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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
방현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5월
평점 :
서울에 대해 물리적 친근감은 없다. 되려 낯설고 기괴하다. 언제부터 인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당시로부터 사람도, 돈도, 분위기도, 말도, 소문도 그곳으로 몰려 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곳, 그곳이 두 번째로 큰 도시라 할지라도 시골이라 생각한다지. 쳇. 어차피 만들어 낸 허상의 성밖에서 언제나 성문이 열리려나 목을 있는 대로 집어 빼들고 있는 꼴들이니 분통터진다 해도 만들어 진 수모를 감당할 수밖에.
방현희의 소설을 처음 만났다. 최근 들어 단편 소설을 엮은 소설집을 몇 권 읽었는데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나’는 하나같이 외롭고 고독하다. 서울로 대변되는 사회에 대해 소극적이고 방관자적이며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어차피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는 한계를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덤벼들기도 전에 겁만 잔띡 집어먹은 채 포기해 버리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방현희의 작품 속에서의 ‘나’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변명거리를 덧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하릴없이 자기 머리를 그대로 짓이기는 삶을 예찬할 수만은 없다. 어차피 아픈 건 나니까.
“구멍으로 내다보았다. 강이 작은방으로 나와 벽에 붙여놓은 소파에 발을 들고 앉았다. 그렉안나가 발수건을 가져다주니 먼저 수건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p.30)
<로스트 인 서울>에 나오는 ‘강’은 다른 인물들 보다 확실히 강자다. 그는 자신이 가진 신체적·사회적 우위를 가지고 그렉 안나를 휘두른다. 고통이라는 것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역치값이 정체되는 고약한 면을 가지고 있는 터라 안나는 ‘강’에게 그대로 사로잡히고 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강’의 눈을 피해 ‘나’와 숨막히는 밀회를 감행하는 것이다. 차마 밀회를 즐기지조차 못한다. ‘강’의 마수는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멈춰버리게 하는 공포 그 자체다. ‘나’는 그렉 안나가 ‘강’에게 당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쪼그려 앉아 훔쳐는 것. 당하고만 있는 그렉 안나를 구해주려는 시도조차 한 번 하지 않는다. 뛰쳐 나가 당하고 있는 그렉 안나가 보는 앞에서 ‘강’을 후려칠 용기, 아니 마음조차 없다. ‘나’도 그냥 그렇게 순응해서 사는 것이다. 그저 ‘강’에게 얻어맞은 그렉 안나의 상처를 핥고 애무할 뿐이다. 동물들이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핥아내는 것처럼 그렇게.
“머릿속이 수만 조각으로 갈라져 흩뿌려지더니 한 점 한 점 붉은 벨벳 위로 떨어져 내렸다 향기란 차원이 다른 세계에 속한 것임이 분명했다. 앞뒷말을 계산하고 후환을 두려워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몸 어디선가 시키는 대로 간신히 입을 열어 연기를 내뿜으며 그 연기 끝에 몇마디를 딸려 내보냈다.” (p.128)
<그 남자의 손목시계>의 ‘나’도 <로스트 인 서울>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확한 이유나 자세한 상황 설명조차 한 번 없이 ‘나’는 엄마가 그 남자에게 무방비로 얻어 맞는 꼴을 마주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반복된 그 남자의 폭력은 가히 압도적이다.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게는 일말의 거리낌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그 남자에게도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손목시계다.
“그런데 장식장에 잘 모셔놨던 그 시계를 엄마가 떨어뜨려 유리를 그만 깨뜨린 일이 있었다. 이게 어떤 건데, 너 같은 년이 손을 대, 대통령님이 주신 것을.....” (p.143)
집 안 구석에 고이 모셔둔 금고 안에는 그 남자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손목시계가 있다. ‘나’의 엄마가 초죽음이 될 정도로 얻어 맞은 직후에도 그 남자는 어김없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리품을 신전에 갖다 바치며 짓는 웃음처럼 그 남자는 그 금고를 열고 손목시계를 보는 순간만큼은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그 남자로부터 엄마를 탈출해 내고 그 남자가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금고 안의 손목시계를 모조리 때려 부수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다가왔다. 그 남자 몰래 그 남자의 금고를 열 수 있게 되었고, 그 남자의 손목시계를 마주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무방비로 그 남자에게 얻어 맞는 엄마를 볼 때마다 이를 갈며 다짐하고 다짐하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기껏해야 그 남자의 손목시계를 부수려는 소심한 복수조차 감행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그 남자에게 순응되어 있다.
‘구조’에 속한 ‘나’는 티끌에 불과하다. 그 ‘구조’라는 것이 때로는 괴물일 수도 있고 때로는 천사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문학에서는 괴물일 때가 많다. 사실, 일상에서도 괴물일 때가 많다. ‘나’는 그저 ‘구조’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약속된 룰이고 도덕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면 ‘나’는 당장 부적응자가 된다. 차라리 가차없이 내팽겨쳐 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괴물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 ‘부적응자’라는 주홍글씨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손가락질과 음흉한 수근거림을 견딜 수 없다. 차라리 순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구조’가 가진 원리고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괴물의 얼굴이다.
“그의 선심에서 희망을 엿본다. 때가 무르익어가는군. 머지않아, 나를 밖으로 실어 나를 거야. 나는 그들의 손에 의해서 나가는 거지. 내가 저 전압 높은 철문을 열지 않아도, 내가 무슨 바보처럼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거나, 헬리콥터를 대기시키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들이 나를 곱게 모셔 나르는 거니. 나는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들었다.” (p.111)
<탈옥>에서 ‘나’는 이것의 가장 극적인 전형을 보여 준다. ‘나’는 교도소 밖에서 할 일이 분명한 사람이다. 내 머리와 손 안에서 엄청난 돈이 움직여야 한다. 사회와 철저히 단절된 교도소 안에 있지만 이미 ‘구조’를 움직이는 원리와 그 중에서도 돈이 되는 구조에 대해서는 빠삭하다. 그래서 ‘나’는 교도소를 나가야 한다. 하찮은 죄목으로 영어의 몸이 된 ‘나’지만 언제든지 ‘구조’를 벗어날 수도 바꿔버릴 수도 있는 존재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다. 이미 여러 번 탈옥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탈옥을 꿈꾼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감옥을 뼈나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넌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네 내장을 송두리째 다른 곳으로 도망시킨다 해도.” (p.114)
하지만 괴물의 얼굴을 한 ‘구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탈옥>의 말미에 교도관은 이미 ‘나’의 의도와 생각 전체를 읽고 있다는 말을 한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변수다. ‘나’는 당연히 ‘구조’를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했고 의기양양했는데, 하찮은 교도소의 볼품없는 교도관에게 ‘나’를 완전히 들켜 버렸다. 폼도 나지 않고 변명을 덧붙일수도 없는 완전한 패배다. 작품에서는 어떻게 교도관이 ‘나’의 의도를 간파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무리 된다. 구차하게 설명하고 묘사하지 않아 더욱 공포스럽다.
<세컨드 라이프>, <후쿠오카 스토리>,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퍼펙트 블루> 나머지 단편들도 재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