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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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대해 물리적 친근감은 없다. 되려 낯설고 기괴하다. 언제부터 인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당시로부터 사람도, 돈도, 분위기도, 말도, 소문도 그곳으로 몰려 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곳, 그곳이 두 번째로 큰 도시라 할지라도 시골이라 생각한다지. 쳇. 어차피 만들어 낸 허상의 성밖에서 언제나 성문이 열리려나 목을 있는 대로 집어 빼들고 있는 꼴들이니 분통터진다 해도 만들어 진 수모를 감당할 수밖에.

방현희의 소설을 처음 만났다. 최근 들어 단편 소설을 엮은 소설집을 몇 권 읽었는데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는 하나같이 외롭고 고독하다. 서울로 대변되는 사회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이며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어차피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한계를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덤벼들기도 전에 겁만 잔띡 집어먹은 채 포기해 버리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방현희의 작품 속에서의 ‘나’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변명거리를 덧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하릴없이 자기 머리를 그대로 짓이기는 삶을 예찬할 수만은 없다. 어차피 아픈 건 나니까.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강이 작은방으로 나와 벽에 붙여놓은 소파에 발을 들고 앉았다. 그렉안나가 발수건을 가져다주니 먼저 수건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p.30)

 

<로스트 인 서울>에 나오는 ‘강’은 다른 인물들 보다 확실히 강자다. 그는 자신이 가진 신체적·사회적 우위를 가지고 그렉 안나를 휘두른다. 고통이라는 것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역치값이 정체되는 고약한 면을 가지고 있는 터라 안나는 ‘강’에게 그대로 사로잡히고 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강’의 눈을 피해 ‘나’와 숨막히는 밀회를 감행하는 것이다. 차마 밀회를 즐기지조차 못한다. ‘강’의 마수는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멈춰버리게 하는 공포 그 자체다. ‘나’는 그렉 안나가 ‘강’에게 당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쪼그려 앉아 훔쳐는 것. 당하고만 있는 그렉 안나를 구해주려는 시도조차 한 번 하지 않는다. 뛰쳐 나가 당하고 있는 그렉 안나가 보는 앞에서 ‘강’을 후려칠 용기, 아니 마음조차 없다. ‘나’도 그냥 그렇게 순응해서 사는 것이다. 그저 ‘강’에게 얻어맞은 그렉 안나의 상처를 핥고 애무할 뿐이다. 동물들이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핥아내는 것처럼 그렇게.

 

 

“머릿속이 수만 조각으로 갈라져 흩뿌려지더니 한 점 한 점 붉은 벨벳 위로 떨어져 내렸다 향기란 차원이 다른 세계에 속한 것임이 분명했다. 앞뒷말을 계산하고 후환을 두려워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몸 어디선가 시키는 대로 간신히 입을 열어 연기를 내뿜으며 그 연기 끝에 몇마디를 딸려 내보냈다.” (p.128)

 

<그 남자의 손목시계>의 ‘나’도 <로스트 인 서울>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확한 이유나 자세한 상황 설명조차 한 번 없이 ‘나’는 엄마가 그 남자에게 무방비로 얻어 맞는 꼴을 마주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반복된 그 남자의 폭력은 가히 압도적이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게는 일말의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그 남자에게도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손목시계다.

 

 

“그런데 장식장에 잘 모셔놨던 그 시계를 엄마가 떨어뜨려 유리를 그만 깨뜨린 일이 있었다. 이게 어떤 건데, 너 같은 년이 손을 대, 대통령님이 주신 것을.....” (p.143)

 

집 안 구석에 고이 모셔둔 금고 안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손목시계가 있다. ‘나’의 엄마가 초죽음이 될 정도로 얻어 맞은 직후에도 그 남자는 어김없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을 신전에 갖다 바치며 짓는 웃음처럼 그 남자는 그 금고를 열고 손목시계를 보는 순간만큼은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그 남자로부터 엄마를 탈출해 내고 그 남자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금고 안의 손목시계를 모조리 때려 부수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다가왔다. 그 남자 몰래 그 남자의 금고를 열 수 있게 되었고, 그 남자의 손목시계를 마주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무방비로 그 남자에게 얻어 맞는 엄마를 볼 때마다 이를 갈며 다짐하고 다짐하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기껏해야 그 남자의 손목시계를 부수려는 소심한 복수조차 감행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그 남자에게 순응되어 있다.

‘구조’에 속한 ‘나’는 티끌에 불과하다. 그 ‘구조’라는 것이 때로는 괴물일 수도 있고 때로는 천사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문학에서는 괴물일 때가 많다. 사실, 일상에서도 괴물일 때가 많다. ‘나’는 그저 ‘구조’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약속된 룰이고 도덕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면 ‘나’는 당장 부적응자가 된다. 차라리 가차없이 내팽겨쳐 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괴물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부적응자’라는 주홍글씨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손가락질과 음흉한 수근거림을 견딜 수 없다. 차라리 순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구조’가 가진 원리고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괴물의 얼굴이다.

 

 

“그의 선심에서 희망을 엿본다. 때가 무르익어가는군. 머지않아, 나를 밖으로 실어 나를 거야. 나는 그들의 손에 의해서 나가는 거지. 내가 저 전압 높은 철문을 열지 않아도, 내가 무슨 바보처럼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거나, 헬리콥터를 대기시키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들이 나를 곱게 모셔 나르는 거니. 나는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들었다.” (p.111)

 

<탈옥>에서 ‘나’는 이것의 가장 극적인 전형을 보여 준다. ‘나’는 교도소 밖에서 할 일이 분명한 사람이다. 내 머리와 손 안에서 엄청난 돈이 움직여야 한다. 사회와 철저히 단절된 교도소 안에 있지만 이미 ‘구조’를 움직이는 원리와 그 중에서도 돈이 되는 구조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그래서 ‘나’는 교도소를 나가야 한다. 하찮은 죄목으로 영어의 몸이 된 ‘나’지만 언제든지 ‘구조’를 벗어날 수도 바꿔버릴 수도 있는 존재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다. 이미 여러 번 탈옥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탈옥을 꿈꾼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감옥을 뼈나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넌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네 내장을 송두리째 다른 곳으로 도망시킨다 해도.” (p.114)

 

하지만 괴물의 얼굴을 한 ‘구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탈옥>의 말미에 교도관은 이미 ‘나’의 의도와 생각 전체를 읽고 있다는 말을 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변수다. ‘나’는 당연히 ‘구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했고 의기양양했는데, 하찮은 교도소의 볼품없는 교도관에게 ‘나’를 완전히 들켜 버렸다. 폼도 나지 않고 변명을 덧붙일수도 없는 완전한 패배다. 작품에서는 어떻게 교도관이 ‘나’의 의도를 간파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무리 된다. 구차하게 설명하고 묘사하지 않아 더욱 공포스럽다.

 

<세컨드 라이프>, <후쿠오카 스토리>,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퍼펙트 블루> 나머지 단편들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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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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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정원 선거 개입 논란에 대한 여론이 뜨겁다. 물론 여론을 형성하고 유통하는 채널에 따라 뜨거움의 정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무래도 가장 뜨거운 곳은 SNS이고 가장 미지근하고 소극적인 곳은 지상파TV와 조중동이다. 종편은 말할 가치도 없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거나 젊은 직장인으로 87년 서울의 봄을 겪은 세대는 말 그대로 ‘혁명’을 경험한 세대다. 자신들의 힘과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6.29 선언’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정치 혁명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노림수와 음모론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꿈도 꾸지 못했던 혁명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들은 386세대로 현재 한국이라는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많은 386이 정치권으로 뛰어 들었고 그들의 치기와 혁명 쟁취 경험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 전체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현재, 87년 이전의 상황에서 얼마나 발전하고 진보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암담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는 후진적이고 국민들의 수준 또한 후진적이다. 아직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인 국정원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선거인 대통령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인들이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국가들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을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당은 그들의 수십 년 동안 존재해 온 생존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본질을 흐리고 물타기를 하고 역공세를 펼치는 전술. 야당은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늘 국민들보다 더 늦게 움직이고 더 작은 목소리를 낸다. 멍청하게 넋 놓고 있다가 여당에 의해 수세에 몰린다. 이런 짓거리를 수십 년 동안 지켜봐 온 국민들은 그저 ‘그러려니’하고 만다. ‘그러려니’라니…….

 

19세기 초 유명한 정치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한국의 정치 구조 자체가 기생적으로 탄생했고 몇 번의 군부독재를 겪으며 잘못된 역사와 그것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들을 단죄하지 못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지역주의 프레임에 국민들은 여지없이 속아 넘어갔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수십 년 전에는 막 가난을 탈출한 국민들이 아직 정치적 의의에 대해 미숙하고 잘 알지 못해서라고 핑계 댈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386세대가 각계각층, 정치권까지 들어가 있는 상황인데도 바뀌지 않는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괴물에 온 몸을 내던진다.

그렇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표현이 한국의 상황에 가장 딱 들어맞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은 80년대와 같이 혜성처럼 나타난 히어로 한 명이 수많은 군중을, 국민을 선도해서 이끌어 갈 수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의 방법을 고수해서는 가능성이 없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정치인들에게 헛된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카리스마가 넘치는 시대의 영웅을 갈망해서도 안 된다.

 

 

이 책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를 읽을 무렵 터키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대한 뉴스 하나를 보게 되었다. 수많은 군중이 시위대를 형성한 광장 한 복판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전율했다. 그런 시위는 들어본 적도 책에서 읽은 적도 없는 형태였다. 대학 1학년 때 잠시 경험한 시위와 데모, 책에서 읽거나 한국의 TV뉴스에서 보도되는 시위와 데모의 모습은 100% 과격하고 폭력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시위의 한복판에서 청아하고 순결한 피아노 소리가 광장을 가득채운 시위대와 그들과 대치한 경찰들을 한 아귀에 감싸 안은 모습은 그곳으로부터 수천km 떨어진 한국의 한 가정집 컴퓨터 화면에서도 감동으로 전해 졌다. 제대로 된 ‘혁명’을 겪어본 적이 없고 이제는 그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냄새조차 사멸해 가는 지금, 혁명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갈구하는 나와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터키의 피아노 연주 시위와 같은 참신하고 기발한 그것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방법론적 접근을 이 책을 통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확증편향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어떤 쪽은 ‘완전히 정부 편향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평가하고 또 다른 쪽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평가한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이러한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대선 전 SNS상에서는 박근혜보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가 우세했다. 댓글 부대가 SNS에 전면적으로 투입되면서 부터는 그 속에서도 극명하게 의견이 나뉘는 경향을 보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패턴을 유지했다. 대통령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도 극명하게 의견과 평가가 나뉘었다. 어쨌든 야당의 문재인 후보는 지역주의 고착에 의한 ‘묻지 마 투표’와 50대 이상의 절대적인 박근혜 지지에 의해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한 수많은 48% 사람들은 집단 멘붕에 빠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또한 그것이 ‘참’이고 ‘옳다’라고 믿는다. ‘확증편향’은 광범위하고 유연하게 우리들의 사고 속으로 침투한다. 어느 한쪽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양쪽 모두가 자신들만의 ‘확증편향’ 속에서 사회를 규정하고 이해하며 인식하고 행동한다. 도무지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속으로 인정하면서 ‘확증편향’이 가져다주는 안정성에 기생한다. 그것이 편한 길이고 안전한 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초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범국민적인 반대 의견이 수렴되어 대규모의 촛불 집회가 열렸다. 수만 명이 거리를 가득 채울 때 맞은편에서는 반드시 어버이연합 노인들이 등장 했다. 수만 명의 촛불 시민들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숫자였고 대부분 동원된 사람들로 구성된 그들을 무겁게 보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 시절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통과시킨 방송법으로 인해 종편이 탄생했다. 종편 또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 코웃음 치며 그들의 몰락을 관전할 날만을 키득거리며 기다렸다. 그런데 어쨌든 그들은 그들만의 ‘확증편향’으로 또 다른 여론을 만들어 냈고 48%보다 더 많은 51%를 한 데 모았다. 그들의 ‘확증편향’으로는 그들의 승리다. 어려운 싸움에서 힘을 모아 승리한 것이다.

 

 

 

봉기, beyond 혁명

 

“현재를 혁명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혁명 불가능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은 혁명이 아닌 봉기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봉기는 언제 어디서 누구나 부당한 모든 것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닌 뒤흔드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이 없어도 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도 좋다. 엄숙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삶 그 자체가 즐거운 투쟁이 되는 것이 바로봉기다.”

 

터키 시위에서 벌어진 피아노 연주,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축제처럼 벌어진 촛불 집회, 지금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보이는 시민들의 자발성. 이것은 분명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혁명’과는 다른 것이다. 깃발을 들고 스크럼을 짜서 누군가의 희생을 수혈 받아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간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다른 형태이다.

누군가 선봉에 서서 주도하는 시위가 아니라 너도 나도 나와서 각자 하고 싶은 말 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무리나 조직에 의해 끌려가는 형태가 아닌 것이 ‘봉기’라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젊음을 투사했던 지금의 기성세대에게는 퍽 낯선 형태일 것이다. 자연스럽고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닌 시위. 점성이 강한 페인트로 글자체만으로도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깃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걸그룹, 보이그룹 내지는 운동선수 응원하듯이 자신만의 피켓을 만들거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실제로 15M은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일어난 운동과 공통점이 많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들이 운동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의 정당이나 노조가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리더나 중심 그룹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운동의 형성이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다.”

 

15M은 2011년 5월15일에 시작되었다고 하여 이름 붙인 대규모의 민중 봉기인데, 스페인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스페인 각 도시에서 이어진 민중 봉기다. 5월 23일 치러질 지방 선거를 앞두고 선거전이 한창인 스페인 전국을 뒤흔들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해 전반적인 ‘NO’를 들이미는 것이지 새로운 시스템이나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 문제를 공유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봉기’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 답을 공유하는 운동인 ‘혁명’이 아닌 것이다.” (p.175∼176)

 

저자는 이 15M 운동에서 그가 말하는 ‘봉기’에 대한 전형을 찾는다. 이전의 ‘혁명’이 짊어졌던 것.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답을 공유해야 하는 절차적 혼탁함을 넘어서는 것이 ‘봉기’라는 것이다. 특정한 사안과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탈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혁명’이 가지지 못한 확장성과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다.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나하나 무슨 일인지, 그 이면의 의도는 무엇인지 조사하고 연구할 수 없는 대중은 기존 시스템에 대해 전반적인 ‘NO'를 들이미는 것이 더 몸에 와 닿는 것이다.

 

 

“이것을 시대착오적인 ‘독재 체제’를 이제야 타도했다는 식으로 아랍의 봄을 마치 아랍 여러 국가의 특수한 사정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애당초 ‘독재 체제’는 아랍을 비롯한 제3세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이 보여 주는 양당 정당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선거제도 역시 독재적이고 과두적이지 않은가(‘놈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iLo llaman democracia y no lo es!]). 아랍의 봄은 기존의 시스템 전체에 대해 ‘No'를 들이미는 민중 봉기다.” (p.176)

 

한국의 기성세대가 그들이 젊은 시절 군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벌였던 혁명을 위한 시위와 목소리의 기준으로 ‘봉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아무리 정치적 선진성을 답보한 국가라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구조는 여전히 양당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과 우리가 나눠먹기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 지형과 구조에서 가장 극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6공화국 이후 줄기차게 헌법 개정과 정치구조 개편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치인들은 선거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줄어들게 만들 수 있는 법 개정에 대해 모른 체했다.

그런 구리고 오래된 사고로 아랍의 봄 이후 유럽을 뒤흔들고 작년 월스트리트를 물들인 ‘봉기’의 물결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 몇 주째 한국에서 벌어지는 국정원에 대한 시위도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콘크리트화 된 한국의 정치적 구조와 과두적 샴쌍둥이 양당구조로는 바꿀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도 한국의 국민들은 국정원 사건과 그것에 대한 이후 여당과 야당의 반응과 대책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어떤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해도 지난 쇠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집회의 열기만큼 뜨겁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미해병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로렌스는 교관 하트만 상사에게 수료 전날 밤 총을 발사한다. 입소 때부터 고문관이던 로렌스에게 하트만은 가차 없는 욕설과 비인격적인 대우를 선사한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로렌스는 급기야 동기 훈련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에 이른다. 로렌스를 제외한 다른 훈련병들도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베트남전에 참전시킬 군대의 무기 하나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명한 영화 『풀 메탈 자켓』의 전반부 내용이다. 획일적인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신병훈련소에서 로렌스는 삐죽 튀어나온 작은 돌기 하나일 뿐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툭 쳐내버리면 깔끔해 진다. ‘다른’것이 아니라 ‘틀린’것이 되어 버린 로렌스는 하트만 상사가 그토록 만들어 내고 싶어 하던 살기를 띤 눈빛을 죽기 직전 그가 그토록 괴롭히던 로렌스의 눈에서 딱 한 번 확인한다.

 

첨단의 문명을 만들어 낸 인간은 어쩐 일인지 문명의 발전과 비례해 소외되어 갔다. 일부러 소외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다. 자기 스스로 소외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 몇 년 간 수도 없이 벌어진 묻지마 범죄는 그것의 가장 참담한 결과물이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가둔 채 그 속에서 만들어 낸 관계에만 천착하게 된다.

영화『풀 메탈 자켓』에서 나는 로렌스와 함께 훈련 받던 동기 훈련병들에게 주목 한다. 똑같은 옷, 똑같은 군가, 똑같은 훈련을 받지만 그들은 결국 이층 침대 안에서 서로에게 소외 되었다. 소외가 지속되면 참견하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왜 국정원 규탄 집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가? 특히 젊은이들이?

지금의 젊은이, 특히 20대는 어린 시절부터 소외를 경험했다. 부모는 맞벌이로 눈코를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강요받고 급기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해’, ‘배려’, ‘이웃’ 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회인으로 자라난 것이다. 부모의 손에서 모든 것을 충당 하고 모든 궁금증을 해결했으며 대학에 진학해서도 사회적인 의미에 대해 관심을 두기보다 스펙을 쌓거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도서관과 열람실에 틀어 박혀야만 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인가? 누가 이런 20대를 만들어 냈나?

그런 면에서 고등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눈물겨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 없는 벌거숭이들이라 여기는 어른들에게 시원한 어퍼컷을 날리는 것 같아 한 대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분명 ‘혁명’의 세대와는 다른 ‘봉기’의 세대에게 맞는 적용이 탄생해야 한다. 어른들이 주도하거나 특정 세력과 조직이 선동하는 ‘봉기’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구리고 꼰대적인 냄새가 나면 한순간에 빠져 나갈 것이다.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을 더 이상 괴물 같은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시키지 않아야 한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봉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아랍의 봄은 청년 운동, 프레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불안정한)’와 ‘proletariat(무산계급)’를 합성한 조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불안정한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실업자, 노숙자 등을 총칭한다. 2003년에 이탈리아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2006년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시위에서도 쓰였다)의 운동이며, ‘불안정’,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준(準)안정’ 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이 기존의 정치 경제 시스템 전체를 거부하는 운동인 것이다.” (p.177)

 

아랍의 봄에 대해서도 한국의 언론은 기울어진 잣대로 보도 했다. 그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유럽 국가들의 ‘민중 봉기’ 또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300원 남짓 최저임금을 인상해 놓고 온갖 생색을 내는 저들을 향해서 짱돌을 던지기는커녕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

 

 

“역사 속 수많은 혁명은 실패했다. 혁명은 특정 지도자와 당이 있고, 대다수가 동의해야 하는 사상이나 규칙이 필요하다. 혁명은 문제를 ‘해결’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성공’을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그대로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대다. 우리는 ‘혁명 불가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봉기에 있다. 봉기는 특정 지도자와 당이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모든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봉기다. 봉기는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해결책이나 정답은 필요 없다. 나로부터, 너로부터, 우리 모두로부터 봉기는 가능하다.”

 

한 번도 ‘봉기’를 해보지 않아 두렵다. 막연하게 두렵다. 사문화된 법으로 경찰서에 끌려가거나 고소·고발을 당하는 꼴을 지난 5년 동안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의탁해 구조를 바꿀 수 없는 곳이 나와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한국은 그만큼 미성숙한 사회다.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의 방법 하나를 찾은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얼마만큼 이 책에서 말하는 ‘봉기’가 한국 땅에서 펼쳐질 수 있을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국정원 규탄 집회가 ‘봉기’의 형태로 발전될 수 있을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큰 기대가 없다. 맥이 탁 풀리지만 솔직히 그렇다. 그들의 수준에 딱 맞는 지도자를 뽑은 한국의 국민들에게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싶다. 정치구조, 정당형태, 지역주의 고착, 세대별 갈등, 계층별 갈등, 세대 간 갈등 등 산적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봉기’의 물결이 이곳 한국까지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신나게 책 읽고 희망차게 리뷰를 작성했는데 결국 결론은 암울하니 나 스스로 복장이 터진다.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도 이 책은 추천하고 싶다. 나와 같은 세대는 물론 더 어린 세대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하며 부담되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도 기꺼이 몸한번 내던지고 싶은 ‘봉기’를 얘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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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학교급식 여행 - 더 공평하게 더 건강하게 내인생의책 인문학 놀이터 3
안드레아 커티스.오진희 지음, 박준식 옮김, 소피 캐손 그림, 이본 데이핀푸어딘 사진 / 내인생의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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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갔다. 점심, 저녁 도시락 2개에다가 동생 도시락까지 매일 아침 싸야했던 어머니의 고단함을 이제야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도시락 하면 딱 두 가지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같이 반찬을 섞어서 비벼 먹는 그 맛. 비벼 놓고 보면 개밥 같아 보이지만 밥통에 각종 반찬을 넣은 후 뚜껑을 닿고 수차례 아래위로 흔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비빔밥이 되었었다. 특이한 것은 친구들이 싸온 반찬의 종류가 달라져도 맛은 늘 비슷했다는 것이다. 2학년 때는 학교에 식당이 생겨서 급식을 시작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때 도시락 반찬이다. 그때는 급식 이런 개념이 없었고 전교생이 도시락을 싸갔었다. 당시만 해도 지금은 흔한 햄이나 참치, 고기 같은 반찬을 싸오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나는 바다에 위치한 해안도시에 살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생선 반찬과 젓갈 반찬이 많았다. 나의 부모님은 사면이 내륙으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시골 출신이신데 아버지가 해안도시 쪽 회사에 취직을 하시면서 물설고 사람 낯선 도시에 정착하시게 되었다. 부모님 식성에 나도 맞춰지다 보니 어린 시절 밥상에는 나물 종류가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고들삐짠지가 가장 맛있었다. 쌉싸름하면서 매콤하고 달착지근한 고들삐짠지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반찬으로도 자주 싸갔다. 그런데 내가 싸온 고들삐짠지를 친구들이 한 번 맛보고는 다시 먹지 않았다. 그 아이들 입에는 도저히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친구들이 싸 온 젓갈을 먹지 못했던 것처럼 친구들도 내가 싸온 고들삐짠지를 먹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 「세계 학교 급식 여행」은 각 나라의 점심 식사를 그대로 찍은 사진을 삽입하기도 하고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보기에도 의미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책이었다.

 

 

“가령 어떤 어린이들의 집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을 수도 있어요. 전쟁, 이주, 가난, 자연재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매일 6.600만 명의 어린이들이 빈 배를 움켜쥐고 학교에 가지요. 이런 어린이들에게는 무상 급식이 생명줄과도 같습니다.” (p.10)

 

지난 주말 로봇처럼 습관화된 분리수거와 음식물쓰레기 처리를 위해 아파트 내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려는 데 4통이나 되는 음식물쓰레기 수거 통이 모두 가득차 있었다. 한창 더울 때라 냄새도 고약했고 제대로 물기를 제거하지 않은 탓인지 수거통 아래로 물이 새어나오기도 했다. 부랴부랴 경비실 아저씨를 불러 다른 통을 비치하고 우리 집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었다. 경비실 아저씨께서 꼭 들으라는 듯이 아주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셨다.

 

“으이구~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 없이 버려서야~!! 일주일에 한 번 수거해 가는데 3일이면 가득 차 버리는데 참나!!”

 

아저씨의 아주 큰 넋두리를 정확하게 들었지만 마치 안 들렸던 것처럼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 나왔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가 정말 많다. 관리하고 조심하면서 처리한다 하지만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성가셔서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먹지 않아서 썩어버린 냉장고 속 음식물들을 처리하기 바쁘다.

모든 가정에 냉장고를 없애지 않는 이상 음식물쓰레기 문제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다양한 이유로 밥을 굶은 채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매일 6,60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어른인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한국의 전체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학교에 등교한다는 사실. 한국의 엄마들은 자기 아이 밥 안 먹는 것이 가장 안쓰럽다나……. 그래서 밥공기를 들고 밥을 떠서 아이를 쫓아가며 밥을 억지로 억지로 먹이는데...

작년과 재작년 무상급식이라는 화두가 한 나라의 국민이자 가장 큰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들의 권리로 당연시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수싸움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을 보면서 어이가 없고 신물이 났다. 당연히 누려야 할 작은 권리가 왜 어른들의 싸움터에서 무기로 활용되어야 했는지 말이다. 한국의 학교에는 아직도 무상급식이 전체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온갖 이유로 무상급식을 하지 않는 지자체가 많다.

그런데 무상급식을 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말을 들어 보면 열의 아홉은 맛이 없다고 했다. 체계적으로 짜여진 식단과 나이대에 따른 고른 영양소 섭취를 고려한 급식이 제공되는 데 대부분 맛이 없다고 했다. 내가 고등학교 2년 동안 먹었던 급식은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왜 요즘 아이들은 맛이 없다고 할까? 아마도 집에서도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런 듯 하다. 김치나 채소를 아예 먹지 않는 아이들도 많고 하루에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아이가 많다는 것을 며칠 전 TV에서 본 적도 있다. 그러니 집에서도 먹지 않는 밥을 학교에서 맛있게 먹을 리 만무하다.

매일 6,600만 명의 아이들이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밥을 일부러 먹지 않거나 무상급식의 혜택이 있음에도 음식물을 남기는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토론토처럼 부유한 도시에서조차 어린이 4명 중 1명이 굶주리고 있어요. 또한 어린이 9,000명 정도가 무상 급식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먹고 살아요. 하지만 무상 급식은 지방 정부, 교육청, 기업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자원봉사자들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p.36)

 

한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의 부유한 도시에서조차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무상급식은 지자체나 정부의 예산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무상급식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 아이들도 밥을 많이 먹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프랑스 아이들이 먹는 급식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매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라도 빵을 주면 좋을 것 같았다.

 

“학교급식에서는 물만 마실 수 있어요. 학생들이 달콤한 주스만 마시지 않게 하려는 거예요. 2005년에 프랑스 정부는 학교 안에 탄산음료와 스낵류를 파는 자동판매기 설치를 금지시켰어요.” (p.23)

 

이 부분은 며칠 전 본 TV에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최근 10여 년 간 아동 비만율이 가공할 정도로 치솟으면서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아동 비만율은 낮추기 위한 각종 정책을 마련해 비만율을 실제로 크게 낮췄다는 내용이었다. 술과 담배 못지않게 몸에 좋지 않은 것이 탄산음료라는 전문의의 소견도 포함되었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프랑스 전역의 학교에 탄산음료를 파는 자동판매기 설치를 금지하고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끼니때마다 적정량의 물을 섭취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권장했다고 한다. TV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자신의 이름이 쓰인 개인컵을 가지고 물을 계속 섭취하게 했다.

실제로 물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한국의 중학생과 초등학생, 일반인 몇 명에게 물 대신 마시던 탄산음료를 끊게 하고 일정 기간 동안 물을 섭취하게 했을 때 체지방률은 물론 체중 자체도 감소하는 엄청난 효과를 보여주었다.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아이들은 물을 먹지 않고 있었다. 굳이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더라도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물 섭취는 필수불가결한 데 한국의 아이들의 물 섭취량은 평균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멕시코 사람들은 연간 1인당 159리터의 탄산음료를 마셔요. 이는 석유 드럼통 하나를 채울 수 있는 양이에요. 2006년에는 탄산음료에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어요.” (p.31)

“세계 어느 나라나 과자와 같은 가공식품이 천연식품보다 값이 쌉니다. 자연 그대로의 신선한 먹거리는 빨리 상해서 보관과 운송에 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에요.” (p.31)

 

커다란 석유 드럼통 하나를 채우는 양의 탄산음료를 1년 동안 마신다니... 책에서의 지적대로 가동되지 않은 천연식품은 비싸다. 결국 여기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에 따른 극과극의 현상이 두드러진다. 돈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천연식품을 사서 먹지만 돈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가공식품을 사 먹을 수밖에 없다. 탄산음료가 지금 가격의 5배 정도가 된다면 지금처럼 많은 아이들이 탄산음료를 사 먹을 수 없다. 하지만 싸고 손쉽게 사 먹을 수 있고 오랜 기간 먹으면 맛에 중독되기 때문에 그 유혹을 쉽게 벗어낼 수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지식이 많이 없어요. 만약 음식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우게 된다면 음식에 대한 중요성을 좀 더 잘 알게 될 거예요. 그때 비로소 우리는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찾고자 노력할 수 있지요.” (p.84)

 

맞는 말이다. 이제는 원산지 확인은 구매자들이 꼭 하지만 구매하는 음식이 로컬푸드인지의 여부는 잘 확인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로컬푸드가 아닌 음식은 장기간의 이동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재처리가 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는 로컬푸드는 그런 재처리 과정이 없기 때문에 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 음식, 식품을 구매할 때 하나하나 따져보고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좋지만 그러기가 또 쉽지 않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주말의 대형마트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고 똑같은 종류의 식품에도 브랜드가 여러 가지라 하나하나 들고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좀 더 몸에 좋은 음식이나 식품, 더 안전한 것을 찾으려 한다면 그런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책의 말미에 이 책을 읽은 아이와 청소년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소개가 삽입되어 있는데,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실제로 해본다면 생각하지 못했던 관심과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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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튜즈데이 - 한 남자의 운명을 바꾼 골든 리트리버
루이스 카를로스 몬탈반.브렛 위터 지음, 조영학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한 번도 개를 키워 본 적이 없다. 다른 동물도 키워 본 적이 없다. 요즘은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단순히 동물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가 되었다. 반려동물 관련된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여전히 이런 반려동물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유기하는 되먹지 못한 인간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제는 동네 공원이나 어디를 가도 반려동물과 함께 나온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반려동물들 중에서도 개는 유독 사람과 친하다. 전해져 내려오는 개와 관련된 민화도 많고 내 나이쯤 되는 이들에게는 어린 시절 명작 동화 <플란다스의 개>를 잊지 못할 것이다. 뭐가 그렇게 슬프던지 동생과 함께 일요일 아침부터 대성통곡을 했던 기억이 있다. 개를 사랑하고 아끼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요구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와 같이 반려동물로 개를 키워보지 않고, 개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권리도 중요하다. 특별히 개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만을 강조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권리만큼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개를 데리고 밖에 나올 때는 반드시 목줄과 함께 용변을 처리할 수 있는 봉지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해도 목줄을 착용시키지 않고 크게 짖으며 달려드는 개와 사람이 있다. 몇 몇 어린 아이들은 놀라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는 산책을 하거나 공원에 나가서 그런 사람을 보면 꼭 얘기 한다. 밖에 나올 때는 목줄을 착용시키는 게 맞지 않냐고. 본인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나와 같이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싫다고. 그러면 ‘어이쿠~ 잠깐 풀었는데 다시 채우죠.’ 하고 만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을 하고 살 수는 없다. 함께 사는 곳에서는 각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내가 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개 중에서도 큰 개는 좋아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튜즈데이같은 리트리버 종이나 말라뮤트, 허스키 같은 개들은 좋아한다. 그 외의 종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ㅎㅎ

아내도 개를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후에는 큰 개를 길러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고.

 

이 책 「기적의 튜즈데이」는 사람과 리트리버 종 개 한 마리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처럼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꽤 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할 때가 많다. 특히 그 사람이 나와 일정한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 구도라면 이것은 더욱 심해진다.

 

외상성 뇌손상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에서 비롯된 대인기피증, 폐소공포증

 

또 다른 주인공 루이스 카를로스 몬탈반의 병명이다. 그는 두 차례나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별명이 터미네이터라고 불릴 정도로 신체적 조건이 좋았고 진급이 보장된 뛰어난 장교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전쟁은 그를 완전히 폐인으로 몰아넣었다.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부적응자가 되었고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였다.

아내의 친한 친구가 폐소공포증을 앓았었는데 실제로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한다. 갑자기 사방이 막힌 것 같고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대학 시절 아내가 서울까지 가는 기차를 일부러 같이 타고 가 준적이 있는데 좌석에 앉아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 손을 꽉 잡은 채 한순간도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가 정말로 신뢰하고 안정을 느끼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힘들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는데 대학 때는 너무 힘들어 1년을 휴학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만큼 큰 것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몬탈반은 폐소공포증에 대인기피증, 거기다가 외상성 뇌손상과 척추 손상까지 입었다. 아내의 친구는 어린 시절에는 주위 친구들의 도움으로, 결혼 후에는 남편 덕분에 잘 견디며 생활할 수 있었는데, 몬탈반은 전쟁 후유증까지 더해 암흑과 같은 하루하루를 살았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 불면의 밤, 소화불량과 그에 따른 탈수와 복통” (p.95)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 몬탈반은 명예로운 상이군인이 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벗어나면 적어도 그곳보다는 불행이 덜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매일 보던 뉴스에서는 승리가 임박했다는 소리를 하고 정치인들은 실제로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에게는 관심도 없이 어떻게든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작만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 온 미국 땅에서 절망을 발견했다. 그리고 썩어 문드러진 전쟁의 구조를 발견했다. 그리고 망가져가는 몸을 방치했다. 아니, 더 망가지도록 부추겼다.

그런 그에게 튜즈데이가 나타났다.

 


“‘전우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교도소 강아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외상성 뇌손상 및 신체부위 손상으로 고통 받는 이라크·아르헨티나 전역병에게 매년 30마리의 도우미견을 무료로 분양하고 있습니다.” (p.135)

“어떤 면에서는 튜즈데이와 닮았다. 사랑받으며 열심히 살고 싶었지만, 애정의 대상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p.64)

 

튜즈데이는 철저하게 사람을 위해 태어난 개다. 그의 어미도 그랬다. 그의 형제들도 그렇다.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쳐 분양 되었지만 버림받았다. 몬탈반이 고국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튜즈데이도 그랬다. 같은 상처를 가진 두 존재가 만나서 진정한 우정을 찾아 간다. 흔히 알고 있는 도우미견은 시각장애인 옆에 있을 경우가 많았다. 반려동물에 대한 개념이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는 미국에서조차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거구의 남성과 함께 하는 튜즈데이의 모습이 낯선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지만 미국의 중심이라는 뉴욕에서조차 튜즈데이와 함께 식당에 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과 의구심으로 가득찬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무감각해 지기까지 몬탈반과 튜즈데이가 겪은 수모과 고통은 짐작조차 어렵다.

 


“튜즈데이는 단순한 치유를 뛰어넘어 일종의 큰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p.202)

“내가 계단을 내려가도록 도와주는 것 외에도 150여 가지의 지시에 반응하도록 훈련받았다. 내 호흡이 가빠지거나 맥박이 빨라지면, 머리로 나를 때려 과거의 악몽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도록 도와준다.” (p.11)


몬탈반은 튜즈데이를 만나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게 된다. 실패한 인생, 폐인의 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던 자신에게 튜즈데이는 도우미견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책에서 몬탈반의 그런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데 마치 격렬하고 애틋하게 사랑하는 연인 같기도 하고 목숨보다 더 상대를 아끼는 형제 같기도 하다. 버림받은 상처를 가진 튜즈데이도 자신에게 마음과 정성을 쏟으며 진심으로 소통하는 몬탈반의 헌신을 신뢰한다. 수십 년 동안 이어 온 사람 사이의 우정과 같은 끈끈함이 몬탈반과 튜즈데이 사이에 존재 한다. 비록 터놓고 마음을 쏟아 낼 수 있는 대화가 불가능 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서로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 지는 책을 통해 절절하게 알 수 있다.

 


“미국과 이라크 군대 내부의 부패불감증과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감 결여. 당연한 얘기지만 기고문은 군 고위층에게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p.124)

“나는 침대를 책상 삼아 전쟁에 대해 연구하고 국가보훈청 뉴욕 지부의 무능력과 부패를 파헤쳤다. 나를 비롯해 수천 퇴역군인들의 뒤통수를 친 사건을 담은 내 보고서는 윗대가리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p.209)

 

튜즈데이로 인해 일어난 기적은 몬탈반의 삶의 자세와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던 그에게 이제는 적극적으로 상이군인에 대한 처우 개선과 복지확대를 위해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에 최선을 다하게끔 했다. 그리고 미국의 전쟁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비판하고 돌을 던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대책이 마련되도록 힘을 다한 것이다.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니 많은 사람들 보다 더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삶을 살아가며 각자가 경험하는 절망과 고통이 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매일의 삶이 항상 행복하고 평안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을 바라고 산다. 아니, 기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행복을 바라고 산다.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으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과 영화, 사진과 TV,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누구나 튜즈데이를 만나는 기적을 경험할 수는 없듯이 모두가 사람에게 상처와 스트레스만 받는 것은 아니다. 매일 보는 그 사람으로부터 뜬금없는 행복을 발견할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아주 낮겠지만.

노후가 되기 전에 튜즈데이와 같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보고 싶다. 내게 있어서 이런 생각은 엄청난 변화다. 굳이 튜즈데이처럼 내게 기적을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진정한 우정을 나눠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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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발명가
최우근 지음 / 북극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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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빠 빠 빠밤~ 빠빰~ 빠빠빠빠 빠밤~!

 

‘이 사건은 0월 0일 일어난 사건으로서...’

 

로 시작되고 끝나던 프로그램. 한 때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경찰청 사람들>이다. 현역 경찰관이 프로그램의 나레이션을 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던 프로그램이다. 전혀 어색하지 않는 전문 성우나 배우가 아니라 실제 경찰관이 나와서 어색한 표정과 말투로 나레이션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경찰청 사람들>이 방송된 다음날 학교에 가면 어김없이 시그널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하고 어제 나왔던 경찰 아저씨의 재미난 표정과 사투리를 흉내 내기도 했다.

이 책 「이웃집 발명가」의 작가가 바로 <경찰청 사람들>의 작가였던 최우근 씨다. 책의 소개 글과 추천 글만 보고 이 책에 대해 정말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표지 뒤에 실린 저자에 대한 설명만 읽고도 충분했다. 어린 시절 <경찰청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이렇게나 컸는지 몰랐다. ㅎㅎ

희곡이라는 장르는 낯설다. 희곡 작품이 무대나 공연장, TV세트를 통해 극으로 탄생해야 하는데 한국의 실정은 호락하지 않다. 연극 장르는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고사되었다고 봐야 한다. TV에서는 방송국과 외주의 특정한 업체에서 만들어내는 일주일 간격의 코미디쇼가 전부다. 그것도 요 몇 년간은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연극과 TV를 제외하고 희곡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아주 어린 시절, 동네를 방문하는 약장사 공연단이 있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 이 말을 실제로 들어 봤다. 내 기억에 그 아저씨, 아줌마들은 동물들도 데리고 나와 공연을 했고 주로 차력과 마술을 했던 것 같다. 여장한 아저씨가 삐에로 같은 화장을 하고 연기를 하면 둥글게 모인 어른들이 박장대소를 하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다. 희곡이 공연되고 오를만한 무대가 없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은 이미 연극무대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무대에서 공연된 네 작품들이 각각 어떤 평가를 받았고 관객들에게 어떤 호응을 받았는지 알수 없지만 적어도 연극이라는 장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한 생각부터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와 간 서울에서 <택시 드리벌>이라는 연극을 봤다. 충격이었다. 경상도 중소도시에서는 절대로 접할 수 없는 공연이었다. TV보다, 영화보다 더 생동감 있고 신났다. 이후로 몇 편의 연극을 더 보기는 했지만 이제까지 본 영화 편수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도 몇 개의 소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오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보지 못했다. <택시 드리벌>을 너무너무 재미있게 봤지만 더 찾지 못했다.

그 때 본 <택시 드리벌>에서는 질퍽하고 구수한 욕설이 난무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정부와 있는 놈들에 대한 비판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에 주목할 틈도 없이 내 눈 바로 앞에서 연기를 펼치는 두 배우에게 온통 정신이 빼앗겼다.

연극의 무대 연출은 영화나 TV극의 그것보다 단순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와 탄탄한 시나리오 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네 편의 작품은 재미있다. 콘티 형식으로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대사가 길지 않고 인물 간에 주고 받는 형식이 대부분이어서 긴장감도 있었다.

 

 

첫 번째로 실린 <이웃집 발명가>에서는 현대인과 강요받는 현대인의 생활 패턴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또, 또, 또 변명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알아듣겠어요? 지금 처한 현실에 안주하는 건 박사님 인생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구요. 그런 자세로, 박사님이 그렇게나 원하는, 이름만 대면 척하고 알아들을 만한 유명한 발명품을 어느 세월에 만들겠냐구요.” (p.31)

 

로즈밀러 양은 현실적인 인물이다. 뜬구름 잡는 박사를 보고 답답해한다. 로즈밀러 양의 평소 성격과 기질로 보면 답답하고 속 터지기만 한 발명가 곁을 떠나지 못한다. 로즈밀러 양의 태도가 발명가의 그것보다 더 답답해 보인다. 아내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오다가다 마주치기만 하는 이웃일 뿐인데, 막무가내의 논리로 계속 발명가를 상대한다. 현실에 필요한 사람은 넘쳐 나고 찾아보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현실 감각 제로인 발명가 곁을 떠나지 못한다. 떠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 테다. 결국 로즈밀러 양도 관심이 필요한 현대인의 전형일 뿐이었다. 훤한 대낮에 어둠을 만들어 내는 발명가의 창조적인 발명품은 로즈밀러 양의 말대로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발명품이다. 찾아보면 필요한 곳은 있겠지만 당장 먹고 사는 데는 필요가 없다.

발명가는 그의 유일한 친구, 블랙도 말할 수 있게 했다.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니…….

 

 

“개를 조수로 쓰다니……. 이건 명백한 동물학대예요!”

“동물학대요...?”

“전 학대 받은 적 없는데요?”

“불쌍한 것.. 자기가 학대받는 줄도 모르다니...” (p.41)

 

로즈밀러 양은 발명가와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 둘은 대화를 지속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타협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발명가와 함께 사는 개, 블랙을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발명가는 자신의 곁을 지키는 블랙을 위해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한다. 블랙과 소통하고 그를 통해 위로 받고 힘을 얻었던 것이다. 발명가와 블랙에게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지만 로즈밀러 앙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그녀의 말대로 개는 개다워 하고 개답게 살아야 하는데 인간도 아닌, 개도 아닌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물론, 블랙은 얼토당토 않는 말이라고 항변하지만 사람이란 자기 생각대로 사는 존재다. 스스로 깨닫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거나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사실 로즈밀러 양과 발명가는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존재하는데 서로 티격태격 할 뿐이다. 생각이 너무 다른데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 성격과 기질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은 곤욕이다.

결코 반갑지 만은 않은 두 사람을 통해 현대인이 맺는 관계의 군상들을 생각해 본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 맞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같이 지내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티격태격 주고받는 로즈밀러 양과 발명가, 블랙과의 대화를 통해 현재를 그대로 직시한다.

 

 

두 번째 작품 <판다 바이러스>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을 생각나게 했고, 세 번째 작품 <거기에 있는 남자>는 류승범이 출연한 영화 <만남의 광장>을 생각나게 했다.

 

 

네 번째 작품 <이웃집 발명가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그렇게 티격태격 하던 로즈밀러 양과 발명가가 결혼해 부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게 안 맞는 사람 둘이 결혼을 했다. 당연히 사랑하니까 결혼을 했겠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데요?”

“개라면 당연히 개답게 살아야지.”

“사람들은 모두 사람답게 사나요?” (p.323)

 

아프리카로 3년 동안 여행을 떠났던 블랙이 돌아왔지만 발명가와 결혼한 로즈밀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발명가를 남편으로 두고 있지만 그녀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바뀔까?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내 부모님을 봐도 뻔히 알 수 있다. 30년 넘게 부부로 살아왔지만 신혼 초 싸웠던 그 사소한 것으로 아직도 다투신다. 그런 부모님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나 자신을 봐도 그렇다. 유독 내가 싫어하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성격과 기질은 죽어라고 바뀌지 않는다. 어느 정도 노력을 하고 애를 써서 이제는 괜찮겠지 잠시만 마음을 놓으면 어느새 툭 하고 튀어 나온다.

개라면 개답게 살고 사람이라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바뀌지 않는 성격과 기질에 목숨 걸 필요 없다. 생겨먹은 대로 살면 된다. 다만 염치 있게 살아야 한다. 나는 작가의 표현을 염치로 해석 했다. 개라면 개다운 염치, 사람이라면 사람다운 염치.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각자 판단해야 할 사항이다.

염치조차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라 피곤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여긴 이미 가진 자들의 세상이에요. 약자에겐 단 한 계단 올라갈 수 있는 지식도 정보도 기회도 제공되지 않아요.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빼앗기고 더 빼앗기고 완전히 빼앗기겠죠. 물론 저건 박사님이 만드셨죠. 하지만 박사님이 저걸 없애신다면... 그건 약자들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도둑질하는 겁니다.” (p.367)

 

돌아온 블랙은 여전히 이상을 가지고 있다. 3년 동안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기린과 결혼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발명가와 나눈 이상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더욱 발명가를 독려한다.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구조적인 문제에까지 도달한다. 개답지 못하게 말이다.ㅎㅎ

 

 

“저기 언덕 위에 미성 아파트 있잖아. 거기 관리소장인데... 경비 자리가 비었다고 해서 아까 면접 봤거든. 내일부터 나오래.” (p.379)

 

발명가는 현실과 타협하고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는 것 같지만!!

결말을 그렇지 않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 한다.

영화 얘기를 여러 번 하게 되는데 마지막 장면은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 쇼>의 결말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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