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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김기혁.호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집에 있는 TV로 다시보기를 할 수 있다. 제대로 보지 못한 TV프로그램이나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을 무료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작년 연말에 인기리에 방영된 SBS의 〔뿌리 깊은 나무〕를 보았다. 송중기와 한석규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한글창제를 둘러싼 사대부 세력과의 갈등을 극적으로 화면에 담았다.
당시 사대부 세력의 반대에 막혀 한글을 반포하지 못한 채 사장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언어를 쓰고 있을까?
이 책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사라져가는 언어에 대한 보고서다.
“이렇게 근사한 언어들이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릴 때 그 공동체는 물론 학계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면서 느낀 절망감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도록 이끌었다.” (p.26)
언어학을 공부한 저자가 아무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소중한 언어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쓴 책이다. 특히 호주 북쪽의 원주민들의 언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그들만의 아름답고 귀중한 언어에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세계 공용어를 배우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한 사람의 화자만 남은 부족과 공동체가 꽤 많다는 사실은 저자로 하여금 더 많은 이들에게 이런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 일으켰다.
“세계 도처의 원주민들은 오랜 역사 동안 자연을 세밀히 관찰하고 자연의 산물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실을 자기네 언어의 단어와 표현을 통해 전하고 있다.” (p.67)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낳는다. 어쩌면 뻔해 보이는 수준까지도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적절한 개념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p.316)
사실 언어의 우수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신이 쓰는 언어가 가장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암호해독가들이 미군과 연합군의 암호를 거의 해독하는 바람에 실패한 작전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군에 소속된 나바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을 통해 암호를 제작했는데 이후 일본군의 암호해독가들은 동물소리로만 들리지 않았던 생소한 나바호어 암호를 풀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다. 저자가 소수 공동체의 언어를 조사하고자 갖은 애를 쓰고 최신식 장비와 유능한 언어학자들이 달라붙어도 문법체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4살 베기 원주민 아이는 생글거리며 완벽한 자신들만의 언어를 구사했다고도 한다.
언어라는 것은 오랜 시간 사용되고 수정되며 구전되고 학습되면서 만들어진 문화의 결정체다. 따라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집단의 문화적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아주 오래 전 그들의 조상들이 사냥을 다니며 본 동물들과 낙조를 보며 느꼈던 감상, 시간과 공간을 판단하는 기준의 독특함들은 그대로 그들의 언어에 녹아 있다.
유달리 높임말 표현이 많은 한국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높임말 표현들은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양식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추정에 따르면, 17개 국가가 전체 언어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들 국가 전체가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구 비중은 27퍼센트, 영토 면적은 단9퍼센트인데도 말이다.” (p.59)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언어도 심각한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나머지 91퍼센트 크기의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9퍼센트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가장 당연한 세계 공용어가 되어 버린 영어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착과 병적인 추종현상은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훌륭한 예가 된다.
한때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원정출산과 영어발음 향상을 위한 어린아이의 혀를 수술했던 기사를 본적이 있다.
같은 제품이라도 영어가 쓰여져 있으면 그리로 손이 가고 유명한 영어학원은 왠만한 기업수준이다. 홈플러스와 이마트에서 장보는 것보다 코스트코에 진열된 온통 영어로 가득한 외국산 제품 속에서 장보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전 세계 약 6000개 언어 가운데 많은 언어가 빠른 속도로 하나씩 침묵에 빠져들고 세계 언어 목록에서 퇴출되고 있다.” (p.404)
물론, 소수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슬픈 종말처럼 한국어가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렇게 훌륭한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영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전체 한국 사회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쉬운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집단인 사용자들이 그 고유 언어를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다면 영어의 뒤편에 서는 제2공용어가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나이 많은 세대에서 아이들이 외부의 세력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들은 언어 교체가 빈민굴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p.422)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저자의 지적에도 동의한다. 저 멀리 수평선에서 해가 올라오면 하루가 시작되고 해의 이동에 따라 과하지 않게 사냥을 하고 지천에 가득한 열매와 과일을 따 먹고 다시 저 멀리 수평선으로 해가 지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언어는 그들의 삶의 양태와도 완전히 닮아 있다고 한다. 폭력적이고 상대와 비교하고 미워하는 단어가 아예 없는 언어체계를 가진 원주민과 공동체가 많다.
하지만 외부와 접촉하게 되고 외부의 문화와 기술과 언어를 포함한 자극에 노출되다 보니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워프의 ‘언어 상대성 원리’. ‘현저하게 다른 문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문법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고, 비슷하게 관찰한 것도 서로 다르게 평가하며,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관에 이르게 된다.” (p.319)
워프의 ‘언어 상대성 원리’대로 현저하게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현저하게 다른 문화를 살아온 사람들은 현저하게 다른 문법을 사용해 왔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교하게 되고 점점 자신들의 것과는 다른 것을 배우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문법과 문화, 세계관을 잃어가게 되었다.
특정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마지막 화자를 만나는 저자의 심경은 책의 곳곳에 녹아 있다. 책의 제목처럼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지막 화자가 죽는다면, 그들의 언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지식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 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사라져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도, 아직 버티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감사해한 적도, 이를 기록화 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적도 없었다.” (p.448)
그래서 저자는 쉴 새 없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마지막 화자가 죽는 일이 없도록 곳곳을 누비며 녹음하고 조사하고 이야기하고 배운다.
사실 소수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아직도 제대로 발견되거나 조명되지 않은 언어가 더 많은 것이라고도 짐작한다.
현실은 심각한 수준이지만 저자는 마지막까지 희망적으로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무거운 녹음테이프와 큰 장비를 짊어지고 정글을 헤쳐야 했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녹음하고 기록하는 장비가 경량화 되고 편리해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