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메타과학
장회익 지음 / 현암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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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라 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 별명이 ‘개장수’였다.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별명이다. 물리 시간이면 수백 가지가 넘는 화려한 체벌 향연이 펼쳐졌었기에 거의 모든 아이들이 싫어했다. 유독 수학과 과학에는 소질이 없고 재미없어 하던 내게 ‘개장수’ 선생의 그 어색하기 짝이 없던 가발과 음흉한 미소를 띠며 아이들을 괴롭히던 광경은 과학, 특히 물리를 완전히 경멸 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했다.

(예전 내가 고등학교 때처럼 학생들 대하면 당장 뉴스에 나올 텐데……. 이제 안 그러겠지.)

 

 

이 책 「과학과 메타과학」은 물리학자가 쓴 책이다. 저자의 이름이 장회익씨인데, 이름만 입속으로 되뇌어 봐도 뭔가 학구적이고 어렵고 생소하고 낯설다.ㅎㅎ

 

“메타과학은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면서도 모든 학문 특히 자연과학의 바탕을 그 대상으로 살피며, 이렇게 얻어진 성과들은 생명과 인간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관심사를 망라한다.” (p.7)

“자연과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속하는 일차적 실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 지식을 과학이라고 부른다면, 다시 과학과 과학이 빚어낸 문명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종류의 지식을 우리는 메타과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p.14)

 

일단 [메타과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개념도 사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생각하고 고려하고 대화하는 개념인데 단어화 되어 있다 보니 어렵게 느껴질 뿐이지 가까이에 있는 개념이었다.

 

순수 과학이라는 것의 의미가 과거보다는 퇴색되고 추상화 되었다. 급속도로 변하고 발전하고 진화하는 현대에는 한 차원 더 높은 새로운 종류의 지식이 필요하다. ‘응용’, ‘통합’, ‘통합’, ‘융합’ 이런 단어들이 접두사로 붙는 신조어의 대부분이 [메타과학]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은 총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과학과 인식”, 2부는 “생명과 인간”이다.

1부 “과학과 인식”은 과학이라는 것의 인간의 삶, 특히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는 연구자 혹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탐구하는 것에서부터 과학의 논리·이론·인식 구조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2부 “생명과 인간”은 태초의 우주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인간의 우주적 존재 양상과 가치, 존재론적으로 어떤 인간의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까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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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지 못한 부분.

1부

사실 1부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일단 개념이 모두 낯설고 처음 들어보는 것이 많았다

.

“지지이론, 스니드이론, 관념구조적 관점, 동역학법칙, 양자역학(상태함수), 강생기제, 상보성원리, 열역학, 통계역학 등”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와 개념이 많았고 들어봤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도 찾아보거나 읽어보지 못한 것들도 많았다.

다만 이 책의 초판이 1990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대중적 과학서적은 아니었지만 한창 경제개발이다 뭐다 해서 수출 주력 산업, 제조업 등에만 국가의 정책에서부터 대학의 전공에 이르기까지 발 벗고 난리를 치던 시절에 이런 순수 학문(물리)에 대한 서적을 펴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싶었다.

사회와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진화하고 발전한다. 그것의 합목적성이 옳으냐 그르냐는 차후의 문제이다. 사회와 역사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 또한 진화하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그 삶의 합목적성에 대한 옳고 그름은 차후의 문제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저자인 장회익씨의 [과학→메타과학] 과 같은 진화·발전 과정과 같은 중간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입고 있는 옷이나 쓰고 있는 물건이나 보고 있는 현상들은 진일보 했는데 사람의 의식·인식 수준은 과거의 그것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물리학자가 되고 수학자가 되고 응용·통합·융합과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닐 것이다.

메타로 전진하는 보폭에 크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 의식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상적 지식과는 달리 과학적 지식은 무의식 속에서 손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과학 공부라고 하는 학습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과학 연구라고 하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p.27)

 

과학 공부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과학 서적을 읽거나 교과서를 찾아보거나 지식인 형들에게 물어보는 것만이 아니라 과거와 지금보다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활동을 지향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일상에서 ‘왜 그럴까?’ 라는 물음을 진지하고 꾸준하며 성실하게 던져 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1부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뿐이었다. 내가 나름대로 소화해 낸 결론이다.

 

“20세기 지성계의 가장 커다란 수수께끼 하나를 말하라면 아마도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를 꼽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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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 부분.

2부

1부를 읽고 너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2부를 읽은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생명과 인간”. 최소한 1부 보다는 쉬울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았다. 재미도 더 있었다.

 

우주의 탄생과 기원

 

“그런데 우주의 신비성, 생명의 신비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빠져드는 함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주가 자연의 합법칙적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점 이외에 우주가 처음부터 신비스러운 그 어떤 ‘자기조직의 능력’을 지녔다는 관점이다.” (p.211)

 

나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다. 처음 종교를 가졌을 때는 믿지 않았다. 나름 읽고 듣고 고민하며 내린 결론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것처럼 나만의 ‘메타과학적 지식’의 결과인 셈이다.

물론, 시키는 대로 믿는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대학 때부터 진화론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다. 최근에는 최재천 교수의 책도 많이 읽었다.

이후에 내린 결론이 ‘창조론이 더욱 믿을만한 이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신앙을 가졌어도 쌓여오던 의문이 많이 해소되고 관련된 책을 읽으며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해결되었다.

 

“대략 40억 년 전에 지구상의 풍요로운 물질적 요동 속에서 매우 단순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 하나가 우연히 발생했고,” (p.292)

“초기 지구의 상황에서 자체촉매적 국소질서가 나타나 자신의 기대수명 동안 평균 1회 이상의 자체촉매적 기능을 수행한다면, 이러한 존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p.218)

 

이 책에서 말하는 우주 탄생과 기원에 대한 내용은 모두 추측 내지는 가정이다. ‘우연히’, ‘수행한다면’ 이런 단어는 과학, 더군다나 메타과학을 운운하는 물리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모르겠다. 우주 탄생의 기원과 진화론에 대한 확실한 과학적 증거가 나를 설득한다면 그때는 내가 믿고 있는 창조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아니다.

저자도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라고 확실하게 선을 긋지는 않는다. 모호하게 여지를 남기는 면이 많았다. 뭉뚱그려 이렇게 장엄하고 신비로운 우주 속에서 잘 삽시다. 정도로 무마해 버린다.

 

메타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자세 - 인문학적 고찰

골치 아픈 1부를 지나 조금 재미있고 관심이 가는 2부의 첫 주제를 읽고 책의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과학서적에서 인문서적으로의 바뀐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내용이 급변했다.

 

“현대인은 지구 생태계 전체를 파괴시키기에 충분한 행위 능력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 안에서 자신과 생태계를 장기적으로 보존해나가기에 충분할 만큼 명확한 통찰력은 지니지 못했다.” (p.281)

 

갑자기 생태계 파괴와 핵겨울에 대한 실제적 위험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머리를 쥐어짜며 읽었던 1부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과 소재였다. ‘메타과학적 인간’이라는 명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수많은 실제적 선택을 포함한)에 산재하는 현실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늘상 삶의 언저리에서 만져지고 맡아지는 감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IMF이후 한국은 ‘국가가 책임질 수 없으니 알아서들 사시오!! 경쟁해서 이기시오!!’ 였다. 신자유주의의 파도를 타고 10여년을 살아왔다. 가치 있는 것들은 도외시되고 생존하는 것에 애쓸 뿐이었다. 옆을 돌아보고 주변을 챙기는 시대정신은 사라졌다.

책에서도 명확히 지적하는바 인류는 우주와 지구를 충분히 지켜낼 만한 문명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상징적으로 ‘핵’을 명시했다. 냉전을 거치며 기하급수적으로 양산되어 이제는 폐기처분조차 할 수 없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 왔지 그 결과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다.

 

“핵겨울 문제가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현재 적재된 핵무기의 극히 일부분만 폭발하더라도 이 엄청난 현상이 유발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백 메가톤 정도를 핵겨울 유발의 경계치로 보고 있으나 학자에 따라서는 그 이하로 보는 사람도 있다.” (p.325)

 

인류가 가진 핵의 아주 작은 양만으로도 전 지구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바 아니다. ‘핵겨울’은 인류의 종말 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메타과학적 인간’의 자세다.

 

“우리는 장엄한 우주의 질서와 그 안에 주어진 삶의 기회를 경건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 질서를 존중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이 모든 의식 주체의 ‘삶’을 존엄과 긍지 가운데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p.362)

 

물리와는 이미 오래 전 결별을 선언한 나와 같은 독자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다. 특히 책의 1부가 그렇다. 하지만 2부는 재미있고 신선했다. 어렵지만 1부의 내용을 통해 ‘메타과학적 지식, 메타과학적 인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다면 다소 뜬금없는 인문서적으로의 트랜스폼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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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어떻게 오는가 - 어제의 성공요인이 오늘의 실패요인이 될 수 있다!
이재규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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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대학 때 읽었다. ‘지식근로자’의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책을 읽을 대학 당시에는 꽤나 신선했다.

 

이 책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는 국내의 피터 드러커 전문가이자 국내 번역된 드러커 책의 번역자로 유명한 이재규씨가 쓴 책이다.

어떻게 보면 피터 드러커의 전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드러커주의를 신봉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 책을 읽으면 느끼는 바가 많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자가 피터 드러커와 관련된 강의를 했던 것을 엮은 책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책의 제목처럼 ‘미래는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신선한 자극을 기대했었는데 아쉬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적확하게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 알아채기가 쉽지 않았다.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인 것 같기는 한데 와 닿는 것이 없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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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피터 드러커가 그의 여러 저작을 통해 강조했던 경영의 인문예술화를 소개한다. 단순히 회사와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의 통칭이 경영이 아니라 회사와 조직의 구성원을 아우르는 인문적·예술적 특성을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드러커가 강조하는 경영자가 갖춰야 할 ‘인문예술 능력’은

첫째,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전하는 능력

둘째, 남과 함께 일하는 능력

셋째, 자신의 일과 공헌과 경력을 결정하는 능력

넷째, 조직에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고, 목표를 성취하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능력” (p.19)

 

대선을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좌파든 우파든 상관없이 경제민주화와 재별 개혁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재벌이 잘 돼야 살림살이가 나아진다는 사람에서부터 재벌 해체를 부르짖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광활하다. 여러 책에서 소개된 스웨덴의 ‘발렌보리’ 가문은 재벌이지만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영을 통해 스웨덴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국내의 재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총수가 제왕적 통치를 하고 국가의 법과 통치범위를 초월하는 초국가적 존재가 되어 버린 국내의 재벌은 드러커가 강조하는 경영의 ‘인문예술 능력’ 네 가지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만을 전하지 말고 남과 함께 일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기가 막힌 인문예술 능력을 함양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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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은 약점이 없는 사람보다는 전투에서 승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장군으로 뽑았다. 온갖 분야에서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나무랄 데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같은 것은 없다.” (p.51)

 

링컨이 했다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세상에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에 일견 동의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까. 하지만 링컨이 전투에서 승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으면서 다른 약점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남북전쟁 시대에나 통할 말이 아닌 가 싶다.

‘불법 부동산 투기를 해도, 위장전입을 해도, 얌체같이 군 면제를 받아도, 이곳저곳에서 돈을 받아도 능력만 있으면 뽑겠다.’라는 생각은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무랄 데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당최 있는 것이라고는 업무 능력 밖에 없는 온몸을 위법으로 도배질 한 사람을 뽑는다면 그것은 비극에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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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회사 형편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와 복지 추구에 급급했던 노조 행태가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p.210)

“JAL의 직종별 노동조합은 여덟 개나 된다. 조종사, 객실 승무원, 지상 근무요원 등 직종별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 바빴다. 주인 없는 회사에 경쟁적인 노동조합들” (p.495)

 

GM과 JAL의 몰락을 너무도 간명하고 확실하게 진단해서 좀 놀랐다. 이 부분을 읽으며 ‘설마 노조에 대한 지적밖에 없을라고!! 드러컨대??’ 생각했다. 진짜 없었다. GM과 JAL이 망한 가장 큰 이유가 노조라니...

그러면 노조가 어떤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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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은 임종 무렵 문병 온 친구에게 피아노를 쳐달라고 했다. 친구는 쇼팽의 곡을 쳤다. 그러자 쇼팽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내 것 말고 더 좋은 거……. 모차르트 피아노곡 말이야.” (p.305)

 

이 책을 읽으며 전혀 몰랐던 얘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 저자는 5장 경영과 음악에서 모차르트에 대해 긴 찬사를 늘어놓는다. 나는 클래식에 조예가 없지만 모차르트는 안다. 영화 「아마데우스」만도 몇 번은 본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 소개된 모차르트의 모습은 영화적으로 각색된 것이고, 모차르트 아버지의 헌신과 모차르트 본인의 지독한 연습이 낳은 천재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아! 드러커가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도 강조했다.

개인적 기준에서는 피아노 하면 쇼팽이었었는데, 쇼팽이 진짜 임종을 앞두고 모차르트의 피아노곡을 쳐달라고 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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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경영은 하나의 전문적 직업이고, 경영자는 그들의 일차적 과업이 조직의 장기적인 건강을 돌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지식근로자들은 감독할 수 없고 통제를 가할 수도 없다. 지식근로자들에게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셋째, 비영리조직은 좋은 사회, 즉 기업이 번창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를 창출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넷째, 드러커는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속성과 장기적 비전을 역설했다.

다섯째, 드러커주의의 행동강령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세우고 자기관리를 통해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다.” (p.575)

“막을 내린 20세기는 정부와 기업 모두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대였다. 특히 선진국에서는 더 그랬다. 21세기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배적 사회 환경, 즉 도시에 공동체를 만들어줄 비영리 사회조직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p.624)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도시 공동체적인 영역에서 비영리 사회조직들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화된 지식근로자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해 목표를 달성하고 성과를 내는 사회를 말한다. 더불어 기업이 번창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비영리 조직이 필수적 요소라 지적한다. 좋은 말 인 것 같지만 모순적인 듯싶다. 기업이 번창하는 사회가 과연 자유로운 사회일까? 비영리 조직이 기업 번창의 필수적 요소일까?

 

이 책을 읽은 후 바로 다음 읽을 책이 「이상호 기자 X파일」이다. 삼성의 비리를 폭로한 이상호기자가 쓴 책이다. 그런 전지전능한 기업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

그리고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비영리 조직에서 일한다. 최저생계비 정도의 돈을 받으며 사회 공적영역에 헌신하고 산다.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내게 드러커의 주장은 딴 나라 얘기로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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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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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날 2천7백만 명의 노예가 현존한다.” (p.5)

 

 

너무나도 명확하고 확고한 첫 문장에 눈이 멈췄다. ‘노예가 2천 7백만 명이나??’

나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노예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넋두리 하거나 힘든 일상을 푸념할 때 쓰는 ‘일의 노예’, ‘생활의 노예’ 이정도 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 책 「끊어지지 않는 사슬」은 과거 구노예제 하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들과 형태는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현대판 노예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책의 부제처럼 노예는 엄연히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침묵하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첫 번째는 가산노예제로 구노예제와 가장 가까운 형태이다. 두 번째는 부채로 인한 인신구속 노예제 또는 담보노동의 형태이다. 세 번째는 계약노예제로 가장 급속히 증가한 노예제 형태이다. 네 번째는 강제노동 형태이다.” (p.61∼62)

 

책에서는 현대판 노예제의 형태를 4가지로 분류한다.

두 번째 부채로 인한 구속 노예제, 담보노동과 세 번째 계약노예제가 오늘날 가장 일반화된 노예제의 형태인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브라질, 몇몇 아랍 국가에서 광범위하게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실제로 네팔에서 NGO관련 일을 했었던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인데,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에서는 자녀를 식모로 파는 일이 굉장히 흔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과거 구노예처럼 한번 대륙을 이동해 팔려오면 대를 이어 노예의 신분을 벗을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의 노예들도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1863년 6월 1일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서’에 서명했다.” (p.31)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된 지 약 140년이 지났지만 미국에서 노예제는 계속되고 있다. 노예제는 이미 종식되었다는 생각 역시 그만큼이나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p.47)

 

노예제는 고대부터 이어져 왔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노예해방 선언을 하기 전까지 관습에 의해서든, 종교에 의해서든 노예는 존재해 왔고 노예를 매매하고 사용하는 주인들 또한 존재해 왔다.

 

전 세계적으로 공식적인 노예해방 내지는 노예철폐 선언을 한다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 모든 노예제가 한 번에 사라질 거라 믿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문서상에서는 분명히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종종 보는 미드에서는 여전히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을 사 와서 식모로 부리는 부유층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도 공식적으로는 폐지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도와 네팔에서는 견고한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고 책에서도 소개된 것처럼 어린 소녀를 신에 대한 제물로 바쳐 신전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의 성노리개가 되게 하거나 몸종으로 살게 되는 어이없는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오히려 과거에 공식적으로 노예를 사고팔던 것보다 더 치졸하고 비열한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

“1950년 무렵 이래로 엄청난 수의 잠재적 노예들이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고 이에 따라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평균 가격은 역사상 유례없이 1백 달러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p.85)

 

현대판 노예가 2천7백만 명이나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평균 가격의 곤두박질이다. 기계적으로 인간에 대한 가격을 매긴다는 것이 찝찝하기는 하지만 절대가격으로 상정해 보면 고대와 중세 그 어떤 과거보다 인간의 가격이 가장 낮은 때라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다. 노예를 사고팔던 시기 아프리카에서 한 명의 노예를 사기 위해서는 지금 돈으로 2∼3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는 한 번 노예를 사 오면 대를 이어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인 탓도 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인간의 가격이 1백 달러 이하라니. 참담하다.

 

“사람들이 전쟁과 환경파괴, 자연재해로 인해 빈곤해지고 불안정해지고 삶의 터전을 잃을 때, 이들은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압박들로 법 규범이 와해될 때 기승을 부리는 폭력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사용된다.” (p.168)

 

또한 지난 세기에 줄곧 일어났던 전쟁과 분쟁, 근래 들어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자연재해와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의 역습들은 빈곤을 부추겼다. 특히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은 이러한 외부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없어지고 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별로 없다.

안정된 사회안전망을 통해 취업을 한다거나 보편적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국가에서 사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사실, 사람을 노예로 만들거나 인신매매해 팔아넘기는 일에서 여성이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는 단순한 이미지를 뒤흔든다.” (p.127)

 

1백 달러도 되지 않는 몸값이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들은 팔려나가는 신세조차 원망할 수 없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 ‘학교에 보내주겠다.’, ‘굶지 않게 해주겠다.’ 라는 꼬임에 넘어가 인신매매 되거나 강제 계약을 맺어 노예 신분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노예로 팔려 온 피해자가 다시금 가해자가 되어 자신과 같은 노예를 만들어 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악순환이 칼로 무를 자르듯 단번에 끊어낼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신매매 조직은 광범위하고 초국가 적이다. 그리고 각국의 정권과 공권력은 이미 그들 범죄조직과 끈끈하게 결탁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자는 국제적 기구인 UN의 적극적인 활동을 제안하고 무엇보다 근본적인 빈곤 탈출을 도울 수 있는 선진국들의 행동을 주문한다.

 

“유럽 국가들은 채무 면제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루어, 이자 지불로 가난한 나라들의 국고를 바닥나게 했던 오래된 채권들을 소멸시켜 버렸다. 부유한 국가들이 1천1백억 달러를 탕감해 주기로 동의한 악성채무빈국HIPC 계획으로 1996년부터 27개국에서 약 3백억 달러의 부채가 소멸되었다.” (p.253)

 

나는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유럽 국가들이 오래된 채권을 소멸해 줬다는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채무를 소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해당 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으로 자국의 복지에 그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극빈층을 지원하게 되는 것이다. 애초부터 노예가 탄생할 수 있는 싹을 자르는 것이다.

노예를 생산해내는 범죄조직을 소탕하고 억류되어 있는 현대판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환경을 바꾸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역시 유럽이다.

 

“소비자들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공정무역 제도 안에서 농부들은 자신의 농작물에 대해 일정한 가격을 보장받는다.” (p.240)

“마틴 기타 회사, 러그마크 재단” (p.242)

 

그리고 소비자 개인들에게는 될 수 있으면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라고 제안한다. 공정무역 은 최근 들어 이슈화가 되었었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정무역 제품에 대한 홍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구입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책에서 소개된 기타 회사 마틴과 남아시아 카펫 직조 공장을 인증하는 러그마크 재단은 생산 전 과정에 참여해 공정한 과정으로 하나의 제품이 생산되도록 참관하고 인증하는 절차를 거친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가능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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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의 정치학 - 21세기를 위한 선언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최창석.김낙근 옮김 / 인간사랑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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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정국이다. 여당과 야당의 대선 후보가 결정되었고 제3의 인물이 한쪽을 점유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100일도 남지 않았지만 아직 국지적 공방만 주고받을 뿐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 대통령이 가진 힘이 막강한 곳임에도 이렇게 폭풍전야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의문을 단순히 정치 공학적 판단으로만 이해하기 쉽지 않다.

지난 4년의 집권세력으로 인해 안겨진 허탈함과 상실, 분노와 공포는 혐오의 형태로만 분출될 뿐 정치적 의사 표현이나 직접적인 참여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4월 총선의 결과는 정확히 그것을 반영했다.

 

“이 세기의 마지막은 미래로의 몰입을 나타낸다. 20세기는 우리의 지식에 아무것도 보태주지 않았다. 20세기는 단지 우리의 열정을 그것의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창조적인 세기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혁명의 경험을 남겼고, 새로운 존재론적 결정을 창조했다. 우리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존재론적 결정에 관한 것이다.” (p.223)

 

1986년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탈리아 총리 암살사전의 배후로 지목되어 프랑스에 망명 중이었다. 1986년 파리대학 자율화를 공표한 자크 시라크 내각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투쟁은 이 책 「전복의 정치학」을 펴낸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초 두 번의 참혹했던 전쟁을 치르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혁명과 체제 전복이 일어났다. 특정 정당에 의해서든 집권 조직에 의해서든 지식인 집단에 의해서든 일정 정도의 역사적 진보를 이루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세기를 종언하고 새로운 21세기의 10년이 지난 지금은 20세기의 그것들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일방적인 계도와 전위 조직·리더만을 향해 따르라는 선전 따위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주체들의 등장을 목도했다.

이 책은 네그리로 하여금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을 확립시킨 1986년 학생투쟁과 아직 여물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지난 몇 년간 급속도로 발전된 새로운 정치형태 내지는 구조를 함께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이 주체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 다종하며(polychrome), 평등에 대한 요구를 집합적으로 기획하는 지적인 주체다. 또한 정치적인 것을 거부하고 직접적으로 생존과 투쟁을 위해 윤리적 결정을 일으키는 주체다.” (p.73)

 

“그들은 지적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즉 학생들이자 사회적 노동자들(others)이다. 그들의 힘은 그 자체로 유연하게(tenderness) 나타난다.” (p.80)

 

SNS의 등장과 대중화는 1인 미디어를 양산했고 더 이상 기존의 구태의연하고 지극히 정치적이던 미디어를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 기존 신문·방송 미디어가 종말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개별 미디어는 네트워크화 되어 하나의 사안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고 기존의 어떤 정치적 집단도 보여주지 못했던 자율성을 담보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행태를 낳게 되었다.

이를테면 희망버스와 각종 팟 캐스트 방송, 선거전의 바로미터가 되어 오던 여론조사의 부정확성 등이다.

 

네그리가 본 프랑스와 26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공시적으로 해석하면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점이 많다.

집권을 하고 있는 세력이 워낙 뻘짓을 많이 하니까 그에 대한 반작용이 그만큼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책에서 등장하는 ‘사회적 노동자’의 개념이 그대로 전유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에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다양 다종하다. 정치적인 것을 거부한다. 개인이 주체가 되어 미디어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공유하고 소비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율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유연할 수밖에 없다.

물론, 기성정치세력이나 기성언론에서는 신기루 내지는 현상 정도로 격하하고 폄훼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지금 안철수씨에게 몰리는 지지와 환상을 지켜보면 간단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대선을 앞두고 어떤 정국이 펼쳐질지 쉽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네거티브로는 더 이상 새롭게 양산된 ‘사회적 노동자’들의 생산적 정치행위와 의제설정을 무너뜨릴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언론을 장악해서 여론을 조작한다 하더라도 이미 개별 주체가 미디어가 되어 있는 젊은 ‘사회적 노동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조직 혹은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보수’의 의미를 내키는 대로 해석해 활용하는 데는 대책이 없다. 어떤 뻘짓이나 대책 없는 말을 하거나 몰상식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30∼40%의 부동층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이다. 혹자는 이성의 역사가 아닌 감정으로 점철된 역사가 파생한 기형적인 현상이라 분석하는데 일견 맞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내 개인적으로 구한말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한국전쟁과 독재를 100년 동안 압축적으로 겪어온 부작용이라 판단한다. 단순히 통시적으로 펼쳐놓을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어떤 쪽에 속해 있든지 간에 이번 대통령 선거는 굉장히 중요하다. 현재의 여당과 야당 모두 정권 교체를 경험했고 집권과 제1야당을 경험했다. 개인적인 예측이지만 이번 대선을 통해 집권하는 세력은 적어도 10년은 정권을 이어갈 것으로 본다.

 

과거 수십 년간 극단으로 치닫던 지역주의, 패권주의, 너저분한 네거티브 등으로 형성한 헤게모니 구축이 지금은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이 내놓는 정책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이미 지역투표에서 세대투표로 선거의 결과가 이행된 것이 기정사실이라는 점도 덧붙인다.

투표의 결과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민심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이미 정치화되고(유독 국내에서는 ‘정치적이다’라는 수사를 반정부, 반체제, 반집권세력을 탄압하거나 뭔가 비이성적이고 반공동체적인 것으로 치부하는데 아니, 도대체 정치적이지 않은 사회적 활동이 있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여론은 생산해 소비하는 ‘사회적 노동자’들의 주체성도 그대로 녹아들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된 용기(容器)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은 기성 정치세력과 탄생할 집권세력의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마치 19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고, 또한 마치 20세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p.8)

 

21세기는 이미 저만치 가고 있는데 여전히 20세기 언저리에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직무 유기에 다름없다.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19세기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바뀌며 진화하고 있는 사회다. 이 책에서 여러 번 네그리가 언급하는 것처럼 ‘사회적 노동자’는 이미 대두되었고, 산업혁명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공장노동자’를 대체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아내는 성숙한 사회적 함의와 방향이 필요하다.

 

“지배계급들은 비밀주의가 안보상의 이유로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수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p.340)

“비밀주의와 불안은 오늘날 국가와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국가와 테러리즘의 대결로 거짓 포장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과 알카에다, 미국과 불량국가들의 대결은 양자의 비밀주의를 강화시키고 세계 민중들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효과만 낳는다.” (p.341)

 

사회현상을 아우르는 정치는 전복되어 새로운 미래로의 몰입으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지배계급과 국가는 이상한 계략들로 초점을 흐린다.

 

특히, 상존하는 ‘적’의 존재를 상대화 하고 있는 한국의 현대사는 이것의 심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등학교 시절 안보 포스터를 열심히 그리던 나와 친구들은 거의 북한 사람들을 빨간 도깨비로 그렸다. 한국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빨갱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고 있다.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염려를 ‘역시나’ 하는 위험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하지만 ‘사회적 노동자’들이 전복하는 새로운 정치의 장에서는 큰 재미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일방적인 여론 주입과 선전·선동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스스로 주체가 되는 새로운 존재론적 결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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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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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참으로 생활력이 강한 분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일을 하셨다. 보석 도매상에서부터 아이 돌보기, 밤껍질 까기, 공장일까지 줄곧 일을 하셨다. 지역에서는 건실한 회사에서 정비관련 일을 하셨던 아버지와 함께 늘 일을 하셨다. 나와 내 남동생이 모두 결혼해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돌아보면 부모님의 헌신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셨던 일이 라면스프에 들어가는 첨가물을 가공하는 공장이었다. 4남매의 장녀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양반 끄트머리를 붙들고 계시던 외할아버지의 완고함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중학교에서 멈춰야 하셨다. 어머니 나이 23세에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는 기울었고 남동생 셋을 위해 성남으로 상경해 일을 하셨다. 시골 여자로 태어나셨지만 강한 리더십과 추진력, 카리스마를 가지신 어머니는 그곳에서도 금세 또래들 중 리더가 되셨다고 한다. 결혼 후 생전 처음 온 지역에서 정착해 살면서도 그런 어머니의 기질은 도드라졌다. 각종 계와 모임, 동네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해소자가 되기도 하셨다.

마지막으로 일하셨던 라면스프 공장에서도 비공식 직함인 ‘반장’이 되어 수십 명의 아줌마들을 리드하셨다. 공장의 상황이 갑작스레 안 좋아져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수십 명의 아줌마들을 이끌고 노동관련 부서로 쫓아다니시고 공장장과 사장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 퇴직금과 밀린 급여를 모두 받아내시기도 했다.

 

아마 남자로 태어나셨으면 못해도 회사 중역이나, 자치단체 장 정도는 하고도 남으실 분이다.

 

“잔뜩 열어놓은 창문이고 환기구를 통해 한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밀려들었다. 지나가는 산과 밭, 논은 온통 푸른데 바람 없이 햇살만 가득한 그 풍경이 무거워 어쩌면 가장 왕성한 생명력이란 저렇듯 무겁고 힘든 색깔을 등에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p.65)

 

한창훈의 「홍합」을 읽으며 계속 어머니가 생각났다. 여수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의 고된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편 수발하고 새끼들 키우느라 일을 놓을 수 없는 아줌마들. 그녀들에게 계절의 변화는 체화할 수 없는 일상일 뿐이다. 뼈가 삭는 고통일 뿐이다. 숨이 막히는 한 여름 초록빛 세상은 목을 조여 오는 답답함일 뿐이다.

 

 

「홍합」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아줌마라는 단어 하나로 통칭할 수 없는 개별적 고통과 한숨의 주체다.

 

“하늘에서 물 몇 방울 떨어진다고 사람들 마음이 그 새 창호지마냥 녹녹해지는 게 아주 우습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두고 보면 비라도 좀 내려 봐라, 나는 그 핑계 대고 놀란다, 세상만사 잊어 불란다, 소주 몇 잔만 눈앞에 있으면 온갖 시름 떨쳐버릴란다, 작정을 할 만큼 그들은 고달픈 것이다.” (p.23)

 

여수에서 순천에서 한 푼 벌기 위해 홍합 공장으로 모여든 여인들은 누구하나 곡절이 없는 이가 없다. 별의별 사연과 과거로 가득한 곳이다. 라디오 사연으로 써 내려가면 번지르르한 김치냉장고 하나쯤 거뜬히 받아낼 수 있을 만큼 구슬프고 어이없으며 짠하다. 하긴 경제적 어려움이 없고 남편 벌어오는 돈 만으로 새끼들 키우고 사고 싶은 옷 마음껏 살 수 있는 형편이라면 좁아터진 홍합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멈추지 못한 일로 굳어진 손마디와 마음 심지는 얼핏 뻔뻔하게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김씨 아줌마처럼 철판을 둘러놓은 것 같이 단단해 보이지만 그녀들이 살아온 삶의 굴절만큼이나 요동치고 잘못 건드리면 한꺼번에 쓰러져버리는 도미노 조각처럼 약하기도 하다.

그래서 좁은 공장에 모여든 서로를 위로한다. 내 옆의 00엄마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뭐 그런 날도 있었다. 그만큼 흔한 수 있는 게 남편들의 폭력이었고 사실 그 폭력에 가장 시달리는 이는 바로 석이네이기도 했다.” (p.44)

“간간히 자신들도 눈가에 푸른 꽃을 달고 오면서도 누구 하나 그 몰골로 오면 천하에 못 볼 꼴 봤다는 듯 성화였다.” (p.79)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의 남편들은 하나같이 인간 하자들이다. 제대로 돈을 벌어다 주는 놈 하나 없다. 열심히 배를 타지도 않고 열심히 농사를 짓지도 않는다. 싸지른 새끼들에게는 관심도 없다. 꼴에 사내노릇 한다고 술질에 계집질까지 가관이다. 공장에서 잔업이 있어 조금이라도 늦게 집에 올라치면 당장 때려치우라 되레 큰소리다. 술까지 마실라치면 어김없이 두들겨 팬다. 자식 낳아줘, 부모 공양해, 돈 벌어와, 밥상 차려주는 마누라를 두들긴다.

홍합 공장 여인들은 무저갱에서 탈출할 수 없다.

숙명처럼 자신의 팔자를 탓하기도 하고 이혼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단 한명도 실행하지 못한다.

부끄러운 훈장처럼 얼굴에 푸른 꽃을 피워오면 지난 주 자신이 피워온 푸른 꽃을 기억 못하는 듯이 더 길길이 날뛴다. 죽일 놈, 찢어 죽일 놈, 망나니 같은 놈 악을 써보지만 그녀들은 무저갱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집 옆집 같이 공장 다니는 여자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유독 그녀만 늦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그 입방아를 무슨 수로 견뎌내겠는가. 도대체 이놈의 동네엔 말 못해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p.181)

 

공장의 유일한 총각 문기사와 설레는 로맨스를 꿈꾸는 승희네는 일찍 죽은 남편의 부모와 자식들을 결국 벗어내지 못한다. 노총각과 과부의 로맨스는 전혀 불륜적이지도 외설적이지도 않다. 소설 속 승희네의 인생이 너무 구차하기 때문일 거다. 둘만의 사사로운 시간을 가질라치면 어김없이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거나 옆집에 불상사가 생긴다. 무슨 대단한 야반도주를 꿈꾸지도 뜨거운 하룻밤을 바라지도 않는데 그것조차 이놈의 무저갱은 허락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은 구차하고 애달프게만 읽히지 않는다.

 

작가 한창훈의 네이티브 전라도 사투리 표현이 일단 한 몫 한다. 그리고 남자들만 모여 있는 곳과는 달리 여자들만 모여 있는 곳은 늘 깔깔깔, 까르르르가 넘쳐나기 마련이다.

몰래 공장을 빠져나와 아들내미 학교에 다녀온 후 다른 여인들과 시비가 붙는 일도 있지만 마침 생선을 수송하는 트럭이 공장 옆 논두렁에 거꾸러져 맨손으로 팔뚝만한 우럭을 잡아와 다 같이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재미도 있다.

깔깔깔, 까르르르는 그네들에게만 통하는 정서요. 배출구요. 잠시나마 무저갱을 잊을 수 있는 짜릿함이다.

제일 나이 많은 언니를 망구로 놀리고 시답지 않은 남자 일꾼들과 노골적인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면서도 깔깔깔, 까르르르.

한창훈은 새콤달콤 알싸하게 잘 버무려진 홍합초무침처럼 여인들과 사투리와 깔깔깔, 까르르르를 섞어낸다.

 

돌이켜보면 내 어머니도 그러셨던 것 같다. 공장에서 일하고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 음성 뒤로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그렇게 견뎌냈던 것이다.

한창훈의 글에 완전히 매료됐다. 구슬프지만 재미있고 고되지만 위안이 된다. 인물과 사건을 버무려내는 전라도 사투리는 맛있는 초고추장처럼 찰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김훈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이런 작가를 이제야 안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거문도 출신답게 초기작 대부분이 섬과 바다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여러 권 구입했다. 좋아하는 작가 목록 상위에 올려놓으니 부자가 된 듯하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한창이던 1992년 여름인데, 중간 중간 언급한 당시 정치적 상황과 전라도 사람들의 인식. 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은 작품에 더 큰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표현한다. 홍합공장 여인들의 삶을 기똥차게 버무려 내는 것처럼 딱 그만큼에서 멈춘다. 그래서 더 임팩트 있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공장의 유일한 총각 문기사와 유일한 젊은 과부 승희네의 로맨스가 어떤 식으로든 영글었으면 싶었는데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기사와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이어가던 승희네는 공장에 출근하는 것만이 무저갱에서의 탈출이었다. 집안일은 내팽개친 시어머니와 꼬장꼬장한 시아버지, 참새 새끼마냥 저녁밥만 기다리는 새끼들은 가녀린 승희네의 어깨를 짓누르기만 하는 돌덩어리다. 한 여름 달게 익어가는 포도송이 같은 나날이었는데, 일생 도움이 안 되는 시어머니가 내일부터 공장 나가지 말고 논일 하란다.

 

내일부터 공장에 못 가고 농약 친단다. 씨발 것, 독사야 내 발 물어라.” (p.185)

 

승희네는 과부에서도 며느리에서도 편모에서도, 자기를 둘러싼 무저갱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출렁대는 논물에 발을 담그지만 이내 빼버릴 수밖에 없다.

근데 오히려 딱 이만큼이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좋지 않은 결말에 대한 예상은 뚜렷하고 핑크빛 결말에 대한 기대는 모호하고 흐릿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에 생소한 단어가 많이 나왔다. 나름 책을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단어가 참 많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뜻을 찾아보는 것도 쏠쏠하게 재미있었다.

 

“에멜무지로 앉아” (p.12)

“흉내를 내며 얼굴을 빤히 대고는 기롱지거리를 했다.” (p.27)

“그예” (p.37)

“한갓지게” (p.56)

“틉틉한” (p.138)

“고시랑거리며” (p.229)

 

한창훈의 다음 작품을 읽을 생각에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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