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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작가다. 그의 전작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는 몰입을
이번 작품 「공허한 십자가」에서도 경험했다. 그의 작품은 하드코어나 고어 장르가 결코 아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이
소개하지만 오히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과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와 같은 미스터리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도 작품을 읽기가 거북하지
않다. 이것은 꽤 중요한 작가의 장점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나 최근작 「몽환화」를 읽으면 등골이 서늘하고 식은땀이 나기보다 따스한
인간애가 넘치는 영화 한 편 본 것 같은 감상을 얻는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하고 덜 힘들게 하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나의 사건에 얽힌 여러 등장인물들이 종국에는 날실과 씨실이 하나의 패턴으로 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의 사건으로
모여 든다. 모여든 것으로 인해 사건이 해결되는 것으로 엔딩 되는 것도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 이유 중 하나다. 일상을 밀어내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엔딩조차 불확실하고 불편하거나 암울하다면 나는 그런 작품을 읽어낼 자신이 없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여간 불편한 영화가 아니었다. 개신교인으로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내게 믿음과 용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한 인간이 갖는 고통과 고민을 그려낸 영화 『밀양』은 내 신앙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영화 『밀양』을 생각했다. 아들의 죽음과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기도 전에 미리 용서해 버린 신을 조롱하기 위해 교회 장로의
몸 밑에 일부러 누워 하늘을 향해, 정확하게는 신을 향해 소리친다. 눈이 부셔 제대로 보이지 않는 secret sunshine을
향해서.
보여? 보이냐구. 난 너한테 안 져.
이번 작품 「공허한 십자가」는 제목이 가진 함의가 무엇인지 독자들이 각자 상상을 하게
만든다. ‘공허’라는 단어와 ‘십자가’라는 단어는 다분히 종교적이고 철학적이다. 다중적이고 다면적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쓴 글에서 등장하는
‘공허한 십자가’는 최근 읽은 책의 제목 중 단연 압권이다. 제목만으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고 왜 이 제목이 붙여졌는지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유족의 입장에서 보면
범인의 죽음은 ‘속죄’도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통과점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통과점마저 빼앗기면 유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형 폐지란 바로 그런 것이다.” (p.190) <사형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 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p.212)
딸아이를 죽인 범인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 나카하라와 사요코 부부는 최선을 다한다. 사요코가
죽기 전 책 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원고, <사형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글에 등장하는 그녀의 생각이다. 나는 섣불리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다. 세월호 참사와 유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해 그 누가 이해한다느니, 공감한다느니
지껄일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사요코가 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나카하라와 이혼한 후 더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 또한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범인의 죽음으로 가족의 상실을 보상받을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범인의 사형 집행으로 범죄율이 현격하게
떨어진다거나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들이대며 유족들에게 사형폐지론을 지껄여서는 안 된다. 그런 유족들,
사요코를 향해 비판을 해서도 안 된다. 영화『밀양』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신애는 아들을 납치해 살해한 범인의 사형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들을 잃은
슬픔이 유발한 종교적 귀의에 의한 의지였다. 그런데 어렵게 찾아간 범인의 얼굴에서 신애는 ‘공허한 십자가’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것을 벗어
던진다.
“남편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제 남편처럼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생각하세요?”
(p.413)
후미야는 그렇게 벗어던진 십자가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 아내 유미를 껴안는다. 그녀의 과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후미야에게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 후미야 자신도 어린 시절 사오리와의 사이에서 생긴 생명을 죽인 범인이기 때문이다. 후미야에게
유미는 속죄 의식이었지만 유미에게 후미야는 달랐다. 유미에게 후미야는 ‘구원의 십자가’다. 공허하지 않은 십자가다. 사기꾼 타바타에게 받은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를 후미야가 싸매주고 고쳐주고 있는 중이었다. 유미는 후미야로 인해 십자가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나카하라와 사요코의 딸아이를 살해한 범인, 밀양에서 신애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과 후미야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속죄를 요구하거나 처벌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다. 따라서 다분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가치판단의 문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을 통해 독자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든다.
당연히 이 작품의 결말은 모호하기 때문이다.
“눈치 챈 사람은 극히
일부분으로, 함부로 떠들어서 학교의 평판이 떨어질까 봐 걱정했다고 하더군요. 고등학교 입시가
코앞이었으니까요.”
“눈치는 챘지만 모르는
척했을 거라고요. 어차피 이제 곧 졸업할 학생이니까 골치 아픈 일을 피하고 싶었겠지요.”
(p.388)
문제는 십자가 아래서 웅성대거나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다. 대중이 가진
무책임함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 전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라고 하는 처형장으로 올라갈
때, 그전까지는 메시아요 구원자, 슈퍼스타라고 떠들어 대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무기력하게 패배한 예수를 향해 욕을 퍼붓고 돌을
던졌다. 책임지지 않는다.
이미 지난 과거가 되었고 일부러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사오리와 후미야는 그들 사이에서
불행하게 태어난 갓난아기를 죽여 매장한 후 연락을 끊는다. 절대로 묻을 수도 없고, 치유되지도 않을 상처임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사오리와 후미야는 너무 어렸고 불안했다. 만약 사오리의 배가 불러 오는 것을 눈치 챘던 당시 학교 친구들과 교사가 사오리와 후미야의 일에
개입했다면 최소한 생명을 살해하는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죽어가는 신애를 향해 주변인들이 손을 내민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에의 초대였다. 아들의 상실이 주는 슬픔이 깊어질수록 신애의 믿음도 깊어졌지만 근본적인 물음을 애써 회피하는 신과
주변의 신자들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단 교회에 데려왔으니 내 할 일은 다했다는 무책임이다. 신을 조롱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와 유혹했을
때, 장로는 응한다. 신을 향한 조롱이 신애의 목젖에서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장로는 일을 마무리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아니 우리는
십자가를 회피하고 책임을 나눠 갖지 않는다. 성가시고 불편하며 내게도 아픈 일이니 말이다.
“그녀는 후회했다. 역시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비밀은 죽을 때까지 가슴속에 묻어두었어야 했다.” (p.429)
사요코의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면 후미야와의 비밀을 영원히 묻어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오리 자신만의 고통과 상처로 떠안아 살면 될 일이었다. 그랬다면 유미의 아버지가 사요코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고통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일상을 파괴한다. 참아낼 수 없는
슬픔과 분노는 나는 물론 내 주위 사람들까지 망가뜨린다.
“분명히
모순투성이군요.”
“인간이 완벽한 심판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p.441)
맞다. 인간은 모순투성이이고, 그런 인간이 만든 제도와 시스템은 더욱 모순투성이다. 완벽한
심판과 치유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해서 뻔히 보이는 타인이 가진 십자가의 고통에 언제까지 모른 채 하고 무책임한 채로
살아갈 것인지는 각자 선택할 일이다. 각자의 가치판단에 따를 일이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 이미 용서 받았대요.
하나님한테.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대요.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가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영화 『밀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