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나이 또래 남자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아이를 낳은 아비가 되어 보니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낳은 내 아이의 아주 작은 몸짓과 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비다. 그렇다면 나와 내 나이 또래 남자들의 아버지들도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을 거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버지들과 관계가 좋지 않을 것일까?
지난 추석에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명절 때마다 조부가 계시는 시골로 간다.
아버지 형제는 4남2녀 인데, 그중 내 아버지가 장남이시다. 막내 삼촌이 일찍 돌아가셔서 명절에는 삼형제가 모이고 그 삼형제의 식솔들이 모인다.
나와 내 동생을 포함한 3대 중 남자는 모두 4명이다. 딸들도 있고 숙모님들도 계실 때는 화기애애하다. 그런데 이번 추석 때는 남자들 따로
여자들 따로 목욕을 하러 갔다. 모든 목욕탕의 풍경이 그러하듯이 우리 가족들 중 남자들이 먼저 나와 기다리다 집으로 왔다. 여자들이 없는,
남자들만 모인 3대의 분위기는 화기애매했다. 제사음식을 아무리 바쁘게 차려도 도무지 중력의 힘을 이겨낼 길이 없어 보였던 남자들이, 여자들이
없으니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을 떠오기도 하고 리모컨을 집어드리기도 하고... TV를 켠 채 멀뚱히 화면만 응시하는 남자
3대의 모습이 인상 깊으면서도 애잔했다.
뭐, 집집마다 상황이 다르고 스토리가 다르겠지만 남자들만 모여 있으면 대부분 화기애애하지
못하고 화기애매할 때가 많을 것이다. 명절 때 3대가 모여 있고, 평소 자주 보지 못하던 친척들과 뒤섞여 있으면 조금 덜 하다. 한 번씩 본가에
가 아버지와 단 둘이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것만큼 고역이 없다. 지금이야 아이가 있어 그 녀석에게 거의 모든 분위기를 맡기고 있지만, 그전에는
정말... 별스럽지도 않은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시큰둥. 혹여 아버지가 입을 여시면 ‘너는 어떻게 살거냐?’종류의 훈계 내지는
걱정이 태반이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틀어지게 된 그날 밤 이후,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있다. 전화도 되도록 어머니와 하게 되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상실.
내 아버지는 암 투병중이시다. 완치 판정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재발하여 얼마 전까지
방사선 치료를 받으셨다. 첫 발병소식과 수술, 첫 재발 소식과 연이은 수술까지는 많이 힘들었다. 7년이 다 되어가는 암투병기간.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상실에서부터 점점 멀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아버지와의 사이가 소원하고 껄끄럽고
불편하다고 해서 아버지의 암 투병까지 데면데면 했던 것은 아닌데, 시간이 흐르고 흐른 탓일까? 아버지가 암 투병 중이라는 것조차 잊을 때가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아버지의 상실, 그 상실된 시간에 파고들 디테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슬프고 죄스럽고 후회되었다.
“남은 금액, 요기 보이시죠. 200을 당장 털어주셔야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니까요.
가입할 대 설명 들으셨잖아요?” (p.18)
“방금 죽은 엄마를 보고 왔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갈비탕이나 우거짓국 중에 뭐가 더
맛있을지, 바람떡과 송편 중에 어떤 게 보관이 용이하고 잘 쉬지 않을지 가격 대비 만족도로 비교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은 현실은,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기괴했다.” (p.21)
할머니 장례식장은 저 멀리 김포였다. 우리가 가장 멀리서 온 식구가 된 탓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세팅이 완료된 뒤였다. 이제는 보편화 된 상조보험과 그 서비스에 익숙하다 보니 누군가 돌아가신 후 전화만 하면 모든 준비를 하는 것은
상조회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세하고 귀찮은 것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상주가 결정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나는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 장례야
어른들이 계시니까 손자인 나까지 나서야 할 일은 없었지만 혹시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일을 당하신 후 상조회사 직원이 나와 체크리스트를 눈앞에
내보이며 사인을 하라고 하면, 나는 주먹을 날려야 할까? 뻘건 눈으로 눈물을 떨구며 사인을 해야 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심장이 턱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엄마가 죽었다.” (p.15)
음... 이런 소식을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가늠하지 못하겠다. 아버지 암
발병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휴가를 내 고속도로를 달렸다. 정신없이 가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져 근처 갓길인지 임시휴게소인지 하는 곳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운전대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슬픈 것이었는지, 죄스러운 것이었는지, 걱정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다시 출발했었다.
부모님의 암 발병 소식은, 내게는 닥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막연하게 안심하고 살았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일이 되었을 때, 닥쳐오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일이다.
부모님의 암 발병 소식도 그럴 것인데, 부모님의 부고는...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연애소설을 쓴다. 자유업에 비혼, 아이도 없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
(p.29)
“탈상까지 100일 동안, 아버지가 엄마 없는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나한테 떨어졌다.”
석희는 언니와 여동생이 있다. 언니는 호주에 살고 있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동생은
석희만큼 시간이 없다. 그런 탓에 엄마의 장례는 물론, 그 이후에 아버지의 일상을 돌보는 일까지 떠맡게 되었다. 엄마의 죽음은 이미 상실된
감정이 될 정도로 석희는 꼼꼼하고 자세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마치, 슬프기는 하지만 부모 정도는 아닌 조부모나 일가친척의
죽음을 대하는 것처럼. 강인하고 깐깐했던 아버지는 깐깐함만 남아서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30년 동안 복무한 군대의 그것에 머물러
있다.
“언니의 저 제단은 엄마를 아름답게 만들어서 그리워하는 것으로 상실된 시간들을 전부
천국의 사물처럼 만드는 추모로 보인다.” (p.238)
멀리 떨어진 언니나 여동생에게는 여전히 엄마의 부재와 상실 한가운데에 있다. 실컷
슬퍼하고 실컷 추모하고 실컷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석희는 달랐다. 언니와 여동생이 엄마의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전, 모든 장례절차를 확인하고
사인해야 했다. 아내의 죽음을 기리고 추모하는 작은 지출조차 꺼리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때론 이해해야 했다. 엄마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교회 권사
아줌마들이 엄마의 옷장에서 엄마가 생전 가장 아끼던 옷을 꺼내 입는 꼴도 지켜봐야 했다. 밥조차 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주방기기들의 사용법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야 했다.
“이해의 담임이 기록한 생활기록부 평가에 의하면, 나는 리더십이 전혀 없고, 협동심이
현저하게 부족한데다 분쟁이나 일으키기 좋아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p.164)
어쩌면 석희라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석희는 중학교에서도 튀는 아이였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지만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는 따지고 저항하는 아이였다. 지금처럼 학생인권이 조례된 때도 아니었고,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군대 내 계급처럼
수직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석희의 튀는 행동은 교권과 학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반항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때다. 그렇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상식적인 선이었다. 교사의 무분별한 체벌, 학생에 대한 무시 같은 것들에 대해서 따지고 저항했다. 석희의 저항에는 아무 말 않던
담임이라는 쫌생이는 생활기록부로 복수를 했다. 그런 식이다.
“살다 보면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다 있는 건데... 이런 상황에선 너 자신을 좀
제쳐두고, 무슨 말인지 알겠니? 자기 자신을 미뤄두는, 그런 게 필요한 순간이 있는 거야.”
다른 중학교 담임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어린 중학생에게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지만
석희는 결국 담임의 말대로 살지 못했다. 자유롭게 글을 쓰는 비혼 여성이지만 당장 닥치는 삶의 구차한 문제들과 밥벌이의 고단함은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자기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채 상실된 엄마의 시간과 공간을 겨우 메우고 있는 터다.
“새벽 5시 7분.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배가 아픈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p.284)
그러면, 엄마의 탈상도 지나가고 아버지가 스스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석희는
중학교 담임의 말처럼 자신을 좀 제쳐두고, 자신을 미뤄두는 그런 순간을 즐길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새벽 5시게 받는 아버지의 전화는
100% 나쁜 소식이니까. 아무리 교통이 좋아졌다 해도 서울에서 원주까지 내려가는 길은 쉽지 않으니까. 배가 아프면 119에 전화를 하면
되는데, 아버지는 꼭 석희에게 전화를 할 것이니까. 언니는 호주에 있고, 잘난 박사 막내는 너무 바쁘니까. 둘째 석희는 그래도 시간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정이 많고 불의에는 타협하지 않는 여전사 같은 석희지만,
그에게도 엄마가 없는 일상은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낯설 상실의 공간이다. 언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일
테다.
나는 남동생이 있지만 멀리 강릉에 산다. 부모님은 포항에 살고 계신다. 나는 대구에
산다. 남동생과 제수씨는 직업 특성 상 쉽게 시간을 낼 수 없다. 그에 반해 나는 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의
일상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겁이 많아졌다. 단지 부모님을 여윈
슬픔과 죄스러움뿐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석희가 겪은 자질구레하면서도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에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던 자매간의
반목, 그리고 남아있는 부모님에 대한 봉양에 이르기까지. 닥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모두가 바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