 나타내고 마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깊은 슬픔에 빠지는 노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인간이건 인간이 아니건 간에,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존재와 관계를 맺어선 안 될 이유가 뭔가?... 다음 세대는 다양한 종류의 관계에 익숙해질 것이다. 애완동물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로봇과의 관계 등, 로봇한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수많은 선택지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p.411)

 

그렇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로봇공학자, 테크놀로지학자, 인문·사회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주제라고 말한다. 30년 넘게 이 분야를 연구해 온 자신도 이 물음에 대해 시원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노인들을 돕기 위해 만든 ‘파로’는 결국 인간이 느끼는 복잡다단하고 오묘한 감정의 층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거의 복제할 수 있는 로봇이 만들어진다면 엘리자효과이건 나발이건 노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옆을 지키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결국, 테크놀로지 발전의 심화가 가져온 결과의 책임도 그것을 만든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이다. 앞으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의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 가지를 제시한다.

 

“‘리얼테크닉 realtechnik’ 이라 부르는 접근법은, 직선적 진보에 회의적이다. 문제점에 직면해 거리낌 없이 결정을 재검토하는 마음 상태, 겸허한 태도를 권장한다.” (p.476)

“네트워크한 문화는 역사가 매우 짧다. 탄생을 지켜본 우리는 그 모험의 세계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이게 인간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네트워크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서로를 등한시한다. 테크놀로지를 거부하거나 폄하할 필요는 없다.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다.” (p.477)

 

테크놀로지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자는 저자의 지적에 100% 동의한다. 너무 멀리 가 있는 테크놀로지의 비약을 목 아프게 고개 들고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다시 제자리로 가져와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결코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준 효용과 가치를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어찌됐던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네트워크한 역사는 정말 짧다. 탄생을 주도한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멀어져 부작용이 더 부각된 지금의 양태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적인 기술’ -리얼테크닉-의 개념처럼 직선적으로 팽창하고 솟구쳐 오르던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수백, 수천억 원의 개발 비용을 들여 만든 스마트폰과 로봇이라 할지라도 -리얼테크닉-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판단되면 올스톱하고 되돌려야 한다. 물론, 실제 개발을 하는 기업과 국가에서 그것을 받아들일지 확신할 수는 없다. 이것도 결국 인간들의 문제이다. 인간의 몫이다.

 

“우리는 더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테크놀로지의 운영 방식을 정하는 게 바로 우리 자신임을 상기할 때 분명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p.479)

 

좀 더 윤택하고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의 마음이고 꿈이다.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인 테크놀로지는 운영주체인 우리, 인간의 가치판단의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이라 자신들의 몫이다.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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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다 - 정공 스님 대담집
정공.진대회 지음, 임재규 옮김 / 바람과우레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정공스님은 중화권에서는 꽤나 유명한 스님인가 보다. 자신이 불교의 스님이라고 해서 꼭 불교 경전에만 묶여 있거나 불교의 교리가 최고라 우기지 않는다. 이 책 「화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다」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 경전이다.

 

 이른 바 동양사상으로 표현되는 것인데 이것은 수십 년 전부터 서양의 사상계가 주목한 흐름과 일치한다. 정공 스님은 동양 사상 중에서도 [논어]와 [맹자]의 가르침을 가장 우위에 두고 있다. 현재 중국 내의 여러 가지 문제와 전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인간성 상실, 재해·재난, 전쟁과 테러 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나름의 시각과 해석으로 제시한다.

이 책은 CCTV저명 사회자 진대회씨와 정공스님이 나눈 대담을 묶은 것이다.

 

“쓰촨대지진 3일 전에는 지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셨습니다.” (p.23)

“대만의 9.21 대지진”

“쓰촨 대지진의 와중에도 안훼이성에서는 진동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선업을 쌓았기 때문에 지진의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p.77)

 

몇 해 전 엄청난 재해였던 쓰촨 대지진에 대해서 정공스님이 미리 언급을 했다는 것이었다. 쓰촨 대지진뿐만 아니라 일본 쓰나미와 미국 경제위기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예언하고 미리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며 ‘뭐야~’했는데 정공스님이 자신의 예언을 통해 유명해지고 TV에 출연하는 따위의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비하고 다음번에 닥칠 재난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규모 법회를 열거나 정치·경제 지도자들을 만나 메시지를 던진다. 철저하게 메신저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책에 실린 대담 내용은 자칫 마음을 닫고 보면 유치한 노인의 말장난으로 밖에 들리지 않고 하나마나 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 나도 그랬다.

 

“전염병의 발생까지 포함해서 매우 엄중한 재난이 생기겠지요. 이 모든 것이 중생들이 지은 악행의 업보입니다.” (p.107)

“가정에 언청이 같은 장애아가 생기는 경우도 과보입니다. 부모에게 선하지 않은 업이 있는 경우입니다.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아이는 점차 좋아질 것입니다.” (p.117)

“아무런 이유 없이 저를 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또한 전생에 지은 업 때문입니다.” (p.151)

“남이 원한을 가지고 나를 대하더라도,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를 대하십시오. (p.154)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든지 혹은 이외의 사고를 당해 죽습니다. 과보입니다. 우연이란 없으며, 모든 것이 인과응보입니다.” (p.175)

 

전염병, 장애, 나를 해치는 사람, 원한, 자동차 사고, 갑작스런 죽음 모두 악행의 업보이고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며 우연이 아닌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이처럼 패배주의적이고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자세가 어디 있을까? 그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들으며 내게 닥친 시련과 아픔과 상처는 모두 ‘내 탓이려니~’하는 자세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기질과 내 가치관 상 책에서 이런 부분을 읽었으면 당장 집어던졌어야 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넓게 펼치면 다른 생각도 가능했다. 전염병, 사고, 죽음과 같은 자극적인 단어의 소재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고민이 소재가 된다면 인식의 폭을 넓히고 무조건 ‘이 책 뭐야!!’ 라는 반응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흔히 내게 닥친 문제와 시련, 나를 힘들게 하는 고민이 ‘나 자신’ 아닌 ‘상대나 외부’에서 이유를 찾고 원인을 찾기 마련이다. 그래야 덜 억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상대나 외부’로부터 이유와 원인을 찾으면 또 그 과정이 반복될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제쳐둔 채 나 이외의 것에만 골몰하게 되면 다음번에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정공스님의 다소 황당한(?) 주장도 이해가 갔다. 물론, 100%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한 60%?^^

 

“재난은 끝이 아니고 시작일 뿐이며 매년 더 심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업을 짓는 사람이 날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윤리와 도덕을 회복할 때, 이런 재난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p.197)

 

우리가 닥친, 앞으로 닥칠 세계적 위기를 풀어내는 방법 또한 명백하게 된다. 정공스님은 불교에 동양사상을 가미해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그 원인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과 오만이라 한다. 동양사상의 보고인 중국 마저도 이제는 자신들의 전통사상을 배척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동양사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행동 양식과 가치 판단은 바꾸지 않기 때문에 서양이 저질러 온 역사의 업으로 인해 앞으로도 엄청난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 한다.

 

모든 재난은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진다.” (p.46)

“‘여러분, 화를 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화를 낼 때마다 지구 온도는 상승합니다.’” (p.72)

“불경에서는 생각의 속도를,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 파동은 일시에 온 우주를 가득 채우게 된다.” (p.72)

 

사실, 정공스님의 해답은 간단한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내지 말라. 스스로 화를 내지 말라. 너무나도 쉬운 해결책이라 선뜻 동의되지 않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또 이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나는 하루에 얼마나 화를 낼까?를 생각해 보았다. 얼굴 표정, 속마음까지 다 포함해서 생각해 보니 20∼30번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정공스님의 주장대로 나 한사람의 화가 나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킨다는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나는 지구 온도 상승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답은 화해의 마음입니다. 화해의 마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p.266)

 

최종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화해의 마음이다. 나 자신과 화해하고, 상대방과 화해하고, 자연과 화해하고, 집단과 화해하고, 동·식물과 화해하고 결국 우주와 화해하는 것에 이르기를 바라는 정공스님의 마음이 책 속에 가득하다.

 

책의 말미에는 이러한 화해의 마음을 갖기 위한 정공스님의 간편 수행법이 예시되어 있다.

 

 

 

그림에서처럼 하루9회에 걸쳐 ‘나무아미타불’을 매회 10번씩 외우라는 것이다. 이것이 염불 수행인데 원효 대사도 강조한 바가 있는 것이라 한다. 마음속으로 외우는 것보다 소리 내어 외우는 것이 더 효과가 좋다고 덧붙인다.

 

매일 9회씩 ‘나무아미타불’을 10번씩 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 3번 기도를 목숨같이 지키는 이슬람 신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 노력이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수행한다면 적어도 ‘나 자신과의 화해’는 꼭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맞지 않는 수행법이라 실천해보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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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김제동 지음 / 위즈덤경향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나는 남이 가진 것을 별로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질이 그렇게 생겨먹은 탓도 있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가정교육 탓도 있다. 그래서 남과 크게 비교하지 않으며 살아 왔다

.

물론, 고등학교 때 나보다 수능시험 성적이 늘 수십 점씩 낮았던 친구 놈이 어느 수능 모의고사 때 복이 터졌는지 나보다 점수가 높게 나오거나 사관후보생 시절 유격훈련 때 PT체조를 받으며 나보다 더 좋은 조교와 교관의 시선 사각지대에서 살금살금 요령을 피우던 동기 놈을 볼 때는 부러웠다.

 

그러고 보니 남이 가진 것을 많이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나는.^^;;

 

 

“생각해 보면 굉장히 축복 같은 사건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빚진 마음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p.234)

 

그리고 김제동은 참 부럽다. 그도 얘기했지만 그의 인생은 벼락같은 축복이 많았다. 대학시절 다른 학교 축제때 김제동을 처음 봤다. 무릎팍도사와 여러 책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수천 명이 모인 노천극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온 몸을 땀으로 적시며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열광하고 벌겋게 눈시울을 붉히며 감동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TV에 나오더니 일약 TV스타가 됐다. 채널을 돌려도 김제동이 나왔다. 우여곡절이 많아 지금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대중연예인이다.

촌스러운 대구사투리를 거리낌 없이 구사한다. 어설프게 표준말을 구사하려는 노력 따윈 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고 말을 잘한다.

 

                          (지상파에서 '분노하라'를 다리꼬고 읽을 수 있는 연예인이 몇 이나 될까?)

 

말을 많이 하지만 적절한 말을 한다. 트위터 글들을 보면 글도 잘 쓴다. 웃기다.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다만 원하는 대답을 요구하기보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도록 합니다.” (p.220)

정치인, 교수, 여당·야당 국회의원, 여자 연예인, 시인, 소설가, 남자 연예인, 국민 가수, 스포츠스타 등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한테 돈 준 사람들, 나한테 이런 집에 살게 해준 사람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진짜 갚아나가는 길이란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에요.” (p.251)

 

그래서 그가 좋다.

 

 

염치가 있다.

 

몰염치와 몰상식이 팽배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면서 이런 사람을 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국내에서는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까지도 공인(公人)이라는 이름표를 달아버리는데, -사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들에게 공인이라는 탈을 일방적으로 뒤집어씌우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불만이 많다. 논리적으로 억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표를 달아버리면 입을 다물어버리기 일쑤다. 괜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한방에 훅~! 가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제동은 염치가 있다. 한창 잘 나가던 때,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살고 잘 나가도 되나?’ 라는 고민을 6개월을 했다고 한다. 이건 보통의 연예인들이 하는 고민은 아니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고 ‘염치가 없는 것은 아닌가?’ 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좋다. 부럽고.

 

 

이 책은 경향신문에서 진행했던 [김제동의 똑똑똑]이라는 인터뷰를 묶은 책 2탄이다. 지난 1탄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를 읽고 리뷰를 쓸 때 내용도 좋고 다양한 인터뷰어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나는 김제동을 더 알고 싶다.’라고 썼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2탄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의 말미에는 경향신문 신동호 기자와의 심층 인터뷰가 실려 있어 더 좋았다. 염치 있는 김제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러앉아 편하게 소주잔 기울이며 터놓고 얘기한 것 같았다. 그만큼 좋았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야동을 보고 있을 때의 나,(웃음) 사회 문제에 관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의 나, 방송인으로서의 저, 그 다음에 웃음을 주는 저…….” (p.223)

“어떤 높은 사람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얘기를 했다는데 그것부터 먼저 얘기하면 안 되죠. 미안하다가 우선돼야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p.228)

 

김제동은 결코 대중보다 앞서지 않는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그를 만나면 자연스레 속내를 털어놓는 가장 큰 이유도 인터뷰어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높은 연단 위에 올라가서 훈계하고 계도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제목처럼 우리들과 어깨동무 하는 것이 전부다. 어깨 걸고 함께 울고 웃자는 것이다.

그래서 김제동이 좋다. 부럽고.

이번 책에도 많은 인터뷰이가 등장하지만 나는 마지막 김제동의 심층 인터뷰가 가장 좋았다. 그의 얘기를 더 듣고 싶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지만 벌써 동네 형이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김제동의 힘일 것이다.


염치가 있으니 가시가 없다.

그저 웃음을 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좌·우 따지고 진보·보수 따지고 이것저것 눈치보는 것이 아니라 한바탕 웃자는 것이다. 칼끝같이 서 있는 대립과 반목도 한방에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릴 웃음! 그것을 바라는 것일지 모르겠다.


비록 힘든 시간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지만 대중과 함께 어깨 걸고 웃겨주고자 한다.

김제동의 염치다.

 

리뷰 첫머리에 나는 남이 가진 것을 별로 부러워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쓰다 보니 김제동 ‘용비어천가’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뭐 아주 작은 마음이나마 보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떤 사람의 말과 생각은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의 행동과 선택이 그 사람이더라고요. 정치인들 보면 그렇죠. 줄곧 서민정책을 주장하던 정치인이 나중에 표결할 때 보면 부자감세에 손을 들어요. 그 사람 행동만 보고 판단하면 돼요.” (p.53)

 

책의 인터뷰이로 등장한 안철수 교수가 한 말인데,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어디 정치인뿐일까. 김제동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고 글은 휘황찬란하게 써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결국 악취만 진동 할 뿐이다. 모를 것 같아도 나중에는 다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루의 일상을 대하는 태도는 경건하고 겸손해야 한다. 행동과 선택은 진실해야 한다.

 

언제한번 꼭 만날 일이 있다면(왠지 한 번은 만날 것 같은 이 막연한 기대는 뭐지?^^;;) 제동이 형과 대구에 있는 안지랑에 가서 막창에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그러면 나도 조금이나마 염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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