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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작년 3월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주 어렸던 때부터 명절과 방학을 맞아 시골에 가면 그 때도 할머니는 늘 아프셨다. 경북 포항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이 충북 단양에 계시는 할머니 댁을 찾아가려면 4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는 포항에서 경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경주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가는 완행 비둘기호를 타야 했다. 비둘기호라 함은 선로에 걸쳐 있는 모든 역에 정차하는 기차였다. 경주에서 구단양역까지 꼬박 5시간을 가야 하는 먼 거리였다. 안동이나 영주와 같은 큰 역에서는 타고 내리는 손님이 많아 꽤 오랜 시간을 정차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잽싸게 기차에서 내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락우동을 사오시고는 했다. 그것이 정말 별미였다. 지루한 열차에서 그 가락우동 먹는 맛이 최고였다. 구단양역에는 늘 깜깜한 밤에 도착했다. 가로등도 없고 지나는 차도 많지 않은 찻길로 나와 택시를 타고 30분여를 가야 할머니 댁에 이를 수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애살맞은 할머니는 아니셨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더 애살맞으시고 손주 놈들을 더 예뻐하셨다. 경북 영주가 고향이신 할머니는 경북 예천 신랑 집으로 오고 나서야 할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척박한 예천의 첩첩산중 뱀사골에서 밭을 일구고 소작 생활을 하시다가 여차여차하여 충북 단양에 정착하게 되었다. 소작의 신분은 버릴 수 없었던지라 고된 밭일, 논일에 6남매를 키워내시면서도 허리 한 번 펴실 날이 없으셨다. 그래서 어린 내 눈에도 할머니는 늘 꼬부랑 할머니셨다. 지금 내 어머니 나이보다 훨씬 어렸음에도 너무 늙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소죽을 끓이시며 폐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가파른 기침을 밭아내시는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곤 했다. 나와 내 동생이 어느 정도 장성하여 할머니 댁에 가면 미뤄두었던 외양간 청소와 고추 따기, 콩 털어내기 등 온갖 농사일을 했다. 때론 일만 시키는 할머니가 야속하기도 했다. 욕심 많고 며느리 고생시키던 할머니가 밉기도 했다. 어머니가 속상해 하시는 것도 싫고 시간이 갈수록 갈등이 많아지는 집안의 일들도 신경 쓰기 싫었다.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취직 하고 결혼 하고... 앞가림 하느라 할머니, 할아버지 늙으시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직 미워하던 내 마음 정리도 못하고 제대로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는데, 늘 아프셔서 그냥 또 아프신가 보다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장손입네 상주노릇 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죄송했다. 내 마음은, 진짜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할머니한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하나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내 할머니는 1922년생이시다. 박완서 선생님은 31년생이시다. 평소 문학을 가까이 하지 않아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이 책 「세상에 예쁜 것」이 처음이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작을 읽는 것이 죄송스러웠다. 책 표지에 밝게 웃는 선생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자꾸만 쭈글쭈글하고 열 손가락이 나의 그것보다 두 배는 더 두꺼웠고 손톱 끝마다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내 할머니가 생각났다. ‘박 선생님처럼 저렇게 내 할머니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늘 등을 굽힌 채 사시고 6남매를 시골에서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하셨다는 할머니의 인생은 금과옥조 같은 손주들에게도 마음껏 활짝 웃어줄 수 없는 험한 길이었나 보다. 무섭고 꼬장꼬장 했던 할머니 보다는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옆 동네 슈퍼에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한 봉지 사다주시며 ‘이거 먹어라~~’하셨던 할아버지에게 더 마음이 갔었나 보다.
지난 추석, 할머니 묘소에 갔다. 평생을 일구시던 그 밭뙈기 구석에 작은 묘소를 마련했다. 볕이 잘 들고 산허리에 위치해 있어 바람도 잘 드는 곳이다. 거기서 둘러보면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잔잔히 흐르는 개울과 저 만치 마을을 품어주는 앞산도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생전에 밭일 하시다가 잠시 앉아 쉬실 때면 늘 할아버지께 ‘나 죽으면 여기에 묻어주소’ 하셨단다.
이 책을 읽으며 박완서 선생님과 내 할머니 권주인 여사님이 계속 오버랩 되었다.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고 외모도 전혀 다르고 살아 온 인생도 판이하게 다른 두 분이 왜 오버랩 되었는지 나도 알 길이 없다. 같은 것이라고는 두 분이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라는 것 밖에는.
“도망갈 시간을 주고 더운물을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도 사람이 사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도리가 담겨 있었다.” (p.38)
예전 할머니 댁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이래야 세 평도 채 되지 않을 작은 형편이었다.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춘 마당이었다. 작은 평상이 있고 작은 정원도 있고 지하수를 퍼 올리는 펌프에 작두와 맷돌, 외양간, 창고, 개, 고양이... 없는 게 없었다. 철없는 사촌동생들과 하루 종일 뛰어 다니는 난장에 할머니는 수시로 부지깽이를 드셨다. 마당 한 켠에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소죽을 끓이는 곳이었다. 내 기억에 새벽과 저녁 두 번 소죽을 끓였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그 아궁이 곁은 따뜻했다. 그러면 ‘나비’라고 불렀던 고양이가 늘 그 아궁이 곁에 앉아 있었다. 꼬리를 제 배 안으로 감춘 채 눈을 감고 사람이 오든, 안 오든 편하게 쉬고 있었다. 호기심 많던 어린 나와 내 사촌동생들은 고것이 못 마땅했던지 신기했던지 작대기를 던지거나 돌멩이를 던지고는 했다. 후다닥 마당 저 안으로 도망가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일말의 승리감이 생기기도 해서 그 장난을 계속됐다. 할머니께 들키기 전까지 말이다.
한참 ‘나비’를 놀려주고 있는데 할머니가 버럭 호통을 치셨다. ‘이놈들아!! 나비한테 왜 그러냐!! 그 놈도 제 새끼 있고 추워서 아궁이에 올라와 있는데 왜 괴롭히냐!!’
손주 놈들이래야 고작 일 년에 고작 몇 번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비’는 늘 그 아궁이에 앉아 있었을 테다. 늘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의 궁시렁을 듣고 소죽 끓이는 할아버지 곁을 지키고. 돌이켜 보니 할머니는 늘 손주들에게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다. 할머니 댁 마당에서 손주 놈들과 함께 노는 개, 고양이, 소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고. 저 놈들도 다 제 새끼 있다고. 어릴 때는 몰랐다. 무슨 말인지. 박완서 선생님의 글에서 내 할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무엇보다도 원고가 도중에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악필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게 그저 신기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p.44)
시골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주 가끔 포항에 살고 있는 우리 집에 오시던 때가 있었다. 큰 아들이 살고 있는 포항에 오시면 유명한 회도 같이 먹고, 볼 만한 구경거리에 모시고 가기도 했다. 내 기억에 우리 가족이 아파트에 사실 때 늘 오셨던 것 같다. 그래서 하루만 지나면 ‘올라갈란다.’ 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더 놀다 가시라. 뭐도 드시고 뭐도 보시고. 손주들 더 보고 가시라.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정말 불편하셨던 게다. 우리 집에 오셔서 이틀 밤을 지내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좋은 것 보여드리고, 맛있는 것 사드리고, 편리한 것 사용하게 해드려도 신기하고 고마워 하셨지만 불편해 하셨던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이 원고지에 쓰시던 원고를 컴퓨터도 작업하게 되시면서 신기하고 고마웠다고 표현하셨지만 나는 불편함이 더 크셨으리라 짐작된다. 수십 년을 살아 온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하셨을까?
내 할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철없는 손주 놈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고된 삶이셨을 텐데, 자식·손주가 아무리 모시려 해도 기어코 그 깡촌에서 불편하고 고되게만 사시다 돌아가신 내 꼬장꼬장한 할머니. 권주인 여사님.
“딱 한마디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주로 예전에 감동받은 작품을 다시 읽기도 하고 새로 나온 시집을 읽기도 합니다.” (p.57)
“공부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고 자기 나이에 맞는 경험을 소홀히 하지 말고, 가족, 친구,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관심을 가질 것.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말 것.” (p.72)
내 할머니는 애살맞지 않으시고 잔정이 많은 분이 아니시라 손주 놈들 불러다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말씀 하신 적은 없었다. 뚝딱뚝딱 음식 만드셔서 입에 넣어주셨을 뿐.
박완서 선생님은 대단한 작가이셨음에도 한순간도 노력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던, 인생을 가열차게 사신 분이신 것 같다. 작가라는 직업은 마음먹기에 따라 한없는 한량일 수도 있고 한없는 극한직업의 노동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의 한 마디를 찾아내기 위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책을 뒤지고 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박완서라는 이름 알려진 작가 정도 되면 어느 정도 표현과 문장에 독자는 열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 선생님은 그것에 머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작가를 지망하는 젊은 친구에게도 사려 깊은 충고를 하신다. 언뜻 ‘뭐 대단한 충고나 권면이 아니네~’ 할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100% 맞는 말씀이다. 그래서 더 어렵고 힘든 충고다. 쉽지 않다. 절대로.
평생을 허리 굽혀 일하신 할머니가 제비새끼 같은 손주 놈들에게 무슨 많은 말이 필요했을까 싶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있었던 화로에 고구마 감자, 밤 구워서 손주 놈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시며 ‘꼭꼭 씹어 묵어라. 체한다.’ 옆집 남의 할머니처럼 무뚝뚝하게 건네던 새까만 손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그때가 내가 아들을 잃고 두문불출 대인기피증을 극복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의 초대엔 기꺼이 응했다. 상투적인 위로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p.210)
할머니는 6남매들 두셨다. 아들, 아들, 딸, 딸, 아들, 아들 이렇게 여섯 명. 막내아들은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게는 막내 삼촌이다. 막내며느리, 그러니까 내게는 막내 숙모도 세상을 떠났다. 세 딸을 남겨두고.
박완서 선생님도 그런 아픔을 겪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식은 평생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흔한데, 아직 나는 알지 못한다. 자식도 없으니 말이다. 자식이 여섯 명이 있지만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이 갑자기 곁을 떠났을 때 내 할머니가 어떠셨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당연히 박 선생님의 마음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내 할머니와 박 선생님이 같은 아픔을 겪으셨다는 것만으로 내 저 깊은 마음속이 저며 온다.
나는 100분의 1도 감내할 수 없지만. 아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의 고통이 어떨까? 이런 저런 말을 끄적이고 싶지만 할 수 없다.
유명한 작가이신 박 선생님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 슬픔을 나누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결코 위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들을 잃은 슬픔은 늙은 남편과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에게도 나누지 못했던 내 할머니의 심정도 누가 위로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같은 세상에서 그렇게도 예뻐하셨던 막내아들과 함께 지내실 할머니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여전한 슬픔 속에 살지만, 그 슬픔의 끝에 또 다른 재회가 있고 행복이 있음은 순간순간 휘청거리는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세상에 예쁜 것은 참 많지만 애달프고 마음 저미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은 밤이다.
박완서 선생님, 내 할머니 권주인 여사님!! 계신 곳에서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