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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 2012년 대선과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 참여
김근주 외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10월
평점 :
“교회는 양적 성장을 얻는 대신 진정한 광기를 상실했다. 아무도 목숨 걸고 교회를 다니지는 않는다. 성도들의 일상적 삶과 분리된, 그 삶에 진짜 관심도 없는 목사들의 추상적 설교에서 진정성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p.142)
성경을 읽어보면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 하다. 이제까지 나는 성경을 4번 읽었다. 지금은 5번째 읽고 있는 중이다. 물론 66권의 방대한 분량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범상치 않다.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스토리의 밀도에 질식해 버릴 지경이다. 위에서 말한 광기는 진정어린 신앙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애초에 별 관심이 없겠지만 초기 기독교의 모습, 한국에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 그 교회들의 모습. 그것은 광기였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의 요구에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창씨개명하고 황제를 하나님 위에 놓은 수많은 목사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과 신앙을 추호의 망설임 없이 맞바꿀 수 있었던 신앙의 결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외부에서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버린 수많은 요인 중 하나로 목사들의 추상적 설교를 찾는다.
이 책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소 도발적인 주제와 내용이 담긴 책이다. 흔히 기독교 하면 앞뒤 꽉꽉 막혀 자신들만 아는 이익집단쯤으로 생각할 텐데 기독교 내에서도 이런 정도의 주제를 균형감을 유지하며 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안이 된다.
앞서 했던 말로 돌아가면 목사들의 추상적인 설교는 정말 문제다. 비록 나는 4번 정도 밖에 성경을 읽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성경의 어느 구절, 어느 구절을 따로 뽑아 상황에 끼워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야기다. 스토리가 있고 서사가 있다. 하나의 성경구절에는 앞뒤로 성경구절이 붙어 있다. 그 맥락 속에서 구절을 해석하고 대입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설교 때에는 그것은 간과된다.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며 어디어디라고 보지도 않고 설교하면 ‘이야~ 저 목사님 성경 많이 아시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십일조, 세금문제 등이 아직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세금문제!! 나는 적어도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설혹 성경에 ‘세금내지 마라’라고 쓰여져 있다(성경에는 전혀 그런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세금을 내야한다고 본다. 매주 강대상 위에 서서 고고한 말 늘어놓고 기복적 축복을 내리는 것이 목사의 일의 다가 아니다. 목숨을 내어놓고 멸망을 선포하고 신의 저주를 전파하는 예언자들의 광기어린 결기가 없다. 매주 딱딱한 교회 의자에 앉아 그 목사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 대부분은 일주일을 전쟁같이 지내다 휴일 아침잠에 취해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내일부터 또 총칼은 없지만 그보다 더한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며 졸기에 적격인 듣기 좋은 레퍼토리만 늘어놓는다면 교회 본연의 모습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을 대리해 말씀을 선포하는 대리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성경에 나타난 바른 정치와 지난 대선을 통해 드러난 정치와 결탁한 기독교의 실체, 그리고 며칠 남지 않은 이번 대선에 대한 담론이 담겨 있다. 사실 지난 대선과 이번 대선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많은 양의 정보와 볼거리가 많은 요즘이라 ‘최소한 기독교계에서도 이런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하는 정도만으로 만족한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폄하하고 조롱하는 뜻으로 쓰는 용어 ‘개독교’가 단순히 어떤 한 시점에 유행병처럼 번진 의미였을지, 중·고딩 들이 하루에도 수백 번 쓰는 용어인 ‘졸라’처럼 별 의미 없이 떠돈 말이였을지가 궁금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가 어떤 연유로 개독교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내게는 중요한 과제이자 과정이었다.
“‘기독교 정당’같은 것도 기독교인들만 찍어도 몇 표인데 하는, 비례대표제의 유익을 좀 누려보자는 얄팍한 공학적 사고의 산물이었지, 시대를 향한 기독교적 메시지는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p.107)
실제로 모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지난 총선을 앞두고 ‘기독당’을 창당하며 했던 말이다. 몇 만 표 이상만 득표하면 비례 몇 석을 얻을 수 있고,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독당’에 투표하면 원내에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나름의 시나리오였다. 양으로 지칭되는 성도들을 신의 목적과 영광에 참예시키는 데에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할 성직자들이 여느 정치평론가가 짤 수준의 정치공학적 고심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보기에 목사님을 참 바쁘다. 새벽설교부터 온갖 심방, 수요일·금요일·주일(일요일) 설교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내가 겪은 목사님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비례가 몇 표니, 성도들을 한 표 정도의 정치적 계산의 숫자 하나로 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진정한 성직자의 모습인가 싶었다.
“실제로는 현실의 지배 세력과 결탁하여 교회가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저급한 욕망의 배설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8)
현대 한국교회가 왜 이토록 보수화·정치화·기복신앙화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모 시사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옮겨 소개하고 싶다.
[바로 돈 문제입니다. 교회가 부동산·사학 등 재산을 소유하게 되면서 점차 기득권화 된 것입니다.]
아주 심플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분석이다.
교회가 기업화되고 친교모임 정도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돈 문제이다.
몇 해 전 사학법 개정을 하려고 했을 때 한국교회가 보여 준 패악을 떠올려 보면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목사들이 거리로 나와 바퀴 달린 대형 십자가를 끌고 다니지 않나, 스님처럼 머리를 삭발하지를 않나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사학법 개정 반대를 위한 서명을 받기도 했었다.
왜 그랬을까?
돈이다! 돈!
성경에서 예수가 얘기하는 진정한 신앙의 범주에는 ‘돈을 많이들 벌어라!!, 교회를 크게 넓게 멋있게 잘 지어라~~!!, 학교를 많이 많이 세워라~~!!, 대통령은 꼭 장로가 되어라~~!!’따위는 들어가지 않는다.
교회에서 얘기하는 세속(세상, 사회)은 최대한 물들지 말아야 하고 편승하지 말아야 할 신앙의 적이다. 실제로 설교를 통해서 세상에 섞이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속화되고 그것의 첨병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지난 대선이 있기 전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라는 단체의 대표가 된다. 머뭇거리던 교회표를 지금의 대통령에게 집중하게 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교회가 세속화되고 기득권화되면서 자연스레 정치권력과 결탁하게 되었다. 당연한 현상이다.
“복음의 모든 면을 설교하면서 당신 자신의 시대가 직면한 문제만 제외했다면, 당신은 전혀 복음을 설교하지 않은 것이다.” (p.149)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했던 말이다. 과연 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 중 몇 개의 교회 설교강단에서 시대가 직면한 문제가 선포될까? 어느 시골에 가도 두 개의 붉은 네온싸인을 볼 수 있다. 교회 십자가 네온싸인과 모텔 간판 네온싸인!! 그만큼 교회 숫자가 많지만 손에 꼽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는 자신이 없다. 십 수 년간 교회에 출석하면서 고3때 고등부를 담당하셨던 모 전도사님(목사가 되기 전 직책)이 광주5.18과 독재에 대한 얘기를 한 번 들었을 뿐. 기억이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추위와 싸우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고 있고, 조금만 응시하고 귀를 기울이면 교회라는 곳이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할 곳이 넘쳐나는데 주일(일요일) 교회에서는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처럼 뜬구름 잡는 얘기로 가득할 때가 많다.
“세상에서도, 직장에서도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힘든 시대지만 힘을 내시고 기도하십시오.”라고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대체 당장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도처에 가득한 시대 문제가 있는데 교회 문 안으로만 들어오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거룩하게 찬송가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행위가 일어난다.
나와 그들이 믿는 신이 나와 그들만의 신인가?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고자 하는 것인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세상을 살고 있다. 교회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는데 유일하게 교회만 이것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채 하는 것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무턱대고 투표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중에서는 공식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후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 대선에서 그렇게 장로대통령을 외치던 모 대형 교회들이 요즘은 어떤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슨 명분으로 한쪽으로의 투표를 종용할지 말이다.
제발 좀 신은 신답게 교회밖에 놔두고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신을 믿는 사람들답게 교회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를 바란다.
이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내는 나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