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 시대를 읽다 - 문화투쟁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백승종 지음 / 산처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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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6개월의 군생활 동안 소대장 생활을 1년5개월여 했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주된 임무가 해안경계근무였다. 중대가 담당한 소초가 2개가 있었고 3개 소대가 번갈아가며 소초에 투입되었다. 소초는 독립부대다. 한번 투입되면 3∼4개월 동안 낮에는 교육훈련, 밤에는 경계근무가 반복된다. 소대인원, 타중대 파견인원, 상근인원을 포함하면 40명 정도의 병력을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소초는 독립부대이기 때문에 식사부터 교육훈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했다. 주둔지 부대에 있을 때 보다는 다소 느슨하고 탄력적으로 부대를 운영할 수 있었지만 어느 독립 부대나 그렇듯이 하루가 멀다하고 순찰·순시·온갖 검사가 잇따랐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밤낮이 바뀌는 소초 생활도, 사고 치는 상근인원들도, 열악한 근무환경도 크게 힘들지 않았다.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정신교육이었다. 군에 다녀온 남자들은 모두 알 것이다. 내가 소초장 생활을 할때는 수요일이 정신교육 시간이었다. 말이 정신교육이지 국방부에서 내려오는 대북안보관을 그대로 읽고 전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제대별·계급별 간담회도 하고 토론 시간이 계획에 있기는 했지만 역점을 두는 것은 안보관 확립이었다. 하지만 내가 소대장을 했을 때에도 병사들의 의식수준은 국방부의 그것 이상이었다. 주적관·안보관은 이미 탄력적이었다. 쉽게 말하면 군에서 이런 정신교육을 하는 의도조차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설문을 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주적을 미국이나 일본으로 적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 또한 판에 박힌 의도적인 정신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주로 자유토론을 했었다.

그러던 중 한번씩 상급부대로부터 내려 온 공문의 사본이 소초에까지 오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에 대한 내용이었다. 정말 웃겼던 것은 이미 시중에 베스트셀러였던 책도 있고 주둔지 대대에서 일괄 구입한 책들 중에 불온서적 대상에 끼여 있는 책도 있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런 불온서적을 지정하고 ‘읽지마라’고 하는지 어이가 없고 황당하기 까지 했다.

전역한 후에도 국방부는 한번 더 ‘불온서적’을 지정해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금서의 문제를 ‘문화투쟁’이란 관점에서 바라볼 것입니다.” (p.5)

“미풍양속이 구실이 됐든, 올바른 종교적 신앙, 혹은 정치적 이념을 위해서라 하든 금서는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p.16)

 

금서를 통해 시대를 읽는다는 저자의 발상이 신선했다. 단순히 시대적 상황이나 배경에 의해서 금서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문화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분석한 노력을 책에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금서는 있어왔다. 어느 시대에나 힘은 있어왔다. 힘을 가진 자가 있었고 반대로 힘을 가지지 못한 자가 있었다. 힘을 가진 자(들)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힘을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고 힘을 가지지 못한 자(들)는 어떻게 해서든지 힘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다. 갈등과 투쟁의 반복이다.

 

 

“「정감록」이 성리학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상대로 평민지식인들이 벌인 ‘문화투쟁’의 수단이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싶습니다.” (p.53)

“신채호의 을지문덕 예찬은 신채호식 영웅사관의 표현이었습니다. 단순히 을지문덕이라는 개인을 추앙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었어요. 대신에 을지문덕이라는 민족적 영웅을 중심으로 한민족의 관념적 일체감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깔려 있었습니다.” (p.138)

 

조선 시대 「정감록」과 일제 강점기 「을지문덕」은 조정과 일제라는 구체제에 대한 반발이었다. ‘갈아 엎자.’, ‘뒤집어 버리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의 조정과 일제는 탄압하고 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 책들은 민중들에게 불티나게 읽혔다. 오랜 시간 시달려 왔고 지배받아 왔기 때문에 당연히 생각되던 것들이 책을 읽어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쓰나미처럼 민중의 마음을 휩쓸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체제 전복이나 폭력 투쟁에까지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진짜 소시민들이 마음을 대변하는 현상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최소한 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었다면 말이다. 또한 분명히 「정감록」과 「을지문덕」을 쓴 이들은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 목표와 목적이 민중의 그것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권력과 지배층에 대한 투쟁이라는 관점의 출발은 동일하기 때문에 열광했다.

조선의 조정과 일제는 무서웠을 것이다.

 

 

“리영희의 책들은 체제가 금지한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시민 중심의 민주 사회로 이끌어나간 ‘문화투쟁’의 기폭제였습니다. 리영희의 문화투쟁은 ‘진실’을 향한 열정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p.211)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고(故)리영희 선생에 대한 내용이 있어 더욱 반가웠다. 리영희 선생의 책은 나보다 10∼20년 대학을 먼저 다닌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교본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의 성경이기도 했던 리영희 선생의 책이 대부분 금서였다는 사실은 그의 책 「반세기의 신화」를 처음 읽으면서 알게 되었었다. 리영희 선생의 책을 읽으면 모두 ‘투쟁가·운동가’가 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투쟁가·혁명가는 되지 못했지만 그의 책을 읽고 세계관·사회관·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출간된 지 20∼30년이 지난 책이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관통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리영희 선생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 언론인이었고 지식인이었으며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수감생활도 부지기수로 했었고 정권이 바뀌고 정치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다고 해서 비판의 칼날을 내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신화처럼 떠받들어지고 세뇌되어 왔던 거짓을 도려내고 진실을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 선생의 삶과 그의 책을 ‘문화투쟁’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자의 시도가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그런 삶을 몸으로 살아 낸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선생이자 선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70년에 발표된 김지하의 시 「오적」은 험난한 투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시는 곧 금지됐고, 시인은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시인이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은 것은 1980년 말이었습니다.” (p.180)

“「오적」은 군부독재정권은 물론이고 그와 결탁한 특권층의 비리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 첫째가 재벌, 둘째가 국회의원, 셋째가 고급공무원, 넷째가 장군님, 다섯째는 장차관들” (p.186)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실소를 아니 지을 수 없는 코미디가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최근들어 가장 나의 배꼽을 잡은 것은 김지하였다. 사람이 한 번 변하면 겉잡을 수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문수와 비슷한 반열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김지하의 책을 직접적으로 본 적은 없다. 그래서 그가 한 때 학생운동의 상징이었고 심장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단순히 운동권 작가였고 오랜 세월 투옥되었던 민주열사였다고만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모 인터넷 신문의 기사를 보고 나서 김지하의 최근 행태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재미있고 슬프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역사적 인물이었음에도 말로가 저렇게 구차하고 너저분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도 했고 적어도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이라면 그로 인해 영향을 받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자신의 사상전향으로 인해 받은 많은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기적이다.

한 때는 내놓는 책마다 금서가 되고 정권에게는 반드시 잡아 들여야 할 지식인이자 운동가였던 자가 뒤늦게 변신하여 보이는 모습이 애처롭다.

하지만 김지하 개인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실제 예가 이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

다만 지금 내가 김지하의 「오적」을 구해서 읽는다 해도 70년대 당시 숨어서 몰래 「오적」을 읽으며 통쾌해 했던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100분의 1도 느껴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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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과학 - 위대한 석학 16인이 말하는 뇌, 기억, 성격, 그리고 행복의 비밀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1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이한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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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은 무엇이 있을까? 자본, 권력, 군사력, 정의, 사랑, 희망, 공감, 연대, 역사 등등.

가장 실제적 힘을 미치는 요소는 과학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 분야인지라 기본 상식조차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학에 의해 문명이 발전되어 왔고 역사가 쓰이기도 했으며,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엣지’라는 과학자들의 집단이 있었나 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전혀 알 턱이 없는 이름이다. 과학에도 수많은 종류와 분파, 분야에 있기 때문에 수많은 전문가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고 학설을 발표하고 논문을 소개하기도 하는 모임이라고 한다. 단순히 사교모임이나 ‘나는 이만큼 잘 났소~’ 자랑하려는 모임이 아니라 <과학과 인문의 단절도 상징되는 ‘두 문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지식과 사고방식, 즉 ‘제3의 문화’를 추구한다>는 모임의 정체성이 흥미를 끈다. 첨단의 시대를 살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간다운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시대에 역행하고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에 ‘엣지’의 선언은 반갑다.

사실 이들의 선언만큼 책에 소개된 내용도 반가웠으면 좋으련만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첨단을 달리는 이론심리학자, 인지과학자, 신경과학자, 신경생물학자, 언어학자, 행동유전학자, 도덕심리학자가 ‘마음’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탐구한다.” (p.10)

 

이 책 「마음의 과학」은 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 특히 이전에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었던 새로운 과학의 연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과학자들의 글이 실려 있다. 모두 18편이 실려 있는데 엣지 온라인 지면에 실리기도 했고 편집한 인터뷰 내용이나 의뢰한 기고문, 강연문으로 채워져 있다. 딱딱한 연구 논문은 아니어서 읽기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18편의 글 중 내게 인상 깊었고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글은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당신은 식초 통에 든 단 오이가 될 수 없다]와 신경과학자이자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뇌인지센터 소장인 V.S.라마찬드란 교수의 [자기인식의 신경학]이었다.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글 ‘당신은 식초 통에 든 단 오이가 될 수 없다.’는 몇 해 전 전 세계를 경악케 했던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일어난 죄수 학대 사건에 대한 단상에서 시작된다.

 

 

“미 국방부와 군대는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죄수 학대 사건이 여러 모로 보나 좋은 통에 나쁜 사과가 몇 개 들어간 탓이라고 말한다. 그 분석은 잘못되었다.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는 것은 나쁜 사과가 아니라 나쁜 통이다.” (p.82)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있었던 죄수 학대 사건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내용이다. 그만큼 사건 자체가 충격적이었고 자극적이었다. 세계를 호령하고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며 세계 민주주의의 파수꾼이라 자임하는 미국 군인이 저지른 일이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학대를 가하던 미군들이 서로 사진을 찍었는데 앳된 미여군이 이라크 죄수들이 발가벗겨져 피라미드처럼 쌓여진 뒷배경에서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다른 많은 사진들에서도 미군들은 마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수감자들을 갖고 놀았다. ‘갖고 놀았다.’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사실 이 책의 필자도 은근히 ‘죄수’라는 표현을 기정사실화 해 놓고 있는데 나는 이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죄수가 아니라 수감자였다. 번역을 잘못 했는지 애초에 이런 단어를 썼는지 원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이런 표현하나가 굉장히 세심하고 주의 깊게 쓰였어야 했다.

어쨌든 학대 사건은 당시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즉각 사과하고 처벌과 보상을 약속했다. 부시 대통령과 럼즈펠트 국방장관이 혈안이 되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찾으려 했던 생화학 무기와 후세인은 잡히지 않고 지리멸렬한 공방과 물 먹는 하마보다 더 빨리 돈 먹는 전쟁에 지쳐가던 시기였다. 국내외 언론 또한 그랬다. 그런 와중에 이라크 수감자에 대한 미군 병사들의 학대 사건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왜 선한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를까?” (p.83)

 

짐바르도 교수의 표현처럼 ‘왜 선한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당시 아부그라이브 학대 사건은 주로 밤에 일어났다고 한다. 신경 쓰고 주의해야 할 눈이 많은 낮이 아니라 제 세상이 되는 밤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짐바르도 교수는 유명한 ‘밀그램 실험’을 소개한다. 선하고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유명한 실험이다. 대다수가 아는 실험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 ‘밀그램 실험’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뜻이나 의지가 아니라 옆에서 부추기는 감독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것이 아부그라이브 수감자 학대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눈치 봐야 하는 상사도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수감자들에 비해 무기를 가지고 있고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은 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밤이 되면 자기들 세상이 된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저질러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고 나 말고도 많은 동료들이 함께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익명성 또한 보장되는 흥미진진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약하고 의지라는 것은 얼마나 위태로운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방치의 악(evil of inaction)'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떠한가?’이건 잘못된 일이야! 당장 그만둬! 너무 끔찍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p.99)

 

‘밀그램 실험’이나 아부그라이브 수감자 학대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떨까? 솔직하게.

‘나도 저럴 수 있겠지~. 아니야~ 저 정도는 아닐 거야~.’ 생각할 것이다. 짐바르도 교수는 자신은 아닌 척 하면서 그것에 자위하는 방치자들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아직 이전 연구만큼은 진행되지 않아서 책에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지만 않지만 흥미로운 분야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가하는 전기 충격에 고통 받는 피실험자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거나, 나 외에도 많은 선량하고 친절하며 일 잘하는 동료들 모두가 동참한 학대 게임에 나 하나 거든다고 큰 탈이 날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나와 당신의 의지 또한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생활을 하면서 ‘암묵적 동의’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직장 상사의 거듭되는 어이없는 언행에도 한 마디 할 수 없고, 유별나게 한 사람을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도 ‘그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나만 그런가? 나만 쓰레긴가? ㅎㅎ

결정적인 것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식초 통에서 단 오이가 될 수 없듯이 똑같은 그 상황 한 가운데 나도 들어가 있다면 과연 나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아부그라이브 수감자 학대 사건이 일어나고 미 당국은 엄중한 처벌과 분명한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진 처벌과 보상은 없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명확한 피해자 숫자 파악도 없었고 학대의 주모자를 비롯해 재판에 회부된 미군은 모두 11명이었는데 고문이나 가혹행위 등 직접적인 범죄 혐의로 기소된 것이 아니라 ‘근무태만’으로 기소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강력한 처벌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통을 구할 생각도 없었고 식초를 부어낼 의지도 없었다. 식초가 들어 있는 통에 오이를 넣든지 사과를 넣든지 감을 넣든지 해도 결국 단 오이, 사과, 감은 될 수 없다.

 

 

 

“전측 대상회(anterior cingulate)에 있는 뉴런들은 환자를 바늘로 찌르면 반응할 것이다. 이 뉴런들은 감각 통증(sensory pain) 뉴런이라고 한다. 놀랍게도 토론토대학교의 연구자들은 그 뉴런들 중 일부는 타인이 찔리는 것을 지켜보는 환자에게서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발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공감뉴런(empathy neuron)’ 또는 ‘달라이라마 뉴런’이라고 부른다.” (p.266)

 

신경과학자이자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뇌인지센터 소장인 V.S.라마찬드란 교수의 [자기인식의 신경학]이라는 글도 흥미로웠다.

언젠가 범죄심리학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사이코패스에 대한 연구가 주된 내용이었다.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에 대해 프로파일링을 하고 범죄심리학과 가정사를 분석하는 것이 기존의 주된 연구였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는 실제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뇌를 연구한 내용이었다.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전두엽 부분의 손상이 사이코패스가 된 주요 원인이라는 추정이 기억났다.

라마찬드란 교수의 글을 보면서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쉽게 말하면 우리 뇌의 특정 부분에 있는 뉴런은 내 손가락이 바늘에 찔렸을 때 통증을 느끼도록 감각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감각 통증 뉴런이 만일 손상되었다면 제대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의 통증만이 아니라 타인이 찔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똑같은 통증을 느끼는 뉴런이 있다는 것이다. 라마찬드란 교수는 그것을 ‘공감뉴런’, ‘달라이라마 뉴런’이라 정의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달라이라마 뉴런’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고 쉽게 이해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 ‘달라이라마 뉴런’이 손상된다면 타인에 대한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사이코패스 범죄자에 대한 다큐멘터리 내용과 굉장히 비슷했다. 그때 그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사람이 라마찬드란 교수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사이코패스 범죄가 많아지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소통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유아·청소년이 많다는 뉴스를 본 적도 있었기에 흥미가 갔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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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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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주 어렸던 때부터 명절과 방학을 맞아 시골에 가면 그 때도 할머니는 늘 아프셨다. 경북 포항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이 충북 단양에 계시는 할머니 댁을 찾아가려면 4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포항에서 경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경주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 완행 비둘기호를 타야 했다. 비둘기호라 함은 선로에 걸쳐 있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기차였다. 경주에서 구단양역까지 꼬박 5시간을 가야 하는 먼 거리였다. 안동이나 영주와 같은 큰 역에서는 타고 내리는 손님이 많아 꽤 오랜 시간을 정차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잽싸게 기차에서 내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락우동을 사오시고는 했다. 그것이 정말 별미였다. 지루한 열차에서 그 가락우동 먹는 맛이 최고였다. 구단양역에는 늘 깜깜한 밤에 도착했다. 가로등도 없고 지나는 차도 많지 않은 찻길로 나와 택시를 타고 30분여를 가야 할머니 댁에 이를 수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애살맞은 할머니는 아니셨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더 애살맞으시고 손주 놈들을 더 예뻐하셨다. 경북 영주가 고향이신 할머니는 경북 예천 신랑 집으로 오고 나서야 할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척박한 예천의 첩첩산중 뱀사골에서 밭을 일구고 소작 생활을 하시다가 여차여차하여 충북 단양에 정착하게 되었다. 소작의 신분은 버릴 수 없었던지라 고된 밭일, 논일에 6남매를 키워내시면서도 허리 한 번 펴실 날이 없으셨다. 그래서 어린 내 눈에도 할머니는 늘 꼬부랑 할머니셨다. 지금 내 어머니 나이보다 훨씬 어렸음에도 너무 늙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소죽을 끓이시며 폐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가파른 기침을 밭아내시는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곤 했다. 나와 내 동생이 어느 정도 장성하여 할머니 댁에 가면 미뤄두었던 외양간 청소와 고추 따기, 콩 털어내기 등 온갖 농사일을 했다. 때론 일만 시키는 할머니가 야속하기도 했다. 욕심 많고 며느리 고생시키던 할머니가 밉기도 했다. 어머니가 속상해 하시는 것도 싫고 시간이 갈수록 갈등이 많아지는 집안의 일들도 신경 쓰기 싫었다.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취직 하고 결혼 하고... 앞가림 하느라 할머니, 할아버지 늙으시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직 미워하던 내 마음 정리도 못하고 제대로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는데, 늘 아프셔서 그냥 또 아프신가 보다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손입네 상주노릇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죄송했다. 내 마음은, 진짜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할머니한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하나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내 할머니는 1922년생이시다. 박완서 선생님은 31년생이시다. 평소 문학을 가까이 하지 않아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이 책 「세상에 예쁜 것」이 처음이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작을 읽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책 표지에 밝게 웃는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자꾸만 쭈글쭈글하고 열 손가락이 나의 그것보다 두 배는 더 두꺼웠고 손톱 끝마다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내 할머니가 생각났다. ‘박 선생님처럼 저렇게 내 할머니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늘 등을 굽힌 채 사시고 6남매를 시골에서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하셨다는 할머니의 인생은 금과옥조 같은 손주들에게도 마음껏 활짝 웃어줄 수 없는 험한 길이었나 보다. 무섭고 꼬장꼬장 했던 할머니 보다는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옆 동네 슈퍼에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한 봉지 사다주시며 ‘이거 먹어라~~’하셨던 할아버지에게 더 마음이 갔었나 보다.

 

 

지난 추석, 할머니 묘소에 갔다. 평생을 일구시던 그 밭뙈기 구석에 작은 묘소를 마련했다. 볕이 잘 들고 산허리에 위치해 있어 바람도 잘 드는 곳이다. 거기서 둘러보면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잔잔히 흐르는 개울과 저 만치 마을을 품어주는 앞산도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생전에 밭일 하시다가 잠시 앉아 쉬실 때면 늘 할아버지께 ‘나 죽으면 여기에 묻어주소’ 하셨단다.

 

이 책을 읽으며 박완서 선생님과 내 할머니 권주인 여사님이 계속 오버랩 되었다.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고 외모도 전혀 다르고 살아 온 인생도 판이하게 다른 두 분이 왜 오버랩 되었는지 나도 알 길이 없다. 같은 것이라고는 두 분이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라는 것 밖에는.

 

 

 

“도망갈 시간을 주고 더운물을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도 사람이 사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도리가 담겨 있었다.” (p.38)

 

예전 할머니 댁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이래야 세 평도 채 되지 않을 작은 형편이었다.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춘 마당이었다. 작은 평상이 있고 작은 정원도 있고 지하수를 퍼 올리는 펌프에 작두와 맷돌, 외양간, 창고, 개, 고양이... 없는 게 없었다. 철없는 사촌동생들과 하루 종일 뛰어 다니는 난장에 할머니는 수시로 부지깽이를 드셨다. 마당 한 켠에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소죽을 끓이는 곳이었다. 내 기억에 새벽과 저녁 두 번 소죽을 끓였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그 아궁이 곁은 따뜻했다. 그러면 ‘나비’라고 불렀던 고양이가 늘 그 아궁이 곁에 앉아 있었다. 꼬리를 제 배 안으로 감춘 채 눈을 감고 사람이 오든, 안 오든 편하게 쉬고 있었다. 호기심 많던 어린 나와 내 사촌동생들은 고것이 못 마땅했던지 신기했던지 작대기를 던지거나 돌멩이를 던지고는 했다. 후다닥 마당 저 안으로 도망가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일말의 승리감이 생기기도 해서 그 장난을 계속됐다. 할머니께 들키기 전까지 말이다.

한참 ‘나비’를 놀려주고 있는데 할머니가 버럭 호통을 치셨다. ‘이놈들아!! 나비한테 왜 그러냐!! 그 놈도 제 새끼 있고 추워서 아궁이에 올라와 있는데 왜 괴롭히냐!!’

손주 놈들이래야 고작 일 년에 고작 몇 번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비’는 늘 그 아궁이에 앉아 있었을 테다. 늘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의 궁시렁을 듣고 소죽 끓이는 할아버지 곁을 지키고. 돌이켜 보니 할머니는 늘 손주들에게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할머니 댁 마당에서 손주 놈들과 함께 노는 개, 고양이, 소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저 놈들도 다 제 새끼 있다고. 어릴 때는 몰랐다. 무슨 말인지.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 내 할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무엇보다도 원고가 도중에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악필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게 그저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p.44)

 

시골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주 가끔 포항에 살고 있는 우리 집에 오시던 때가 있었다. 큰 아들이 살고 있는 포항에 오시면 유명한 회도 같이 먹고, 볼 만한 구경거리에 모시고 가기도 했다. 내 기억에 우리 가족이 아파트에 사실 때 늘 오셨던 것 같다. 그래서 하루만 지나면 ‘올라갈란다.’ 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 놀다 가시라. 뭐도 드시고 뭐도 보시고. 손주들 더 보고 가시라.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정말 불편하셨던 게다. 우리 집에 오셔서 이틀 밤을 지내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좋은 것 보여드리고, 맛있는 것 사드리고, 편리한 것 사용하게 해드려도 신기하고 고마워 하셨지만 불편해 하셨던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이 원고지에 쓰시던 원고를 컴퓨터도 작업하게 되시면서 신기하고 고마웠다고 표현하셨지만 나는 불편함이 더 크셨으리라 짐작된다. 수십 년을 살아 온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하셨을까?

내 할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철없는 손주 놈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고된 삶이셨을 텐데, 자식·손주가 아무리 모시려 해도 기어코 그 깡촌에서 불편하고 고되게만 사시다 돌아가신 내 꼬장꼬장한 할머니. 권주인 여사님.

 

 

 

 

“딱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주로 예전에 감동받은 작품을 다시 읽기도 하고 새로 나온 시집을 읽기도 합니다.” (p.57)

“공부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고 자기 나이에 맞는 경험을 소홀히 하지 말고, 가족, 친구,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것.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 것.” (p.72)

 

내 할머니는 애살맞지 않으시고 잔정이 많은 분이 아니시라 손주 놈들 불러다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말씀 하신 적은 없었다. 뚝딱뚝딱 음식 만드셔서 입에 넣어주셨을 뿐.

박완서 선생님은 대단한 작가이셨음에도 한순간도 노력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인생을 가열차게 사신 분이신 것 같다. 작가라는 직업은 마음먹기에 따라 한없는 한량일 수도 있고 한없는 극한직업의 노동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의 한 마디를 찾아내기 위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책을 뒤지고 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박완서라는 이름 알려진 작가 정도 되면 어느 정도 표현과 문장에 독자는 열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 선생님은 그것에 머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작가를 지망하는 젊은 친구에게도 사려 깊은 충고를 하신다. 언뜻 ‘뭐 대단한 충고나 권면이 아니네~’ 할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100%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더 어렵고 힘든 충고다. 쉽지 않다. 절대로.

평생을 허리 굽혀 일하신 할머니가 제비새끼 같은 손주 놈들에게 무슨 많은 말이 필요했을까 싶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있었던 화로에 고구마 감자, 밤 구워서 손주 놈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시며 ‘꼭꼭 씹어 묵어라. 체한다.’ 옆집 남의 할머니처럼 무뚝뚝하게 건네던 새까만 손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그때가 내가 아들을 잃고 두문불출 대인기피증을 극복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의 초대엔 기꺼이 응했다. 상투적인 위로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p.210)

 

할머니는 6남매들 두셨다. 아들, 아들, 딸, 딸, 아들, 아들 이렇게 여섯 명. 막내아들은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게는 막내 삼촌이다. 막내며느리, 그러니까 내게는 막내 숙모도 세상을 떠났다. 세 딸을 남겨두고.

박완서 선생님도 그런 아픔을 겪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식은 평생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흔한데, 아직 나는 알지 못한다. 자식도 없으니 말이다. 자식이 여섯 명이 있지만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이 갑자기 곁을 떠났을 때 내 할머니가 어떠셨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당연히 박 선생님의 마음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내 할머니와 박 선생님이 같은 아픔을 겪으셨다는 것만으로 내 저 깊은 마음속이 저며 온다.

나는 100분의 1도 감내할 수 없지만.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고통이 어떨까? 이런 저런 말을 끄적이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유명한 작가이신 박 선생님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 슬픔을 나누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결코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들을 잃은 슬픔은 늙은 남편과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에게도 나누지 못했던 내 할머니의 심정도 누가 위로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같은 세상에서 그렇게도 예뻐하셨던 막내아들과 함께 지내실 할머니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여전한 슬픔 속에 살지만, 그 슬픔의 끝에 또 다른 재회가 있고 행복이 있음은 순간순간 휘청거리는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세상에 예쁜 것은 참 많지만 애달프고 마음 저미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은 밤이다.

 

박완서 선생님, 내 할머니 권주인 여사님!! 계신 곳에서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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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할둔 - 역사의 탄생과 제3세계의 과거
이브 라코스트 지음, 노서경 옮김 / 알마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전부터 급속도로 빠지게 된 드라마가 있다. MBC에서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방송되는 <마의>다. MBC가 허접방송의 반열에 들어가면서 아예 11번은 리모컨질도 하지 않았는데 영화 [클래식]이후로 팬이 된 조승우의 연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처음 1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워낙 바쁠 때라 퇴근하면 방송을 볼 수 없었다. 2주 전에 비로소 <마의>를 보게 되었다. 이병훈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늘 나타난 특징이지만 과거의 역사를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그려내는 것이 <마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말을 비롯한 가축을 치료하는 의사인 마의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이번 주에 방송된 회차분의 내용에서는 마의가 인의 시험을 보기위해 공부하고 동인경이라는 일종의 마네킹에 침술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마의’를 소재로 한 사극이 없었을 뿐더러 생소한 소재에 신선한 내용과 장면이 삽입되어서 완전히 몰입하며 시청했다.

과거는 과거다. 역사라는 담론은 그것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주체가 어떤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수백 년 전 조선시대 일어난 일을 안방 드라마로 시청하는 것을 시청자들은 좋아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배웠던 교과서의 내용보다 더 빠르게 쉽게 브라운관을 통해 이해하고 습득한다.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렇게 단편적이고 객체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중세 북아프리카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븐 할둔의 생애가 1332년부터 1406년까지이므로 우리로 치면 조선조 초기에 해당하는데 그때의 그런 이슬람 지역을 상상한다는 것은 지금도 어렵다.” (p.354)

 

이 책 「이븐 할둔」은 마그레브 지역(북아프리카 튀니지, 알제리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는 개념)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이븐 할둔이라는 마그레브 대(大)역사가의 역사서이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세계사 시간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북아프리카 하면 그저 이집트 스핑크스와 피라미드가 고작이다.

드라마 <마의>에서 열연을 펼치는 조승우를 통해 조선 현종 시절 마의에 불과하던 백광현이 갖은 어려움을 뚫고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세계사, 특히 중세사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거의 유럽에 국한된 교육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그레브라는 개념도 생소할뿐더러 이 책에서 소개된 이븐 할둔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어색하다.

 

 

“여러 해 전에 절판된 이 책을 재간하기로 결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븐 할둔과 그의 저작에 대해 이슬람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비방에 반대하기 위해서이다.” (p.9)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개념의 형성>이라는 장 제목에서 보듯이 그의 제3세계 분석의 방법론은 마르크스주의였다. 단순화하면 역사의 전개가 다분히 착취와 피착취 구조에 의한다는 관념이었다.” (p.358)

 

이 책의 저자인 이브 라코스트는 이븐 할둔이 정의한 마그레브 지역에서 출생한 역사학자이다. 젊은 시절 모국인 알제리의 정치적 상황(오랜 기간 정치적 격변을 겪었던)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프랑스에 유학 해 이븐 할둔의 저작을 일게 되면서 마그레브 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1960년대만 해도 미·소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유럽열강의 식민 통치가 해당 식민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였다. 제국주의적 관점에서는 자신들의 식민 통치가 ‘미개하고 미성숙한 열등한 나라와 국민을 개도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목을 내세웠다. 단순히 정치적 데마고기를 넘어서서 식민지의 역사와 문화를 부정·폄하하고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 특히 제 3세계(마그레브 지역을 포함한)출신의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역사과정에 대해 공부하게 되면서 자신들 모국의 상황에 적용하게 되었다. 역사는 어쨌든 착취와 피착취라는 간단하면서도 첨예한 갈등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이미 수백 년전 이슬람주의 이전 아랍문화에 대한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에 빠져들었음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이븐 할둔은 경제와 사회, 정치를 둔화시킨 중세적 구조를 연구했다.” (p.23)

 

이븐 할둔의 그의 대표적인 저서 「역사서설」을 통해 중세적 역사가 유럽에 국한된 역사만이 아님을 피력한다. 일찍이 로마시대 이전부터 이집트와 모로코, 더 나아가서 이베리아 반도 남쪽 그라나다 지역까지 세력을 떨친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지역에 강성했던 부족 왕조에 대한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중세유럽의 시각에서 기술된 역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중세유럽의 시각에서 북아프리카와 이슬람, 아랍은 그저 미개하고 미성숙된 유목민족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군사적 침탈과 박해는 개도와 개종의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했다.

 

 

“북아프리카가 언제나 낯선 제국의 일부였다는 것은 틀렸다. 알제리와 튀니지는 8세기에서 14세기까지 토착 왕조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p.137)

 

이 책에서는 8세기 무렵부터 이븐 할둔이 왕성하게 활동한 14세기까지에 대한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고 다른 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신선하게 읽혔다.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기술자체는 지루했지만 요약하자면 마그레브 지역이 중세유럽이 얘기하는 그런 미개하고 미성숙하며 불완전한 구조의 유목민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세유럽이 재편되기 이전 중부 아프리카의 강성한 왕국이던 말리와 수단에서 생산되는 금을 유통하고 소비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이미 10세기 전부터 중동과 중국에 이르기까지 무역이 성행했고 도시구조는 수세기 이후 중세유럽이 만든 그것보다 우수했다는 것이다.

당시 금이 화폐단위로는 최상에 있었고 금의 생산과 확보, 유통이 부족의 생사를 결정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수많은 부족이 사라지고 탄생하는 반복된 역사가 이어졌다.

 

 

“이슬람의 출현 이전부터 아랍인들은 이미 역사성에 대한 일정한 관심을 내보였다. 그들의 구전문학을 보면 아랍인들이 그들의 족보, 특히 부족들이 항복한 전투의 서사적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연구하는 데 얼마나 관심을 쏟았는지 알 수 있다.” (p.296)

 

저자인 이브 라코스트가 이 책을 집필하던 1960년대는 정치적·이념적 냉전이 첨예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이미 경제적·문화적·정치적으로 수많은 혁명과 투쟁을 겪으며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 선 유럽의 강대국들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독립투쟁을 하고 민중투쟁을 하는 북아프리카의 소국들이 가소롭게 보였을 것이다. ‘저들은 아직도 저렇게 미개하다.’라는 인식이 밑바탕이었을 것이고.

하지만 19세기 이후 열강의 식민침탈로 이전까지 지속되어 오던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역사에서 잠시 지워졌을 뿐이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유럽과 달리 북아프리카에서는 정착된 계서적 질서, 봉건적 복종의 연계망이 발달하지 않았다. 북아프리카는(유럽에서 사라진) 부족 권력으로 훨씬 더 강한 친족 관계의 힘을 보존했다.” (p.191)

“북아프리카의 경우 구조적으로 꽉 막혔던 것이 문제였으며, 그러한 봉쇄성은 부족 구조들의 우월권 유지와 그에 부속되는 두 가지 사항에 기인했다. 하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불가능이다. 그리고 분명한 개인주의적 계급이 되어 주민을 지속적 종속의 상태 속에 두지 못한 특권층의 무능이다.” (p.338)

 

중세유럽이 탄생하고 궤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혁명과 투쟁이 반복되었고 하루아침에 나는 새까지도 떨어뜨리던 황제가 참수되고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그런 과정에서 끊임없는 자기분열로 이루어진 도시계급이 형성되었다.

마그레브로 정의되는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 과정이 더뎠고 애초에 부족단위로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이 지속되고 반복되었던 그들에게는 중세 유럽의 봉건적 구조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투쟁에 의해 쟁취한 사적 소유는 반드시 지켜야 할 재산이지만 명확하게 나와 너의 소유구조가 나뉘어 있지 않은 부족 형태에서는 사적소유는 모호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역사의 주체는 중세유럽이 가져가게 되었고 중세유럽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마그레브는 강성하던 부족국가 이전 시기의 열악하고 힘이 약한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합리주의는 마치 근대 서양만의 창안이고 따라서 독점적 자산인 듯 간주한다면 타당치 않은 태도이다.”

 

하지만 역사서술의 주체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의 식민지의 역사마저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승리하고 지배하는 역사만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저자의 주장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미 수백 년 기술된 마그레브의 대(大)역사가 이븐 할둔에 주목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다만, 그런 주체적 역사적 역량을 가진 마그레브 지역이 19세기 이후 열강의 땅따먹기 싸움에 자신들의 온 몸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한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술이 없다. 아마 투쟁의 중심에 있던 60년대였기 때문이리라 미루어 짐작한 따름이다.

 

역사는 사실 재미있는 분야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은 현재를 고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현명한 방법 중 하나이다. <마의>를 보면서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수의사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런 마의가 어의까지 올라 간 역사가 실제했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전혀 알지 못했던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래서 큰 의미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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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숭미에 살어리랏다 - 배반의 역사 수구의 로망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짓는 두 개의 키워드는 ‘친일’과 ‘숭미’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로 귀결된다. 과한 추론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면 적확한 답이다. 한국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 대한 법적 조치나 친일인명사전 발표 당시에도 화두가 되었던 것은 친일잔재의 청산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말뿐이고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는 해방 후 역사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예를 드는 곳은 독일과 프랑스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 드골 대통령은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부역하거나 동조한 자들을 처단하고 청산했다. 그들의 나치 부역은 불과 몇 년이었다. 철자하게 가려내고 밝혀 내 청산하고 정리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왜곡되고 뒤틀러진 채 덮어버리면 그대로 곪고 썩어 악취만 진동할 뿐이다. 나중에는 다시 찾아보기도 싫은 지경에 이른다. 한국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식민지였다. 프랑스와 단순 비교만 하더라도 몇 배는 청산되고 정리되었어야 할 역사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전혀 역사의 심판을 하지 못했다. 친일을 했던 부역자들은 그대로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정권에 들어가 호의호식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를 겪으면서도 대를 이어 잘 살았다. 그래서 해방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이때에도 친일 역사학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지경이다. 노골적으로 친일행위를 하는 정치인도 상당수다.

 

 

“2013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이승만·박정희 독재정치를 쏙 뺀다고 한다. 게다가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항거해 일어난 광주 5.18민주화운동도 삭제한다고 한다.” (p.242)

 

이명박 정권 창출에 큰 기여를 한 뉴라이트 관련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뤄 낸 역사교과서 수정의 결과는 참혹하다. 제 나라의 역사조차 의무교육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선택 사항으로 결정한 곳이 대한민국이다. 이승만·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이 명백한 사실인데 그 내용을 제외하고,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광주 학살이 저질러 진 것이 명백한 사실인데 그 내용을 제외한다고 한다. 얼마 동안 역사교과서 문제로 시끄럽고 난 후 조용하길래 별 일이 없겠거니 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당장 내년부터 일어난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이 책 「친일·숭미에 살어리랏다」는 한국에서 ‘친일파’에 대한 연구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정운현교수의 책이다. 여러 언론의 기사를 통해 정교수의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창출의 내막과 박정희 독재정권 종말의 내막을 소개하는 것을 듣고 완전히 빠져들었다. 교과서는 물론 역사에 관련된 책이나 언론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 방송에서 소개된 「서울시내 일제유산답사기」라는 책을 보고 싶었으나 품절되어 구입할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친일역사’에 대한 연구를 해온 정교수는 이 바닥(?)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분이었다. 자칭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지대하다고 늘 말해 온 내가 부끄러웠다. 당연히 정운현이라는 이름을 알았어야 하는데^^;;

책은 재미있고 충격적이었다. 신선하기도 했다. 여기서 충격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대단한 내용이거나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내막은 아니다. 정운현 교수가 ‘친일역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잔존하는 ‘친일역사’가 동일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80년대에 잘 먹고 잘 살던 친일파 후손들이 2012년 11월에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그들에 대한 어떠한 청산이나 단죄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충격적이었다. 여러 번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도 재창출 되었는데도 왜 ‘친일역사’에 대한 조명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스스로를 상식과 원칙을 존중하면서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것은 위장에 불과하다. 반칙과 특권이 몸에 밴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는 수구일 뿐이다.” (p.271)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그들 독재정권에 결여 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용역사관을 만들었던 것처럼 뿌리가 친일에 박혀 있는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 위장을 해 온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잘 먹고 잘 살았고 자식새끼를 외국 보내 공부시키고 돌아와서 또 한자리 해 먹고, 그 놈의 자식새끼들은 그대로 따라 해서 또 한자리 해 먹고 그렇게 살아 온 것이다. 미군정,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국가의 행정수반은 바뀌었지만 그들의 견고하고 철옹성 같은 권력과 부는 바뀌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재빠르게 옷을 바꿔 입고 변장했을 뿐. 그래서 그들은 태생적으로 뿌리가 약하다.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친일에 닿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당연한 이치다. 지금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나 조직·단체 중 상당수가 친일파의 후손이다. 정확한 통계를 알 길이 없지만 제대로 된 ‘친일역사’에 대한 청산이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역사를 돌이켜 보면 뻔 한 추론이다.

 

 

박정희, 그 깊고 아픈 시대의 그늘” (p.178)

 

책의 한 챕터 제목이다. 정말 잘 썼다. ‘박정희, 그 깊고 아픈 시대의 그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박정희라는 인물은 그래서 아프고 슬프다. 친일파 - 독재정권 - 수구세력이 한 덩이로 포개져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에 깊은 그늘이다. 아직도 그를 임금님으로 모시며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최고의 친일파요, 악질적인 독재자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 안에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부모와 박정희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자식이 존재한다. 비극이다. 그의 딸이 대통령 선거에 나왔다. 유력한 외신들은 그녀를 보도할 때 ‘독재자의 딸’이라는 문장을 쓴다. 한국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일이 생길 것이다. 한국에서 독재를 한 사람의 딸이 분명히 맞는데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는 이 어이없는 현실의 정점에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를 거치며 ‘친일역사’에 대한 청산과 단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국민의 입과 귀를 막아 ‘잘 살아 보세’, ‘경제 발전’, ‘수출’ 이야기만 하면 끝이었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게는 가장 호화롭고 안정적인 역사였을 것이다.

 

 

“백선엽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전공(戰功)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강조해왔는데, 이는 제대로 따져 묻지 않은 언론의 책임도 없진 않다. 몇몇 수구언론들은 그의 ‘어두운 그림자’는 아예 제쳐둔 채 그를 ‘전쟁영웅’으로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어 온 터이다.” (p.166)

 

박정희뿐만 아니라 백선엽과 같은 인물도 분명한 친일행위를 했지만 한국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친일역사’ 청산은 관심이 없다. 일본에 의해 한국의 근대화가 촉진되었고 한국 정부의 기원이 상해임시정부가 아니라 유엔에 있다는 따위의 역사를 재편하려고 하는 이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주무르고 있는 이상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돈 내고 보는 KBS라는 방송국에서 어이없는 친일 행위자의 영웅으로의 미화 프로그램이 방영되어도 별 다른 소리를 할 수 없다.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를 미화한 프로그램이 준비 중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것은 유야무야 된 것인지, 아직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곳은 그런 곳이다. 한국은 그런 국가다.

 

 

“재산보상금은 66억 2209만원(7만 4967건), 사망자(유족)보상금은 25억 6560만원(8552명)이었다. 당시 미화 1달러가 300원이었으니 재산·사망 합해 보상금은 모두 약 3062만 달러로, 이는 대일청구권 자금 중 ‘무상 3억 달러’의 10.2퍼센트에 불과한 액수였다.” (p.58)

 

65년도 한일협정에서 청구권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아 온 자금이 있다. 아무리 정신대 할머니 수요 집회가 천회를 넘고 소녀상을 세우고 외국 언론에 알려도 일본은 묵묵부답이다. ‘청구권’ 협상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65년도에 자신들이 식민지 시절 잘못에 대한 보상을 이미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독재 시절 이뤄진 한일협정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3억 달러를 받아왔는데, 그 중 실제로 보상한 금액은 전체 금액의 10퍼센트 남짓이란다. 이런 곳이다. 한국.

나머지 자금이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쓰였느니, 경부 고속도로 건설 자금으로 쓰였느니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직접적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청구권 자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곳이다. 한국.

 

 

아~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고 워낙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분야라 신나게 리뷰를 작성할 것 같았는데, 답답하고 짜증이 밀려와서 속까지 메스껍다.

이번 대선을 통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도 ‘친일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는 한 수십 년 동안 대를 이어오며 잘 먹고 잘 살아 온 그들이 여전히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나라라는 곳이 이런 데가 있나 싶다.

구조가 제대로 되어 있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는 곳이라면 당연히 되었어야 할 일들이 될 낌새가 없다.

역사문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해방 후 반민특위와 같은 곳에서 제대로 이 문제가 처리되고 독재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친일역사’에 대한 청산이 이뤄졌을까? 이것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난 일을 가정해 봐야 시간낭비 일 뿐이니까.

워낙 오랜 시간 동안 감춰두고 덮어온 일이기에 당사자들조차 그들의 역사가 제대로 된 역사라는 착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오랜 시간만큼 내려 뻗은 뿌리가 깊고 넓어 끝까지 파헤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자꾸만 가고 세대는 바뀌어 가는데 자꾸만 때를 놓치면 영영 할 수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미래사가 덮여진 과거에 의한 반쪽자리 역사로 기록될 것 같아 못내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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