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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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을 믿는 사람이든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든 자기의 삶 한복판에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현실의 삶이 팍팍하고 고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출근하고(등교하고) 일하고(공부하고) 퇴근하고(하교하고) 집에 와서 씻고 자고 하는 재귀순환이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바라는 기적이라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다는 것이 가장 큰 마력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나 갈 수 있는 해병대라면 지금처럼 해병대 전우회가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기적이 누구에게나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이미 그것은 기적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기적을 경험하고 싶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시간과 공간이 무의미해진 나미야 잡화점에서 미래의 예측을 답장으로 받아 큰 부자가 된 하루미처럼 나도 당신도 그렇게 되고 싶을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던 경기불황이 끝나는 시점에 갑자기 터져버린 부동산 열기를 타고 투자를 반복해 엄청난 돈을 번 후 부동산 버블이 터져버리기 직전 모든 매물을 처분해 피해를 입지 않는 예언자적 삶. 그렇게 예견된 미래를 이미 확보한 채 무한한 재귀순환을 또다시 반복한다면 나는 월요일 출근길도 너무 행복할 것 같다. 직장인들의 가장 큰 소원 중 하나가 단 하루, 단 하루만 미리 살아보는 것일 테다. 이틀도 사흘도 한 달도 아니라 단 하루. 이번 주 토요일 9시 10분!! 그 때로 미리 날아가서 잠시 숫자 몇 개만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미야 잡화점 같은 잡화점이 되었건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슈퍼마켓이 되었건, 단 하루!! 이번 주 토요일 9시 10분!!! 일생에 단 한번만 그때로 미리 가볼 수 있다면……. 하는 소원, 기적!!

 

이 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들과는 많이 다른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같은 맥락 안에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추리소설의 플롯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가 주목하는 인간성과 그 객체적 인간성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성의 본연의 모습,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 없도록 설계된 듯이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들 간의 개연성은 이전의 작품의 그것과 유사하다.

 


“처음으로 상담 편지를 드립니다.” (p.19)

 

아쓰야, 쇼타, 고헤이는 각자의 이유로 직장을 잃은 백수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갑자기 잃게 된 직장은 삶의 무게를 천근이나 더하는 고통이다. 아직 젊고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직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술 취한 아저씨의 지갑을 슬쩍하는 것으로 도둑질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그토록 들었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라는 어른들 말씀은 나이가 들수록 정말 맞는 말이다. 세 친구도 처음 취객의 지갑을 훔치는 것으로 시작된 일이 빈집에 들어가 절도를 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어쨌든 돈은 있어야 하고 바로 직장을 다시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보니 별장처럼 지은 집이 있는데 주인은 2시간 거리의 도쿄에 살고 있는 부자이고 자주 오지 않는 다는 사실도 확인한 후 아무도 없는 하루미의 별장처럼 지은 집에 몰래 들어가 신나게 절도를 하고 있는데!! 아뿔싸!! 딱 걸렸다. 그래서 사람을 결박하게 되면서 절도라는 범죄명 앞에 특수가 붙게 된다.

책의 첫 부분은 이들 세 명이 절도를 한 후 사람을 결박하고 허둥지둥 도망 나와 나미야 잡화점에 숨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절도를 하게 되는 경위와 도망 나와 지금은 그들 세 명으로 인해 피해자가 된 도쿄의 갑부 하루미가 호스티스 생활을 하던 아가씨 시절 앞서 말한 나미야 잡화점에서 받은 미래를 예측하는 편지로 인해 자신이 부자가 된 것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를 담은 편지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언뜻 보면 이것 또한 재귀순환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분명히 저기쯤인 것 같은데 거길 만져보면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 줄곧 사용했던 사람, 인간성 간의 계획된 듯 한 개연성, 바로 그것이다.

 

계획에 없던 특수절도를 저지르게 된 세 사람이 숨어든 곳은 이제는 폐가가 된 나미야 잡화점이다. 그들이 어린 시절 잡화점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장사보다 사람들 고민해결에 앞장서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어김없이 진심어린 답장을 해주던 그 곳. 그곳에서 시간과 공간이 초월되고 한 여름 낮 아스팔트 위의 뱀춤같은 아지랑이처럼 시간과 공간이 묘해지는 경험을 한다. 고민을 들어주고 답장을 써주던 할아버지는 이미 잡화점을 떠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곳을 찾아와 고민 편지를 던져 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특수절도 피의자이자, 백수들이자, 도망자들인 그들은 답장을 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p.167)

 

<한밤중에 하모니카를>의 가쓰로도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의 잡화점 아들 다카유키도 <묵도는 비틀스로>의 잡화점 손자 고스케도 <하늘위에서 기도를>의 길 잃은 강아지 호스티스 하루미도 정말 할아버지에게, 나미야 잡화점에 자신의 고민을 해결 받기 위해 고민 편지를 던져 넣는 것이 아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 나의 고민에 진지하게 반응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 사람이 감사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야. 우리한테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준 거야. 우리 같은 놈들한테, 쭉정이 백수인 우리한테…….” (p.444)

 

절도 피의자이자, 백수들이자, 도망자들인 아쓰야, 쇼타, 고헤이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던 가쓰로, 다카유키, 고스케, 하루미는 [나미야 잡화점]에서 [기적]이라는 고리로 한 데 연결 된다.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미야 잡화점으로 연결 된다. 그리고 또 한 곳. [환광원] 이라는 사회복지시설로 연결 된다. 그곳에서 생활했었던지, 그곳을 후원했었던지, 그곳에 대해 알고 있었던지 어떤 방식으로든 [환광원]으로 연결된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살아 온 배경, 시기, 방법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사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쓰야, 쇼타, 고헤이의 범행이 그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흘러가 그들은 나마야 잡화점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로 인해 가쓰로, 다카유키, 고스케, 하루미가 그들의 고민에 대한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나의 그 행동이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사람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음은 자명하다. 매일 매일 스트레스를 몇 배로 적립해 주는 저 직장 상사, 저 친구, 저 가족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멋있게 사직서를 집어 던지며 사무실 문을 쾅 닫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내가 손해 보지 않고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는 없다. 부모의 잔소리, 사이가 좋지 않는 형제와 사는 것 또한 내가 두부 자르듯 쉭 하고 잘라내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르게 상사와 친구와 가족을 쳐다봐야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물론, 그런 노력을 굳이 하기 싫거나 귀찮거나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사람은 지금처럼 사는 것이 백번 옳은 길이다. 하지만 [나미야 잡화점]을 통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적을 경험하고 싶다면 나를 제외 한 상대방을 보는 눈을 달리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세 친구의 답장에 많은 사람의 인생이 바뀐 것처럼 그래서 결국엔 그 세 친구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그들의 범죄에 대한 자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몇 날 몇 달을 ‘단 한번만 토요일 밤 9시 10분으로 가서 번호 6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해봤자 그런 것 들어줄 신은 없다.

차라리 내일 월요일 아침에 사무실·학교·학원·가게 등에서 만날 그 사람, 매일 오르내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그 사람, 매일 출·퇴근 신호대기한 차 양 옆으로 한 번씩 마주치는 그 운전자, 매일 함께 밥 먹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나와 기적을 나눌 사람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과 만들지 모를 기적을 꿈꾸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고 희망적인 기다림이 되지 않을 까 싶다.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크게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 이 사람도 자기 얘기를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거야.” (p.31)

 

대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내 얘기를 들어주는 그 사람이 있어 살아갈 맛이 나는 것처럼 나도 그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얘기를 내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힘듦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 사람과 내가 만들 기적의 첫 단추, 아니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멋진 기적을 함께 이루어 갈지도 모를 천 단추를 멋지게 끼운 것이다.

 

우리가 늘 하게 되는 착각, ‘누군가 날 도와줬으면, 내게 연락해 줬으면, 나를 찾아와 줬으면…….’ 라는 생각만 하다가는 기적은커녕 답장은커녕 고민한번 들어 봐주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해야 한다. 왠지 내가 지는 것 같고 자존심 상하는 것 같지만 내가 먼저 해야 한다.

나는 이 리뷰를 쓰기 전 오늘 오후 몇 개월째 틀어진 관계로 꺼림칙하던 그 사람과의 오해를 풀었다. 내가 먼저 사과했다. 늘 그 사람이 내게 먼저 잘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먼저 사과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화해하는 일이 없다고 호언했다. 어차피 평생 볼 사람도 아닌데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사과했더니 그 사람이 더 크게, 더 많이 사과했다. 몇 달 째 앙금이 한 방에 날아갔다.

오늘 만큼은 신이 네 단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시겠다. 해도 다음 주 토요일 밤 9시 10분으로 보내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밤 만큼은 그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축복을 신께 부탁하고 싶다. (부탁을 하자마자 다음 주 토요일 밤으로 데려가 달라는 소원을 빌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기적은 내가 먼저 시작하는 것이다.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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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 - 성장의 종말과 세계 경제의 미래
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노승영 옮김 / 부키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사실상 경제 전체가 영구적 성장이라는 불가능한 기대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폭발은 모든 것을 날려 버릴 터였다.” (p.35)

 

영원한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불가능하다. 자연적인 증가는 절대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식용으로 들여 온 베스와 블루길이 하천 생태계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천적이 없는 종은 급격한 개체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브레이크 없이 증가한 개체 수는 생태계의 교란을 가져왔다. 한창 베스와 블루길에 의한 하천 생태계 파괴를 염려하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던 적이 있었다.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나와 대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몇 년 안에 하천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될 것처럼 말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문제는 인간이 만든 구조다. 자연은 장구한 시간동안 그래왔듯이 변화와 충격에 가장 적절하고 알맞은 형태로 진화하며 적응해 왔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사명인 것처럼.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사람이 만든 구조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지구라는 행성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종 중 가장 막내임에도 모든 것을 한 순간에(지구와 생명 전체 나이에 비교하면)에 파괴하고 있다. 마치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고 주체인 것 마냥 지구와 다른 종을 소모했다.

불을 피우기 시작하고 농사를 짓고 문자를 만들고 왕을 세우고 전쟁을 하고 문명을 건설하면서부터 인간만이 최고인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것이 문제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는 지구와 자연, 다른 모든 종들과 함께 인간이 타고 있는 마지막 종착역에 관한 이야기다. 종착역이 가까워 왔는지, 이미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첨단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성장만이 가장 주요한 담론이었다. 더, 더, 더……. 파이를 크게 만드는 것만이 인류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유일한 길로 여겼다. 각 국가들은 경쟁했다. 경제력으로, 군사력으로. 전쟁을 하기도 하고 무역을 하기도 하고 침략을 하기도 하고 식민 지배를 받기도 했다. 자본이 모든 것이고 자본주의만이 마지막 해결책인 것처럼 모든 인간들이 떠들어 왔다. 하지만 뼈아프게도(뼈만 아프면 다행이다) 미국이 한순간에 넘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이제까지 들어왔던 높으신 고관대작들과 현명하신 경제학자들의 무한 성장론이 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리 알았다면 억울하지 않았을까?

 

 

“월스트리트 중개인들은 자신이 연봉 수백만 달러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한 일은 채무 시스템을 쥐어짜 찔끔찔끔 떨어지는 기름을 받아 챙긴 것뿐이다. 나쁜 짓에 두둑한 보상이 따르자 월스트리트 전체가 나쁜 짓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p.89)

 

월스트리트 아큐파이는 전 세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사실 월스트리트 아큐파이 이전에 월스트리트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미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맨해튼의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경제와 문명의 첨단을 상징하는 그 건물들과 멋지게 주식을 거래하는 월스트리트 중개인들의 걷어진 와이셔츠 속으로 보이는 굵은 팔뚝을 동경했다. 뭐, 어차피 지구 반대편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내 살림살이에 전혀 그들의 멋진 팔뚝이 미칠 영향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멋진 이미지 뒤에 도사린 탐욕을 알지 못했다. 서브프라임 모지기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들은 전 세계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배서니 맥린과 조 노세라가 공역한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를 읽어보면 그들의 추악하고 위험한 탐욕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예측되던 일이었고 월스트리트와 금융당국, 정부와 중앙은행 등이 함께 모른 척 하기로 한 대표적인 케이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마지막 해결책이라 일컬어지던 신자유주의는 종말하고 있다.

 

 

“자원 고갈, 환경 파괴, 구조적 금융·통화 실패” (p.30)

“화석 연료 고갈 ,물 부족, 식량 위기, 금속·광물 고갈, 기후변화, 대규모 환경 재앙”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와 같은 것들이다. 저자는 책에서 위에서 열거한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석유피크’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실이 이에 한 몫 했을 것이다.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석유피크’는 지나갔고 석유를 비롯한 다른 화석연료들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문명 발전과 경제 성장에 가장 큰 추동력이 되었던 화석연료의 종말은 지구의 종말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물 부족 문제. 이것은 기후변화·대규모 환경 재앙 문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부분인데 지구 담수층의 물 전체의 양이 급격하게 줄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기후변화에 둔다. 갈수록 지구전체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이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20년이 훌쩍 지난 얘기다. 2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문제가 해결되거나 뾰족한 대책이 마련되기는커녕 완전한 기후변화에 도달하고 있으니 절망적이다. 남극과 북극이 녹고 있고 비는 예전처럼 많이 오지 않는다. 농업과 공업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물은 필수적이다. 지구 표층에 물이 없어지니 담수층에 있는 물까지 퍼 올리게 된다. 점점 물은 줄어든다.

식량 위기, 금속·광물 고갈 또한 심각한 문제다.

수 년 전부터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유럽 국가들의 국가부도 위기는 남의 나라 일 같지 않다. 불과 십 여 년 전에 한국도 구제금융 체제에 들어갔었고 최소한 한국보다는 잘 살고 경제도 튼튼하리라 생각하던 유럽조차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유럽의 경제위기에 대해 일반적인 해석이 아니라 유로존과 그 유로존의 금융당국, 유로존 안에서도 앞서있는 몇몇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함께 맞물리며 발생한 문제라고 해석하는데 100% 동의했다.

결국, 미리 예방하고 최소한 그런 위기의 정도를 줄일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계가 존재한다. 증거는 분명하다. 우리는 한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고 어쩌면 이미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p.196)

 

증거가 분명했음에도 경제성장만이 해결책이라 떠들어 댔던 것처럼 분명한 증거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직 젊고 아이도 낳아야 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한계를 향해 가고 있고 어쩌면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이 유독 슬프게 들린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아닐까?

 

“화석연료 자원이 거의 없는 일본이 자원 공급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동중국해의 석유·가스 매장지를 놓고 다투느라 중국과의 영유권 분쟁이 격화될지도 모른다.” (p.266)

 

작년 말 갑자기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두고 갈등을 벌였다. 두 나라는 서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급기야 군사적 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세계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중국과 세계경제 3위의 일본이 조그만 동중국해의 섬들을 가지고 난리를 쳤다. 그곳에 엄청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중국도, 일본도 급한 것이다. 이미 한계에 부딪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서 군사적 충돌까지 각오하고 자원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국가를 믿을 수 있을까? 역사를 운운하며 자원 확보에 대한 야욕을 포장하는 국가를 믿을 수 있을까?

 

“세계 성인 인구 중 최상위 부유층 1퍼센트는 계속 부유해져 2000년에 전 세계 자산의 40퍼센트를 소유했으며 최상위 부유층 10퍼센트가 전 세계 총자산의 85퍼센트를 차지했다. 반면에 하위 50퍼센트는 전 세계 부의 고작 1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p.283)

 

국가는 결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뿐더러 어설프게 개입하다가 문제만 크게 만들 뿐이다. 세계 총자산의 85퍼센트를 최상위 부유층 10퍼센트가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최상위 부유층 10퍼센트에게 세금을 걷어 내 세계 부의 고작 1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하위 50퍼센트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지금 어디 국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국가가 있나?

암담한 일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한국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경제민주화’ 담론이 선거용 캠페인 정도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국가에 기댈 멍청한 국민은 없다. 정권교체 보다는 당장 떨어질지도 모를 내 강남 아파트 집값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기성세대가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돈 들여 만든 공익광고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모든 양육을 책임져 줄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을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 같은 국민은 없다.

다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말 그것뿐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해결을 해 줄 수 있을까?

 

“기업은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면서도 법적·도덕적 책임을 면제받는다.” (p.318)

 

요즘 한창인 테니스 메이저 대회 호주오픈을 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를 방해하는 기업로고가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KIA가 곳곳에 박혀 있다. 스폰서 중에서도 메인스폰서인 것 같다. TV화면에 가장 잘 노출되는 곳에 KIA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수십, 수백억에 달하는 후원을 할 텐데 말이다.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껍데기만 바꾼 차를 수백만 원씩 비싸게 받고 똑같은 차종이라 할지라도 수출용 차량은 성능이 월등하게 좋고, 조그마한 결함이 있을 때에는 신속하게 리콜을 하는 그들. 그러면서도 한국 선수 단 한명도 진출하지 못한 테니스 대회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는 까닭이 뭘까? 아무리 싸게 수출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일본과 독일의 자동차들을 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광고를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박지성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할 당시 엄청난 후원으로 논란이 된 한국타이어와 첼시를 후원하는 삼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느 한쪽으로부터는 무한한 착취를 가하고 모든 죄를 면제받는다. 결코 국민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미리 살펴 본 국가는 기업을 향해서는 무한 사랑이다. 규제, 세금, 공정거래 따위는 눈 가리고 아웅이다.

 

 

“전 세계 경제 담론을 바꿔야 한다. 성장의 종말에 어떻게 적응할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논의를 이끌어 내려면 우선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내야 한다. 자원 고갈과 파국적 환경 파괴를 비롯한 현 상황에서는 경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p.337)

 

국가, 기업, 유엔 등등이 따로 놀아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저자의 말대로 세계 경제 담론을 바꿔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떠들던 경제학자들은 자신의 판단착오를 반성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분명한 한계와 위험이 있음에도 입 다물었던 학자와 국가, 기업, 언론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러 있지 말고 함께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 추상적인 이런 제안이 가장 적절하고 빠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자원고갈과 파국적인 환경 파괴 외에 앞서 살펴 본 지구 전체적인 문제들은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가 발 벗고 나선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암담하고 때론 절망적이지만 자꾸만 끄집어내 공론화하고 얘기해야 한다. 더 이상 숨기고 감추고 축소하는 것으로 덮을 수 없다. 이미 성장의 한계가 분명하고 가시적인 지구적 문제들은 가득하다.

 

 

 

결국 로컬(Local)로!! 

 

“이웃과 손잡기, 공동체의 복원력 키우기, 공동안보클럽 만들기”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특히 재난영화나 외계인의 침공 같은 영화의 결말은 백이면 백 어떤 평범한 시민의 용감한 행위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또 저러고 있네~’ 일갈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비슷한 영화를 본다.

전 지구적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는 대책도 결국 별다르지 않다.

[이웃과 손잡기, 공동체의 복원력 키우기, 공동안보클럽 만들기] 각 주제에 대해 저자는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하고 실제로 로컬 공동체를 형성해 국가 단위의 경제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소개한다. 다소 맥 빠지는 당연한 결론에 조금 실망하던 찰나, 실제 사례들을 보니 공감이 가고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기기도 했다.

세계 경제 주체들이, 각 국가가, 공룡 기업들이 만루 홈런 한방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결국 우리들이 해결해야 한다. 마음 맞고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문명의 첨단 이전 공동체가 가졌던 힘을 복원하는 노력. 그것이 산적한 극한의 위험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를 대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다. 석유가 고갈되면 기존 운송 수단을 이용할 수 없기에 생활공간이 국지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역 단위에서 살아가고 소통해야 한다. 지금처럼 익명화 되고 파편화된 도시적 삶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탈석유 시대에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p.397)

 

맞는 말이다. 익명화 되고 파편화된 도시적 삶과 작별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귀농을 하거나 공동체를 만들어 산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현실적이지 않다.

현실적인 것은 당장 아파트 위층과 아래층에 사는 사람조차도 알지 못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쑥스럽지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리지 않아야 한다. 맨 꼭대기 층부터 내려오면서 아저씨 4명이 타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각 구석에 서서 얼굴은 휴대폰에 빠질 듯이 밀착되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506호다. 406호와 606호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갑자기 닥칠지 모를 전 지구적 위기로 대재앙이 닥친다면 나와 내 가족을 도울 수 있는 것은 국가도 기업도 멀리 떨어진 친척도 아니라 바로 내 옆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처럼 그렇게 갑자기 대재앙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오늘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는 무조건 먼저 인사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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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당 - 정치의 새로운 혁명
마르틴 호이즐러 지음, 장혜경 옮김 / 로도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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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민주당의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집단 멘붕에 빠졌다. 처음부터 불리한 판이었고 경기장, 심판, 관중마저 한쪽을 응원하는 경기였지만 그래도…….그래도…….작은 희망을 붙잡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멘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상실과 허탈과 분노가 더 이상 저장할 용량이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 어떤 노동자에게는 절망의 극치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목숨을 버렸다. 올 겨울 지독한 한파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은 더 움츠러들었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가장 큰 멘붕에 빠지고 가장 큰 상처를 입고 가장 큰 절망에 빠져야 할 사람들은 큰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민주당.

민주당은 선거 전에도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선거 후에도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책임 뒤집어씌우기에 혈안이 되었다. 자신들 국회의원을 위한 연금법은 쥐도 새도 모르게 통과시켰다. 과반은 아니지만 100석이 훨씬 넘는 의석을 맡겼는데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민주당 국회의원들에게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 싶다. 어차피 뱃지를 달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 「해적당」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작년에 인터넷에서 ‘해적당’에 대한 기사를 한 번 읽은 적이 있었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종일 교수의 「경제민주화가 희망이다」라는 책을 읽으며 87년 이후 정치적 한계에 대해 적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당구조가 얼마나 후진적이고 그 스펙트럼이 좁은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이 책 「해적당」을 읽으면서 그 생각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신하는 계기다 되었다.

왜 한국의 민주당이 저렇게까지 새누리당스러운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저렇게까지 의지가 없고 늙은 정당인지도.

 

“해적당은 이 두 집단, 즉 청년층과 실망한 투표 기피자들을 미래의 유권자로 끌어 모았다. 해적당에는 뭔가 새 출발의 분위기가 풍기기 때문이다.” (p.113)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열광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뭔가 새로운 출발의 분위기를 풍겼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다른 많은 정치전문가들의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것 가운데에서도 ‘새누리당, 민주당 둘 다 싫다. 안철수면 좋다.’ 라는 생각이 그렇게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열광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수십 년 동안 양당이 정권을 양분해 왔지만 나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갈등을 첨예화하는 구조로 표를 얻어 냈다. 일단 뱃지를 단 이후에는 철면피가 되어 누릴 수 있는 온갖 것을 다 누린다. 정권을 맡겨도 보고 교체를 해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젊은 층은 민주당은 더 싫어한다. 단지 민주당이 야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진보입네, 개혁·민주진영입네 하는 얘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난 민주정권 10년 동안 민주당이 어떻게 해왔는지 MB정권 5년 동안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책임했는지, 이번 대통령 선거기간 내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이제는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민주당은 더 싫어한다.

걸치고 있는 옷의 색깔만 다를 뿐 옷감, 디자인, 메이커, 가격은 새누리당의 그것과 똑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민주당을 싫어한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사실은 민주당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죄송하다며 석고대죄하거나 시장을 돌아다니는 쇼를 하기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당신들에게 속지 않는다.

이 책에 소개된 해적당은 한국 사람들이 한 순간에 안철수에게 열광한 것처럼 독일 베를린 시민들의 마음을 얻었다.

 

 

“공식적인 최종 결과 발표에 따르면 해적당은 8.9%의 득표율을 올렸고 이로써 의회에서 15석을 쟁취했다.” (p.8)

“독창적인 선거전, 선거자금 불과 5만 유로, 폭 넓은 인터넷 활동, 당찬 슬로건, 듬직한 젊은 후보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독특한 요구,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민주주의 확대를 외침으로써 해적당은 베를린 시민들에게서 12만 표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p.9)

 

정치적 선진국 중 선진국인 독일에서도 정치적 의식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인 베를린에서 이름조차 괴상한 해적당이 12만 표를 얻었다는 것은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뉴스가 되었다고 한다. 기사련과 사민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양당 구조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의 양당 구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꽤나 건강한 구조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좀 더 진보적인 사민당의 정책과 정당 활동에 만족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해적당을 만들었다. TV토론에 나와서 기존의 정치인들이 하지 못하는 유머를 하고 기존 정치인들이 입지 않는 옷을 입고 나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단순히 참신하고 새로운 젊은이들의 이미지만으로 선거에 임한 것이 아니라 유럽 내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주체가 주장했지만 현실 정치에 접목하지 못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직접 민주주의 확대’를 주요 공약으로 들고 나와서 최종적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다.

 

내가 더 놀란 것은 독일의 ‘녹색당’을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해적당의 급성장 성공스토리는 한창 잘 나갈 때의 녹색당의 성장을 압도한다.” (p.11)

“1979년 녹색당이 처음으로 브레멘 주 의회로 입성했던 때 모두들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녹색당은 외무장관까지 배출했다. 그날 이후 독일엔 젊은 층의 목소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p.109)

 

앞서도 말한 바 있듯이 독일은 기사련과 사민당이 주도하는 양당 구조이지만 군소정당이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은 정치 선진국이다. 극우정당부터 극좌정당까지 한 테두리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도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지던 ‘녹색당’을 ‘해적당’이 넘어섰다는 것이 놀라웠다. 독일 내에서도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치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젊은이들에게 정치의식을 고취시킨 것이 ‘녹색당’이기 때문이다. 책에서의 소개대로 외무장관까지 배출한 ‘녹색당’이었지만 그들 또한 사민당과의 연정을 통해 좀 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세력의 표를 잃게 된 것이었다.

참 부러운 현실이었다.

한국의 젊은 층은 터질 것 같은 열망과 분노와 참여의지를 도대체 어디로 쏟아내야 하는지 찾을 곳이 없는데 적어도 독일은 선택의 여지가 많았다. 그것도 한국처럼 구조는 양당구조이지만 실제로는 일당구조인 후진적인 정치구조가 아니라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의 정치적 테두리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선진적이라 생각되었다.

진보정치 집단 자체가 궤멸된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녹색당’조차 눌러버린 새로운 진보·개혁적 정당인 ‘해적당’의 출현은 한 없이 부럽다.

 

 

“단지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활용하는 수준이 아니다. 이들에게 인터넷은 정치적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플랫폼이다. 이들은 그래서 당원들이 인터넷상에서 민주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p.165)

 

한국에서도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팟캐스트 방송이 생기고 기존 정치권에서도 무시 못 할 힘을 가지기도 했다.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공정보도가 실종된 기존의 뉴스는 보지도 듣지도 않게 되었다. SNS를 통한 정치의식 고취와 투표독려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이상을 해내지 못한 것이 한계였던 것 같다. 아무도 들려주지 않은 진실한 목소리를 들으며 쾌감을 얻기도 하고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믿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것 같다. SNS만 보면 대선 결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에 매몰되었다. 독일의 ‘해적당’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했어야 했다. 물론, 독일과 달리 한국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있지만 팟캐스트 방송으로 쏠린 젊은 층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실제로 상에 올려 요긴하게 사용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아무리 예쁘게 만들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쓰이지 못하면 그릇은 그릇이 아니다.

 

 

“해적당의 핵심은 정치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에서 내용적으로 무언가를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p.71)

“저의 비전은 정당이 있기는 하되 더 이상 정치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저의 비전은 모두가 쉬지 않고 자신의 제안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시민의 플랫폼입니다.” (p.79)

 

실제로 베를린 시의원이 된 해적당의 당원들 중 20대와 30대가 많다고 한다. 이들은 기존의 정당 구조를 뛰어넘는 시도를 했다. 기존의 정당들이 하지 않은 시도를 한 것이다. 끊임없이 내부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며 주요 결정들은 당원 전체가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주의’를 이미 경험하는 등 플랫폼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다. 사민당과 녹색당에 입당 해 기존 정치인과는 다른 정치인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해적당’ 만이 할 수 있는 정치를 시도한 것이다. 언제나, 누구든, 어떤 제안이건 인터넷을 통해 당과 대화하고 소통했다.

 

놀라웠다. 부러웠다.

한국의 정치 현실이 참담했다.

 

앞으로의 5년, 10년이 더 걱정이 된다. 민주당은 차라리 새누리당과 합당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지금 이대로 선거철만 되면 새누리당과 다른 척 하는 것은 이제 아무도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고 무뇌적인 당신들의 모습에 더 이상 표를 던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새누리당과 합당해 원래 옷을 입는 편이 낫다.

그리고 독일의 ‘해적당’과 같은 정당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한국 정당정치가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진보정당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지 오래다. 지난 민주정권 10년과 MB정권 5년, 이번 대선을 통해 정치를 맛본 젊은이들이 ‘해적당’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을 장착한 정당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또 다시 안철수든, 박원순이든 누구 한 사람에게 기대는 정치가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고 세력이 되는 정치. 이 책에 등장하는 ‘해적당’과 같은 꿈과 같은 정당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정치가들은 민중의 언어를 잊어 버렸거나 그 언어를 사용할 의지를 잃어 버렸다. 수백만 기층 민중의 요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라!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한테 물어라! 우리를 참여시켜라!” (p.40)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밖에 없고 그들을 무서워하고 선거철뿐만 아니라 늘 그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세력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에게 물어보며 우리를 참여시키는 정치 구조가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도 이뤄지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그런 새로운 정치세력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른 민심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냥 땅에 쏟아졌으니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땅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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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사람들에게 -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
스테판 에셀 지음, 유영미 옮김 / 뜨인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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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가까운 세월을 산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다. 고작 30년하고 몇 년을 더 산 내게도 삶은 결코 간단하거나 쉬운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00년 가까운 세월을 편하게 누리며 산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싸우고 무언가 바꾸기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 100세가 가까워가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젊은이들을 향해 “분노하라.”라고 말하는 노인은 그것만으로 칭송과 존경을 받아야 한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은 스테판 에셀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2011년 그의 책 「분노하라」가 한국에서도 꽤 많은 이들이 읽은 책이 되었고 ‘올해의 책’에도 선정되었었다.

무엇보다 표류하고 있는 민심을 향해 ‘~하라.’라는 적극적인 권유를 하는 책이나 사람이 없었다. 분명히 지금 현실은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누구하나 어떻게 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던 때 스테판 에셀의 얇은 책은 타는 듯 한 갈증과 목마름을 조금이나마 가시게 해주는 청량제가 되었다.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속에 있는 것을 쏟아내라.’

 

이제는「분노한 사람들에게」다.

불일 듯 일어난 분노를 어디로, 어떻게, 언제 분출해야 하는지를 말해줄 것만 같았다.

 

“지구상의 분노한 친구들에게 이제 우리가 모두 함께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길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p.59)

 

100살에 가까운 노인이 전 세계를 향해 소리친다. 행복해 한다. 아직 희망이 있음을……. 아직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변화는 서로 연대하는 것을 통해 가능합니다. 특히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고 또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젊은이들이 뭉쳐야만 가능해요. 젊은이들이 정부와 금융 권력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안 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의식해야 합니다.” (p.129)

 

사실 한국의 대학생만큼 독립적이지 못한 대학생은 전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커녕 대학은 이제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불과하고 MT, 동아리 활동, 소개팅 따위는 배부른 소리가 되었다. 1학년 때부터 도서관과 열람실 구석에 틀어 박혀 스팩을 쌓는 공부를 시작한다. 살인적인 등록금은 대학의 청춘, 로망 따위는 아주 먼 옛날 선배들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부모 잘 만난 학생은 등록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공부하고 여행 다니면서 여전히 그 학생의 부모처럼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치열하고 고달픈 알바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대학은 취직을 위한 예비학원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내가 대학시절 활동했던 동아리는 당시만 해도 규모가 컸다. 전체 회원이 200명 되었다. 얼마 전 후배들에게 들었더니 작년에는 60명 정도였다고 했다. 대학생들은 학교, 도서관, 알바,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고 대학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대학 생활 내내 온몸으로 그것에 억눌려 살아간다.

그런 한국의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에게 투표도 안 하는 개념 없는 것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의식 없는 것들. 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이 사회가 젊은이들, 대학생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여전히 하루하루 삶의 문제에 천착된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일군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보다는 당장 정권이 바뀌면 내 아파트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한 선택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젊은이들, 대학생들이 엄청난 열기로 투표를 했지만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돌려주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스테판 에셀의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젊은이들이 뭉쳐서 뭘 할 수 있다는 말인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 내에서 동아리, 학회 활동조차 점점 축소되고 없어지고 있는 판국에 젊은이들, 대학생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더욱 서글프다.

 

“젊은이들이 점령시위를 하는 건 좋고 필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나중에 정당으로 들어가 정부에 더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하고 참여할 의지와 에너지가 있는 젊은이들을 키워, 국회와 정부와 국제조직과 유엔 등의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내야죠.” (p.55)

“이 땅의 분노한 자들에게 주는 나의 메시지는 분노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책임 있는 자세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p.159)

 

점령시위? 정당입당? 유엔?

나는 운동권의 위세가 끄트머리에 있던 90년대 말 대학에 입학했다. 잠시지만 실제로 운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아무리 목 놓아 외쳐도 나와 주지 않았다. 십 여 년이 흘렀다. 대학 내 운동권은 예전의 위용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더 이상 참여시키지 못하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다. 그냥 친목 모임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당장 대학 내에서 정치적 시위를 갖는다고 하면 몇 명이나 참석할까?

정당에 대한 입당은 더군다나 한국의 현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정치에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무관심한 젊은이들에게 정당 입당을 권유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이것도 더 중요한 것은 구조의 문제인데 분노하라고 해서 분노한 그 열망과 에너지를 담아낼 수 있는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혼자 책 읽고 혼자 열 받아서 소리 지르고 글을 쓰기도 하고 친구 몇과 의기투합하기도 하지만 그 이후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구조가 없다. 바짝 말라 아궁이 전체를 순식간에 데울 장작이 되었는데 불쏘시개가 없다. 제때에 타지 못하면 금세 비에 젖어버린다.

스테판 에셀은 ‘책임 있는 자세로 참여하라.’고 말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책임 있는 자세로 참여하라……. 나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주위의 동생들에게, 대학생들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어디에 참여해야 하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는데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분노는 첫 단계다.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하진 않다. 다르게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지가 필요하다!” (p.99)

 

새로운 생각,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지가 아직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을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한참 타고 있는 모닥불에 엄청난 양의 차가운 물을 부으면 불을 금방 꺼진다. 그리고 불길이 잡히면서 연기가 난다. 아직도 연기로 자욱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에 경황이 없다.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과 대학생들 또한 그럴 것이다.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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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가 희망이다 - 손석춘 묻고 경제학자 유종일이 답하다 이슈북 6
유종일.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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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쉽게 되지는 않겠죠. 적어도 25년쯤은 걸리지 않을까.” (p.19)

 

「경제민주화가 희망이다」를 제목으로 하는 책에서 하는 말이다. 경제민주화가 희망인데 적어도 25년쯤 걸리다니……. 그 동안은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책의 저자 유종일씨는 이름이 많이 알려진 경제학자이다. 국가기관이나 연구소 재벌에서 운영하는 경제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 이전부터 경제민주화를 주장해 왔고 지난 18대 대선에서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화두로 들고 나온 경제민주화를 주구장창 외쳐왔던 학자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잠시 경제정책을 세우는 데에도 일조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지난 재보궐 선거와 총선 때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공천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민주당은 그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야인으로 살고 있는 정치 후보생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동안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외쳐오고 정책을 만들기도 한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적어도 25년 쯤 걸린다니 뭔 소린지 궁금할 것이다.

25년이 수치적으로 정확한 기간을 예상한 것이 아니고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경제민주화 자체가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개발독재세력과 이에 맞선 반독재 민주세력 사이의 투쟁의 산물이었거든요, 정치제도가 승자독식 제도고요. 그러다 보니 사회 경제적 약자 등 다양한 집단의 관심과 이해를 반영하기 보다는 여야가 지역주의를 이용해서 기득권을 구축하고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이 정치의 틀이 되고 말았어요." (p.120∼121)

 

나는 한국 정치의 현실과 속살을 이처럼 일목요연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명쾌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 작은 책을 읽고 나서 왜 87년 세대가 이번 대선에서 그런 투표를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평론가, 전문가들이 나와서 말을 쏟아냈지만 단 한명에게서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작은 책에서 야인으로 살고 있는 유종일이라는 경제학자를 통해서 해답을 얻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 책 「경제민주화가 희망이다」는 알마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이슈북]중 번호가 06이다. 몇 권이 더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알찬 내용임은 분명한 것 같다. 페이지는 두껍지 않지만 굵직하다.

유종일 교수의 말대로 결국 ‘그들만의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극도로 비이성적이고 주술적인 심리의 장(場)이 되어버리는 대선판에서 결국 이번에도 ‘그들만의 싸움’이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이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온갖 아양과 입마른 칭찬으로 애면글면 비위를 맞추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들만의 리그였다.’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이런 제도는 승자독식 제도잖아요. 그러다 보니 정치라는 게 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권력싸움 위주의 정치가 된 거고 생산적인 정치, 정책을 만들어내고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는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죠.” (p.20)

 

87년 이후 같은 형태와 구조로 한국의 정치는 이어져 왔다. 25년의 기간 동안 한국 정치가 발전했는지 정체했는지 후퇴했는지는 각자가 생각해 볼 몫이다. 분명한 것은 물리적 형태로 87년 체제가 여전히 유효하고 그것이 정치판 전체를 움직이는 구조라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며 직선제와 소선거구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정치구조 혁신안이 제기되기는 했으나 어차피 여당이든 야당이든 87년 체제 하에서 국회의원 뱃지 달고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자신에게 뱃지를 달아준 체제와 구조를 혁신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던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유종일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의 정치는 승자가 모두 독식하는 구조다. [The winner takes it all - 이긴 자가 다 갖는다] [The loser standing small-진 자는 찌그러져 있을 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표를 던진 48%의 표심은 그냥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표면적으로는 여당이 승리했다. 점유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득표수는 오히려 야당이 많았다. 이것이 87년 체제의 폐해요 한계다.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정치적 민주화가 몇 년 사이 많이 후퇴한 것이 자명한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어떨지 더욱 걱정이 된다. 이대로 양당 구조로만 선거를 계속해서 치러야 하는 것인지, 진보 정당은 이미 엎어진 상태이고 아무리 좋은 후보가 나와도 양당 구조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이 구조를 바꿔야 하다고 말한다.

 

경제민주화라는 것 또한 구조적인 문제가 선행되지 않는 한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조적인 문제. 단순히 대통령 한 사람이 “오늘부터 경제민주화를 할 테니 이렇게 이렇게 합시다!” 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정치민주화도 87년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자리 잡혀 있지 않는 마당이니 경제민주화의 전문가가 “경제민주화를 하려면 적어도 25년이 걸린다.”라고 한 말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정치권에서 새로운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서 양당에서 지지고 볶고 왔다갔다 권력 랠리가 계속 반복된다면 ‘어차피 선거 끝나면 말짱 꽝이야~~, 선거 때나 굽신거리면 돼~~, 어차피 나는 뱃지 달고 있는데 뭐’ 정치인들은 이런 생각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선거에서 졌지만 진 쪽을 지지한 48%의 표심을 받아들여 생산적이고 정책을 만들고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는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벌, 부자들 세금 더 내게 하고 비정규직 일자리 조금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구조적인 전환을 주장한다.


“아주 포괄적인 개념이고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경제민주화를 자본주의를 하지 말자는 것, 넘어서자는 것이라고 봅니다.” (p.36)

 

자본주의를 하지 말자는 것??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본주의가 모든 것의 해결책이고 빨간약인 양 생각해 왔다. 아니, 그렇게 배워왔고 들어왔고 인식해 왔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하지 않으면 뭘 하자는 말이지?

유종일 교수는 자본주의는 자본이 주인이 되는 경제체제라고 말한다. 국가경제 자체가 자본이 주인이 되는 것.

경제민주화를 하려면 주체가 국민이 되어야 하고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00년 넘게 군림해 온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신자유주의의 실패로 멘붕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본다. 더 잘 살고 더 성장하고 더 발전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얘기.

한국의 경제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전체 역사의 중요한 샘플일 것이다. 전형적으로 국가주도적 성장을 이데올로기로 삼고 재벌에게 무한한 특혜를 던져 공룡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공룡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판이다.

삼성! 삼성! 백날 욕을 해도 자식이 삼성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한국 사람들의 심리도 이러한 체제에서 형성된 것이리라.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하는 곳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를 하지 말자고?

 


“제가 강조하는 참여경제 중에 노동자 경영참여, 구체적으로 저는 종업원 대표에게 이사 추천권을 주는 방안을 제시.” (p.57)

“구글, 종업원 소유주가 외부투자자보다 10배 많은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주식에 의결권 가중치는 부여. 고어텍스 종업원주식소유제에 의해서 종업원들이 주식의 과반수를 소유하고 있어. 뉴질랜드 세계 1위 유제품 수출업체 폰테라, 키위 수출업체 제스피리도 출자지분 100퍼센트를 농민이 갖고 있는 협동조합 기업. 이탈리아에서 제일 잘사는 지역인 볼로냐 시의 경우 협동조합 경제비중이 45퍼센트. 캐나다의 퀘벡 주 30퍼센트.” (p.53∼54)

 

실제로 유종일 교수의 주장대로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기업의 소유를 오너 1인이 독식하지 않는 글로벌 기업이 많단다. 나는 몰랐다. 얘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고 뉴스에서는 애플 제품만 까고 그러니까 알 수가 없었다.

노동자 경영참여와 더불어 협동조합에 대한 아이디어도 신선했다. 생산자와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이 되어 비슷한 정도의 가중치로 지분을 나눠 갖고 있는 형태.

큰 기업이 아니면 잘 안 될 것처럼 지레 짐작하여 겁을 먹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신선하면서도 걱정되는 경제 형태이다. 새로운 것을 마주하면 도전하고 감행해보기 보다 이리저리 재보는 것을 먼저 하는 한국사람들에게 유종일 교수의 대안이 언제쯤 먹혀 들어갈지 솔직히 비관적이다.

더군다나 삼성의 서슬은 날이 갈수록 시퍼렇게 날 세워져 가는데 말이다.

 


“경제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p.131)

 

그래서 저자는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한다. 경제민주화는 결코 한판의 승부가 아니라고! 과정은 긴 호흡으로 준비하고 계획하고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판은 한 번에 엎어야 한다. 어차피 구조가 엎어지지 않는 한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한다.

외국의 경우도 단 한 번의 과정으로 경제민주화를 정착해 나간 경우는 없을 것이다. 준비하고 무엇보다 외국의 사례를 국민들이 좀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 또한 비관적이다. 현재 언론의 모양새가 엉망이니 말이다.

 


“고용안정성이 있으면 ‘덜 받더라도 일하겠다’고 할 거고, 고용안전성이 없으면 ‘더 줘야 일할 수 있어!’라고 하는 게 너무 당연하죠. 그런데 우리 시장은 구조가 잘못 되어 있으니, 거꾸로 제도를 통해서 시장을 개혁해나가자는 겁니다.”

덴마크에서는 비정규직의 경우 급여와 휴가비, 복지비 등은 정규직과 똑같이 받고, 추가로 비정규직에게만 주는 15퍼센트 상당의 보상금과 주말과 국경일 휴가비 3.5퍼센트를 더 받게 되어 있습니다. (p.60)

 

덴마크에서 실제로 정책으로 실시되고 있는 비정규직 처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구구절절 옳은 정책이다. 고용안정성이 있으면 좀 덜 받더라도 일하고 고용안정성이 없으면 더 줘야 일한다는 생각.

그런데 이것도 한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워낙 칼바람 부는 곳이라서.

 

유종일 교수는 경제적 담론. 특히 경제민주화라는 담론이 단순히 선거철에 홍보용, 표심잡기용으로만 쓰이다 선거가 끝나면 바로 내동댕이쳐지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나 재벌의 경제연구소, 국가에서 운영하는 경제기관 등에서 말하는 경제지표와 전망 경제민주화에 대한 담론이 전부가 아님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새로운 진보적 경제연구기관을 설립하고자 한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는데 어느 정도 일이 진행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경제민주화’라는 것이 잘 사는 북유럽 복지국가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는 나팔수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각종 세금이 오르고 대형마트에 갈 때마다 뭐 산 것도 없는 것 같은데 4,5만원이 나오는 물가폭탄 속에서 사는 한국 사람들 정말 피곤하고 괴롭다.

새로 뽑힌 대통령이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부르짖던 경제민주화를 위해 어떤 정책을 만들고 의견을 수렴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유종일 교수 같은 사람들이 만든 경제기관이나 연구소에서 정확한 국가 경제 상태나 제대로 알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빠른 일인 듯싶기도 하다.

 

이젠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운영하는 시대가 하루속히 오기를 고대해 본다.

2138년에도 [경제민주화]는커녕 지금보다 더 팍팍해져 있는 사회라면 배명훈의 소설 「총통각하」에 등장하는 ‘동면하는 남편’처럼 차라리 나도 동면이나 해버릴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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