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 명사, 그들이 만난 고전
임영택.박현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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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도 한 권의 책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뀐 사람이다. 아직 인생의 중반부에도 미치지 못해 정말 내 인생 자체를 바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청춘이라는 이름을 가슴위에 얹고 시작한 대학생활이 가져다 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좌절과 실망을 극복하게 해준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이미 다른 리뷰나 포스트에서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는데, 그 책은 고(故) 리영희 선생님의 「반세기의 신화」다. 우연히 접한 리영희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대학 입학 전까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었다.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었다. 리영희 선생님의 많은 책 중에서 「반세기의 신화」를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아마 그때 봤던 인터뷰 기사의 내용 중에 이 책을 언급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개정판이 나왔지만 당시 내가 읽은 책은 초판이었다. 민주화 투쟁이 격렬하던 시기에는 금서로 지정 되어 청춘들이 몰래 보던 책이었다. 내가 그 책을 읽었던 99년도만 해도 리영희 선생님에 대해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잠시 몸담았던 운동권 선배들에게서도 리영희 선생님의 책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혼자서 「반세기의 신화」를 읽는데, 충격과 반전과 배신과 억울함과 기쁨과 희열이 교차했다. 십 수 년을 교육을 받아왔는데 왜 한국의 학교는 제대로 된 진실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분노했다. 색깔별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따로 노트에 정리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과 진실에 쾌감을 맛봤다. 3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멀쩡하게 기능을 해야 하는 한쪽 눈을 20년 동안 감고 있다가 비로소 뜨는 것 같았다. 세계와 한국사회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맞은 것이다. 그 책을 읽으니 리영희 선생님의 다른 책을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완전히 리영희 선생님의 책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그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대학교 안마당까지 점령해 버린 직후라 운동권은 거의 해체되었고 과사무실, 동아리, 학회 등 조직들은 와해되었다. 모두들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위해 영어공부와 공무원시험에 매진했다. 인기 있는 학과와 강의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몰리고 그렇지 않은 학과와 강의는 없어지기도 했다. 민주주의, 가치, 진실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임과 동시에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열람실 자리를 맡아서 첫 강의 들어가기 전까지 토익 공부하고 강의가 다 끝난 후에 다시 돌아와 토익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문학의 와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함께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리영희 선생님의 책으로 충분했다. 진실을 찾아내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선생님의 글을 읽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을 통해 용기를 얻거나, 평생의 꿈을 간직했거나, 살아 갈 방향을 정한 인물 열네 명의 이야기다.” (p.5)

 

이 책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열네 명에 대한 이야기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책 한권이 이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책 한권으로 인생 전체의 방향이 바뀌거나 재설정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조는 소통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아버지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되었고, 자신은 바늘방석 위에 앉아 있는 세손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올랐다. <서경>의 소통철학을 받아들이고 영조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 정책을 계속 펼쳤다. 과거의 죄를 묻는 일은 최소한의 범위에서 처리하고자 했다. 반대 세력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고 오직 옳고 그름만을 따졌다.” (p.79)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 중기 전성기를 이어 간 정조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다. 많이 알려진 대로 끊임없이 암살과 독살의 위협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습관적으로 밤늦게까지 책을 보는 일이 많았다. 처음부터 책을 좋아한 것 보다 살기 위해서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 놓고 책을 본 것이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고, 왕세손 시절부터 줄곧 이어지던 할머니 정순왕후의 시기와 질투, 모략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정신이 이상해져야 마땅할 것 같다.

살기 위해서 책에 몰두한 정조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밑거름을 만들었다. 어린 왕을 가운데 몰아 놓고 휘몰아치며 공격하는 붕당의 정치 협잡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이 정치력을 끌어 올릴 때까지 참고 견뎠다. 왕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정순왕후를 등에 업은 반대세력의 힘이 더 막강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이들에게 제대로 된 복수마저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조는 아버지를 죽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가 가장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반대세력과 힘을 견줄 정치력을 가진 이후에도 정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복수가 아니라 탕평이었다. 소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지 두고 읽었던 중국의 고서 <서경>을 읽으며 소통의 철학을 일구었다. 선대왕 영조 때부터 그렇게 애쓰던 붕당정치의 붕괴와 탕평책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왕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는 암살 위협 속에서, 반대세력의 끈질기고 지독한 공격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경>은 정조에게 소통과 통합의 정치를 이끌게 했다. 정조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했고 심지어는 반대파의 우루머리와도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p.83)

 

정조는 반대파의 우두머리와도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힘을 가진 왕이 아무리 반대파라 해도 잡아들이거나,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하고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였다. 문득, 요즘 정치판이 오버랩 되며 속이 메스꺼워진다. 절대적인 힘을 가졌던 조선시대 왕도 저런 생각을 했는데 요즘 정치인,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은 어떤가. 그저 정치적인 암투만 벌이고 제 잇속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TV카메라 앞에서는 온갖 똥폼을 다 잡고 있지만 뒷구멍으로는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저 자기 얘기만 떠들어대기 바쁘고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TV, 언론과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바보가 되기 전 M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 100분 토론에서도 그랬다. 혹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100분 토론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00분 동안 똑똑하다는 양반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데 서로 동문서답하고 자기 말만 주저리 늘어놓을 뿐, 단 한 번도 결론을 도출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양보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저 공중파 TV에 얼굴 비춰서 지역구 주민들에게 열심히 활동하는 국회의원의 모습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 관심이 가 있지 정말 진지하고 진정성이 담긴 토론은 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정조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에 대한 이야기다.

정치인,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아니, 그만두지 않는다. 한번 국회의원이 되면 따박따박 연금을 받아먹을 수 있고 낙선을 하거나 임기가 끝나더라도 어디 가면 국회의원입네 하며 목에 깁스한 채 돌아다닐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국회의원이 가진 특권이 크고 많은 곳이 바로 한국이다. 모두가 싫어하고 모두가 욕을 하지만 일단 되면 장땡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이 임기가 끝난 후 뭐 다른 일을 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봐도 없다. 여의도 언저리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어내려 안간힘을 쓸 뿐이다. 굶주린 하이에나들처럼.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장하고 발전하기 보다는 후퇴되고 있는 실정이니 기대를 하는 것조차 욕심일 뿐이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정치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을 다른 영역에서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정치인 고어는 환경 운동가 고어로 거듭났다.” (p.217)


고어는 부통령을 지내고 대선 후보로 나오기도 했던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부시와의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후 환경운동가로 뛰어 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말대로 어린 시절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그와 같은 거물급 정치인이라면 다시 재기를 노리거나 대선을 통해 얻어낸 지지를 등에 업고 정치 전반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의 정치인이라면 고어와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고어가 노벨상을 받고 책을 출간하고 열심히 강연을 다니고 하지만 마이클 무어를 비롯한 미국 내 진보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며 한국의 정치인들을 봐 온 경험을 되돌아보면 고어의 이러한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머지 책에 소개된 사람들과 그들이 영향을 받은 책들도 모두 귀중한 것들이다. 의미 있고 재미있었다. 내가 읽은 책도 있고 읽지 않은 책도 있었다. 읽었던 책이라도 나와는 전혀 다른 소감과 느낌인 부분도 있었다. 이것이 독서를 하는 큰 기쁨 중 하나다. 똑같은 책을 읽는다 해도 읽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책이 될 수 있다는 것.

기회가 된다면 나도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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