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땐 니체 땐 시리즈
발타자르 토마스 지음, 김부용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니체를 읽는 것이 여전히 내게는 고역이다. 폼 잡느라 읽지도 않을 두꺼운 철학책을 들고 다니던 대학 시절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고르기도 했던 친구들과 내게 니체는 로망이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 하나에 압도 되었다. 당시 제대로 된 신앙관이 정립되기 전이었고 한국 교회에 대한 치부를 낱낱이 경험하던 때인지라 니체의 멋들어진 표현에 빠져 들었다. 일부러 니체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열람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란 듯이 내 자리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니체의 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많은 입문서가 있었지만 무슨 객기였는지 ‘입문서 따위를 읽을 바에야 아예 읽지 않겠다.’ 라는 생각에 일부러 두꺼운 책만 골라 샀다. 적어도 책의 목차 까지는 목에 잔뜩 힘을 얹은 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목차까지가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독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특정 출판사의 번역서는 도무지 이걸 번역이라 봐야 할지 또 다른 창작이라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뒤죽박죽 이었다. 무엇보다 내용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신은 죽었다”라는 임팩트 있는 문장만 발췌된 문고용 책을 찾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해서 겨우 교양 몇 과목 듣고 운 좋게 좋은 책을 소개 받아 몇 권 읽은 것이 전부인데 뭘 얼마나 알고 있으며, 뭘 얼마나 더 알고 싶다고 니체를 읽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네 조기 축구에서도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는 오합지졸 팀이 느닷없이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에 도전장을 내민 경우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처음 니체를 읽었던 십 여 년 전의 기억이 워낙 강했던 탓인지 이후로 니체를 전혀 읽지 않았다. 대학 이후에는 철학서를 거의 읽지 않았던 독서 편식 습관도 한몫했다. 일단 이해가 잘 안 되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니체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우울할 땐 니체」라는 책 제목이 재미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용기 있는 제목을 정할 수 있었는지 아리송했다. ‘우울할 때 니체를 읽으라니.. 제 정신 인가?’

혹시나 하는 내 기대는 역시나 단번에 깨졌다. 나는 이 책을 절대로 우울할 때는 읽지 않기로 했다. 저자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니체를 소개해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내게는 십 여 년 전 그 니체와 단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니체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며 다가설 수 없었다.

 


“변화를 거쳐 도달할 어떤 목적이 없음을 아는 것, 그리고 개인이 완전히 영속하도록 허용하는 위대한 통합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라는 두 진리가 주어지면 이 변화의 세계를 환상이라고 총체적으로 비난하고 참된 세계인 이 세계 너머에 있을 세계를 고안하는 것만이 핑계거리로 남을 뿐이다.” (「유고(1887-1888)」, 11[99])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20여 번을 반복해서 읽고 생각하고 읽고 생각했다. 철학을 하는 학자들은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보다 더 대중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고 믿는데, 니체가 이런 글을 쓰던 당시만 해도 사실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좀 더 어렵게 말하고 한 번 꽈야 하는 것을 두세 번 꼬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학문이 교조적으로 치우친 탓도 있겠지만 뭐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니체의 글은 어렵다. 니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정말 궁금했다. 특히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 중 니체를 연구한 사람들에게 니체의 이런 난해하고 무의미한 것 같은 문장이 어떤지 정말 궁금했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도 어느 날 갑자기 산책을 하다가 문득 꽝 하고 깨달은 후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색과 연구 공부와 훈련을 통해 깨닫거나 알게 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나와 같이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거나 전공을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거나 어려워서 일부러 멀리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 또한 니체의 원서를 읽는 것처럼 어렵고 난해하며 힘들다.

 


“우리는 덧없는 작은 기쁨, 일상적이고 가까이 있는 것, 지금까지 제기되었다가 결실 없이 대체된 갖가지 형이상학적 질문 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들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p.20)

“하늘로 오를 것 같은 환희를 체험하고 싶다면 또한 죽을 것 같은 슬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68)

“우리가 참아내지 못하는 것과 씨름하고 그것을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만드느라 기진맥진해지는 대신에 단순히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원한과 증오의 원인이 될 만한 것과 거리 두기, 교묘한 검열, 공격을 살짝 피하는 기술, 이것이 거리 두기의 윤리, 기품 있는 귀족 윤리의 토대다.” (p.169)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몇 개의 문장이다.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최소한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우리는 인간의 심오한 욕구인 영원성에 대한 욕구를 기독교가 어떻게 변질시켰는지를 안다. 먼저 니체는 영원한 삶을 우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을 심화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에 대한 대속으로 본다. 기독교인이 사후에 최고의 삶을 희망하는 것은 삶에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고통에 초대 되어 마침내 영원성을 향한 보장을 얻는다. 차안의 모든 쾌락은 피안의 모든 쾌락에 입각한 가설적인 것이다.” (p.288)

 

이 문장에 대해서는 이제는 비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 안에서 말과 글이 정리되지 않아 서평에 옮길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많고 쓰고 싶은 글은 많은 데 정돈 시킬 수 없었다.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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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짧고도 긴 시간이었군요.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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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흔히 말하는 이념으로 나를 분석하면 나는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일까? 사회민주주의자, 온건적 진보주의자, 급진적 민족주의자, 중도 보수주의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만큼 이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고 수렁에 빠지고 빠트리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가 있을까 싶다. 누구 말대로 미국의 텍사스주 보다 작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분열되어 있고 나뉘어져 있는 경우는 아무 없을 것이다. 외국의 정치학 논문에서 대상으로 한다면 학위는 당연히 받을 만한 특수한 상황이다. 지역 간 분열을 물론이고 세대 간 분열도 최근 아주 극심해졌다. 거기에 더해서 같은 세대 속에서도 분열이 조장 되고 상호 비방이 일상화 된 사회다. 경제 규모자체는 10위권에 속해 있다고 늘 자랑스레 얘기하지만 세부적인 수치를 따져보고 경제 규모에 대한 수치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수치에서는 OECD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국가다. 자살률은 단연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모든 국가를 포함하더라도 공부를 많이 시키고 부모들의 교육열이 심각할 정도로 큰 곳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바로 또 공부를 시작한다. 대학에서 누려야 할 청춘의 맛은 취업 준비를 위한 공부로 뒤덮인다.

내가 살고 있는 국가는 어떤 곳일까? 아무리 책을 읽고 고민을 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뚜렷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어차피 내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안을 마주할 때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가장 공정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인 나는 한국에 대해서 아주 객관적으로 불 수 있을 가능성은 작다. 그래서 박노자 교수의 논리와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이미 귀화해 한국 사람이 된 박노자 교수이지만 그가 가진 외모만큼 그의 생각은 나와 같은 날 때부터 한국인의 그것과는 다를 가능성이 크다. 박노자 교수의 전작을 대학 때 읽으며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최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가감 없는 속살을 시원스레 폭로하는 그의 주장에 낯설기도 했다. 우리네 일상과 현실이 워낙 짜증나고 힘들고 비상식적이어서 ‘혹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도 문제가 많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곳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귀화를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푸른 눈을 가졌는데 뭐 한국 비판하는 거 들을 필요 있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산이다. 박노자는 노르웨이도, 스웨덴도, 핀란드도 한국과 똑같이 비판한다. 그래서 진보입네 흉내 내지만 내용 없는 이야기 늘어놓는 국내 지식인들의 허울 보다는 훨씬 낫다.

 

 

이 책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국가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국가폭력……. 어린 시절부터 반공교육을 받아 온 나의 세대와 그 이전 세대들에게 국가는 신성한 존재였다. 매일 국기게양식을 지켜봐야 했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야 했고 국민교육헌장을 무슨 가훈 외듯 외워야 했다. 국가가 있어 내가 있고 국가는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고 나를 보호해주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그런 국가를 제대로 알아 가면 갈수록 국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줄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갖는 괴물과 같은 힘이 너무 컸다. 비정상적으로 수립되고 구성되었으며 전개된 독재 권력과 군사정권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거지로 국가지상주의 라는 괴물을 낳고 키웠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간판을 내걸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고 정치적 상식을 이루어 냈지만 국가는 도구로 사용되기만 했다. 어린 시절을 지나며 교육을 받고 국가에 대한 진실을 체득하면서 자연스레 국가를 인식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고 세뇌하는 것이 구조화되다 보니 정권이 바뀌고 정치적 자유화를 이루어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개혁 정권 10년을 겪으며 많은 것을 바꿔보려 했지만 지난 5년 만에 20∼30년 뒤로 완전히 후퇴해 버렸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는 그렇게 쉽게 바뀌고 언제든 정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낱낱이 보여 주었다.

 

 

“국가폭력의 주된 표적, ‘열등한 타자’” (p.44)

 

박노자 교수는 참 아프지만 정확하게 지적 한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국가폭력의 주된 표적은 ‘열등한 타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리 변명해보려 해도 저 말이 맞다. 책에서도 소대된 사례 용산참사는 이것의 전형을 보여 준다. 밀려나고 밀려나다가 망루에까지 오른 철거민들은 이 사회가, 한국이라는 국가가 ‘열등한 타자’로 규정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공장 옥상에서 살육하듯 진압한 장면도, 각종 시위에서 등장하는 공권력의 진압 장면도 국가가 규정한 ‘열등한 타자’에 대한 표적 폭력이다. 대의고 명분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한국의 역사를 통해 ‘열등한 타자’는 늘 폭력을 당해 왔다. 늘 구차한 변명을 따라 왔다. 국가를 위한 길이다. 국가를 위한 길…….

 

 

“국가의 실체와 함께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폭력이 여태까지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 되어 왔는가 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p.14)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박종철이나 이한열 등의 열사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시적 정치성이 부족한 국살은 대체로 대중에게 망각되고 피해자의 유족에게만 기억된다.” (p.27)

 

나는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정하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는다.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할지도 모르겠다.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가시적 정치성이 강한 국살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들고 일어났다. 얘기만 들어 왔던 민주화 투쟁이 아니더라도 몇 년 전 쇠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시위만 돌이켜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국가폭력에 의한 항거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숙고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시적인 정치적 국살이 없어서 대중은 국가폭력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한국이라는 국가를 움직이는 기득권이 노리는 오래전부터의 야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되고 허망하게 망하면서 사람들에게 남긴 건 단 하나, 돈이 최고다. 라는 인식이다. 그 최고의 가치인 돈을 위해서는 좋은 직장,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그렇다면 청춘을 논하고 캠퍼스 운운하는 대학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대학은 직장예비학교로 전락했고 대학에서 배우던 조직과 사회, 공동체 생활은 멸절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느새 기성세대로 불리게 된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저지른 많은 범죄 중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국가의 힘에 의한 민간인 사찰 건은 사람들에게 환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당연히 잘못된 일이고 언제 어느 때 나도 국가로부터 사찰을 당할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일인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국민들은 점점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혐오를 넘어 무관심에 이르게 하는 것이 기득권의 목표였다면 그들은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했다. 요즘 들어 최고의 현안인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NLL로 물 타기 해버린 저들의 계략 또한 넓은 범주에서 보면 국가폭력과 다름없다. 이미 정권의 하수인이 된 언론은 그 국가폭력을 대행하는 용병이다. 예전처럼 최루탄을 쏘고 고문을 가하는 것만이 국가폭력은 아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 같은 ‘하찮은’ 이야기보다 ‘거대’ 전국 정치판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린다. 국가에 대해 도대체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기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p.11)

 

국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관심이 없다. 또한 건국 이후 ‘하찮은’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가 성공한 역사가 없다. 산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던 사람들이 변절해서 기득권 끄트머리에 들러붙는 꼴을 반복적으로 경험해 온 한국의 국민들은 비현실적인 기대조차 없다. 그저 ‘우리당 사람 뽑아줘야지’ 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정치적 후진국의 영예를 벗을 수 없는 것이다.

 

 

“한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일본의 ‘일억옥쇄(一億玉碎)’의 집단 광풍 등을 ‘후발 발전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보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p.117)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주장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리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특수성을 이해하면 오히려 편하다. 덧붙여 수십 년 동안 동일한 패턴으로 인식화 되다 보니 오히려 국가가 의도한 대로 사는 것이 편한 것이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고 그렇게 당했는데도 ‘아이고 불쌍해서 우짜노~ 뽑아 줘야지~~’라는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국가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을 의도했다.

 

 

박노자 교수는 여기에 더해 국가폭력이 가장 극적으로 사용되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철저하게 불평등하고 이러한 불평등이 세습화된 한국 사회는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는 생각에 매달리며 이를 위안으로 삼는다. 좌우간 전 사회군사화의 산물이든 사회적 불평등 희생자들의 기만적 자기위안이든 의무로서의 병역에 대한 인식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p.221)

 

지난 2002년 대선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엄청난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대선 후보가 되었지만 그 이전 몇 년간 대세론의 파도를 타던 사람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였다. 아무리 당시 민주당 경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기가 상당했다고하더라도 이회창과 한나라당을 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이회창의 여러 가지 스캔들이 터졌다. 그중에서도 아들의 병역면제가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의 아들이 몸무게 미달로 병역을 면제했다는 사유는 대구에 사는 개도 믿지 않을 코미디다. 박근혜만큼 당시 이회창의 대세론은 막강하고 단단했다. 그런데 아들 병역문제로 한 방에 날아갔다. 박노자 교수의 적나라한 분석대로 철저하게 불평등이 세습화되고 공고화된 한국 사람들에게는 ‘병역’만큼은 저들과 내가 똑같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남의 병역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고 혹시나 병역에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도 단번에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의 병역에 대한 집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국가폭력의 실행조직이 일상화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장에서 ‘우리’의 단결을 높이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남’에 대한 끔찍한 잔혹 행위다.” (p.80)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은 죽음의 장소이다. 적을 향해 총구를 지향하고 포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폭력이 가장 극적이고 적극적으로 이행되는 장소이다. 전쟁으로 인해 그간 무디어진 애국의 날을 세울 수 있다. 20세기 초 두 번의 끔찍했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류는 국가폭력의 잔혹성을 그래도 맛보았다. 한국인들은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비극적인 국가 간 폭력의 결과는 참혹했다. 아직도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이유를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서 분석한다.

 

 

“전쟁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전쟁 없는 자본주의라고? 수류탄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생산·수출해 세계7위의 무기 수출국으로 군림하면서도 노벨 평화상을 주는 등 ‘평화국’으로 행세하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일단 국내에선 전쟁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노르웨이산 무기로 아프간의 미군이나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이 미성년자 ‘테러리스트’를 아무리 많이 살육해도, 이를 많은 노르웨이인은 그저 몰라도 되는 것이다.” (p.112)

 

직접 전쟁을 일으키거나 남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전쟁을 계속되고 광범위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들이 이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북유럽 국가에 대한 치부를 낱낱이 파헤친다. 노르웨이가 세계7위의 무기 수출국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년 전 극우주의자에 의해 끔찍한 대량 살인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노르웨이는 살고 싶고 가고 싶은 나라인데, 자기 손에 피 묻히지는 않지만 세계 7위의 무기 수출국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국가 중심주의를 내세우지 않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국가에서조차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하다.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노르웨이 국민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남의 전쟁에 참전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어떤 방식, 모양이든 국가는 국가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정도가 다르고 각국의 상황에 따라 각국의 국민들이 체감하는 폭력의 강도도 다르겠지만 지속되고 있다. 가시적인 국가폭력이라면 오히려 두려워 할 수도 있겠지만 비가시적인 경우라면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 공포는 배가 된다.

 

처음 리뷰의 도입부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한국이라는 국가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떤 이념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국가폭력이 어떠한 형태로 어떻게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열등한 타자’ 들에게 가해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자신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심각한 문제다. 애국심, 국가주의는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국가가 ‘국민의 한 사람인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저절로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당신을 위한 국가가 없듯이 나를 위한 국가가 없다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내린 유일한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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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 명사, 그들이 만난 고전
임영택.박현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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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도 한 권의 책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뀐 사람이다. 아직 인생의 중반부에도 미치지 못해 정말 내 인생 자체를 바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청춘이라는 이름을 가슴위에 얹고 시작한 대학생활이 가져다 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좌절과 실망을 극복하게 해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이미 다른 리뷰나 포스트에서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는데, 그 책은 고(故) 리영희 선생님의 「반세기의 신화」다. 우연히 접한 리영희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학 입학 전까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었다.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었다. 리영희 선생님의 많은 책 중에서 「반세기의 신화」를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아마 그때 봤던 인터뷰 기사의 내용 중에 이 책을 언급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개정판이 나왔지만 당시 내가 읽은 책은 초판이었다. 민주화 투쟁이 격렬하던 시기에는 금서로 지정 되어 청춘들이 몰래 보던 책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었던 99년도만 해도 리영희 선생님에 대해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잠시 몸담았던 운동권 선배들에게서도 리영희 선생님의 책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혼자서 「반세기의 신화」를 읽는데, 충격과 반전과 배신과 억울함과 기쁨과 희열이 교차했다. 십 수 년을 교육을 받아왔는데 왜 한국의 학교는 제대로 된 진실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분노했다. 색깔별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따로 노트에 정리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과 진실에 쾌감을 맛봤다. 3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멀쩡하게 기능을 해야 하는 한쪽 눈을 20년 동안 감고 있다가 비로소 뜨는 것 같았다. 세계와 한국사회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맞은 것이다. 그 책을 읽으니 리영희 선생님의 다른 책을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완전히 리영희 선생님의 책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그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대학교 안마당까지 점령해 버린 직후라 운동권은 거의 해체되었고 과사무실, 동아리, 학회 등 조직들은 와해되었다. 모두들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위해 영어공부와 공무원시험에 매진했다. 인기 있는 학과와 강의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몰리고 그렇지 않은 학과와 강의는 없어지기도 했다. 민주주의, 가치, 진실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임과 동시에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열람실 자리를 맡아서 첫 강의 들어가기 전까지 토익 공부하고 강의가 다 끝난 후에 다시 돌아와 토익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문학의 와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리영희 선생님의 책으로 충분했다. 진실을 찾아내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선생님의 글을 읽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용기를 얻거나, 평생의 꿈을 간직했거나, 살아 갈 방향을 정한 인물 열네 명의 이야기다.” (p.5)

 

이 책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열네 명에 대한 이야기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책 한권이 이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책 한권으로 인생 전체의 방향이 바뀌거나 재설정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조는 소통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아버지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었고, 자신은 바늘방석 위에 앉아 있는 세손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올랐다. <서경>의 소통철학을 받아들이고 영조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 정책을 계속 펼쳤다. 과거의 죄를 묻는 일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처리하고자 했다. 반대 세력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고 오직 옳고 그름만을 따졌다.” (p.79)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 중기 전성기를 이어 간 정조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다. 많이 알려진 대로 끊임없이 암살과 독살의 위협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습관적으로 밤늦게까지 책을 보는 일이 많았다. 처음부터 책을 좋아한 것 보다 살기 위해서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 놓고 책을 본 것이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고, 왕세손 시절부터 줄곧 이어지던 할머니 정순왕후의 시기와 질투, 모략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정신이 이상해져야 마땅할 것 같다.

살기 위해서 책에 몰두한 정조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밑거름을 만들었다. 어린 왕을 가운데 몰아 놓고 휘몰아치며 공격하는 붕당의 정치 협잡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이 정치력을 끌어 올릴 때까지 참고 견뎠다. 왕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반대세력의 힘이 더 막강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복수마저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조는 아버지를 죽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가 가장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반대세력과 힘을 견줄 정치력을 가진 이후에도 정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복수가 아니라 탕평이었다. 소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지 두고 읽었던 중국의 고서 <서경>을 읽으며 소통의 철학을 일구었다. 선대왕 영조 때부터 그렇게 애쓰던 붕당정치의 붕괴와 탕평책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왕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는 암살 위협 속에서, 반대세력의 끈질기고 지독한 공격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경>은 정조에게 소통과 통합의 정치를 이끌게 했다. 정조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했고 심지어는 반대파의 우루머리와도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p.83)

 

정조는 반대파의 우두머리와도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힘을 가진 왕이 아무리 반대파라 해도 잡아들이거나,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고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였다. 문득, 요즘 정치판이 오버랩 되며 속이 메스꺼워진다. 절대적인 힘을 가졌던 조선시대 왕도 저런 생각을 했는데 요즘 정치인,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은 어떤가. 그저 정치적인 암투만 벌이고 제 잇속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TV카메라 앞에서는 온갖 똥폼을 다 잡고 있지만 뒷구멍으로는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저 자기 얘기만 떠들어대기 바쁘고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TV, 언론과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바보가 되기 전 M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 100분 토론에서도 그랬다. 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100분 토론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00분 동안 똑똑하다는 양반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데 서로 동문서답하고 자기 말만 주저리 늘어놓을 뿐, 단 한 번도 결론을 도출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양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저 공중파 TV에 얼굴 비춰서 지역구 주민들에게 열심히 활동하는 국회의원의 모습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관심이 가 있지 정말 진지하고 진정성이 담긴 토론은 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정조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에 대한 이야기다.

정치인,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아니, 그만두지 않는다. 한번 국회의원이 되면 따박따박 연금을 받아먹을 수 있고 낙선을 하거나 임기가 끝나더라도 어디 가면 국회의원입네 하며 목에 깁스한 채 돌아다닐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국회의원이 가진 특권이 크고 많은 곳이 바로 한국이다. 모두가 싫어하고 모두가 욕을 하지만 일단 되면 장땡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이 임기가 끝난 후 뭐 다른 일을 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봐도 없다. 여의도 언저리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어내려 안간힘을 쓸 뿐이다. 굶주린 하이에나들처럼.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보다는 후퇴되고 있는 실정이니 기대를 하는 것조차 욕심일 뿐이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정치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을 다른 영역에서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정치인 고어는 환경 운동가 고어로 거듭났다.” (p.217)


고어는 부통령을 지내고 대선 후보로 나오기도 했던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부시와의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후 환경운동가로 뛰어 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말대로 어린 시절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그와 같은 거물급 정치인이라면 다시 재기를 노리거나 대선을 통해 얻어낸 지지를 등에 업고 정치 전반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의 정치인이라면 고어와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고어가 노벨상을 받고 책을 출간하고 열심히 강연을 다니고 하지만 마이클 무어를 비롯한 미국 내 진보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며 한국의 정치인들을 봐 온 경험을 되돌아보면 고어의 이러한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머지 책에 소개된 사람들과 그들이 영향을 받은 책들도 모두 귀중한 것들이다. 의미 있고 재미있었다.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읽지 않은 책도 있었다. 읽었던 책이라도 나와는 전혀 다른 소감과 느낌인 부분도 있었다. 이것이 독서를 하는 큰 기쁨 중 하나다. 똑같은 책을 읽는다 해도 읽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책이 될 수 있다는 것.

기회가 된다면 나도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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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4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정수 미생 4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바둑을 전혀 모른다. 알까기와 오목 정도만 조금 할 줄 안다. 이 책은 전적으로 작가 때문에 읽은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전작 「이끼」는 한국 만화역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생각 한다. 치밀한 스토리와 과감한 상황 묘사는 짜릿한 영화 몇 편을 보는 것 같았다. 이끼가 영화화 된다는 기사를 보고 제발 감독……. 했는데 강우석이 메가폰을 잡는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이끼가 가진 스토리라인을 영상화하는 데에는 강우석 감독의 창작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다행히 흥행을 했지만 나는 주저 없이 최악의 한국영화로 꼽고 싶었다. 배우 박해일과 유선, 유해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스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했고 가장 중요한 인물인 이장 역할을 정재영이 한 것은 최대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를 웹툰에서 먼저 보고 팬이 된 나와 같은 사람들 중 대다수는 영화 이끼를 보고 엄청난 실망을 했다. 그 실망감을 씻을 방법이 없어 다시 웹툰으로 파고들었다.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의 대단한 흡입력이 있는 작품이다.

이후 한겨레신문에 연재되던 「내부자들」도 대단한 작품이었다. 지난 정권을 그대로 겨눈 작품이었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에 맞춰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에 긴장감이 넘쳤고, 언젠가 카운터펀치가 될 훅 한방을 기대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유야무야 연재가 마무리 되었다.

「이끼」도 그렇고 「내부자들」도 윤태호 작가 특유의 굵은 선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후 이어진 「미생」은 사실 읽지 않았다. 바둑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예스24에서 상반기 결산으로 이벤트를 하고 있어서 검색하던 중 미생4권이 올라 있어 읽게 되었다. 이미 130편이 넘는 웹툰이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는 6권째가 출간된 상태였다. 이전에 읽은 윤태호 작가의 전작보다는 선이 얇았지만 바둑 한 판에 수십, 수백 가지의 인생이 들어 있는 것처럼 상사맨으로 등장하는 장그래씨가 겪는 녹록치만은 않는 사회생활에 금세 빠져들었다. 미생4권은 그의 연재물 중 50수에서 67수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주인공 장그래가 영업3팀에서 점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요르단 현지 업체에 자신의 친인척을 주요 임원으로 고용해 불법을 저지른 박과장을 내부고발하는 것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꼭 있다.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 물불 안 가리고 아부 떠는 사람. 박과장은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처음 상사맨으로 사회생활을 출발했을 때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마음가짐을 점차 잃어가며 직장생활을 정치적으로 분탕질하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 어느새 지위가 되어 버렸다. 거래업체, 하청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고 투명해야 할 해외계약건에 더러운 욕심을 덧칠했다.

 

 


 

 

결국, 걸리게 되어 있다. 들통 난다.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 -미즈 반 데어 로에

 

직장생활, 사회생활도 디테일이 좌우한다. 허겁지겁 밀어내는 일상이 점철된 현장이지만 떠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디테일에서 승부는 결정 난다.

 

 


 

윤태호 작가의 작품은 굉장히 철학적이다. 대단한 인문학적 소양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림과 글이 많다. 그래서 한 번 읽고 서는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여러 번 읽어야 한다.

장그래가 겪는 좌충우돌과 벼락과 같은 깨달음이 실제로 당장 내일 아침부터 내가 마주할 사회의 디테일에 교훈을 준다. 오과장과 같은 기인(奇人)을 실제로 만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부장과 과장과 대리와 사원들은 각자의 디테일 속에서 살아간다. 어떻게 채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신이 디테일 속에 살아있다면

나도 기꺼이 디테일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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