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흔히 말하는 이념으로 나를 분석하면 나는 어떤 이념을 가진 사람일까? 사회민주주의자, 온건적 진보주의자, 급진적 민족주의자, 중도 보수주의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만큼 이념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고 수렁에 빠지고 빠트리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가 있을까 싶다. 누구 말대로 미국의 텍사스주 보다 작은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분열되어 있고 나뉘어져 있는 경우는 아무 없을 것이다. 외국의 정치학 논문에서 대상으로 한다면 학위는 당연히 받을 만한 특수한 상황이다. 지역 간 분열을 물론이고 세대 간 분열도 최근 아주 극심해졌다. 거기에 더해서 같은 세대 속에서도 분열이 조장 되고 상호 비방이 일상화 된 사회다. 경제 규모자체는 10위권에 속해 있다고 늘 자랑스레 얘기하지만 세부적인 수치를 따져보고 경제 규모에 대한 수치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수치에서는 OECD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국가다. 자살률은 단연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모든 국가를 포함하더라도 공부를 많이 시키고 부모들의 교육열이 심각할 정도로 큰 곳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바로 또 공부를 시작한다. 대학에서 누려야 할 청춘의 맛은 취업 준비를 위한 공부로 뒤덮인다.

내가 살고 있는 국가는 어떤 곳일까? 아무리 책을 읽고 고민을 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뚜렷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어차피 내가 발붙이고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안을 마주할 때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가장 공정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인 나는 한국에 대해서 아주 객관적으로 불 수 있을 가능성은 작다. 그래서 박노자 교수의 논리와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이미 귀화해 한국 사람이 된 박노자 교수이지만 그가 가진 외모만큼 그의 생각은 나와 같은 날 때부터 한국인의 그것과는 다를 가능성이 크다. 박노자 교수의 전작을 대학 때 읽으며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최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가감 없는 속살을 시원스레 폭로하는 그의 주장에 낯설기도 했다. 우리네 일상과 현실이 워낙 짜증나고 힘들고 비상식적이어서 ‘혹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번씩은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도 문제가 많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곳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귀화를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푸른 눈을 가졌는데 뭐 한국 비판하는 거 들을 필요 있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산이다. 박노자는 노르웨이도, 스웨덴도, 핀란드도 한국과 똑같이 비판한다. 그래서 진보입네 흉내 내지만 내용 없는 이야기 늘어놓는 국내 지식인들의 허울 보다는 훨씬 낫다.

 

 

이 책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국가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국가폭력……. 어린 시절부터 반공교육을 받아 온 나의 세대와 그 이전 세대들에게 국가는 신성한 존재였다. 매일 국기게양식을 지켜봐야 했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외워야 했고 국민교육헌장을 무슨 가훈 외듯 외워야 했다. 국가가 있어 내가 있고 국가는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고 나를 보호해주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그런 국가를 제대로 알아 가면 갈수록 국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줄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갖는 괴물과 같은 힘이 너무 컸다. 비정상적으로 수립되고 구성되었으며 전개된 독재 권력과 군사정권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거지로 국가지상주의 라는 괴물을 낳고 키웠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간판을 내걸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고 정치적 상식을 이루어 냈지만 국가는 도구로 사용되기만 했다. 어린 시절을 지나며 교육을 받고 국가에 대한 진실을 체득하면서 자연스레 국가를 인식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고 세뇌하는 것이 구조화되다 보니 정권이 바뀌고 정치적 자유화를 이루어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개혁 정권 10년을 겪으며 많은 것을 바꿔보려 했지만 지난 5년 만에 20∼30년 뒤로 완전히 후퇴해 버렸다. 그들이 말하는 국가는 그렇게 쉽게 바뀌고 언제든 정략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낱낱이 보여 주었다.

 

 

“국가폭력의 주된 표적, ‘열등한 타자’” (p.44)

 

박노자 교수는 참 아프지만 정확하게 지적 한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국가폭력의 주된 표적은 ‘열등한 타자’였음이 분명하다. 아무리 변명해보려 해도 저 말이 맞다. 책에서도 소대된 사례 용산참사는 이것의 전형을 보여 준다. 밀려나고 밀려나다가 망루에까지 오른 철거민들은 이 사회가, 한국이라는 국가가 ‘열등한 타자’로 규정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공장 옥상에서 살육하듯 진압한 장면도, 각종 시위에서 등장하는 공권력의 진압 장면도 국가가 규정한 ‘열등한 타자’에 대한 표적 폭력이다. 대의고 명분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한국의 역사를 통해 ‘열등한 타자’는 늘 폭력을 당해 왔다. 늘 구차한 변명을 따라 왔다. 국가를 위한 길이다. 국가를 위한 길…….

 

 

“국가의 실체와 함께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폭력이 여태까지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 되어 왔는가 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p.14)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박종철이나 이한열 등의 열사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시적 정치성이 부족한 국살은 대체로 대중에게 망각되고 피해자의 유족에게만 기억된다.” (p.27)

 

나는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정하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는다.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할지도 모르겠다.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가시적 정치성이 강한 국살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들고 일어났다. 얘기만 들어 왔던 민주화 투쟁이 아니더라도 몇 년 전 쇠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시위만 돌이켜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국가폭력에 의한 항거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숙고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가시적인 정치적 국살이 없어서 대중은 국가폭력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한국이라는 국가를 움직이는 기득권이 노리는 오래전부터의 야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 되고 허망하게 망하면서 사람들에게 남긴 건 단 하나, 돈이 최고다. 라는 인식이다. 그 최고의 가치인 돈을 위해서는 좋은 직장,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그렇다면 청춘을 논하고 캠퍼스 운운하는 대학생활은 포기해야 한다. 대학은 직장예비학교로 전락했고 대학에서 배우던 조직과 사회, 공동체 생활은 멸절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느새 기성세대로 불리게 된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저지른 많은 범죄 중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국가의 힘에 의한 민간인 사찰 건은 사람들에게 환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당연히 잘못된 일이고 언제 어느 때 나도 국가로부터 사찰을 당할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일인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국민들은 점점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혐오를 넘어 무관심에 이르게 하는 것이 기득권의 목표였다면 그들은 확실하게 목표를 달성했다. 요즘 들어 최고의 현안인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NLL로 물 타기 해버린 저들의 계략 또한 넓은 범주에서 보면 국가폭력과 다름없다. 이미 정권의 하수인이 된 언론은 그 국가폭력을 대행하는 용병이다. 예전처럼 최루탄을 쏘고 고문을 가하는 것만이 국가폭력은 아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 같은 ‘하찮은’ 이야기보다 ‘거대’ 전국 정치판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린다. 국가에 대해 도대체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기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 (p.11)

 

국가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관심이 없다. 또한 건국 이후 ‘하찮은’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가 성공한 역사가 없다. 산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던 사람들이 변절해서 기득권 끄트머리에 들러붙는 꼴을 반복적으로 경험해 온 한국의 국민들은 비현실적인 기대조차 없다. 그저 ‘우리당 사람 뽑아줘야지’ 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정치적 후진국의 영예를 벗을 수 없는 것이다.

 

 

“한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일본의 ‘일억옥쇄(一億玉碎)’의 집단 광풍 등을 ‘후발 발전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보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p.117)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주장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리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특수성을 이해하면 오히려 편하다. 덧붙여 수십 년 동안 동일한 패턴으로 인식화 되다 보니 오히려 국가가 의도한 대로 사는 것이 편한 것이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고 그렇게 당했는데도 ‘아이고 불쌍해서 우짜노~ 뽑아 줘야지~~’라는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국가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을 의도했다.

 

 

박노자 교수는 여기에 더해 국가폭력이 가장 극적으로 사용되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철저하게 불평등하고 이러한 불평등이 세습화된 한국 사회는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는 생각에 매달리며 이를 위안으로 삼는다. 좌우간 전 사회군사화의 산물이든 사회적 불평등 희생자들의 기만적 자기위안이든 의무로서의 병역에 대한 인식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p.221)

 

지난 2002년 대선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엄청난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대선 후보가 되었지만 그 이전 몇 년간 대세론의 파도를 타던 사람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였다. 아무리 당시 민주당 경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기가 상당했다고하더라도 이회창과 한나라당을 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이회창의 여러 가지 스캔들이 터졌다. 그중에서도 아들의 병역면제가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의 아들이 몸무게 미달로 병역을 면제했다는 사유는 대구에 사는 개도 믿지 않을 코미디다. 박근혜만큼 당시 이회창의 대세론은 막강하고 단단했다. 그런데 아들 병역문제로 한 방에 날아갔다. 박노자 교수의 적나라한 분석대로 철저하게 불평등이 세습화되고 공고화된 한국 사람들에게는 ‘병역’만큼은 저들과 내가 똑같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그래서 내가 아닌 남의 병역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고 혹시나 병역에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도 단번에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의 병역에 대한 집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국가폭력의 실행조직이 일상화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장에서 ‘우리’의 단결을 높이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남’에 대한 끔찍한 잔혹 행위다.” (p.80)

 

전쟁이 일어나는 전장은 죽음의 장소이다. 적을 향해 총구를 지향하고 포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폭력이 가장 극적이고 적극적으로 이행되는 장소이다. 전쟁으로 인해 그간 무디어진 애국의 날을 세울 수 있다. 20세기 초 두 번의 끔찍했던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류는 국가폭력의 잔혹성을 그래도 맛보았다. 한국인들은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비극적인 국가 간 폭력의 결과는 참혹했다. 아직도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이유를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해서 분석한다.

 

 

“전쟁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전쟁 없는 자본주의라고? 수류탄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생산·수출해 세계7위의 무기 수출국으로 군림하면서도 노벨 평화상을 주는 등 ‘평화국’으로 행세하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일단 국내에선 전쟁이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노르웨이산 무기로 아프간의 미군이나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이 미성년자 ‘테러리스트’를 아무리 많이 살육해도, 이를 많은 노르웨이인은 그저 몰라도 되는 것이다.” (p.112)

 

직접 전쟁을 일으키거나 남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전쟁을 계속되고 광범위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박노자 교수는 한국인들이 이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북유럽 국가에 대한 치부를 낱낱이 파헤친다. 노르웨이가 세계7위의 무기 수출국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년 전 극우주의자에 의해 끔찍한 대량 살인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노르웨이는 살고 싶고 가고 싶은 나라인데, 자기 손에 피 묻히지는 않지만 세계 7위의 무기 수출국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국가 중심주의를 내세우지 않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복지가 이루어지는 국가에서조차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하다.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노르웨이 국민들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고 남의 전쟁에 참전하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어떤 방식, 모양이든 국가는 국가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정도가 다르고 각국의 상황에 따라 각국의 국민들이 체감하는 폭력의 강도도 다르겠지만 지속되고 있다. 가시적인 국가폭력이라면 오히려 두려워 할 수도 있겠지만 비가시적인 경우라면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 공포는 배가 된다.

 

처음 리뷰의 도입부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한국이라는 국가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떤 이념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국가폭력이 어떠한 형태로 어떻게 박노자 교수의 말대로 ‘열등한 타자’ 들에게 가해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자신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심각한 문제다. 애국심, 국가주의는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국가가 ‘국민의 한 사람인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저절로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당신을 위한 국가가 없듯이 나를 위한 국가가 없다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내린 유일한 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