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혜곡 최순우 선생은 현대 한국사회의 고정관념에서는 철저하게 이단아였다. 이북 출생이었고 고졸이었다. 분명한 공무원이었지만 공무원답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고려청자와 가마터를 찾고 무시무시한 경제개발로 파헤쳐진 문화재와 유물을 다시 정성스럽게 쓸어 담았다.

 

“1965년 최순우는 49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과장이었다.” (p.296)

“글쎄... 나라고 왜 욕심이 없겠어. 그런데 학력을 중요하게 따지는 요즘 세상에 그게 어디 쉽겠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아랫사람이 오면 사표 써야지. 어떻게 더 있겠어. 허허…….” (p.354)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도 그 책을 쓴 이가 최순우 선생인지 몰랐다.

참 감명 깊게 읽었었는데 어릴 때라 그랬던지 저자를 기억해 두지 않았다.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 는 뜻.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거들떠보지 않아도 묵묵히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던 최순우 선생의 인생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의 길을 간다는 것. 묵묵하고 우직하게 나의 길을 간다는 것.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어렵다. 일상에 충실하되 파묻히지 않고 나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않는 이상 묵묵하고 우직하게 나의 길을 가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 이후를 휩쓴 서구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야 했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p.5)

“최순우는 개발논리에 쫓기는 시대상황 속에서도 문화재 발굴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30년이 넘는 박물관 경험으로 전국에 있는 문화유산을 최선을 다해 지켜냈다. 그리고 국격은 문화의 수준에 따라 좌우된다는 신념에 따라 미국 전시를 힘차게 추진했다.” (p.380)

 

최순우 선생이 온 몸으로 겪은 인생은 한국의 현대사와 정확하게 맞물린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 가장 극렬하게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에 맞섰고 한국전쟁 시에는 피난을 오게 된다. 유럽 순회 전시회를 하던 도중 5.16쿠데타를 접하게 된다.

 

격동하는 현대사에서도 최순우 선생은 우리 문화예술을 찾아내고 보존하며 널리 알리는 일에 매진했다.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다녔다면 결코 그의 길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 식민사관과 서구우월주위에 파묻혀 제대로 된 역사 재평가와 유물·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없던 때 줄기자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발굴과 보존에 힘썼고 미국, 유럽, 일본에 문화예술을 알리려 동분서주했다.

 

개성 박물관 서기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84년 임종 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한 길만을 간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 한가지만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올라갈 수 있었다.

 

관장을 해도 벌써 해야 했을 그였지만 고졸이라는 신분이 늘 그늘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의 전통문화예술과 문화재·유물에 대한 깊은 사랑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던히 애써 온 공로를 주위 사람들이 알아주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게 되고 공석이던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자리도 여러 사람의 추천과 동의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눈치보고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다.

책을 읽으며 궁금한 것이 있었다.

국보급 문화재가 사유재산으로 되어 있어 사립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었다.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국보 제139호)는 훗날 손재형이 호암 이병철에게 양도했다.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이다. 국보가 사유재산일 경우 국내 거래는 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허가제가 아니라, 국보를 산 사람이 문화관광부에 자신이 국보를 샀다고 신고만 하면 되는 신고제다(문화재보호법 제40조). 손재형은 군선도뿐 아니라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와 금강전도(국보 제217호)도 이병철에게 양도했다.” (p.176)

 

일제 강점기에야 워낙 많은 도굴꾼과 재력가들이 무작위로 파내가고 사가서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병철에게 양도되어 삼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국보는 국가의 보물이라는 말인데 왜 삼성미술관에 있다는 말일까?

 

“박물관에는 유물구입 예산이 거의 없어 발굴품 외에는 비싼 유물은 구입할 형편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윤장섭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재력이 되면 문화재를 구입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해서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했다.” (p.341)

 

해답은 책 속에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화나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평가하고 지켜내려는 노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초가집 태우고 기와집 무너뜨려서 신작로 닦는 것에 혈안이 되었던 시절이라 별스럽지도 않은 기왓조각 몇 개와 깨진 항아리 몇 개가 무슨 소용이었을까.

최순우 선생은 국가가 비싼 유물을 사지 못한다면 재력가라도 사서 다른 나라도 빠져나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국가에서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왓조각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p.40)

 

 

최순우 선생이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개성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고백이다. 버려지고 깨진 기왓조각 하나에도 한국의 정신과 얼이 담겨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무작정 부수고 없애 새것만 만들어 내는 것이 결코 국가의 성장이 아닐 것이다. 예전에 다 없애버린 것을 관광 사업이다 뭐다 해서 어설프게 복원하거나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뒤에야 부랴부랴 보수하고 정비하는 아마추어리즘은 부끄럽다 못해 창피하다.

앞일 생각 안 하고 개발이다 올림픽이다 해서 없애버린 것들은 다시 되살릴 수 없다.

그렇게 없어져버린 전통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삼성미술관에 국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안타깝지만 말이다.

 

이 사회에는 혜곡 최순우 선생 같은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게 인기다 하면 우르르 몰려들고 저게 인기다 하면 우르르 몰려가는 생각 없는 패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직하게 할 수 있는 일. 내가 묵묵히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물론, 그것을 찾기가 너무나 어려운 현실인 것도 맞다. 당장 직장이 없고 살아갈 길이 막막한 청춘이 넘쳐나는 이 때 내 길을 우직하고 묵묵히 걸어가라는 것은 씨도 안 먹힐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어두운 시기에 ‘우공지산’할 사람들이 더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내 길을 갈 수 있는 용기와 떳떳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우물만 파라’, ‘한 가지 기술을 꼭 배워라’

 

어른들이 많이 하시던 말씀이다.

어릴 때는 전혀 몰랐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오롯이 마음에 익는다.

돌이킬수록 참 맞는 말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