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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라질 어젠다>















브라질 하면 딱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다. 축구, 아마존, 카니발, 룰라대통령 등. 일주일 후면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린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두고 몇 해 전부터 말이 많았다. 브라질 축구의 대부 펠레가 지연되는 경기장 공사와 관련된 각종 부패와 비리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었는데, 며칠 전에는 자국민들의 반월드컵 시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며 도리어 국민들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노동자 출신 진보 대통령인 룰라가 집권하면서 나름 브라질 전체에 만연해 있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를 어느 정도 해소했는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니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우리나라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다보니 사실 알고 있는 바가 전혀 없다. 그래서 브라질 사람의 눈에서 바라본 현대 브라질의 48가지 모습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한두사람이 쓴 책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쓴 책이 어떤 경우에는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오해하고 있거나 잘못 알려진 브라질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리라 생각된다. 





2.<뜨는 도시 지는 국가>














며칠 전 6.4 지방선거가 있었다. 민선6기 지방자치단체장을 선출한 선거였다.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선거 중에서 가장 투표율이 낮고 관심도 적은 선거인데, 사실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가장 큰 체감효과를 주는 선거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후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지방자치단체장의 힘이 더욱 강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전의 관선 단체장들은 현역 국회의원이나 정부의 눈치를 당연히 봐야 했고 따라서 시민이나 군민보다는 현 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상하 개념이었다. 

이번에 재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경우를 보면 지자체장을 잘 뽑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것이 시민의 생활을 어떻게 더 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좋은 사례다. 두 시장 모두 재임기간 내내 반대편에 의해 공격받고 음해 당했지만 결국 시민들이 두 분 시장을 투표로 결정한 것이다. 실제로 시민 자신들의 실생활의 질적 개선이 없었다면 두 시장은 재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세계의 도시들을 소개한다.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도시가 주체적으로 해나가서 성공을 거둔 사례들을 소개한다. 더 이상 국가 권력이나 지속되어 온 기득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유의미하다. 제목처럼 도시가 더 발달하고 주체적이어야 생동감을 담보할 수 있다. 






3. <칼날 위의 평화>














지난 대선 직전 참여정부, 특히 고 노무현 대통령을 끈질지게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는 NLL대화록의 내용이 이상하다고 하다가 여의치 않자 사초가 어떻고 저떻고 하며 대선 내내, 대선 이후에도 난리를 쳤다. 그런데 얼마 전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노 전대통령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워낙 이쪽 야당은 무능하고 한심해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도 일언반구 말도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참여정부 시절 NSC를 설계하고 사무처장으로 일하기도 한 전 통일부장관 이종석씨다. 흔히 보수는 안보에 특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지난 이명박 시절 노크 귀순 북한군이 넘어오기도 하고 연평도 포격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적어도 참여정부 시절에는 총체적 국가 안보를 컨트롤 하는 NSC라는 타워가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을 하지만 철저하게 안을 다지는 실속있는 안보개념인 것이다. 겉으로만 통일 통일 어쩌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래도 참여정부에서 실질적인 분야를 담당한 저자이다 보니 생생한 뒷이야기는 물론, 전체적인 상황도 아우르는 그림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4. <18세기 한중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이제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정민 교수의 책이다. '추사 김정희' 전문가로 알려진 후지쓰카 지카시의 수집 서적 중 일부가 흘러들어간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문서들을 고증한 책이다. 18세기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조선의 지식인들이 어떤 교류를 했는지에 대한 여러 고문서들을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있는 1년 동안 탐독하며 쓴 책이라 할수 있겠다. 

다른 내용이나 목차보다 궁금한 것은 조선의 지식인들과 청나라의 지식인들간의 교류라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기로 당시 조선의 사대부와 유림들은 청나라보다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기꺼이 어버이로 모시는 정도였는데, 어떻게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교류가 있었냐는 것이다. 물론, 청나라가 완전히 대륙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지만 적어도 명말부터 청초까지는 조선의 궁정에서조차 기울어가는 명나라를 더 위하고 청나라를 대놓고 무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겠지만 문화, 인문학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청나라와 조선의 지식인들간의 교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국가 간 정치적인 역학관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나키즘적 지식인들간의 교류였을까? 진짜 내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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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식탁 - 독성물질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나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권지현 옮김 / 판미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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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주하는 식탁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는 제목이 자극적이다. 웰빙 이라는 단어가 광풍처럼 번지며 너도나도 좋은 먹거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전까지 소비자에게 제품을 판매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기업들마저 자사의 제품 광고에 유기농, 웰빙이라는 카피를 넣어가며 유행을 부추겼다. 시사프로그램들 중 소비자의 먹거리를 고발하는 몇몇 프로그램은 방송 중에 주요 포털의 실시간검색어 상위에 랭크되기도 한다. 그만큼 사람들은 먹거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단지 농촌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이전 세대들이 고향에 대한 향수와 도시생활에서의 전원을 느껴보고자 텃밭을 가꾸거나 하던 것이 이제는 대규모 주말농장을 분양받기도 하는 사업으로 커지기도 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생산과 구매의 복잡한 중간과정을 한 번에 없애버리는 협동조합 형태의 사업들도 유행이다. 어린 아이를 가진 지인들 중 대다수가 지역 내 협동조합에 조합원으로 가입해 일반 대형마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유기농제품을 다소 비싼 가격에 구입해 먹기도 한다. 아무리 자본주의사회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먹는 음식에 장난질 하거나 단지 돈의 논리로 불법을 자행하겠나 싶지만 가만히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 했다. 바로 생각나는 것은 삼양라면 사건이었다. 폐유에 가까운 기름으로 만든 면발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판매가 중지되었으나 슬며시 지금은 다시 판매되고 있다. 과자류에서 쥐의 꼬리로 의심되는 이물질이 나오거나 하는 사건은 유명했다. 내가 먹고 내 가족이 먹고 내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이런 장난질을 하는 회사가 드러나면 소비자들은 분개한다. 불매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비난을 쏟아 붓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그 제품을 사 먹는다.

 

이것이 이 책 「죽음의 식탁」서평의 결론이다.

 

 

이 책은 거대 다국적 농약회사와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회사가 어떻게 우리들의 식탁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드리우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이전 책에서 거대 다국적 농화학기업 몬산토를 고발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존재론적 당위인 사기업만을 고발하지 않는다. 그렇게 소비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농약과 화학물질의 생산과 유통, 소비가 단지 사기업의 천박한 이익추구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신뢰가 팍팍 가는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유럽정부의 각종 국영 협회와 연맹들이 어떻게 사기업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의 공공연하지만 내밀한 유착이 작용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2009년 6월 11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마거릿 챈이 엄숙하게 ‘신종플루 대유행’을 선언하면서 세계는 공포에 떨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수만 명이 죽어 나갈 것이라던 예측과 달리 ‘돼지 독감’의 희생자는 해마다 찾아오는 일반 독감보다 열 배나 적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백신을 제조하는 다섯 개 업체 - 노바티스,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사노피 파스퇴르, 백스터, 로슈 - 에게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백신 판매로 60억 달러나 되는 이익을 나눠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에 자문을 했던 ‘전문가’들이 이 ‘비통한 사기극’을 이용한 기업들과 유착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p.356)

 

 

기억난다.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2009년 초여름 한국 주요 언론에서도 연일 보도를 쏟아냈었다. 들어보지도 못했던 ‘신종플루’라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이고 어린아이나 노약자 심지어 성인에게도 치명적이라는 것이었다. ‘플루’라는 것이 단지 감기바이러스를 일이키는 것에 불과하지만 ‘플루’라는 단어 앞에 ‘신종’이 붙게 되면서 사람들의 공포는 가중되었다. ‘신종’이라는 단어가 전염병을 수식할 경우에 그것이 가져오는 불확실성에 의한 공포는 재난 수준이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난리도 아니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으나 보건당국에서는 어린 아이와 노약자들에게는 무료로 접종을 실시했고, 그 기준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의 성인들은 자기 돈을 주고 백신을 접종해야 했었다. 실제로 TV에서는 ‘신종플루’로 인해 사망한 사례를 계속해서 보도했고, 유명 탈렌트의 아이조차 그것으로 인해 사망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 ‘신종플루’를 파헤친 저자의 기록은 충격적이다. 세계보건기구라는 정말 이름만 들어도 무한 신뢰가 가는 기구의 사무총장이 새로운 전염병의 대유행을 선언했을 때,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국의 질병관리본부에서 선언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뢰를 가진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이없게도 대형 다국적 제약회사의 배를 불려주는 것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신뢰를 있는 대로 던져주고 싶은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의 대유행 선언이후 1년이 지나면 수만 명이 사망할거라고 했던 신종 전염병의 치사율은 매년 찾아오는 일반 독감의 그것보다 10배나 작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공포로 인해 뭉칫돈을 벌어들인 이들은 백신을 만든 제약회사들이었다는 것이다.

 

다국적 제약회사들과 유착된 ‘전문가’라는 놈들이 세계보건기구를 펌프질 했다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사기극이 일어날까? 싶은데, 실제로 일어났다.

 

 

“식품 사슬을 오염시키는 해로운 제품을 규제할 때 주로 사용하는 도구인 일일섭취허용량은 소비자의 건강보다는 기업을 더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p.305)

 

 

일일섭취허용량. 이 단어도 낯설지 않다. 우리의 식탁위로 올라와서 섭취하게 되는 음식물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제품들에 명시된 단어다. 일일섭취허용량. 소비자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되는 이 단어의 탄생 일화가 허무맹랑하다.

 

 

“몇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정했지요.” (p.327)

 

 

몇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일일섭취허용량이라고 정합시다.”라고 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허용 범위’란 사회적이고 규범적이며 정치적 혹은 상업적인 개념입니다. 또 누구를 위해 ‘허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허용 범위의 개념 뒤에는, 얻는 이익에 비해 리스크를 허용할 만한가하는 질문이 늘 숨어 있습니다. 이익을 보는 쪽은 항상 소비자가 아닌 기업입니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쪽은 소비자이고 이익을 가져가는 쪽은 기업인 것이죠.” (p.333)

 

 

맞다. 우리의 섭취허용량을 정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물론 테이블에 둘러앉은 몇 몇은 전문가들이었다. 일반 소비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다. 그렇다 해도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그들에게 위임한 적이 없다. ‘허용범위’라는 개념은 철저하게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개념이다. 몇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정했으니, 그 ‘허용범위’의 주체와 객체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책의 설명대로 기업 입장에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셈이다. 너무 흔하고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던 ‘일일섭취허용량’이라는 개념에 이토록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몰랐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졌던 것일까?

 

 

“나는 회전문 인사(Revolving Door) 기업 대표들이 정부 단체나 국제기구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임무가 끝나면 다시 기업으로 돌아가는 시스템” (p.359)

 

 

이유는 바로 ‘회전문 인사’다.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숙한 단어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현재 박근혜 정권에까지 이 ‘회전문 인사’의 폐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나마 정권과 여당 주변에서 가장 깨끗한 인사라고 평가되던 안대희씨가 총리직 발표 6일 만에 황급히 사퇴했던 것을 보면 현 정권의 인사 난맥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나라 상황이고.

 

(여러 번 반복하게 되는데) 이름만 들어도 신뢰가 가득 가득 가게 되는 국제기구에서도 이런 ‘회전문 인사’가 만연해 있다고 하니 충격적이다. 미국이 유령기구처럼 만든 IMF나 국제은행 같은 기구는 경제·금융 분야니까 그런 일들이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보건과 환경을 다루는 국제기구들조차 이런 ‘회전문 인사’가 만연해 있다고 하니 막막하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다국적 농화학·합성화학 기업들이 각국의 정부 단체는 물론 국제기구의 고위직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독성학자와 화학자 들이 화학 업계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p.39)

“우선 기업이 돈을 대는 연구소 대부분은 에스트로겐 성질이 있는 화학물질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쥐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p.502)

“현재 사용되는 농약 중 동물이나 인간에게 암을 유발하는 제품은 전무하다. 농약과 암의 상관관계는 추정일 뿐이지 견고한 데이터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p.237)

 

 

 

이들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책에서 소개된 유명한 학자는 줄곧 다국적 농화학 기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그 기업의 고위직에 가게 되고 이후에는 그 기업의 막대한 연구 지원을 받아 저런 연구결과들을 내놓는 것이다. 이런 어용과학자들의 연구결과는 다국적기업과 각국의 정부단체, 국제기구의 삼각 회전문 인사를 용이하게 하는 윤활유가 된다. 일부 환경단체나 저자와 같은 운동가들에 의해 농약과 화학물질의 폐해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어 증거로 제시되었을 경우, 자신들이 고용한 유명한 어용과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반증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100% 증거란 존재하기 어렵다. 수많은 농약 피해자들의 임상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100% 기업의 책임으로 입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관련 학계에 종사하는 모든 학자와 과학자들이 기업의 책임을 묻는다 하더라도 각국의 정부기관과 국제기구에 유착된 다국적 기업들을 벌할 수 없을 텐데, 기업이 제시한 당근에 넘어간 어용과학자들이 소수라도 있는 한 기업은 계속해서 돈을 벌수밖에 없다. 기업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식탁에는 죽음이 가까워지고, 그 농도가 짙어진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개혁은 인간이 환경에서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모든 상황을 고려한 ‘노출학’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p.552)

“화학오염물질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능한 한 유기농을 드세요.” (p.557)

 

 

책의 결론 부분을 읽으며 맥이 빠졌다. 가능한 유기농을 사 드시라니. 물론, 기업과 정부단체 국제기구까지 유착된 현 상황을 타계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이해된다. ‘일일섭취허용량’이라는 낯설지만 전혀 모르고 있었던 기업의 사기멘트에 속지 말고 제품 하나를 사더라도 더 꼼꼼하게 따지고 찾아보고 검색하는 적극적인 소비자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렇지 않으면 만연한 자본주의의 서슬을 감당할 수 없다. 알아서 찾아보고 알리고 공유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다른 가계 영역에서의 소비를 줄여서라도 시중가격보다는 다소 비싼 유기농 음식을 찾아서 구매하는 것도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한 일이다.

 

 

“조지 W. 부시가 연임하면서 공공 보건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지요. 피터 안판테가 그랬듯이 저도 잘릴 뻔했습니다.” (p.254)

 

 

하지만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미국 국립환경보건원 제임스 허프 박사는 지난 대선 결과를 받아 든 한국의 49% 시민들이 가졌던 그 멘붕과 비슷한 멘붕을 겪은 사람이다. 조지 W. 부시가 연임하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부시의 연임이후 미국의 보건당국에서 일하던 제임스 박사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표현했다. 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미국 국민들의 안전과 보건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거대 기업이나 정부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지난 이명박 시절 그 어떤 말단직이라도 참여정부에서 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잘라버렸던 사례와 유사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위축된다. 하고 싶은 말은 목 뒤로 넘기고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국가에서는 ‘규제 철폐, 규제는 암덩어리’라는 표현을 써가며 어떻게 해서든지 규제를 없애버리려 하는 모양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3년 반 남은 임기동안 정말 무수히 많은 규제를 철폐할 생각인가 보다. 그런데, 국민의 건강·보건·환경에 관한 규제도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처리한다면 죽음의 식탁은 이미 바로 내 밥상머리에까지 와 있는 꼴이 될 것이다. 어떤 규제는 수십 년 이어 온 관성과 관습에 의해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있고 어떤 규제는 개발이나 성장에는 걸림돌이 되기는 하지만 전체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정부나 정부단체, 전문가들께서는 일반 소비자 혹은 시민들보다 똑똑하시고 더 잘 알고 계시니 그런 규제들을 잘 구분해 내시겠지만 불일 듯 일어나는 의심과 노파심은 거둘 길이 없다.

 

 

“그때까지 다뤘던 농약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는 정말 단 한 순간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제조업체를 믿었고, 판매를 승인한 기관을 믿었으니까요.” (p.119)

 

 

기업에서 정부 기관에서 괜찮다. 괜찮다. 해서 농약을 사용했는데, 내 몸이 완전히 망가진다면 도대체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할 수 있을까. 단지 농약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화학물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것들이 정확하게 어떤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어느 정도의 노출이나 섭취로 인해 어떤 질병이나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곳도 없다. 앞서 말했듯이 소비자가 알아서 찾아나서야 한다. 암담하고 슬픈 일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갑자기 한날한시에 그간 자신들의 잘못된 논리와 제조행태를 사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자사의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 시스템은 질병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정치, 경제, 규제, 이데올로기의 규범이 인간의 건강이나 환경보다 이윤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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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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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에게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경험을 바라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이 한 번쯤은 있었다.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뒤척이는 잠자리에서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 혼자만의 경험, 지극히 비밀스럽고 은밀한 그 기억이 그렇지 않아도 뒤척이던 몸을 더 안달 나게 만들기도 한다. 그냥 그 기억과 경험 그것 자체로 좋은 것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 시중에 떠도는 도덕이나 상식의 기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철저하게 비밀스럽고 은밀한 것이기 때문에 들킬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이념이나 가치 판단의 여지 또한 필요 없다. 그저 속으로 키득거리거나 살포시 입 꼬리를 올리기만 해도 된다. 톺아가며 따질 필요도 없고 애면글면 몸부림 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좋다. 편하다. 철저하게 나만의 것이다. 대단할 것도 저장해 둘 필요도 없다. 가만히 뒤척이며 입 꼬리를 올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럴까? 뭐?

그 사람이라……. 맞다. 그 사람도 그럴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은 충무로에 리얼리티를 이식한 홍 감독의 연출력만큼이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리얼해 충격적이었다. 남녀가 함께 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는 명제는 너무 흔하고 당연한 듯 보이는 것이지만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의 최면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저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남자는 전체 남자들 중 대다수이고 저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여자도 전체 여자들 중 꽤나 많을 것이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영화 <오! 수정>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인의 몸을 더듬는 것이 어떤 그(그녀)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그(그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는 내밀한 비밀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니 옷을 벗고 있는 것 같이 화끈했다. 그렇게 다른 것일 테다. 그렇다. 사람,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다.




ㄱ - 밝을 소(昭昭)


구 소소(昭昭)는 충분히 음울하고 슬픈 곳이다. 개발의 반대편에서 사위어 가는 소소의 풍경은 이 소설 전체의 메타포다.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그것도 좋네!”


ㄱ은 주인공이다. 중심이다. ㄴ과 ㄷ과 있을 때도 주인공이었다. ㄴ의 죽음 이후 경찰서에서 형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줄곧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불가항력으로 혼자 남게 되었지만 분해되어 가는 소소(昭昭)에서도 그녀는 밝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밝을 수 없다. 부모님을 잃고 오빠도 잃었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지우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누구에게는 가시처럼 박히는 것이 죽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선인장은 그녀 자신이다. 극한의 환경일수록 강한 가시를 드러내는 선인장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갑자기 ㄴ과 함께 살게 되고 갑자기 ㄷ과도 함께 살게 된 ㄱ이지만 소소(昭昭)하게 “혼자 사니 참 좋아!, 둘이 사니 그것도 좋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다. 분명하다.



“희로애락이 완전히 거세된.” (p.34)


ㄴ과 함께 파묻힌 시멘트 데스마스크를 보고 ㄱ은 희로애락을 떠올린다. 말도 안 되는 레토릭이다. ㄱ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ㄱ은 친오빠의 죽음과 ㄴ의 죽음을 동일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닥치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다. 갑자기 찾아온 ㄴ과의 섹스에서 환희를 경험하고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ㄴ의 과거까지 찾아다니며 마음속 깊이 묻으려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ㄴ이 죽은 뒤에야 그가 밴드의 베이스주자였으며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조지 해리슨을 꿈꾸던 뮤지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모두 메말라 선인장의 가시처럼 거칠게 존재할 뿐인 자신에게도 소유욕의 발로라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한 ㄴ을 찾아 나서지만, 그것 또한 ㄱ자신을 위한 자위다.



“나-ㄴ-ㄷ은 서로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


결국 ㄱ에게 ㄴ과 ㄷ은 소소한 풍경일 뿐이다. 정말 풍경이었던 것이다. <오! 수정>에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던 연인의 각자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 정도였던 것처럼 ㄱ과 ㄴ과 ㄷ은 함께 살면서 한 덩어리가 되었지만 ㄴ의 죽음 이전부터 ㄱ에게는 그저 풍경인 것이었다. 그녀를 살게 하는 선인장과 같이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매개일 뿐이다. ㄱ에게 기억되는 ㄴ과 ㄷ은 서로 아무런 요구조차 하지 않고 통성명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한 덩어리가 될 수 있는 모순된 연결이다.

ㄱ에게 있어서 ㄴ과 ㄷ은 작은, 소소(小小)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밝을(昭昭) 수 있다. 그 밝음(昭)이 모순적이라 해도 말이다.




ㄴ - 근심스러울 소(騷)


“셋째 날은 부서진 헛간의 문과 지붕을 고쳤고 넷째 날은 물이 새는 주방 수도꼭지를.. 다섯째 날엔...”

“나는 우물을 파면서 자주 2층의 당신을 올려다보지요.”


ㄴ은 존댓말부터 시작한다. ㄱ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그렇다. ㄱ이 조그마한 귀퉁이에라도 걸쳐진 장면을 모조리 기억해내는 ㄴ에게 ㄱ은 존재의 이유다. 어찌할 수 없는 존재적 무력 앞에 시위하듯 한 물구나무서기를 ㄱ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ㄴ의 근심은-소(騷)- ㄱ의 밝음-소昭-로 잠시 동안 잊을 수 있었다. 그것이 결국 ㄴ을 파멸케 했지만 ㄴ의 죽음 이후의 독백에서는 후회나 원망 따위는 없다.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거듭해서 ㄱ을 기억해낼 뿐이다. ㄱ에게는 그저 풍경 같을 뿐이었으나 ㄴ에게는 존재였다. 준비된 죽음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물을 파내려가는 ㄴ에게 ㄱ은 동경의 대상이다. 우물을 파면서도 2층을 기웃거린다. ㄱ에게 ㄴ은 그저 포크레인이었다. 그렇게 줄곧, 끊임없이, 쉴 새 없이 삽질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수수께끼였을 뿐인데, ㄴ에게 ㄱ은 달랐다. 그때부터였다. 처음 ㄱ과 몸을 섞게 된 그 밤. 2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오는 ㄱ의 발소리는 죽음을 예비한 ㄴ을 흔들었다. 가만히 뒤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안아주는 ㄱ의 몸에서부터 파장이 일었다. 자신을 껴안은 채 눈물을 흘리는 ㄱ으로 인해 ㄴ의 존재 전체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ㄱ의 기억 속에서는 줄곧 무미건조하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려 했던 ㄴ이었는데, ㄴ에게 ㄱ은 달랐다. 소중한 존재였다. 함부로 할 수 없고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선인장 같은.



“나의 멸진(滅盡)을 눈물로 배웅해준 당신.”

“사멸로 가는 듯 한 구소소의 분위기가 좋았어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ㄱ은 성가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죽음의 과정을 완성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던 방해꾼이었다. 먼지가 사라지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비유한 ㄴ의 지고지순함, 그 사멸해 가는 순간마저도 ㄱ을 귀퉁이에 넣으려는 한결같음에 박수를 보내야 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너무 애달프고 어렵다.

어쨌든 ㄱ과 몸을 섞은 후 단 한번이라도 조지 해리슨 이야기를 꺼냈다면 발그레 흥분하는 ㄱ과 함께 밤새도록 조지 해리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처음부터 사멸의 구렁텅이로 향한 ㄴ에게 어쩌면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당신이 몸을 구부려 세탁기 버튼을 누른 것과 내 몸의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은 동시였을 거예요. 나는 그렇게 믿어요. 당신-나, 혹은 나-그녀, 혹은 당신-나-그녀가 완벽하게 덩어리진 순간이었다고요.”


우물로 떨어지면서도 ㄴ은 ㄱ을, ㄷ마저도 끌어들인다. 너무 착한 사람인지, 너무 바보 같은 사람인지 나는 단정할 수 없다. ㄴ의 말처럼 우물 속으로 투하된 것인지, 투하한 것인지도 무의미 하다. 그래서 ㄱ이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고 ㄷ이 ㄴ을 밀었다는 행위 자체로 ㄱ으로부터 받는 의심도 무의미 하다. 처음부터 ㄴ은 죽음을 위해 소소(騷)했다. 그의 근심스러운 ㄱ과의 동거가 해피엔딩이 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뭔 놈의 사랑이 이런 가 모르겠다.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ㄴ에게도 단지 소소한 풍경이었을까? ㄴ은 죽음 이후에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한다. 언젠가 한번은 겪었을지 모를 짜릿했던 그 기억을 간직한 채 부유하던 먼지가 완전히 없어지듯이 그렇게 사라졌다.




ㄷ - 하소연할 소(訴)


“우리, 도자기 마을에 가서 사기그릇 깰 때, 내가 울었잖아!”


ㄷ에게 ㄱ과 ㄷ은 하소연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뒤에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 신고하지 않고 돌봐준다는 것으로 엄마가 있는 옆방에서 짐승에게 몸을 내줘야했다. ㄴ이 우물로 투하된 후 떠나온 곳에서도 몸을 내주고 삶을 이어간다. 그 돈을 중국에 있는 짐승에게 보낼 수밖에 없다. 엄마가 그곳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ㄷ은 하소연하고 싶은 것이다. 문득 찾아간 소소(昭)에 위치한 ㄱ의 집에서 ㄷ은 ㄱ의 밝음과 ㄴ의 근심은 안중에 없었다. 일단 그들에게 하소연(訴)하고 싶었다. 몸을 섞는 ㄱ와 ㄴ을 찾아간 그 방안에서도 바보같이 밝게 웃는 ㄱ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황망함, 놀람 따위는 안중에 둘 수도 없었던 기가 막힌 참담한 과거를 건너 온 ㄷ의 존재방식이다. 야동에 등장하는 쓰리썸은 지극히 음란하고 자극적이지만 그들의 쓰리썸은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다. 감정과 느낌이 배제된 덩어리. 책에서 여러 번 표현되는 덩어리 그 자체다. 그냥 덩어리. 셋이서 삼각형이 아니라 둥근 덩어리가 된 것은 ㄱ,ㄴ,ㄷ 모두에게 이유가 있다. ㄱ에게는 놀이였고 ㄴ에게는 위로였고 ㄷ에게는 절박함이었다. ㄱ에게 있어 그들의 쓰리썸은 하나가 되는 착각이었고 ㄴ에게 그들의 쓰리썸은 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ㄷ에게 그들의 쓰리썸은 생존의 확인이었다. 한 방에서, 한 침대위에서 덩어리졌지만 ㄷ에게는 여전히 결핍이다. 질펀한 쓰리썸 이후에도 ㄷ은 혼자서 또다시 자위를 해야 했다. ㄷ에게 쓰리썸이나 덩어리짐은 의미 있는 듯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쩌면 ㄷ도 그녀만의 우물을 파고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ㄴ의 죽음 이후 바다에 연한 작은 도시에서 여전히 자신의 몸으로 생존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간절한 하소연이다.

자신을 찾아 온 ㄱ에게 또 몸을 들이밀었지만 ㄱ은 거부했다. ㄴ이 부재한 현재에는 덩어리짐마저 할 방법이 없다. ㄱ에게는 지나치는 풍경이었고 ㄴ에게는 ㄱ만이 존재하는 도자기 마을에서의 기억도 ㄷ에게는 절실한 존재확인이다. 거푸 물어본다.

 

언니~! 그때 말이야~! 도자기 마을에 갔을 때 있지? 알지 언니? 그때 내가 도자기 깼잖아~! 그 도자기 마을에서 언니~! 언니 기억나지? 어? 기억나지? 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절실함이 하소연이 되어 흩어진다. ㄴ이 먼지처럼 부유하다 떨어진 것처럼 ㄷ또한 여전히 부유한다. ㄴ처럼 떨어질 지, 언제까지 부유할 지 알 수 없지만 가쁘게 매달린다.

ㄱ과 ㄴ과 ㄷ은 함께 소소(昭昭)에서 살았지만 누군가는 웃고(笑昭), 누군가는 근심했으며(騷), 누군가는 하소연을(訴) 하고 싶었다. 그들이 한 덩어리가 되었어도 그렇게 다르게 소소소(昭騷訴)한 풍경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첫 번째 계약은 우물이 완성되면 흩어져 각각의 길을 따라 떠난다는 것, 두 번째 계약은 그러므로 우리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잠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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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대립에서_대화로
와다 하루키 지음, 임경택 옮김 / 사계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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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정말 우리 땅일까? ‘독도는 우리 땅’은 이미 명제다. 한국인들에게는 고유 문장이 되었다. 당연히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와 정권 차원에서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하기도 했다. 무한도전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진리를 빼앗기기 전에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제대로 해결되지도, 뭔가 대안이 마련되지도 않은 채 한국인들은 당연히 독도는 우리 땅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때가 되면 독도를 찾아가 독도 경비대원들을 위로하거나 대형 태극기를 펼쳐 놓고 배경음악으로 애국가나 홀로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TV를 통해 동해바다 멀리에서부터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애국가나 홀로아리랑을 들으면서 잠잠코 있던 애국심을 조금 꺼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한 번씩 일본에서는 독도에 대한 한국의 강제점유를 규탄하기도 한다. 이명박이 갑자기 독도를 방문해 사진을 찍고 그것이 9시 뉴스는 물론 다음날 조간신문의 1면을 장식한 후 일본에서는 난리가 났다. 강하게 규탄하고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독도는 한국에게도, 일본에게도 첨예한 갈등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다.

와다 하루키는 일본 내 진보적 역사학자 중 한명이다. 그의 이전 작 「한국전쟁」과 「역사로서의 사회주의」(지금은 두 권다 절판된 상태다)를 읽으면서 굉장히 놀랐다. 구 소련사 전문가이면서 동북아시아 전문가이기도 한 그의 시각은 그 전에 읽었던 어떤 한국 역사학자의 의견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이며 진보적이었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의 잔재와 그 부활을 염려하는 그의 학자적 태도는 그저 동북아시아의 축적된 긴장 상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하는 정치인들과 각국의 정권의 욕심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 책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도 이러한 저자의 태도의 연장선에 있는 연구의 결과물이다. 한국인들에게는 영토문제가 일본과의 독도문제에 국한되어 있지만 일본인들에게 영토문제는 한국과의 독도문제,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문제, 러시아와의 쿠릴열도문제, 세 가지 영토문제를 떠안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주로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문제에 치중하고 있다. 아마 한국과 중국보다 러시아의 근·현대사에 정통한 저자의 학문적 특성 때문인 것 같다.

 

 

“‘고유영토’란 ‘아직껏 한 번도 외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는’ 영토라는 일본 외무성의 용어법에 빗대어, 한반도는 당신들의 ‘고유영토’가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웃 나라 한국 국민은 안색을 바꿔 화를 낼 것이다. 외무성의 이 용어는 이웃 나라에조차 적용할 수 없다.” (p.41)

 

‘고유영토’라는 단어는 익숙한 듯 낯설다. 단어 그대로 해석해 받아들이면 쉬운데, 이 단어가 영토문제의 당사자인 두 국가 사이에 놓이면 저자의 포현대로 “교섭의 용어가 아니라 싸움의 용어”가 되고 만다. ‘고유영토’라고 말하면 ‘불법 점거’, ‘불법 점령’이 당연하게 뒤따라 올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저자의 표현대로 이 ‘고유영토’라는 단어를 “듣는 측은 ‘침략자는 물러나라.’”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고유영토’라는 개념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독도야말로 우리의 ‘고유영토’이고 이것은 역사적 사료로도 증명되었고,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당연한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와다 하루키 교수의 문제제기를 접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한국과 일본의 독도를 둘러싼 영토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센카쿠 열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측은 일본이다. 중국 정부가 최근 들어 이곳에 대한 영토문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일본이 제시하고 있는 논리가 바로 ‘고유영토’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독도는 무인도다. 독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 가정이 1가정이 있지만 일본 측에서는 형식적 서류절차에 불과하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센카쿠(중국명 다오위다오)는 무인도로 이루어진 섬의 집합일 뿐이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센카쿠를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문제는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다. 센카쿠 열도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에 ‘고유영토’ 논리를 들이미는 일본 정부가 독도 문제에 대해서 ‘고유영토’ 논리를 들이미는 한국 정부를 향해 모순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웃나라 사이에 영토싸움이 몇 십 년 동안 계속되는데, 실효지배하고 있는 측이 상대의 주장을 듣고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p.217)

 

이런 모순되는 일본 정부 및 일본과 영토 문제를 겪는 중국, 한국, 러시아 정부를 향해 저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일제의 패망 이후 지속되고 있는 영토문제에 대해 실효지배하고 있는 측의 적극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아예 독도가 국제적인 분쟁이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군인이 아닌 경찰을 경비대로 주둔시키고 있고 일본의 거듭된 국제사법재판소로의 제소를 무시하고 있다. 한국과 한국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동북아시아의 평화적 담론을 거듭 제시하는 역사학자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다. 더군다나 쿠릴 열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과의 갈등은 실효지배하고 있는 러시아 측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로 말미암아 조금씩 해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에서 저자도 지적하듯이 쿠릴 열도와 독도문제를 등치시킬 수는 없다. 역사적·정치적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일본과 소련의 교섭 역사는 냉전의 드라마였다.” (p.143)

“1986년 시작된 소련에서 러시아로의 대변환의 역사 속에서, 냉전이 끝나고 영토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찾아왔다.” (p.195)

 

쿠릴열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전향적 태도는 전적으로 정치·경제적 이득을 위한 러시아의 목표에서 기인한 것이다. 소련에서 러시아로의 대변환 속에서 러시아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을 것이다. 이런 명백해 보이는 요인을 책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쉬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쿠릴 열도 문제를 둘러싸고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러시아의 전향적인 태도에 비해 일본의 어이없는 대응과 논리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분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웠다. 아무리 러시아사 전문가라고 하지만 일본 학자가 일본 정부에 대해 이 정도로 비판적인 논조를 펼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만약 한국의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 독도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에 대해 한국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를 요구한다면 그 사람의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에토로후 섬과 구나시리 섬은 남 지시마가 아니며, 지시마 열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외무성이 만들어낸 궤변은, 이케다 수상의 ‘지리상의 대발견’으로 마침내 국가의 진리가 되었다. 지금은 전 국민이 그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p.118)

 

사실 쿠릴 열도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예전 일본 제국주의와 소련 제국주의 시절부터 4번이나 전쟁을 치른 상대이기도 하다. 쿠릴 열도를 둘러싸고 철저하게 양국 국민들이 첨예한 갈등으로 대립하는 것이 일견 당연하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와다 하루키 교수는 문제의 기원과 역사적 과정 현재의 상황에 까지 자세하게 사료 분석을 통해 접근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일본 외무성이 지금껏 견지하고 있는 궤변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한다. 1855년 맺어진 러·일 통상조약과 1875년 맺어진 가라후토·지시마 교환교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일본 외무성이 오역을 하거나 정본의 기록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조약의 정본은 일반인들은 관심이 없다. 접근할 수 있는 경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런 것을 일일이 찾아 볼 여유도 없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외무성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것이 맞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정본과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는, 정본에서 ‘쿠릴이라는 섬들의 집단’이라는 표현을 ‘쿠릴 군도’로 바꿔 마치 쿠릴 열도와 동의어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에게 양도받은 쿠릴 열도의 부분이 일본제국에 속한다는 정본의 정확한 문장을 ‘쿠릴의 모든 섬은 일본제국에 속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p.131)

 

아주 간단한 사실 관계 확인만 하면 일본 외무성이 수십 년간 견지하던 논리가 궤변이고 왜곡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쿠릴 열도의 부분이 일본제국에 속한다는 정본의 문장을 ‘쿠릴의 모든 섬’으로 오역한 일본 정부의 용감함에 박수를 보내야 하나? 아마 소련이 완전히 무너져 대국의 기운을 상실하면 그때 오역한 사본을 가지고 쿠릴 열도 전체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정본을 간단하게 오역해 이제껏 영토문제의 주요 논리로 사용했던 일본 정부에 대한 저자의 날선 비판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조심스럽지만 독도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한국 학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일본과의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갈등으로 인해 사료와 자료를 왜곡한 일이 있다면 제대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이후에 혹시 있을지 모를 독도문제에 대한 분쟁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막연하게 애국심에 호소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기대어 독도문제를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보이지 않는다.

 

 

“국가와 국경도 상대화가 되는 것이 역사의 추세이다. 그 안에 존재하는 국가의 벽을 여러 가지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넘어서면서 국민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유권은 양보하면서 그 활용에 참가하겠다는 생각은 이 인류사적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며, 세계라는 틀에서 살아가는 일본에 적합한 방식이다.” (p.183)

 

와다 하루키 교수는 좀 더 심도 깊은 대안을 제시한다. 국가와 국경이 상대화 되어 가는 역사적 추세에 따라 영토문제에 대해서도 조금 더 유연한 각국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에는 대부분 자본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 자국의 어민들이 더 큰 수역권을 확보할 수 있고 인근의 지하·해저 자원을 차지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국가 간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 자본의 논리에만 천착한다면 결코 영토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어느 국가가 나서서 통 큰 양보를 할 수 있나. 저자는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흐리게 해서 공동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문제가 되는 섬의 현재 상태, 즉 현상(現狀)과 섬 주민들의 생활은 되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p.259)

 

쿠릴 열도의 북쪽 일부는 러시아 국민들이 살고 있고 남쪽 일부는 일본 국민들이 살고 있다. 2세기 전 분명한 조약으로 쿠릴 열도의 실제적 소유권이 정해졌지만 일본 정부의 궤변으로 갈등이 조장되었고 냉전 이후 다소 갈등이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독도와 센카쿠 열도와는 달리 많은 러시아와 일본의 국민들이 살고 있는 쿠릴 열도 문제는 쉽게 어느 한쪽의 양보나 전향적 태도를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저자는 공동소유를 제시한다. 단, 첨예한 갈등이 되고 있는 2개의 섬에 살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의 현재 생활을 유지하면서 일본 국민이 함께 공존하는 방안이다. 이제는 일본 땅이 되었으니 모두 러시아로 내쫓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전향적인 방안이다. 공동 어로수역은 물론 자치도 공동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갈등의 원천이 되었던 2개의 섬은 러시아와 일본의 공동영토가 되는 것이다.

다소 이상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런 방안이 채택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기존의 대안과 갈등을 조장하고 키우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쿠릴 열도 문제에 대한 저자의 대안이 독도문제에 등치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적·정치적 상황이 쿠릴 열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제소를 한국이 거부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도 지배의 부당성을 일방적으로 표출하는 모양새가 되어 오히려 대립이 격화되는 효과밖에 없다.” (p.262)

 

독도문제에 대한 저자의 지적에 대해 반감이 드는 것은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명제와 진리가 깨어지는 것은 아닌가 라는 염려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거부는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하면 국제분쟁이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국력이 더 강한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해 독도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국 국민들이 아마 대다수일 것이다. 계속 무시하고 거부하면서 국민의 뜻을 한 데 모으는 것이 더 시급한 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이 되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고 말이다.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작성하면서도 잘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갈등의 불씨를 유지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저자의 지적대로 싸움의 논리가 아니라 교섭의 논리로 태도를 전향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말이다. ‘독도는 우리 땅’을 자자손손 마르고 닳도록 부르고 기억하고 외치는 것이 맞다면, 정부 차원에서 뭔가 준비를 하던가 연구를 하던가 해야 할 텐데 딱히 그런 것도 없어 보인다.

혹시나 독도 인근 해역에서 일본 해군과 한국 해군 사이의 군사적 행동이 가시화 된다면 그것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된다. 적어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을 진리의 반열에 놓기 위해서 그간 제시했던 한국의 각종 역사적 자료들에 대해 면밀한 분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이 할 수 없으니 역사학자 내지는 정부 당국에서 해야 한다. 혹시나 벌어질 지모를 파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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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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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지 1달이 되었다. 아직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의 부성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기는 한데, 지인들의 조언을 듣다보면 그렇게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라 판단되어 다행으로 여기도 있다. 딸아이의 태명은 봄봄이였다. 이 녀석이 아빠를 닮아 성격이 급했던 탓인지 예정일보다 3주 일찍 세상으로 나왔다. 그전부터 이것저것 필요한 육아용품을 사기는 했지만 아직 3주나 예정일이 남아서 출산 후 바로 필요한 용품들은 미처 장만하지 못했다. 병원에 있는 3일 동안 이것저것 사러 다닌다고 정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었다. 출산 및 육아 용품은 또 왜 그렇게도 다양하고 방대한지, 일일이 인터넷에서 찾아 준비하는 모든 예비엄마들과 초보엄마들, 다산엄마들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난관이 찾아 왔다. 아마 봄봄이 탄생 1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을 것이다. 아내로부터 보일러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가 4월 말이었고 비가 3-4일 연속으로 내리던 때라 아침저녁으로는 꽤 쌀쌀했다. 태어난 지 1주일 밖에 되지 않은 봄봄이를 위해서 당장 조치를 취해야 했다. 결국 출장기사를 불렀다. 수리비는 17만원인데, 보일러가 노후되었으니 교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보일러 교체 비용은 60만 원 선이었다. 부품 2개 교체하는 비용이 17만원이나 나오는 것도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 주인이 보일러를 한 번 교체한 적이 있는데 처음 설치된 연도에서 10년이 지났으니 노후 될 대로 노후되었다는 출장기사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당장 이사할 예정이 없고 한 번 교체하면 10년 정도는 쓸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교체하려 했으나 보일러 관련 일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부품만 교체하라는 조언을 듣고 부품만 교체했다. 현재까지는 잘 돌아간다. 출장을 왔던 기사가 ‘이 집은 신생아도 있고 하니 당연히 보일러를 교체하겠지!’라고 생각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일러를 비롯한 가정 내 모든 가전제품에서부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이런 매뉴얼이 존재한다. 매 5000km 주행마다 엔진오일을 교환하라는 자동차 서비스센터의 매뉴얼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 보일러는 10년도 못 쓴 채 교체해야 하는지, 왜 엔진오일은 5000km 정도밖에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이 책 「낭비 사회를 넘어서」가 명쾌하게 설명한다.

 

 

“하드디스크는 애초부터 3년 정도의 수명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란다.” (p.15)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는 수명이 1500시간에 달했다. 1920년대 생산된 저구의 평균 수명은 2500시간이었다.” (p.41)

 

1924년 12월 제너럴 일렉트릭사를 포함한 전구 제조업체 관계자들은 제네바에 모여 전구 수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이른바 ‘푀부스 카르텔’이다. 회의 결과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 이하로 제한하자는 목표가 정해졌다고 한다. 이렇게 매뉴얼은 자본의 논리와 태도로 정해졌고 이것은 소비자에게 진리로 세뇌되었다. 에디슨이 처음 만든 전구의 수명보다 못한 전구를 21세기 사람들이 쓰고 있는 것이다. 하드디스크는 왜 애초부터 3년 정도의 수명으로 정해졌는지 책은 정화하게 설명한다.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을 말한다.” (p.34)

“인위적으로 공산품의 수명을 단축시켜 새로운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기술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p.37)

 

‘계획적 진부화’는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개념이다. 내가 보일러 교체의 순간, 엔진오일 교체 순간 느꼈던 그 감정과 궁금증이 바로 ‘계획적 진부화’로 인해 유발된 것이다. 개념을 풀어 설명하지 않아도 한번쯤은 경험해 봤을 것이다. ‘계획적 진부화’는 미국에서 창안된 포드주의와 맞물려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단기간에 전 세계를 잠식했다. 또 이것은 성장담론과 결합하면서 가공할 만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컨베이어벨트에서 무한하게 상품을 찍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품이 마모되거나 수명을 다해야 한다. 한번 만들어낸 상품이 수십 년씩 간다면 포드주의식 모델은 완벽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고의적인 수명 단축이 필요한 것이었다. 책에서 소개되는 스타킹의 경우도 그렇다. 최초로 나일론 소재 스타킹이 개발되었을 때는 자동차도 들어 올릴만한 탄력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스타킹 회사는 모조리 망할 것이다. 적절히 찢어지고 적절히 마모되는 스타킹을 만들어야 계속해서 스타킹을 소비자들에게 팔 수 있는 것이다. 짐짓 자본의 논리만으로 따지자면 맞는 말인 듯싶기도 하고, 만약 내가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의 사장이라면 당연한 논리일 것이다. 일부러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완벽하게 가동되는 보일러를 만든다면 특허는 받을 수 있겠지만 결코 돈을 벌수는 없을 것이다.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활동으로서 현대 소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p.23)

 

그런데 이것이 도를 넘어섰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자본의 논리와 자본을 대하는 소비자의 감정이 전복되어 종속되는 결과에 이른 것이다. 휘황찬란한 광고를 넋 놓고 들여다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사고 싶다. 갖고 싶다.’라는 욕구를 느낀다.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소비적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 전적으로 자본의 세뇌인 것인지, 애초부터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던 본성인 것인지는 유전심리·사회심리 전문가들이 논할 일이다. 어쨌든 현대의 소비자들은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활동에 매진한다. 소비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나라에 빚이 쌓이고 가정에 빚이 쌓여가도 끊임없이 소비를 자극하고 종용한다. 거듭되는 소비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광고한다.

 

 

“특정 한계를 넘어서 버리는 순간 우리의 실행 능력은 느끼고 상상하는 능력을 무한정 초월해 버리고 만다. 안더스가 ‘프로메테우스적 괴리’라고 명명한 이 해소할 길 없는 간극은 우리의 도덕의식을 말 그대로 마비시켜 버린다.” (p.75)

 

소비적 욕망에 잠식당한 소비자들은 자본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다. 책에서 소개된 유대인 철학자 귄터 안더스의 ‘프로메테우스적 괴리’는 한국 사회에서 정확하게 구현된다. 안더스는

‘계획적 진부화가 제너럴 모터스사를 위해 좋은 일이라면 그것은 미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인 셈이다.’ 라는 형태로 소비자들의 도덕의식을 마비시킨다고 소개한다.

며칠 전 황당무계한 스포츠기사를 보았다. 이승엽이 홈런을 쳐서 이건희 회장이 깨어났다는 기사였다. 병상에 있는 이건희 회장이 평소 야구를 좋아해 병실 TV를 통해 삼성의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친 순간 이건희 회장의 의식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 만화 같은 일이 스포츠 신문은 물론 포털 뉴스에서도 주목하며 보도를 쏟아냈다. 삼성을 욕하면서도 삼성에 입사하고 싶어 하는 대다수 한국인들의 ‘프로메테우스적 괴리 심리’를 가장 적확하게 이용한 기사라고 생각 된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기업 과세를 조금이라도 늘릴라치면 전 사회적으로 폭발하는 논리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 워낙 오랫동안 들어왔던 말이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정부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서 그런 고위험의 가능성을 분산시켜야 맞는 것 아닐까? 진짜 그 논리대로 삼성이 망한다면 큰일이지 않나? 삼성이 망해도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자본력과 영향력을 분산시키는 게 맞지 않나?

 

불행하게도 ‘계획적 진부화’의 논리는 저자와 같은 탈 성장 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제기되지 않는다.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며칠 후에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도 모두 성장, 발전, 개발의 공약을 가지고 있다. “제가 당선이 되면 탈 성장 주의를 모토로 삼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계획적 진부화’와 탈 성장주의 담론도 유럽에서는 이미 수십 년 된 개념인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거의 없다.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평균 18개월 정도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리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생물체에 유해한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들을 만들어 낸다.” (p.99)

“모조품의 사회는 계속해서 당신을 기계처럼 사용하고, 기계처럼 연료를 공급하고, 기계처럼 감시하고, 기계처럼 일만 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면 고장 난 기계처럼 내다 버릴 것이다.” (p.86)

 

미국에서 한 해 평균 1억대 이상의 휴대 전화가 버려진다고 한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비정상적인 모바일 강국인 한국에서도 엄청난 양의 휴대 전화가 버려질 것이다. 평균 18개월 정도 사용되고 버려진다는 통계가 어느 나라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자가 한국의 상황을 통계 내었다면 18개월 보다는 훨씬 짧은 주기였을 것이다.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다른 국가에서 재활용되지 않는 이상 모조리 쓰레기다.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1년에도 몇 번씩 최신 기종의 휴대 전화가 만들어 진다. 약정 기간을 채우지 않아도 새 휴대 전화로 교체할 수 있는 편법은 넘쳐 난다. 마침 휴대 전화는 어느 정도 사용을 하면 고장도 잘 난다. 현대 기술과 문명의 총아라 할 수 있는 휴대 전화는 ‘계획적 진부화’를 담보하는 최전선에서 소비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자본의 논리는 애초부터 모조품을 만들어 낸다. 얼마 동안의 기간밖에 존재할 수 없는 태생적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미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소비자들에게 짧은 수명주기는 중요하지 않다. 곳곳에 최신 기종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비의 주체로 오해하며 개별 주체 또한 단지 하나의 모조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모른다. 용역천지인 사회다. 대형마트에도 대학병원에도 하물며 국가기관에도 용역으로 가득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양산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모조품으로 전락하는 기구한 소비주체의 운명을 가속화 했다. 끝도 없이 소비하며 살지만 동시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모조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필요에 의해 단번에 버려질 수 있는 모조품으로.

 

 

“내구재의 공동 사용은 성장 반대론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현실화할 때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p.109)

 

내구재의 공동 사용으로 모조품으로 전락해 완벽하게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내구재의 공동 사용 말고도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결코 실현될 것 같지 않다.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 동네 개념보다 더 협소하게 ‘단지개념’을 만들어 낸 한국 사람들에게 내구재의 공동 사용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아직도 성장해야 하고 개발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기껏 꺼내드는 경제카드가 ‘규제철폐’일까. 지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원전 폐기에 대한 담론에서도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고리 원전의 고장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어도 크게 문제시 되지 않는다. 아직 토건개발은 먹혀드는 선거이슈이고 복지, 분배, 평등 담론은 성장, 발전, 개발 담론에 비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저자도 몇 가지 대안으로 수십 년 동안 쓰나미처럼 몰아쳐 온 자본의 논리를 단번에 극복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의 공포와 비극적 결말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출발이라고 지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 문제를 직시하고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고 공유하고 전파한다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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