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의 정치학 - 21세기를 위한 선언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최창석.김낙근 옮김 / 인간사랑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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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정국이다. 여당과 야당의 대선 후보가 결정되었고 제3의 인물이 한쪽을 점유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100일도 남지 않았지만 아직 국지적 공방만 주고받을 뿐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 대통령이 가진 힘이 막강한 곳임에도 이렇게 폭풍전야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의문을 단순히 정치 공학적 판단으로만 이해하기 쉽지 않다.

지난 4년의 집권세력으로 인해 안겨진 허탈함과 상실, 분노와 공포는 혐오의 형태로만 분출될 뿐 정치적 의사 표현이나 직접적인 참여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4월 총선의 결과는 정확히 그것을 반영했다.

 

“이 세기의 마지막은 미래로의 몰입을 나타낸다. 20세기는 우리의 지식에 아무것도 보태주지 않았다. 20세기는 단지 우리의 열정을 그것의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창조적인 세기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혁명의 경험을 남겼고, 새로운 존재론적 결정을 창조했다. 우리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존재론적 결정에 관한 것이다.” (p.223)

 

1986년 안토니오 네그리는 이탈리아 총리 암살사전의 배후로 지목되어 프랑스에 망명 중이었다. 1986년 파리대학 자율화를 공표한 자크 시라크 내각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투쟁은 이 책 「전복의 정치학」을 펴낸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초 두 번의 참혹했던 전쟁을 치르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혁명과 체제 전복이 일어났다. 특정 정당에 의해서든 집권 조직에 의해서든 지식인 집단에 의해서든 일정 정도의 역사적 진보를 이루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세기를 종언하고 새로운 21세기의 10년이 지난 지금은 20세기의 그것들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일방적인 계도와 전위 조직·리더만을 향해 따르라는 선전 따위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주체들의 등장을 목도했다.

이 책은 네그리로 하여금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을 확립시킨 1986년 학생투쟁과 아직 여물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지난 몇 년간 급속도로 발전된 새로운 정치형태 내지는 구조를 함께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

 

“이 주체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 다종하며(polychrome), 평등에 대한 요구를 집합적으로 기획하는 지적인 주체다. 또한 정치적인 것을 거부하고 직접적으로 생존과 투쟁을 위해 윤리적 결정을 일으키는 주체다.” (p.73)

 

“그들은 지적 노동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즉 학생들이자 사회적 노동자들(others)이다. 그들의 힘은 그 자체로 유연하게(tenderness) 나타난다.” (p.80)

 

SNS의 등장과 대중화는 1인 미디어를 양산했고 더 이상 기존의 구태의연하고 지극히 정치적이던 미디어를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 기존 신문·방송 미디어가 종말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개별 미디어는 네트워크화 되어 하나의 사안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고 기존의 어떤 정치적 집단도 보여주지 못했던 자율성을 담보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행태를 낳게 되었다.

이를테면 희망버스와 각종 팟 캐스트 방송, 선거전의 바로미터가 되어 오던 여론조사의 부정확성 등이다.

 

네그리가 본 프랑스와 26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공시적으로 해석하면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점이 많다.

집권을 하고 있는 세력이 워낙 뻘짓을 많이 하니까 그에 대한 반작용이 그만큼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 책에서 등장하는 ‘사회적 노동자’의 개념이 그대로 전유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에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다양 다종하다. 정치적인 것을 거부한다. 개인이 주체가 되어 미디어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공유하고 소비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율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에 유연할 수밖에 없다.

물론, 기성정치세력이나 기성언론에서는 신기루 내지는 현상 정도로 격하하고 폄훼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지금 안철수씨에게 몰리는 지지와 환상을 지켜보면 간단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대선을 앞두고 어떤 정국이 펼쳐질지 쉽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네거티브로는 더 이상 새롭게 양산된 ‘사회적 노동자’들의 생산적 정치행위와 의제설정을 무너뜨릴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언론을 장악해서 여론을 조작한다 하더라도 이미 개별 주체가 미디어가 되어 있는 젊은 ‘사회적 노동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조직 혹은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보수’의 의미를 내키는 대로 해석해 활용하는 데는 대책이 없다. 어떤 뻘짓이나 대책 없는 말을 하거나 몰상식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30∼40%의 부동층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상이다. 혹자는 이성의 역사가 아닌 감정으로 점철된 역사가 파생한 기형적인 현상이라 분석하는데 일견 맞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내 개인적으로 구한말과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한국전쟁과 독재를 100년 동안 압축적으로 겪어온 부작용이라 판단한다. 단순히 통시적으로 펼쳐놓을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어떤 쪽에 속해 있든지 간에 이번 대통령 선거는 굉장히 중요하다. 현재의 여당과 야당 모두 정권 교체를 경험했고 집권과 제1야당을 경험했다. 개인적인 예측이지만 이번 대선을 통해 집권하는 세력은 적어도 10년은 정권을 이어갈 것으로 본다.

 

과거 수십 년간 극단으로 치닫던 지역주의, 패권주의, 너저분한 네거티브 등으로 형성한 헤게모니 구축이 지금은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이 내놓는 정책이라는 것이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이미 지역투표에서 세대투표로 선거의 결과가 이행된 것이 기정사실이라는 점도 덧붙인다.

투표의 결과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민심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이미 정치화되고(유독 국내에서는 ‘정치적이다’라는 수사를 반정부, 반체제, 반집권세력을 탄압하거나 뭔가 비이성적이고 반공동체적인 것으로 치부하는데 아니, 도대체 정치적이지 않은 사회적 활동이 있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여론은 생산해 소비하는 ‘사회적 노동자’들의 주체성도 그대로 녹아들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된 용기(容器)에 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은 기성 정치세력과 탄생할 집권세력의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마치 19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고, 또한 마치 20세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p.8)

 

21세기는 이미 저만치 가고 있는데 여전히 20세기 언저리에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직무 유기에 다름없다.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19세기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바뀌며 진화하고 있는 사회다. 이 책에서 여러 번 네그리가 언급하는 것처럼 ‘사회적 노동자’는 이미 대두되었고, 산업혁명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공장노동자’를 대체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아내는 성숙한 사회적 함의와 방향이 필요하다.

 

“지배계급들은 비밀주의가 안보상의 이유로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수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p.340)

“비밀주의와 불안은 오늘날 국가와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국가와 테러리즘의 대결로 거짓 포장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과 알카에다, 미국과 불량국가들의 대결은 양자의 비밀주의를 강화시키고 세계 민중들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효과만 낳는다.” (p.341)

 

사회현상을 아우르는 정치는 전복되어 새로운 미래로의 몰입으로 나아가는데 여전히 지배계급과 국가는 이상한 계략들로 초점을 흐린다.

 

특히, 상존하는 ‘적’의 존재를 상대화 하고 있는 한국의 현대사는 이것의 심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초등학교 시절 안보 포스터를 열심히 그리던 나와 친구들은 거의 북한 사람들을 빨간 도깨비로 그렸다. 한국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빨갱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정치적 수사로 활용되고 있다.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염려를 ‘역시나’ 하는 위험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하지만 ‘사회적 노동자’들이 전복하는 새로운 정치의 장에서는 큰 재미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일방적인 여론 주입과 선전·선동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스스로 주체가 되는 새로운 존재론적 결정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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