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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할 땐 니체 ㅣ 땐 시리즈
발타자르 토마스 지음, 김부용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니체를 읽는 것이 여전히 내게는 고역이다. 폼 잡느라 읽지도 않을 두꺼운 철학책을 들고 다니던 대학 시절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고르기도 했던 친구들과 내게 니체는 로망이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 하나에 압도 되었다. 당시 제대로 된 신앙관이 정립되기 전이었고 한국 교회에 대한 치부를 낱낱이 경험하던 때인지라 니체의 멋들어진 표현에 빠져 들었다. 일부러 니체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열람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란 듯이 내 자리 위에 올려놓고는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니체의 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많은 입문서가 있었지만 무슨 객기였는지 ‘입문서 따위를 읽을 바에야 아예 읽지 않겠다.’ 라는 생각에 일부러 두꺼운 책만 골라 샀다. 적어도 책의 목차 까지는 목에 잔뜩 힘을 얹은 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목차까지가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독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특정 출판사의 번역서는 도무지 이걸 번역이라 봐야 할지 또 다른 창작이라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뒤죽박죽 이었다. 무엇보다 내용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신은 죽었다”라는 임팩트 있는 문장만 발췌된 문고용 책을 찾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해서 겨우 교양 몇 과목 듣고 운 좋게 좋은 책을 소개 받아 몇 권 읽은 것이 전부인데 뭘 얼마나 알고 있으며, 뭘 얼마나 더 알고 싶다고 니체를 읽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동네 조기 축구에서도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는 오합지졸 팀이 느닷없이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에 도전장을 내민 경우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처음 니체를 읽었던 십 여 년 전의 기억이 워낙 강했던 탓인지 이후로 니체를 전혀 읽지 않았다. 대학 이후에는 철학서를 거의 읽지 않았던 독서 편식 습관도 한몫했다. 일단 이해가 잘 안 되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니체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우울할 땐 니체」라는 책 제목이 재미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용기 있는 제목을 정할 수 있었는지 아리송했다. ‘우울할 때 니체를 읽으라니.. 제 정신 인가?’
혹시나 하는 내 기대는 역시나 단번에 깨졌다. 나는 이 책을 절대로 우울할 때는 읽지 않기로 했다. 저자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니체를 소개해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내게는 십 여 년 전 그 니체와 단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니체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며 다가설 수 없었다.
“변화를 거쳐 도달할 어떤 목적이 없음을 아는 것, 그리고 개인이 완전히 영속하도록 허용하는 위대한 통합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라는 두 진리가 주어지면 이 변화의 세계를 환상이라고 총체적으로 비난하고 참된 세계인 이 세계 너머에 있을 세계를 고안하는 것만이 핑계거리로 남을 뿐이다.” (「유고(1887-1888)」, 11[99])
나는 도무지 이 문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20여 번을 반복해서 읽고 생각하고 읽고 생각했다. 철학을 하는 학자들은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보다 더 대중적인 소통을 해야 한다고 믿는데, 니체가 이런 글을 쓰던 당시만 해도 사실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좀 더 어렵게 말하고 한 번 꽈야 하는 것을 두세 번 꼬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학문이 교조적으로 치우친 탓도 있겠지만 뭐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니체의 글은 어렵다. 니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정말 궁금했다. 특히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 중 니체를 연구한 사람들에게 니체의 이런 난해하고 무의미한 것 같은 문장이 어떤지 정말 궁금했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도 어느 날 갑자기 산책을 하다가 문득 꽝 하고 깨달은 후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색과 연구 공부와 훈련을 통해 깨닫거나 알게 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나와 같이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았거나 전공을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거나 어려워서 일부러 멀리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 또한 니체의 원서를 읽는 것처럼 어렵고 난해하며 힘들다.
“우리는 덧없는 작은 기쁨, 일상적이고 가까이 있는 것, 지금까지 제기되었다가 결실 없이 대체된 갖가지 형이상학적 질문 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들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p.20)
“하늘로 오를 것 같은 환희를 체험하고 싶다면 또한 죽을 것 같은 슬픔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68)
“우리가 참아내지 못하는 것과 씨름하고 그것을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만드느라 기진맥진해지는 대신에 단순히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원한과 증오의 원인이 될 만한 것과 거리 두기, 교묘한 검열, 공격을 살짝 피하는 기술, 이것이 거리 두기의 윤리, 기품 있는 귀족 윤리의 토대다.” (p.169)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몇 개의 문장이다.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최소한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우리는 인간의 심오한 욕구인 영원성에 대한 욕구를 기독교가 어떻게 변질시켰는지를 안다. 먼저 니체는 영원한 삶을 우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을 심화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고통에 대한 대속으로 본다. 기독교인이 사후에 최고의 삶을 희망하는 것은 삶에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고통에 초대 되어 마침내 영원성을 향한 보장을 얻는다. 차안의 모든 쾌락은 피안의 모든 쾌락에 입각한 가설적인 것이다.” (p.288)
이 문장에 대해서는 이제는 비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 안에서 말과 글이 정리되지 않아 서평에 옮길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많고 쓰고 싶은 글은 많은 데 정돈 시킬 수 없었다.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