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지는 사람들 -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셰리 터클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삐삐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나도 열광했다. 486, 8282 등은 삐삐용어다. 비오는 밤 괜히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모르는 삐삐 번호가 뜨면 공중전화까지 뛰어간다. 줄지어 서서 기다리며 ‘누굴까? 누굴까?’하는 마음에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수화기를 들고 삐삐 번호와 비밀번호를 듣고 저장된 메시지를 듣는다. 이런 젠장~!! 모르는 아저씨가 잘못 보냈다. 다시 비를 맞으며 자취방까지 뛰어간다.

 

대학 1학년 때 나는 삐삐를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 중 씨티폰을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휴대폰이 나왔다. 더 큰 충격이었다. 걸어 다니면서 자유롭게 통화한다는 개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가끔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냉장고만 한 휴대폰이 아니었다. 손바닥 안에 쏘옥 들어오는 말 그대로 휴대할 수 있는 전화기였다. 폴더폰이 나오더니 슬라이드 폰이 나오고 사진 기능도 탑재되고 더 작아지고 더 얇아지고 인터넷도 할 수 있게 되더니 얼마나 똑똑하고 편리하면 이름이 ‘스마트폰’인 휴대전화도 나오게 되었다.

 

                             (이 책에 많이 등장하는 "블랙배리" 스마트폰)

 

“오늘의 젊은이들은 온전히 묶인 삶에서 네트워크와 더불어 성장했다.” (p.85)

“10대들은 자신을 등교시키려 운전을 하거나 함께 디즈니 비디오를 보는 와중에도 모바일 기기를 끌 줄 모르던 부모와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p.238)

 

아주 어린, 세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능숙하게 엄마의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TV의 “~~가 달라졌어요.”에서 코칭을 해주는 전문가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강하게 말했다. 밥을 먹을 때도 소파에 앉아 있을 때도 가족여행을 왔을 때도 심지어 운전을 할 때도 스마트폰을 사용해 메시지를 보내고 인터넷을 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폰 만지지 마라. 폰 수거할 테니 가지고 와라.” 라고 하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 당연하다.

 

“스마트폰, 인터넷에 하루 종일 접속해 있는 생활은 어떤 면에서는 새롭고 자유로우며, 다른 면에서는 새롭게 얽매인 상태다. 우리는 지금 다 사이보그들이다.” (p.53)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젊은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다들 자신의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식당에서도 버스 정류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등산 중에도!!! 스마트폰에 접속해 있는 것이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 있다.’ 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다들 스마트폰에 빠져 산다. 책에서 말한 대로 사이보그들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로봇에 관한 책이 아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접촉하는 행위의 대체물을 테크놀로지가 제공할 때 우리가 어떻게 변하느냐를 다룬 책이다.” (p.34)

“우리가 테크놀로지를 만들면, 그 다음에는 테크놀로지가 우리를 만든다. 그러므로 모든 테크놀로지에 대해 우리는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의 인간적 목적에 부합하는가?’ 이 목적이 무엇인지를 재고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p.47)

 

 

 

이 책 「외로워지는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로봇에 대한 책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를 30년 넘게 연구해 온 저자의 연구 결과가 담긴 책이다. 도저히 인간의 의식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편의성과 자극에 따라 인간의 의식과 행동 나아가서는 집단이 어떻게 변하느냐를 다루는 책이다.

 

그래서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는 수많은 실제 사례가 담겨 있다. 저자의 30년 동안의 연구 결과에 대한 산 증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내 얘기, 내 친구 얘기 같은 느낌이 들어 신뢰가 갔다. 물론, 대부분의 사례가 미국인들에 대한 것이지만 동일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유대가 가능하기에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었다.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겠지만, 테크놀로지를 만드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테크놀로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효용과 가치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야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공감한다.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주체와 객체에 대한 혼동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책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SNS와 (사교)로봇에 대해 살펴본다.

 

 

 

1. SNS

사실 나는 슬로우어답터라고 할 수 있다. 모두들 스마트폰에 난리가 났을 때에도 여전히 4년 째 쓰던 폴더폰을 쓰고 있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놀려 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내 삶에 크게 유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초 아끼던 디지털카메라를 분실한 후 새 카메라를 살까 고민하다가 디지털카메라 정도의 해상도를 탑재 한 스마트폰을 구입했다. 일단, 사진을 찍기 위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수고를 안 해도 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잠깐 하기는 했지만 나와 맞지 않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9/11의 상흔은 연결성 문화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다. 세계무역센터 사건 이후, 미국인들은 사람과 통신에 대한 전례 없는 수준의 감시를 받아들였다……. 휴대폰은 신체적·정서적 안전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무역센터 폭격 이후, 그 동안 자녀에게 휴대폰을 사줄 이유를 찾지 못했던 부모들이 한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바로 지속적인 접촉이다.” (p.205)

 

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만 휴대폰과 SNS에 빠져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리고 9/11의 상흔과 휴대폰을 통한 지속적인 접촉의 상관관계를 이 정도로 설득력 있게 분석한 글은 보지 못했다.

 

                                                        (대표적인 SNS "플락소")

 

“미국인들이 갈수록 불안해하고 고립되고 외로워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물리적 유대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연결성은 자기만의 페이지,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p.61)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하릴없이 여기저길 기웃거리죠.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뭔가를 놓치게 될까 봐’ 겁이 나서 휴대폰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불안은 새로운 연결성의 일부다.” (p.197)

 

 

단지 미국인들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점점 외부로부터 차단되고 자신만의 페이지와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 앉은 사람에게 현실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마이스페이스, 플락소 등 많은 SNS페이지는 현실의 나를 포장하고 위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매개가 된다. 현실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이겨낼 수 있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나만의 대화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행위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늘 마음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거의 모든 부분이 SNS와 연결된다. 밥을 먹을 때에도 사진을 찍어서 내 SNS페이지에 올린다. 기쁜 일 슬픈 일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도 SNS의 소재가 된다. SNS를 하는 사람 중 모두가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내 페이지에 댓글이 얼마나 달리는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이 불안이 새로운 연결을 낳는다.

 

                                                            (게임 "세컨드 라이프")

“‘진짜’ 아내인 앨리슨한테 불안한 심경을 털어놓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제이드에게는 말할 수가 있다……. 제이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내 경혼 생활과 가정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p.65)

 

SNS뿐만 아니라 리얼게임의 경우도 그렇다. 이 분야는 한국에서는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았는데 미국의 세컨드 라이프나

 

                                                    (리얼 게임 "더 심즈 온라인")

 

더심즈온라인(세컨드 라이프의 청소년 버전) 같은 리얼게임 같은 경우에는 SNS의 ‘내 페이지’를 더 심화시킨 개념이라 보면 된다.

 

내가 아닌 가상의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실생활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나와는 또 다른 내가 온라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아내 앨리슨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세컨드 라이프에 있는 아내 제이드에게는 모두 털어놓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2. 로봇

 

“하워드는 비밀을 털어놓을 친구감으로도 로봇이 멀찍이 앞서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위험해요. 로봇은 안전하고요.’” (p.305)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다마고치, 퍼비, 아이보, 마이리얼 베이비)

 

초등학교 때 다마고치가 처음 나왔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도 나는 이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유치하게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사실 속내는 별 다를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특히 여자 아이들이 다마고치에 푹 빠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로봇공학자들은 좋은 의도에서 그들의 발명품이 인간관계 기술을 연습하는 데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p.348)

 

퍼비나 마이리얼베이비, 아이보 같은 로봇은 실제로 보지는 못했다. 사실 한국이 로봇공학 분야에서는 한참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져보지는 못했지만 책에 소개된 수십 편의 사례를 읽으니 마치 직접 내가 퍼비와 놀고 마이리얼베이비를 키우고 아이보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온 느낌이다.

 

저자의 말대로 로봇은 인간을 돕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로봇은 의료분야 뿐 아니라 군사무기, 자원탐사, 방송분야 등 수많은 분야에 이미 진출해 인간을 돕고 있다. 이 책에서는 사교로봇에 대해 다룬다. 정말 로봇의 탄생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로봇분야라 할 수 있다.

 

                                             (노인들의 친구가 된 로봇 "파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노인들이다. 이 로봇은 보살핌을 요구하는데, 노인들은 이로써 자신들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낀다.” (p.388)

“그들은 이주 노동자들에게 노인을 돌보게 하는 대신 그 일을 할 로봇을 제작하기로 했다.” (p.389)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로봇은 일본에서 만든 로봇 ‘파로’이다. 주로 보살핌이 필요한 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물론, 어린아이들과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로봇이다.

 

“‘엘리자 효과 ELIZA effect (컴퓨터의 행위가 인간의 행위와 비슷하다고 무의식적으로 가정하는 경향)” (p.457)

 

‘파로’의 효과는 엄청났다. 실의에 빠지고 의욕이 없던 요양원의 노인들의 표정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다. 자연스레 삶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파로’가 마치 살아 있는 동물, 내지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엘리자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파로’가 없을 때 극도의 불안 증세를 나타내고 마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깊은 슬픔에 빠지는 노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인간이건 인간이 아니건 간에,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존재와 관계를 맺어선 안 될 이유가 뭔가?... 다음 세대는 다양한 종류의 관계에 익숙해질 것이다. 애완동물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로봇과의 관계 등, 로봇한테 속마음을 털어놓는 건 수많은 선택지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p.411)

 

그렇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로봇공학자, 테크놀로지학자, 인문·사회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주제라고 말한다. 30년 넘게 이 분야를 연구해 온 자신도 이 물음에 대해 시원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노인들을 돕기 위해 만든 ‘파로’는 결국 인간이 느끼는 복잡다단하고 오묘한 감정의 층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거의 복제할 수 있는 로봇이 만들어진다면 엘리자효과이건 나발이건 노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옆을 지키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결국, 테크놀로지 발전의 심화가 가져온 결과의 책임도 그것을 만든 인간이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이다. 앞으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의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택지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 가지를 제시한다.

 

“‘리얼테크닉 realtechnik’ 이라 부르는 접근법은, 직선적 진보에 회의적이다. 문제점에 직면해 거리낌 없이 결정을 재검토하는 마음 상태, 겸허한 태도를 권장한다.” (p.476)

“네트워크한 문화는 역사가 매우 짧다. 탄생을 지켜본 우리는 그 모험의 세계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이게 인간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네트워크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서로를 등한시한다. 테크놀로지를 거부하거나 폄하할 필요는 없다.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다.” (p.477)

 

테크놀로지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자는 저자의 지적에 100% 동의한다. 너무 멀리 가 있는 테크놀로지의 비약을 목 아프게 고개 들고 쳐다보고만 있지 말고 다시 제자리로 가져와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결코 테크놀로지가 가져다 준 효용과 가치를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어찌됐던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네트워크한 역사는 정말 짧다. 탄생을 주도한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멀어져 부작용이 더 부각된 지금의 양태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적인 기술’ -리얼테크닉-의 개념처럼 직선적으로 팽창하고 솟구쳐 오르던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수백, 수천억 원의 개발 비용을 들여 만든 스마트폰과 로봇이라 할지라도 -리얼테크닉-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판단되면 올스톱하고 되돌려야 한다. 물론, 실제 개발을 하는 기업과 국가에서 그것을 받아들일지 확신할 수는 없다. 이것도 결국 인간들의 문제이다. 인간의 몫이다.

 

“우리는 더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테크놀로지의 운영 방식을 정하는 게 바로 우리 자신임을 상기할 때 분명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p.479)

 

좀 더 윤택하고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의 마음이고 꿈이다.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인 테크놀로지는 운영주체인 우리, 인간의 가치판단의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이라 자신들의 몫이다.

테크놀로지가 인간과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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