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
안드레아스 바그너 지음, 김상우 옮김 / 와이즈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경험, 지식, 정보 따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습득된 교육과 노출되어 떠돌아다니는 미디어의 토사물들은 큰 의미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간절히 바라고 고대하던 일이 바라던 결과와는 딴판으로 귀결되었을 때 찾아오는 허탈함과 상실감은 말할 수 없다.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에서부터 지구와 생명의 역사가 몇 천 년이건 수십 억 년이건 간에 생명의 역사는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말할 수 없는 존재의 가소로움을 자각한다. 또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일견 가장 트렌디하고 세련되며 선구자적인 것 같아 보였던 팬덤에 가려져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고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 책 「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는 꽤 어려운 책이다. 원래부터 자연과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일부러라도 이런 책은 펴보지도 않는데 어쩔 수 없다. 내가 이해한 이 책의 주제는 간단하다. ‘우리가 모조리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 생명세계의 가장 미스터리는 우리가 모조리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착각이다.’라는 것이다. 생명의 긴장과 신비로움과 경이로움과 다이내믹함은 그 어떤 최고 경지의 예술가, 과학자, 공학자가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꽤나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마치 수십, 수 백년 만에 생명의 역사를 추월한 것처럼 생각한다.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하나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패러독스’의 인식이다.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으며, 패러독스를 기초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p.6)

“사람들이 정말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걸까? 아니면 결국 자기를 위한 걸까?” (p.66)

“완전히 우연의 문제다.” (p.77)

 

인간세계와 생명세계, 생물세계와 무생물세계.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거의 모든 세계에 내재된 패러독스를 비교하고 분석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며 호기심이 없는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주된 관심 분야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이라면 신이 나서 읽고 정리하고 쓰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해하고 정리한 만큼만 쓸 수 있다. 자연과학 분야를 바라보는 애송이 사회과학 덕후의 서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앞서 길게 늘어놓은 대로 모든 분야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개인적으로 정의한 ‘일상’에서는 여러 가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패러독스’의 개념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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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 세계와 무생물 세계에는 매우 근본적인 ‘역설적 긴장들’이 존재하고 있다. 둘째, 이 역설적 긴장들은 인간에게 거대한 힘을 제공함으로써 지금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p.349)

 

저자는 ‘패러독스’라는 개념을 세계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구심점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애인 사이에도 이러한 적절한 ‘역설적 긴장’은 애인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더 발전된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동인이 될 수 있다. 사람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영화 같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주장한다. 확신한다. 그런 일방적인 사랑은 굉장히 위험하고 위태롭다. 인간은 그 어떤 생명세계의 존재보다 미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다면 주고받는 것도 늘 좋기만 하나? 절대로 아니다. 때론 오해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고 울고 웃고 질투하고 배려하고 지적하고 칭찬하고 지시하고 순종하고 약속시간에 맞춰가고 일부러 늦게 가고 하면서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늘 배려하고 져 주고 사랑을 쏟아내고 기다리고 참고 한다면 그 사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 꽉 움켜쥐면 타다 만 신문지 으스러지듯 사라져버릴 것이다.

친구관계, 직장 내 동료들과의 관계, 종교단체 안에서 구성원들 간의 관계, 온라인 안에서의 관계 등 인간이 맺고 속할 수 있는 모든 관계의 망 안에서 이러한 패러독스의 개념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지금의 생명세계를 만들어 낸 그 ‘역설적 긴장’의 찬란한 설계 도면을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의 삶에서 그려내야 한다.

 

“오늘의 세상이 단세포 유기체들이 살았던 30억 년 전보다 더 안전하고, 더 예측 가능하며, 덜 위험할까? 우리가 하는 배팅이 유전자물질을 무작위로 바꾸는 식의 도박을 하는 박테리아의 배팅보다 안전할까? 우리가 하는 많은 도박이 다른 유기체들이 하는 도박보다 훨씬 위험할 수 있다. 우리의 도박은 종국엔 우리 목숨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성까지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05)

 

아주 작은 단세포 유기체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끈을 이어져 오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을 견뎌왔을 것이다. 때론 싸우기도 하고 투쟁하기도 하며, 또는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없애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남은 것일 게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소중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오랜 시간을 이어 온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인간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생명을 건 단세포 유기체의 도박과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생명을 담보로 한 인간의 도박은 그 형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결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단세포 유기체의 도박은 생명의 진화를 거듭할 수 있는 이유와 동기가 되었지만 인간의 도박은 저자의 지적대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기체, 무기체, 생물, 무생물들이 그려 온 생명의 도화지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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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 르완다에서 강정까지 송강호의 평화 이야기
송강호 지음 / IVP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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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나는 지난 5년 동안 참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개인적인 신앙이야 죽을 때까지 지켜가야 할 신념이기에 늘 일상에 부딪치며 몸부림치고 있다. 또한 푯대를 향한 기나긴 항해라 여기기에 늘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신앙하고자 애쓴다. 대학에 와서야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있었기에 더 치열하고 살 떨리게 고민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놈 취급을 받기도 하고 너무 리버럴한 거 아니냐,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냐, 민중신학은 이미 죽었다. 등 많은 말을 듣기도 하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포지션에 놓이기도 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대단한 민중신학자들이 많았던 한국 기독교였지만 교회가 권력·자본에 굴복하고 굴종하게 되면서부터 교회 내 모든 이데올로기는 개발과 성장에 맞춰졌다. 민중·민생을 중시하고 그것에 포커스를 맞추던 신학의 풍토가 완전히 미국의 그것으로 바뀐 것이다. 든든한 토양을 다지기도 전에 우람한 교회 건물이 들어서고 수천, 수만의 성도가 몰려들고 돈이 집중되고 힘이 집중되는 곳이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교회가 “개독교”라 불린다. 어린 아이들조차 웹상에서는 “개독”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한다.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다. 하지만 교회만 모르는 것 같다. 왜 개독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하는지, 왜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지 교회만 모른다.

자본과 권력과 결탁하여 제 몸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한국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졌고 더 이상 교회 내 설교단에서는 죄에 대한 회개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울부짖음, 사회의 불의에 대한 탄식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는 소리는 그저 “예수 잘 믿으면 복 받습니다.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헌금하면 축복 받습니다.” 말쑥하게 차려들 입고 어색한 웃음 띠며 인사하고 아멘 한다.

지난 5년은 이것을 더욱 증폭시켰다. 서울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장로 대통령을 만들었다. 어느 한 교회에서는 장관이 속속 배출되었지만 청문회의 그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장로님, 권사님들이 속속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세습을 하는 대형교회가 많으며 유명한 어떤 목사는 여자신도를 성추행하기도 했다. 수백억을 들여 교회를 짓는다.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앙인으로, 한명의 양심을 가진 젊은이로 가보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다. 대신 꼴통 목사 하나가 사람들을 모아 카톨릭을 분쇄하자며 미친 춤을 추었다. 부끄러웠다. 노구를 이끌고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길바닥에 쓰러진 문정현 신부 같은 분들에게 오히려 내가 죄송했다. 그 미친 춤을 추는 목사와 같은 종교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시간을 흘렀고 나도 강정마을을 잊어갔다.

 

이 책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를 읽기 전까지.

문정현 신부보다 더 이전에, 정의구현사제단보다 더 이전에, 다른 시민 활동가들보다 더 이전에 강정을 위해 헌신하고 몸을 깨뜨린 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송강호라는 사람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지만 많은 신학생들처럼 목사가 되지 않고 [개척자들] 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개척자들’ 특유의 정신은 이렇게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과 분쟁, 재난과 기아 사태에 응답하고 동참하는 것. 그들은 지체 없이 현장으로 달려갔고, 그 나라에서 그 땅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내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평화캠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p.60)

 

[개척자들]이라는 단체를 처음 들어봤다. 일반적인 구호단체와는 성격이 달랐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의 신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 당장 일어나는 분쟁과 재난·재해, 갈등에 눈 돌리지 말고 그곳으로 바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이 모토다. 그래서 실제로 아프리카 수단과 동티모르 등지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투입된 단체가 [개척자들]이라고 했다. 구호활동 뿐만 아니라 실제로 현지인들의 삶에 밀착해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하며 근본적인 갈등의 씨앗을 양 주체가 직면해 갈등을 해결하는 데 까지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놀라웠다실제로 가장 위험한 분쟁지역에서 평화학교를 세우고 평화캠프를 세워 교육하고 첨예한 갈등의 접점에 있던 양 부족을 화해 시켜주기도 했던 그들이었는데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 더 놀라웠다. TV에서 하는 구호단체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ARS성금을 하고 또는 후원자가 되는 것도 너무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직접 그 현장으로 날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일정 기간 갔다가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도록 언제까지인지 모른 채 함께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숨을 내어놓은 일이다.

송강호씨는 그런 일을 해온 사람이다. 독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면 내가 알기로 한국에 와서 교회에 이력서를 내면 좋은 곳에서 목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먼 땅의 아픈 곳으로 날아갔고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갔던 사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등한시하는 평화를 주제로 한 책을 출간하도록 결정해 준 IVP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p.11)

 

 

이 책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는 송강호씨의 [개척자들]에 대한 소개와 활동, 강정마을에서 투쟁하게 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구속된 후 수감된 상태에서 외부로 보내 온 편지와 자필 일기 등이 수록된 책이다.

책을 출간한 IVP라는 출판사는 내가 대학 시절 몸담았던 IVF라는 단체의 출판사다. 기독교 출판사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놀라기 이전에 너무 반가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 인 중에서 강정마을에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해서 실제적인 투쟁을 하고 그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싸웠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

 

 

“진리는 오랜 숙고와 성찰을 통해 이를 수 있지만,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p.28)

 

나도 그와 동일한 진리를 믿고 있는 신앙을 가졌는데, 송강호씨의 말대로라면 라는 내가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한 담보를 실천으로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일언반구도 보탤 수 없다. 책을 읽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고민을 하고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으로 진리를 알 수는 있지만 그 진리에 대한 신실함을 담보할 그 어떤 실천도 하고 있지 못하다면 나의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것이 맞다. 적확하다.

나름 생각 있는 기독교인이고 진보적인 가치를 신앙에 접목하고 있다고 자위하지만 이 책을 통한 송강호씨의 삶에 반추해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안보라는 가치 앞에서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내려놓죠. 국가가 있어야 신앙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그건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교회조차도 그런 국가 안보 논리가 이데올로기로 깊이 뿌리박혀 있어요. 그리고 경제적 가치가 신아의 가치를 상회하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가치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기독교적으로 채색해서 수용해 버리는 거예요.” (p.88)

 

강정마을에 군사기지가 들어선다는 발표가 있고 강정마을에서 반대 투쟁을 시작한 후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강정마을 주민은 물론 육지의 시민단체와 종교계, 문화예술인, 일반시민들이 제주의 작은 마을 강정으로 날아갔다. 제주에 있는 많은 교회들은 침묵했다. 육지의 교회들도 침묵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명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나는 공식적으로 교회 이름을 걸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천명한 대형교회는 단 한군데도 보지 못했다. 해군기지 문제로 정치적 갈등을 조장하고 종교전쟁으로까지 물고 가려는 천박한 싸움꾼의 모습만 보였다. 송강호씨의 분석은 날카롭고 정확하다. 자신들이 믿는 신보다 국가의 안보 이데올로기와 대형 재벌 건설사를 배불리는 자본 이데올로기가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은 그 일에 수많은 교회가 그토록 일제히 침묵할 수 있었던 것은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경찰과 법관들은 작은 마을 강정에서만 이미 600명이 넘는 시민을 체포 연행했고 300명 이상을 처벌했습니다.” (p.153)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밀어붙였다. TV를 통해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활동가들과 종교인들이 끌려 나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염기념물의 가치가 있는 구럼비바위가 폭파되는 것도 함께 방영되었다.

 

 

“신념이 없는 학자들은 시류에 편승하고 철학이 없는 정치가들은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법입니다. 제주도는 이런 학자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이들의 비틀거리는 행보를 방조하는 법관들에 의해 표류하는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p.152)

 

강정마을 뿐만 아니라 4대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분명히 잘못된 방향이고 잘못된 방법이라 모두가 반대하는데 아니란다. 일단 삽부터 뜨고 본다. 대다수의 반대를 일부의 반대로 희석해 논란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명확한 잘못과 한계가 설정되어 있음에도 장악된 언론을 이용해 논란거리로 물 타기 해 버린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후다닥 해치운다. 중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는 쉬쉬하면 그만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몇몇과 전문가라는 이들 몇몇 인터뷰해서 문제없다 하면 그만이다. 계속 반대하는 놈들은 잡아 가두고 나중에 무죄가 나더라도 수개월, 수년 동안 괴롭히면 그것으로 목표달성이다. 힘을 가진 자들이 편승하고 휘둘리고 방조하면서 표류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송강호씨는 수감된 지 181일 만에 직권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지금은 강정마을에 대한 뉴스가 전혀 나오고 있지 않아서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수가 없다. 바위가 폭파되고 큰 포크레인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화면이 마지막 기억의 전부다. 하지만 여전히 강정마을은 싸우고 있다고 한다. 언론의 관심이 없고 국민들의 관심이 적고 특히, 기독교의 관심이 전무해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송강호씨는 석방 후에도 여러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강정마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여전히 해군기지 건설을 백지화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기독교인가?’ 첫째, 탐욕을 버리는 신앙이다. 둘째, 거만하지 않은 신앙이다. 셋째,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마음이다.” (p.162)

 

[개척자들]활동과 강정마을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는 전사로 거듭났고 그가 수감된 이후에도 강정마을의 만장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의 그림이 그려지고 티셔츠에도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는 전사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주장한다.

탐욕을 버리고, 거만하지 않으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신앙. 그런 신앙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는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이러니 하지만 당연한 결론이기 하다.

같은 종교를 가졌지만 송강호씨의 신앙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물론 신앙을 두고 니가 낫니, 내가 낫니 구별하고 차별을 둘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신앙보다는 훨씬 진정성이 있고 신실하다. 나도 그런 신앙인이 되고 싶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책을 보는 것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자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간결한 실천과 실행으로 내 신앙의 신실과 진정을 담보하는 그것.

그것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2막이다.

 

“평화의 꿈은 평화를 향한 항해에 오르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단지 꿈일 뿐이다. 배에 올라타라. 깊고 푸른 평화의 바다를 항해하자!”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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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GO발뉴스 - 지승호 이상호의 위험한 인터뷰
지승호.이상호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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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살고 싶고 별 탈 없이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바람일 것이다. 내 몸 하나, 내 가정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버거운 세상에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는 다는 것은 어떤 때는 사치로 느껴지기도 한다. 당장 이번 달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기도 전에 미친 듯이 빠져나갈 온갖 세금과 대출이자, 보험료를 생각하면 민주주의, 정의, 진정한 대통령 따위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은 허세다.

나 하나 잘 되고 내 가장 하나 잘 꾸려가는 것이 나와 같은 소시민에게는 최고의 이상이다. 예전에 어떤 광고 문구에 “모두가 YES할 때 NO한다.”라는 것과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어릴 때는 ‘카피 참 잘 뽑았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완전히 미친 짓이고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사회에서의 행동이다. 모두가 예스할 때 그냥 고개 처박고 따라가고 모두가 노 할 때도 그냥 고개 처박고 따라가야지 어떻게 모두가 따라가는 의견에 손을 들고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참 골치 아픈 사람이다. 십 수 년의 기자생활 동안 오직 ‘탐사고발 기자’로 살아 온 사람이다. 덩치는 곰만 하고 얼굴도 엄청 크고 머리 스타일은 느끼하니 별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기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자관을 독특하게 소개한다.

 

 

“제 저널리즘의 원칙은 휴머니즘입니다. 양식은 리버럴하고요, 판단은 미학적으로 합니다.” (p.243)

 

연예인 노예계약 고발, 삼성X파일 고발, 병역비리 고발, 방산업체 고발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발 보도를 했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구속되거나 처벌받았다. 어떤 종편 채널에서 오죽 시청률이 안 나왔으면 무슨 먹거리에 대한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그런 것만 찾으러 다니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프로그램이 있던데 이상호 기자는 그런 자잘한 고발 따위는 하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 터뜨렸다.

실제로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실타래 마냥 얽히고설킨 대한민국의 비리의 역학관계는 정당하고 정의로운 고발을 한 이상호 기자를 조직 내 배신자로, 왕따로 만들어 버렸다.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대로 미행·협박은 기본이고 삼성X파일을 보도한 후에는 공황장애까지 겪게 되었다고 한다.

수십 건의 고발·고소를 당하고 실제적인 위협을 받고 조직 내에서조차 왕따를 당하고…….

이상호 기자는 기자라는 직업은 사회적 무당이라고 얘기한다. 도저히 어디에도 자신의 억울함을 신원할 길 없는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무당인데, 무당은 접신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함께 한바탕 웃고 우는 굿판을 벌이면 어느 새 그 억울함이 풀린다는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도 어디 국가기관이나 자치기관에 호소하고 탄원해도 도저히 들어주지 않는 그 억울함을 들어주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자신 또한 이제는 의뢰인이 찾아와서 사정을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아~ 이건 전치 몇 주짜리다, 아~이건 최소한 구속이다, 아~이건 죽으라는 얘긴데??’ 감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그냥 의뢰인이나 제보자 얘기 들어주는 것으로 그치려고 하는데 막상 듣다 보면 무당이 접신하는 것처럼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이 가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슬픔과 분노, 억울함과 체념에 오롯이 이입이 되어 또 그 진흙탕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고 한다.

 

 

“기자생활을 통해서 저 스스로를 폭탄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순도 높은 다이너마이트가 되기 위해 제 생활의 밀도를 높여왔던 거지요.” (p.197)

 

이상호 기자의 저 말이 참 멋있었다. 이 책 「이상호 GO발뉴스」는 지승호씨와 한 인터뷰를 엮은 책이기 때문에 이상호 기자가 직접적으로 하는 말이 많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저 말이 가장 좋았다. 스스로를 폭탄으로 만든다는 생각.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이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언론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체험했다. 기자라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제대로 취재해서 보도하지 않으면 얼마나 왜곡되고 편향된 뉴스가 될 수 있는지 명확히 알았다. 누구 말마따나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기자’이고 ‘가장 말을 듣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기자’인데 그런 기자가 없었다. 아니, 있었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기자는 기사를 쓸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호 기자는 스스로를 폭탄으로 정의한다. 터뜨려질 목적으로 만들어진 폭탄. 누가 폭탄을 만들어 놓고 집안에 진열해 놓은 후 ‘이야~~ 멋있다. 내 폭탄’ 하나? 폭탄은 터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호 기자는 자신을 그렇게 정의했다. 다른 자질구레한 설명을 필요 없다. 불발탄이나 공갈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생활의 밀도를 높였다고 한다. 내 콧등이 시큰해졌다. 나는 이상호라는 사람을 잘 알지 못하고 기껏해야 그의 책 두 권을 읽었을 뿐인데 그가 그에게 찾아오는 제보자나 의뢰인에게 이입이 되는 것처럼 나도 그의 고됨에 이입이 되어서 일까? 삼성X파일을 보도하기 위해 오랜 기간 술·담배도 하지 않고 치밀하게 자신의 일상을 정돈했다고 한다. 보도 후에는 온갖 억측과 비난, 위협과 따돌림에 시달렸고 도피하듯 날아 간 미국에서도 여전히 공황장애에 시달렸다.

아니, 다른 얘기 다 필요 없고! 이상호 기자처럼 살 사람이 있나?

이미 최고의 권력이 된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이 되지도 않고 내 안위를 내가 걱정해야 하는 저런 일을 할 사람이 있나? 없다. 그저 저 만치 떨어져서 ‘저 사람 참 멋있네~.’ 박수 쳐 주거나 아예 관심 없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호 기자를 응원해야 한다.

 

나는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면 바로 쌍심지를 켜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발로 뛰며 선출한 첫 대통령이었고 지난 5년을 겪으며 더 그리웠었다. 그의 마지막 삶이 비극적이었던 것도 중요한 기제였다. 이상호 기자는 참여 정부 시절에도 정부와 정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고발을 했었다. 그래서 참여정부의 실정과 노무현 대통령의 판단 미스와 한계에 대한 자세한 의견이 나오는데, 나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고 설득력이 있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이상호 기자가 어떤 정치적 위치함에 따라 비판하거나 찬양하거나 하는 일반 정신없는 기자들과는 달리 어떤 정치적 편향이나 편견 없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보도할 것은 보도하며 고발할 것은 고발하는 기자라는 것을 알고 나니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도 수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또 재미있었던 내용 중 하는 구당 김남수 선생에 관한 내용이었다. 예전에 TV 토크쇼에 나온 아주 키가 작고 눈썹이 흰색인 노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어 신기했다.

 

 

“구당의 삶과 저의 주장은 한마디로 ‘의료 민영화 반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의료까지 영리화되면 어떻게 되겠어요…….사람들이 곰쓸개에 빨대를 대고 바로 쓸개즙을 빨아먹듯이 사람의 장기에 자본주의의 빨대가 박히는 거예요. 인간으로부터, 인체로부터 바로 수익을 빨아먹는 장치가 의료 민영화다, 영리병원이다,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p.175)

 

구당 선생의 삶과 이상호 기자의 취재와 보도는 생각보다 심층적이었다. 나는 단지 TV에서 한 번 봤을 뿐이고 다른 매체들을 통해 뜸에 대한 전문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상이었다. 서양의학이라는 것은 병을 70%이상 완치시키지 못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또한 의학에 공학이 덧입혀져 산업이 되었고 산업은 곧 자본의 속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고가의 검사를 받아야 하고 많은 약을 처방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래 놓고도 완전히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한계라는 점도 이해가 갔다.

구당 김남수 선생은 50년 전부터 서양의학의 한계를 설정하고 동양의학을 보급하고 무리한 수술이나 약의 복용보다 침과 뜸으로 체질을 개선하고 몸에서 저절로 면역을 강화하는 것이 진정한 병의 치료라는 것을 설파한 사람이라는 소개였다.

하지만 구당 선생의 이런 주장은 병원은 물론 한의사들에게도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비싼 임대료, 인테리어비, 홍보비에 나아가 고가의 한의대 교육비까지 계산하면 침뜸만 놔줘서는 수지가 맞지 않겠죠. 헐값에 들여오는 중국산 약재를 섞어 약을 만들면 많게는 수십 배의 차익을 누릴 수 있는데, 누가 침뜸을 하겠습니까. 뜸으로는 도저히 타산이 안 맞는 거죠.” (p.183)

 

수지타산을 맞춰야 하는데 구당 노인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쉽게 쑥을 구해 뜸을 뜨고 그것이 오히려 병원에 가서 비싼 검사를 받거나 한의원에 가서 비싼 약을 구입해 먹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면 한의원들 다 문 닫아야 할 판이었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한참 구당 선생이 TV에도 많이 출연하고 책도 출간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도 간단한 뜸도구를 구입하셨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사이비 침구사니 뭐니 해서 떠들썩하더니 TV에도 나오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자본이 권력의 정점에 있는 지금. 구당 선생의 주장은 반자본적인 것이다. 한의원에 환자가 많이 찾아와야 약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 그것을 정·관계에 로비하기도 하고 할 텐데 모두가 쉽게 저렴한 쑥을 사서 집에서 뜸을 뜬다면 한의사 업계와 병원에게는 재앙일 것이다.

 

아무도 보도하지 않아 잊혔던 구당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재미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싸이에 대한 내용도 짧게나마 실렸는데 얼마 전에도 싸이와 김장훈관련 보도를 해서 이상호 기자가 욕을 많이 먹은 적이 있다. 솔직히 가만히 있었어도 되는데 괜히 나섰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호 기자는 그렇게 생겨먹지 않은 사람이다.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있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천상 기자다.

그가 생각했을 때 분명히 저건 아닌데 싶은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얘기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비난과 비판을 감수한다. 결정적으로 삼성X파일 보도 이후 그는 더 큰 사람, 더 용감한 기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이상호기자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아니, 오해라기보다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처음 소개 한 그의 기자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는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휴머니스트다. 어디에서 메이지 않는 리버럴한 사람이며 치밀하고 밀도 있고 삶을 꾸려가면서 한방에 멋지게 터뜨리는 미학자다.

그래서 그를 더 응원하게 되었다.

 

기자 생활 십 수 년을 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거나 겁먹지 않는다고 한다. MBC자회사에서 만든 <손바닥뉴스>가 갑자기 폐지되고 해고하지도 않으면서 식물인간처럼 살아가게 만들었지만 또 잡초처럼 살아나 대안 언론인 <GO발뉴스>를 만들었다. 이상호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사람이나 조직, 집단에게는 얼마나 성가시고 귀찮고 두려운 존재일까 생각하니 기분이 고소하다.

앞으로 큰 거 한 건 터뜨리고 싶다는 말을 책의 말미에 많이 하고 있다. 나는 서서히 걱정부터 되기 시작한다. 이제껏 그만큼 시달리고 공격당하고 피해를 입어 왔는데 더 큰 거 하나 하고 싶단다. 무서운 사람이다.

저들에게는 오금이 저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선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응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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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 2012년 대선과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 참여
김근주 외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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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양적 성장을 얻는 대신 진정한 광기를 상실했다. 아무도 목숨 걸고 교회를 다니지는 않는다. 성도들의 일상적 삶과 분리된, 그 삶에 진짜 관심도 없는 목사들의 추상적 설교에서 진정성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p.142)

 

성경을 읽어보면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 하다. 이제까지 나는 성경을 4번 읽었다. 지금은 5번째 읽고 있는 중이다. 물론 66권의 방대한 분량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범상치 않다.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스토리의 밀도에 질식해 버릴 지경이다. 위에서 말한 광기는 진정어린 신앙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애초에 별 관심이 없겠지만 초기 기독교의 모습, 한국에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 그 교회들의 모습. 그것은 광기였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의 요구에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창씨개명하고 황제를 하나님 위에 놓은 수많은 목사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과 신앙을 추호의 망설임 없이 맞바꿀 수 있었던 신앙의 결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외부에서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버린 수많은 요인 중 하나로 목사들의 추상적 설교를 찾는다.

 

 

이 책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소 도발적인 주제와 내용이 담긴 책이다. 흔히 기독교 하면 앞뒤 꽉꽉 막혀 자신들만 아는 이익집단쯤으로 생각할 텐데 기독교 내에서도 이런 정도의 주제를 균형감을 유지하며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안이 된다.

앞서 했던 말로 돌아가면 목사들의 추상적인 설교는 정말 문제다. 비록 나는 4번 정도 밖에 성경을 읽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의 어느 구절, 어느 구절을 따로 뽑아 상황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다. 스토리가 있고 서사가 있다. 하나의 성경구절에는 앞뒤로 성경구절이 붙어 있다. 그 맥락 속에서 구절을 해석하고 대입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설교 때에는 그것은 간과된다.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어디어디라고 보지도 않고 설교하면 ‘이야~ 저 목사님 성경 많이 아시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십일조, 세금문제 등이 아직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세금문제!! 나는 적어도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설혹 성경에 ‘세금내지 마라’라고 쓰여져 있다(성경에는 전혀 그런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세금을 내야한다고 본다. 매주 강대상 위에 서서 고고한 말 늘어놓고 기복적 축복을 내리는 것이 목사의 일의 다가 아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멸망을 선포하고 신의 저주를 전파하는 예언자들의 광기어린 결기가 없다. 매주 딱딱한 교회 의자에 앉아 그 목사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 대부분은 일주일을 전쟁같이 지내다 휴일 아침잠에 취해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내일부터 또 총칼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며 졸기에 적격인 듣기 좋은 레퍼토리만 늘어놓는다면 교회 본연의 모습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을 대리해 말씀을 선포하는 대리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성경에 나타난 바른 정치와 지난 대선을 통해 드러난 정치와 결탁한 기독교의 실체, 그리고 며칠 남지 않은 이번 대선에 대한 담론이 담겨 있다. 사실 지난 대선과 이번 대선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많은 양의 정보와 볼거리가 많은 요즘이라 ‘최소한 기독교계에서도 이런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하는 정도만으로 만족한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폄하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쓰는 용어 ‘개독교’가 단순히 어떤 한 시점에 유행병처럼 번진 의미였을지, 중·고딩 들이 하루에도 수백 번 쓰는 용어인 ‘졸라’처럼 별 의미 없이 떠돈 말이였을지가 궁금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가 어떤 연유로 개독교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내게는 중요한 과제이자 과정이었다.

 

 

“‘기독교 정당’같은 것도 기독교인들만 찍어도 몇 표인데 하는, 비례대표제의 유익을 좀 누려보자는 얄팍한 공학적 사고의 산물이었지, 시대를 향한 기독교적 메시지는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p.107)

 

실제로 모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지난 총선을 앞두고 ‘기독당’을 창당하며 했던 말이다. 몇 만 표 이상만 득표하면 비례 몇 석을 얻을 수 있고,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독당’에 투표하면 원내에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나름의 시나리오였다. 양으로 지칭되는 성도들을 신의 목적과 영광에 참예시키는 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할 성직자들이 여느 정치평론가가 짤 수준의 정치공학적 고심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보기에 목사님을 참 바쁘다. 새벽설교부터 온갖 심방, 수요일·금요일·주일(일요일) 설교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내가 겪은 목사님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비례가 몇 표니, 성도들을 한 표 정도의 정치적 계산의 숫자 하나로 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진정한 성직자의 모습인가 싶었다.

 

 

“실제로는 현실의 지배 세력과 결탁하여 교회가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저급한 욕망의 배설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8)

 

현대 한국교회가 왜 이토록 보수화·정치화·기복신앙화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 시사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옮겨 소개하고 싶다.

[바로 돈 문제입니다. 교회가 부동산·사학 등 재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점차 기득권화 된 것입니다.]

아주 심플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분석이다.

교회가 기업화되고 친교모임 정도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돈 문제이다.

몇 해 전 사학법 개정을 하려고 했을 때 한국교회가 보여 준 패악을 떠올려 보면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목사들이 거리로 나와 바퀴 달린 대형 십자가를 끌고 다니지 않나, 스님처럼 머리를 삭발하지를 않나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사학법 개정 반대를 위한 서명을 받기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돈이다! 돈!

 

성경에서 예수가 얘기하는 진정한 신앙의 범주에는 ‘돈을 많이들 벌어라!!, 교회를 크게 넓게 멋있게 잘 지어라~~!!, 학교를 많이 많이 세워라~~!!, 대통령은 꼭 장로가 되어라~~!!’따위는 들어가지 않는다.

교회에서 얘기하는 세속(세상, 사회)은 최대한 물들지 말아야 하고 편승하지 말아야 할 신앙의 적이다. 실제로 설교를 통해서 세상에 섞이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속화되고 그것의 첨병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지난 대선이 있기 전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라는 단체의 대표가 된다. 머뭇거리던 교회표를 지금의 대통령에게 집중하게 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기득권화되면서 자연스레 정치권력과 결탁하게 되었다. 당연한 현상이다.

 

 

“복음의 모든 면을 설교하면서 당신 자신의 시대가 직면한 문제만 제외했다면, 당신은 전혀 복음을 설교하지 않은 것이다.” (p.149)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했던 말이다. 과연 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 중 몇 개의 교회 설교강단에서 시대가 직면한 문제가 선포될까? 어느 시골에 가도 두 개의 붉은 네온싸인을 볼 수 있다. 교회 십자가 네온싸인과 모텔 간판 네온싸인!! 그만큼 교회 숫자가 많지만 손에 꼽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자신이 없다. 십 수 년간 교회에 출석하면서 고3때 고등부를 담당하셨던 모 전도사님(목사가 되기 전 직책)이 광주5.18과 독재에 대한 얘기를 한 번 들었을 뿐. 기억이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추위와 싸우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고 있고, 조금만 응시하고 귀를 기울이면 교회라는 곳이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할 곳이 넘쳐나는데 주일(일요일) 교회에서는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처럼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가득할 때가 많다.

“세상에서도, 직장에서도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힘든 시대지만 힘을 내시고 기도하십시오.”라고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대체 당장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도처에 가득한 시대 문제가 있는데 교회 문 안으로만 들어오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거룩하게 찬송가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행위가 일어난다.

나와 그들이 믿는 신이 나와 그들만의 신인가?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고자 하는 것인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다. 교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는데 유일하게 교회만 이것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채 하는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무턱대고 투표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중에서는 공식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후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 대선에서 그렇게 장로대통령을 외치던 모 대형 교회들이 요즘은 어떤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슨 명분으로 한쪽으로의 투표를 종용할지 말이다.

 

제발 좀 신은 신답게 교회밖에 놔두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신을 믿는 사람들답게 교회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를 바란다.

이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내는 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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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개념 - 서문과 세 개의 계론을 수록한 1932년 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 외 옮김 / 살림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지난 주 대선정국을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안철수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치를 혐오하는 사람이나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안철수라는 이름을 당연히 들어봤을 것이고 호불호의 기준을 떠나서 야당 후보와 단일화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도 당연히 들어봤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안철수와 단일화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봐야 한다.

안철수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 이후 SNS가 폭발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서부터 허탈과 분노, 서운함과 안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정보를 발사하는 미디어를 대중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존 미디어의 속성과 한계를 알고 있고 그들이 언론으로서의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무리 많은 방송과 프로그램을 만든다 할지라도 대중은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어리석지 않다. 이전처럼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SNS로 진화하면서 SNS를 사용하는 이용자 한 사람이 일인미디어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일방적으로 편집되어 발사된 정보에 현혹되지 않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간의 정보를 SNS상에서 공유하고 전파하게 되었다. 기존 미디어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소통의 방향성이다.

그래서 지난 안철수 후보 사퇴를 두고도 기존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분석과 판단은 적어도 SNS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오세훈과 한명숙이 붙었던 서울 시장 선거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여론조사라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여론 조사 기관이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조사했다는데 여론조사 기관이나 언론사·미디어마다 다른 결과를 낸다는 것은 넌센스다.

SNS는 이미 문화가 되었고 가장 훌륭한 소통의 시장이 되었다. 정치판도 허겁지겁 뛰어들어 어떤 사람들은 트위터 전사대를 만들기도 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SNS야 말로 가장 정치적이고 정치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도구라고 생각한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나눠먹기 하고 재래시장 한 번 돌아다니며 악수하고(아! 악수하지 않는 분도 계시지!!) 어묵하나 집어 먹으면서 하는 소통 코스프레가 아니다.

 

정치!!

정치는 살아가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며 누구와 살아가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내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치인들이 떠들어 대는 수사(레토릭)가 내 피부에 확 와 닿지 않을 뿐이지 저들이 입법하고 통과시키는 법안들이 빠르게는 다음 달에 당장, 늦게는 수년 후에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정치에 대해서는 별나게 노이로제를 일으킨다. 정치는 마냥 정치인님들이나 하는 것이고 잘 모르는 아랫것들은 그저 선거날 투표나 하고 밥상 차려주면 밥이나 한 사발 퍼 먹는 것에 만족하라는 것인지.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해서 연예인들의 밥줄을 끊고 정치적인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헌정 사상 최초로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정치인도 있으며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게재했다고 서민을 잡아 가두기도 한다. 도대체 그들이 정의하는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번 안철수 기자회견 후 유아인이라는 남자 연예인이 트위터에 자신의 생각을 올렸나 보다. 나중에 확인하니 꽤나 식견을 가진 사람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또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이름 알리려고 생쑈를 한다는 둥, 야권에 빌어 붙어 드라마라도 한 편 찍으려고 한다는 둥, 제대로 모르는 XX는 찌그러져 있으라는 둥.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정제되지 않고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들인 유아인씨의 트윗을 제대로 읽었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연예인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말도 못하나? SNS는 열린 공간이고 아직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편향을 가진 연예인의 언급에 가치관이 호도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SNS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중·고딩 들은 아직도 조간 신문과 9시 뉴스만 보는 꼰대들 보다 더 정치적인 정보와 자극에 의연하다. 관심이 없을 뿐이지…….

 

조지 클루니 형님은 시위하다 잡혀가셔도 간지가 좔좔 흐르는데, 한국의 연예인들 중 도대체 누가 정치적인 행동을 제대로 하기나 했나?? 나는 전혀 모르겠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공간이고 소통의 공간인 SNS에서 자신의 의견을 짧게 피력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난리를 치고……. 더 황당했던 것은 그것을 관망하며 기사화하는 저질 언론들이다.

얼마 후 배슬기라는 여자 연예인이 흔히 보수꼴통 진영에서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쓰는 종북좌파 프레임의 단어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것도 정말 코미디다. 배슬기씨가 자신의 트윗에 그러한 언급을 했다는 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볼 줄 알았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은 배슬기씨 평소의 생각이라고 봐야 한다. 그 언급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과정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왜 문제시 되어야 하나?

오히려 한국 연예인을 비롯한 문화예술인, 체육인 등은 더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정치적인 개념」은 사실 어려운 책이다. 이미 출간된 지 80년이나 된 책이고 딱딱한 이론서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카를 슈미트가 독일 사람인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특유의 문체를 경험할 수 있다.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p.31)

“본래의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 중 겨우 어떤 적대적인 계기만 남을 뿐이며, 모든 종류의 책략과 술책, 경쟁과 음모의 형태를 취하고, 가장 기묘한 거래와 정략을 ‘정치’라고 부르게 된다.” (p.44)

 

카를 슈미트의 생애는 그야말로 순탄치 않았다. 요동치는 정세 한 가운데 20세기 초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법과 철학을 공부하고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나치스에 부역하기도 하고 추방되어 학문과 강의에만 매진하게 된다. 젊은 나이에 전쟁을 겪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갈등이 첨예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에 대한 경험의 차이에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카를 슈미트는 이런 전쟁을 두 번 겪었다. 자신의 학문적 집대성이 나치스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다. ‘국가’라는 기틀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 ‘정치적’ 투쟁의 한 가운데서 정치적인 개념을 논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갑자기 국가 지도자가 바뀔지도 모르고 오늘 연합한 국가가 내일 배신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정치적인 것은 ‘책략과 술책, 경쟁과 음모, 거래와 정략’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를 슈미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개념인 ‘적과 동지’ 개념은 이러한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경험에 의한 사고의 결과였을 것이다.

 

 

“세계가 오락의 세계가 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보증은 정치와 국가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의 반대자는 최종적으로 오락의 세계, 즉 즐거운 세계, 진지하지 않은 세계의 구축을 바란다.” (p.214)

“진정한 정치이론이란 모두 인간을 ‘악한 것’으로 전제하는, 즉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동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p.240)

 

한 국가의 지도자는 국민들이 ‘정치적’이 되는 것을 좋아할까? 싫어할까?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라는 것의 범위는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연일 계속되는 정치뉴스에 일희일비하고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항의하고 건의하기도 하고 학부모를 둔 엄마들은 모여서 학원이나 과외, 대학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 교육감의 정책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하는 뭐 그 정도. 전혀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허황된 얘기인가?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이런 정치의식의 성숙을 반가워하고 오히려 고마워해야 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제대로 되지 않은 지도자라면 국민들이 ‘정치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 것이다. 그냥 매일을 악다구니로 몸서리치며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정치 얘기 하는 것이 배부를 소리 하는 것인 양 찬밥신세를 받아야 한다.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다들 고개 푹 숙이고 투표 날에나 기어 나와 도장 찍고, 찍 소리 안 하고 또 4년, 5년 그렇게 가는 것이다. 국가 예산을 어떻게 남용하든지, 어떻게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든지, 부정과 비리가 얼마든지 상관없이 국민들 한명한명 살아가는 꼴을 너무나 힘들게 세팅해 놓으면 저절로 정치와는 무관한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에 관심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최소한 나는 투표하지 않았다.’ 라는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자세로 자신의 무관심을 자위하는 것은 제대로 되지 않은 지도자가 바라는 딱 그 수준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정치적인 사람, 정치적인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유아인씨도, 배슬기씨도 직업은 연예인이지만 더욱 정치적인 사람, 정치적인 국민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정치적 발언과 언행이 문제시 되어서는 안 된다. 비정상적이다. 한편으론 씁쓸하다. 국민들 대다수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적인 사람들이라면 몇몇 연예인들의 정치적 발언과 언행이 이슈화 되거나 기사거리조차 되지 않을 텐데 얼마나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이런 허접한 가십조차 이슈가 되고 기사거리가 되는 지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카를 슈미트의 딱딱하고 어려운 이론서를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살고 있는 시대 상황과 조우하여 피하지 않고 내가 멀리해야 할 적과 내가 가까이 해야 할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과 동지의 범위가 사람이나 조직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가장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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