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 -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
니나 자블론스키 지음, 진선미 옮김 / 양문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피부가 검은 편이다. 남동생은 하얗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죽하면 동네 친구 녀석은 나와 동생을 가리켜 바둑알의 ‘흰 돌’, ‘검은 돌’이라 했었다.

지난 주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 나의 피부는 더 검게 되었다. 남동생은 지금도 하얗다.

 

"우리 신체에서 피부만큼 다양하고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은 없다. 그러나 피부를 신체기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p.8)

"넓이는 약 2제곱미터(약 0.6평), 평균 무게는 4킬로그램이나 된다." (p.9)

 

나도 이 책 「Skin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을 읽지 전에는 피부가 중요한 신체기관인지 몰랐다. 뼈나 장기 같은 신체기관은 평소에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구나~’ 생각하지만 피부는 매일, 매순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나는 피부가 신체기관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내 피부는 내 동생에 비해 검은 편이다.’ 정도의 인식에 불과했다.

 

"피부는 인체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p.13)

 

만약 피부가 없다면 요즘 같은 불볕·찜통더위에 동반되는 강력한 자외선에 몸의 각 기관은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인간 피부의 가장 놀라운 특성 중 하나가 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여기서 털이 없다는 것은 다른 온혈동물들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털이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땀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영장류에 비해서 많은 땀을 흘리는 인간은 털이 없어지는 진화를 하게 된 것이다. 직립보행을 하게 되고 도구와 연장을 사용하게 되면서 털의 부재가 가져올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 했고 이것이 피부색의 다양화를 가져온 결과라 얘기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고 나 또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인간의 피부색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었다.

우리는 피부색이 다른 인종에 대해서는 유독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는 다른 피부색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뭐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생각해봐야 시원한 답을 내릴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 스타벅스 매장에서 창립 몇 주년을 맞아 모든 음료를 반값으로 판매한 적이 있다. 동료 몇 명과 매장으로 갔는데 줄이 2겹·3겹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래도 반값이라 하기에 30분을 기다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벤티 크기를 주문했다. 내가 가본 중에 가장 사람이 많았다. 시끄럽고 덥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일순간에 모든 이를 정적에 빠뜨린 사람이 등장했다. 키는 작아도 185cm정도, 몸무게는 적어도 150kg정도가 되어 보이는 흑인아저씨였다. 땀을 소나기처럼 흘리며 등장한 아저씨를 최소한 백 개가 넘는 눈이 일제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 흑인아저씨는 자신에게 쏠린 백 개가 넘는 눈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소나기 수준을 넘어선 호우경보 수준의 땀을 쏟아냈다.

물론, 요즘은 워낙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있어서 크게 신기하고 낯설 것도 없었는데 덩치도 워낙 크고 흑인 중에서도 아주 피부색이 짙은 흑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본 것 같다.

저자는 피부색이 다른 것에 대한 의문에 간단하게 대답한다.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와 신에 의지에 의한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응이라 할 수 있다.

 

“일조량이 많은 저위도 지역에서 일조량이 적은 고위도 지역으로 인류가 이주해감에 따라, 순전히 생식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피부색이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p.298)

 

또한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외선에 대한 적응이라 주장한다. 위도에 따라 일조량은 물론 노출되는 자외선의 양도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은 이러한 변화에 따른 자연선택을 결정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피부색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피부색이 다른 것을 신의 저주니, 노예로 타고난 운명이니 하며 같은 인간인 흑인들은 노예로 사고팔았었다. 노예가 해방된 지 수 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오죽하면 유명한 축구선수도 골세리머니를 하며 “No Racism”이 적힌 티셔츠를 보여주겠나.

 

몇 해 전 모 방송사의 교양프로그램에서 실험을 했다. 백인 남성과 동남아 남성이 지나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길을 묻는 설정이었다. 인종·피부색이 다른 것에 따라 반응이 어떨지 조사하는 실험이었다.

실험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 그대로였다. 백인 남성에게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던 사람들이 동남아 남성에게는 그렇게 불친절할 수 없었다. (물론, 실험의 한계와 오차는 존재한다)

 

아직도 피부색은 그 사람을 판단하는 유효한 기준이다.

하지만 「Skin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을 읽으며 저자의 피부색에 대한 주장을 읽으니 위와 같은 인식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을 피부색으로 분류하는 방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부색은 분명히 적응의 결과 이며, 특정 인구집단에서 피부색의 진화는 해당 지역의 환경 조건 -특히 자외선 양- 에 큰 영향을 받는다." (p.132)

 

피부색을 자외선의 양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분석하는 것은 처음 봤다. 그래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피부에 대한 질병(특히 피부암)과 피부시술에 대한 일부의 언급도 꽤 재미이었다.

 

"오늘날에는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때로는 선조들의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도 이주하기 때문에 피부가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피부가 환경 변화를 따라 잡을 시간이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비해 피부가 너무 옅거나 짙은 경우가 많다." (p.154)

 

우리의 조상 인류는 그 이동과 적응의 기간이 무척 멀고 길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몇 시간 만에 대륙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피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서서히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선택되어진 피부색과 피부의 특징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자외선 양이 많아서 짙은 색 피부가 중요한 보호 기능을 수행하는 적도 지역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p.217)

"보톡스의 사용은 영장류를 진화시킨 추진력들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p.221)

 

또한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많이 하게 되고 미용시술을 많이 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들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되고 적응된 피부색임에도 더 옅은 색으로 화장하고 미용용품을 바르고 시술을 하게 됨으로 점점 피부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너무 많이 맞아 제대로 웃지도 못하는 여자 연예인들을 TV에서 보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로봇처럼 얼굴 근육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나까지 불편해진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 하면 탈이 난다.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이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적합한 적응의 결과이고 나의 검은 피부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적잘한 장치라는 사실에 아주 천천히 잘 적응해 주신 인류의 조상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김기혁.호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집에 있는 TV로 다시보기를 할 수 있다. 제대로 보지 못한 TV프로그램이나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작년 연말에 인기리에 방영된 SBS의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다. 송중기와 한석규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한글창제를 둘러싼 사대부 세력과의 갈등을 극적으로 화면에 담았다.

 

당시 사대부 세력의 반대에 막혀 한글을 반포하지 못한 채 사장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고 있을까?

 

이 책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사라져가는 언어에 대한 보고서다.

 

“이렇게 근사한 언어들이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릴 때 그 공동체는 물론 학계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면서 느낀 절망감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도록 이끌었다.” (p.26)

 

언어학을 공부한 저자가 아무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소중한 언어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쓴 책이다. 특히 호주 북쪽의 원주민들의 언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그들만의 아름답고 귀중한 언어에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세계 공용어를 배우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한 사람의 화자만 남은 부족과 공동체가 꽤 많다는 사실은 저자로 하여금 더 많은 이들에게 이런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 일으켰다.

 

“세계 도처의 원주민들은 오랜 역사 동안 자연을 세밀히 관찰하고 자연의 산물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실을 자기네 언어의 단어와 표현을 통해 전하고 있다.” (p.67)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낳는다. 어쩌면 뻔해 보이는 수준까지도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적절한 개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p.316)

 

사실 언어의 우수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신이 쓰는 언어가 가장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암호해독가들이 미군과 연합군의 암호를 거의 해독하는 바람에 실패한 작전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군에 소속된 나바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을 통해 암호를 제작했는데 이후 일본군의 암호해독가들은 동물소리로만 들리지 않았던 생소한 나바호어 암호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다. 저자가 소수 공동체의 언어를 조사하고자 갖은 애를 쓰고 최신식 장비와 유능한 언어학자들이 달라붙어도 문법체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4살 베기 원주민 아이는 생글거리며 완벽한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사했다고도 한다.

언어라는 것은 오랜 시간 사용되고 수정되며 구전되고 학습되면서 만들어진 문화의 결정체다. 따라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집단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아주 오래 전 그들의 조상들이 사냥을 다니며 본 동물들과 낙조를 보며 느꼈던 감상, 시간과 공간을 판단하는 기준의 독특함들은 그대로 그들의 언어에 녹아 있다.

유달리 높임말 표현이 많은 한국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높임말 표현들은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양식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추정에 따르면, 17개 국가가 전체 언어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들 국가 전체가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구 비중은 27퍼센트, 영토 면적은 단9퍼센트인데도 말이다.” (p.59)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언어도 심각한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나머지 91퍼센트 크기의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9퍼센트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가장 당연한 세계 공용어가 되어 버린 영어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착과 병적인 추종현상은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훌륭한 예가 된다.

한때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원정출산과 영어발음 향상을 위한 어린아이의 혀를 수술했던 기사를 본적이 있다.

같은 제품이라도 영어가 쓰여져 있으면 그리로 손이 가고 유명한 영어학원은 왠만한 기업수준이다. 홈플러스와 이마트에서 장보는 것보다 코스트코에 진열된 온통 영어로 가득한 외국산 제품 속에서 장보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전 세계 약 6000개 언어 가운데 많은 언어가 빠른 속도로 하나씩 침묵에 빠져들고 세계 언어 목록에서 퇴출되고 있다.” (p.404)

 

물론, 소수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슬픈 종말처럼 한국어가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렇게 훌륭한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영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전체 한국 사회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쉬운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집단인 사용자들이 그 고유 언어를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면 영어의 뒤편에 서는 제2공용어가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나이 많은 세대에서 아이들이 외부의 세력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들은 언어 교체가 빈민굴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p.422)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저자의 지적에도 동의한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해가 올라오면 하루가 시작되고 해의 이동에 따라 과하지 않게 사냥을 하고 지천에 가득한 열매와 과일을 따 먹고 다시 저 멀리 수평선으로 해가 지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언어는 그들의 삶의 양태와도 완전히 닮아 있다고 한다. 폭력적이고 상대와 비교하고 미워하는 단어가 아예 없는 언어체계를 가진 원주민과 공동체가 많다.

하지만 외부와 접촉하게 되고 외부의 문화와 기술과 언어를 포함한 자극에 노출되다 보니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워프의 ‘언어 상대성 원리’. ‘현저하게 다른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문법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고, 비슷하게 관찰한 것도 서로 다르게 평가하며,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관에 이르게 된다.” (p.319)

 

워프의 ‘언어 상대성 원리’대로 현저하게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현저하게 다른 문화를 살아온 사람들은 현저하게 다른 문법을 사용해 왔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하게 되고 점점 자신들의 것과는 다른 것을 배우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문법과 문화, 세계관을 잃어가게 되었다.

 

특정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마지막 화자를 만나는 저자의 심경은 책의 곳곳에 녹아 있다. 책의 제목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지막 화자가 죽는다면, 그들의 언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지식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 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사라져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도, 아직 버티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감사해한 적도, 이를 기록화 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적도 없었다.” (p.448)

 

그래서 저자는 쉴 새 없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지막 화자가 죽는 일이 없도록 곳곳을 누비며 녹음하고 조사하고 이야기하고 배운다.

사실 소수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아직도 제대로 발견되거나 조명되지 않은 언어가 더 많은 것이라고도 짐작한다.

현실은 심각한 수준이지만 저자는 마지막까지 희망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무거운 녹음테이프와 큰 장비를 짊어지고 정글을 헤쳐야 했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녹음하고 기록하는 장비가 경량화 되고 편리해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혜곡 최순우 선생은 현대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에서는 철저하게 이단아였다. 이북 출생이었고 고졸이었다. 분명한 공무원이었지만 공무원답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고려청자와 가마터를 찾고 무시무시한 경제개발로 파헤쳐진 문화재와 유물을 다시 정성스럽게 쓸어 담았다.

 

“1965년 최순우는 49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과장이었다.” (p.296)

“글쎄... 나라고 왜 욕심이 없겠어. 그런데 학력을 중요하게 따지는 요즘 세상에 그게 어디 쉽겠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아랫사람이 오면 사표 써야지. 어떻게 더 있겠어. 허허…….” (p.354)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도 그 책을 쓴 이가 최순우 선생인지 몰랐다.

참 감명 깊게 읽었었는데 어릴 때라 그랬던지 저자를 기억해 두지 않았다.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 는 뜻.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거들떠보지 않아도 묵묵히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던 최순우 선생의 인생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의 길을 간다는 것. 묵묵하고 우직하게 나의 길을 간다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어렵다. 일상에 충실하되 파묻히지 않고 나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않는 이상 묵묵하고 우직하게 나의 길을 가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 이후를 휩쓴 서구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야 했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p.5)

“최순우는 개발논리에 쫓기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문화재 발굴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30년이 넘는 박물관 경험으로 전국에 있는 문화유산을 최선을 다해 지켜냈다. 그리고 국격은 문화의 수준에 따라 좌우된다는 신념에 따라 미국 전시를 힘차게 추진했다.” (p.380)

 

최순우 선생이 온 몸으로 겪은 인생은 한국의 현대사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 가장 극렬하게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맞섰고 한국전쟁 시에는 피난을 오게 된다. 유럽 순회 전시회를 하던 도중 5.16쿠데타를 접하게 된다.

 

격동하는 현대사에서도 최순우 선생은 우리 문화예술을 찾아내고 보존하며 널리 알리는 일에 매진했다.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다녔다면 결코 그의 길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 식민사관과 서구우월주위에 파묻혀 제대로 된 역사 재평가와 유물·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 줄기자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발굴과 보존에 힘썼고 미국, 유럽, 일본에 문화예술을 알리려 동분서주했다.

 

개성 박물관 서기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84년 임종 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 길만을 간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 한가지만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올라갈 수 있었다.

 

관장을 해도 벌써 해야 했을 그였지만 고졸이라는 신분이 늘 그늘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의 전통문화예술과 문화재·유물에 대한 깊은 사랑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던히 애써 온 공로를 주위 사람들이 알아주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게 되고 공석이던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자리도 여러 사람의 추천과 동의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눈치보고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책을 읽으며 궁금한 것이 있었다.

국보급 문화재가 사유재산으로 되어 있어 사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었다.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국보 제139호)는 훗날 손재형이 호암 이병철에게 양도했다.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이다. 국보가 사유재산일 경우 국내 거래는 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허가제가 아니라, 국보를 산 사람이 문화관광부에 자신이 국보를 샀다고 신고만 하면 되는 신고제다(문화재보호법 제40조). 손재형은 군선도뿐 아니라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와 금강전도(국보 제217호)도 이병철에게 양도했다.” (p.176)

 

일제 강점기에야 워낙 많은 도굴꾼과 재력가들이 무작위로 파내가고 사가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병철에게 양도되어 삼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국보는 국가의 보물이라는 말인데 왜 삼성미술관에 있다는 말일까?

 

“박물관에는 유물구입 예산이 거의 없어 발굴품 외에는 비싼 유물은 구입할 형편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윤장섭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재력이 되면 문화재를 구입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해서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했다.” (p.341)

 

해답은 책 속에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나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평가하고 지켜내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초가집 태우고 기와집 무너뜨려서 신작로 닦는 것에 혈안이 되었던 시절이라 별스럽지도 않은 기왓조각 몇 개와 깨진 항아리 몇 개가 무슨 소용이었을까.

최순우 선생은 국가가 비싼 유물을 사지 못한다면 재력가라도 사서 다른 나라도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국가에서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왓조각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p.40)

 

 

최순우 선생이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개성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고백이다. 버려지고 깨진 기왓조각 하나에도 한국의 정신과 얼이 담겨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무작정 부수고 없애 새것만 만들어 내는 것이 결코 국가의 성장이 아닐 것이다. 예전에 다 없애버린 것을 관광 사업이다 뭐다 해서 어설프게 복원하거나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뒤에야 부랴부랴 보수하고 정비하는 아마추어리즘은 부끄럽다 못해 창피하다.

앞일 생각 안 하고 개발이다 올림픽이다 해서 없애버린 것들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그렇게 없어져버린 전통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삼성미술관에 국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말이다.

 

이 사회에는 혜곡 최순우 선생 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게 인기다 하면 우르르 몰려들고 저게 인기다 하면 우르르 몰려가는 생각 없는 패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직하게 할 수 있는 일. 내가 묵묵히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물론, 그것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운 현실인 것도 맞다. 당장 직장이 없고 살아갈 길이 막막한 청춘이 넘쳐나는 이 때 내 길을 우직하고 묵묵히 걸어가라는 것은 씨도 안 먹힐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어두운 시기에 ‘우공지산’할 사람들이 더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내 길을 갈 수 있는 용기와 떳떳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우물만 파라’, ‘한 가지 기술을 꼭 배워라’

 

어른들이 많이 하시던 말씀이다.

어릴 때는 전혀 몰랐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오롯이 마음에 익는다.

돌이킬수록 참 맞는 말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소셜한가? - 소셜미디어가 바꾸는 인류의 풍경 SERI 연구에세이 109
유승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스마트폰을 구입한 것도 올 초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태블릿PC, 가정이나 직장에 있는 PC로도 소셜미디어나 SNS를 사용할 수 있지만 내 손 안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의 의미를 가중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어쨌든 늦었지만 스마트폰을 사서 남들이 다 하는 페이스북, 트위터를 해보았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기대를 가질 것이다.

‘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누가 찾아올까? 내가 글을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거나 반응을 보이겠지?’

나도 그런 기대를 가졌다. 처음엔 꽤 재미있었다.

책에서도 여러 번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예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느꼈던 알콩달콩함과 전화 통화를 하며 경험했던 즉각적인 소통을 한 번에 주는 것이 SNS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또 평소에 내가 알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뿐만이 아니라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과 한 가지 사안에 대한 공통적인 의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굉장한 유대감을 경험하게 되기도 했다. 외국인과 어설픈 대화도 나누게 되고 말 그대로 내 손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소셜미디어에 집착하고 골몰한다.

 

“W.I.T.(Well-being, Integration, Trust : 행복, 통합, 신뢰)의 관점에서 소셜미디어의 속성을 해석하고, 소셜미디어에 집착하는 인간의 사회심리학적인 이유를 파헤치고 있다.” (p.7)

 

이 책 「당신은 소셜한가?」의 저자 유승호교수는 흥미로운 방법으로 이러한 현상에 접근한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 통합, 신뢰 이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내 삶은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모래처럼 흩어진 관계가 아니라 한 데 모아지며, 불신이 팽배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

 

이것은 모두가 원하는 사회이다.

저자는 소셜미디어가 이 W.I.T.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대안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을 소셜미디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현 시대의 풍경들에 비추어보고 앞으로 만들어 낼 시대의 흐름도 예견하고 있다.

 

“일개 개인이 천리안이나 관세음처럼 천 리 밖을 보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히 ‘증강인류(augmented humanity)'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p.8)

 

‘증강인류’라는 개념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소셜미디어가 탄생하기 전 한때 엄청난 유행이었던 아이러브스쿨, 미니홈피도 대단했었다.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끊겼던 동창들과의 동창회가 무수히 생겨났다. 미니홈피는 내 이름과 내 모습을 전면으로 내세운 최초의 웹페이지였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는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증강시켰다. 배가시켰다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무한대로 확장시켰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도 그렇게 확장시켰다. 반응과 대화는 더 신속하고 즉각적이다.

책에서 소개된 것처럼 정확하고 세밀한 계획 없이 트위터 하나만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 예전에는 절대 불가능했다. 현지에 사는 트위터 친구들의 도움과 조언을 받아 매일매일 새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대화 자체를 관리한다. ‘가까움의 미디어’는 이성적인 면보다 감성적인 면과 더욱 가깝다.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그로 인해 차가운 이성의 미디어보다는 뜨거운 감성의 미디어로 변형되기 쉽다.” (p.36)

 

지난해부터 부쩍 사회적 이슈가 되고 때론 공론화되기도 했던 주제이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특히 한국의 독특한 현실구조에서는 소셜미디어 또한 격하게 다루어질 때가 많다. 몇몇 소셜테이너들에 대한 댓글과 리트윗, 반응과는 다르게 지하철 진상녀, 고속도로 진상녀, 벤츠 진상녀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이전 인터넷게시판을 통한 악성댓글보다 더 신속하게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개인정보가 유출되기도 했다.

나에게 기쁜 소식이 있거나 슬픈 소식이 있을 때 소셜미디어는 ‘가까움의 미디어’라는 속성을 십분 발휘한다. 이성적인 면은 물론 감성적인 특징을 아우르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위로한다.

 

그렇지만 확인되지 않은 불명확한 정보에 대한 소셜미디어의 파급은 광기에 가까울 때가 있기도 하다. 얼마 전 한국의 직장인들이 직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대화가 ‘뒷담화’라고 하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누구보다 ‘뒷담화’를 좋아한다. 대놓고 드러내고 대놓고 비판하고 대놓고 칭찬하지 못했던 시대상황을 비춰보면 일견 이해되지 않는바 아니다. 그래서 소셜미디어 상에서 ‘뭐라뭐라 더라~’ 라고 하면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후에 거짓이나 잘못된 정보라 확인되면 슬쩍 뒤로 빠져버리면 그만이다. 이것은 그토록 욕을 먹는 일부 언론의 행태를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일부 진보 인사는 이것을 ‘팬덤’이라 격하하기도 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급격히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에 불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저자가 3장에서 얘기하고 있듯이 소셜미디어로 인해 탄생된 ‘증강인류’는 그 개인 각자가 하나의 미디어를 생성한다. 노출이 증가하고 관계 맺는 무리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권력이 형성된다.

한 명의 연예인이 60만 명이 넘는 팔로우를 갖게 되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힘이고 영향력일 수밖에 없다. ‘나는 60만 명까지 나를 팔로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항변해도 형성된 권력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조심해주기를 바라고 소셜미디어로 얻게 된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일정 부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관계가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스타와 팬, 팬과 팬으로 확산되는 무한의 쌍방향이다.” (p.130)

“기존 미디어나 폐쇄적인 사회관계망에서는 소외되던 사람들이 새로운 도구를 활용해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스스로 조직화하고 있는 것이다.” (p.131)

 

저자는 소셜미디어로 갖게 된 권력의 양태가 일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주장한다. 동의한다. 소셜미디어 이전의 미디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던 쌍방향소통과 쌍방향관계는 소셜미디어의 가장 큰 힘이다. 나와 관계 맺는 소셜미디어 상의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상호 간 벽을 허물 수는 없겠지만 반대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호관계이다.

예전에 집에서 기르던 반려동물을 잃어버리면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거나 전봇대에 붙이거나 아파트 게시판에 게시하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움을 요청한다.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어르신도 찾게 되는 예를 보게 되었다.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도구를 활용한 소통과 관계의 극적인 예라 볼 수 있겠다.

일부 기업에서는 입사면접 시 지원자의 소셜미디어 활동을 체크하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소셜미디어에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밝힌 육군 장교는 군법에 회부되기도 했다.

아직 실정법상에서는 소셜미디어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국민의 알권리·자유로운 의사표현과 명예훼손·허위사실 유포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셜미디어가 주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공존한다. 칼로 두부를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는 것처럼 분명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

 

때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인 대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법의 제정이든, 미비한 제도의 개선이든 간에 더욱 강력해질 소셜미디어의 탄탄대로가 저자의 접근처럼 W.I.T.(Well-being, Integration, Trust : 행복, 통합, 신뢰)를 정착시키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조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결국 자기 노출을 할 경우, 타인에게 신뢰를 얻고 친구도 얻게 되어 행복해 진다.” (p.72)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나와 유사한 사람을 끌어 모야야 한다. 이제 소셜미디어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수 없다. 나의 매력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노출시켜야 한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지속시킬 수 있다.” (p.133)

 

리뷰의 도입부에 나는 소셜하지 못다고 밝혔다. 온라인에서 댓글을 달고 댓글을 확인하는 것이 아직도 어색한 개인적인 기질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어쩌면 겁을 먹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수 없다고 확고하게 말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이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끊임없이 노출하고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 하는 소셜미디어의 생리를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지 내 기질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소셜할지는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소셜미디어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존중하는 매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소셜미디어를 왜 사용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다” (p.169) 라고 지적한다.

 

‘소통’의 부재가 가져 온 결핍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회복하는 것이다.

비록 나는 아직 소셜하고 있지 못하지만 소셜하는 이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소셜미디어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어쨌든 소셜미디어는 앞으로도 ‘소통’의 주요한 통로가 될 것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탄생된 ‘증강인류’가 만들어 갈 미래가 기대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한다.

불안한 줄타기가 고꾸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국」이라는 제목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홋카이도였다. ‘눈의 나라’ 설국. 눈 하면 일본에서는 당연히 홋카이도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아니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니가타현은 지리상 동해와 인접해 있고 도쿄와의 거리도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두 번째는 [신 설국]이라는 영화를 찍은 배우 ‘유민’이었다. 한 동안 국내 연예계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돌아간 유난히 얼굴이 새하얗던 배우 ‘유민’이 생각났다.


소설의 배경이 된 니가타 현 유자와 지역은 4월 언저리까지 눈이 온다고 한다. 한국의 영동지방의 지리적 특성과 유사하다. 한껏 수증기를 담은 구름이 태백산맥의 준령에 부딪혀 눈을 쏟아 내듯 니가타 현 유자와 지역 또한 습기를 머금은 북풍이 높이 1963m의 다니카와 산에 부딪혀 많은 눈을 쏟아낸다고 한다.


「설국」은 시종일관 여러 가지 눈 덮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봤던 장면, 검은 밤바다만 빼놓고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한 겨울 매복진지에서 한 없이 떨어지던 함박눈을 봤던 장면 등.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이 형상화되고 개별 캐릭터에 투영되기도 하며 배경 및 캐릭터의 심리묘사를 대변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p.7)


서양인의 마음을 한 방에 잡았다는 작품의 첫 문장이다. 새하얀 눈이 생각난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눈 말이다.

눈은 반드시 녹는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 내린 눈이라 해도 반드시 녹는다.


“창틀 안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에서 커다란 함박눈이 흐릿하게 이쪽으로 떠내려 온다. 어쩐지 고요하고 비현실적인 세계였다.” (p.129)

“먼 산들은 눈이 자욱할 때와 같은 부드러운 우윳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p.59)


작품에서 배경을 묘사하는 ‘눈’은 아름답고 황홀하게 그려진다. 때로는 몽환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환상적이기도 하다. 한창 내리는 함박눈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한창 내리는 함박눈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 보면 스멀스멀 걱정 반 투정 반이 기어오른다. ‘내일 출근 어쩌지? 체인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버스 타고 갈까? 눈 녹으면 차 엉망일 텐데? 제기랄~!’

하지만 작품 속 ‘눈’은 녹지 않을 눈 같다. 그렇게 느껴진다. 눈이 녹은 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결코 녹을 것 같지 않은 ‘눈의 세계’다.

인간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의 양태도 그러하다. 사랑, 연민, 신뢰. 변하고 바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그 사람만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끊임없이 자기주문을 건다. 아무리 각박하고 감정이 메말라버린 현실이라 해도 인간이라면 기대고 싶은 감정의 원형이 있다. 찌든 일상을 잠시라도 잊게 만들어 주는 사랑, 연민, 신뢰. 그냥 기대고 싶은 것이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p.134)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는 쉽게 녹아버리는 ‘눈’과 같다.

특히 시마무라는 흩날리는 눈처럼 공허하고 메마르다. 일정한 직업이 없이 무용관련 번역일을 하는 한량 시마무라는 이미 다 녹아버린 ‘눈’을 가지고 ‘눈’의 고장을 찾는다. 새로운 삶에의 의욕과 기대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갔는데

‘눈’과 같은 고마코와 요코를 만난다.

작품의 중반부는 시마무라의 료칸 방에 무시로 찾아오는 고마코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눈’과 같은 대화다. ‘금세 녹아 버리는 눈’이다. 한 방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지만 결코 점성이 있어 뭉쳐지는 찰진 눈처럼 감정을 함께 호흡하지 않는다.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점성 없는 싸리눈처럼 둘의 대화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시마무라를 향한 고마코의 연정은 식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방문을 닫고 도쿄로 돌아가는 시마무라를 고마코는 매년 기다린다.

공허하고 메마른 시마무라는 요코에게 마음이 간다. 요코에게 ‘눈의 결정’과도 같은 순수하고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고마코에게는 파혼한 유키오가 있고 유키오를 간호하다 게이샤 일을 하게 되었는데 유키오의 현재 애인은 요코라는 복잡 미묘한 구조는 별 문제 없다. 계속해서 고마코보다 요코에게 가는 자신의 마음을 제지하지 않는다.

원초적인 순수함을 지닌 요코는 도쿄로 돌아갈 때 자신을 꼭 데리고 가줄 것을 부탁한다. 시마무라는 흔들린다. 요코는 작품의 마지막까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헌신한다. 큰 화재가 난 건물에서 노약자와 어린 아이를 구하려다 온 몸에 화상을 입게 된다. 여인(人)이라기 보다 여신(神)으로 정형화된다.


결국 시마무라의 ‘눈’은 모두 녹아 버렸다.

눈의 고장 ‘설국’에 처음 왔을 때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목적 없이 왔기에 일 년 만의 방문 후 돌아갈 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고 고마코와 요코 사이에서 중년의 메마르고 차가운 싸리눈같은 가슴을 불태우지도 못했다. 그냥 스스로 녹아버렸다.

그래도 시마무라는 별로 손해 날 것이 없어 보인다.

어차피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고마코만이 눈으로 뒤덮인 눈의 고장 ‘설국’에서 ‘눈’처럼 흩날리는 시마무라를 기다릴 뿐이다.


사실, 내게 「설국」은 좀 어려웠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고 그 이름도 찬란한 노벨상까지 받은 작가니까 말이다. 나는 늘 노벨상을 받은 작품과는 맞지 않았었다. 읽고 나면 항상 ‘이게 도대체 왜 노벨상을 받았지?’ 했었다.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은 후 치밀었던 실망과 난해함을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아 일본 소설은 오쿠다 히데오 정도만 읽고 있었다.

「설국」도 작품의 말미에 갑자기 불이 나고 요코가 사람들을 구해내는 장면이 끝내 이해되지 않았다. 흡사 국내 막장 드라마의 인물 간 구조 같은 얽히고설킨 관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 굳이 화재가 나고 요코가 희생해야 했는지는 쉬이 설득되지 않는다.

뭐, 작품을 읽는 독자가 판단하고 이해하고 느끼기 나름이니 더 긴말을 필요 없다. 나는 그랬다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읽었으면 그만이다.

다만, 하루키와 겐자부로로 인해 등한시 했던 일본 소설이었는데, 「설국」이후 다른 고전들 위주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큰 계기가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