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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되는 적정 수준의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어느 사회학자가 그랬듯이 상식과 양식 또한 그 범주와 개념의 양태를 톺아보며 비교 분석해야 할 대상이지만,
관습적으로 대중이 인지하여 사용하는 상식과 양식의 범위는 사실 어렵지 않다. 개인이 살아온 삶의 기록을 종이에 옮겨 놓으면 그것이 상식과 양식일
수 있는 것이다. 종교·문화·지역·교육을 망라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듯 다른 개인 간의 차는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분쟁과 전쟁을 불러
오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편’이라는 강한 연대감을 확인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개신교 신자인 내게 이슬람교는 연대나 포용의 감정보다는 적대와 이질감의 감정이 앞서는
개념이다. 이슬람과 무슬림을 구분조차 하지 않던 몰이해를 감추기 위한 자기변명이었음은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20대 후반에야 깨달아
알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한 몰이해는 가히 폭력적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적인 인식과 폭력적인 자기합리화는 얼마 전 12월 14일
새벽에 하나님이 한국 땅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예언을 한 미치광이 여자 광신도의 그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앞에 나서서 광신도 흉내는 내지 않고
길거리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것’이 아니면 모조리 ‘잘못된 것’이라는 광신도의 탈을 벗을 수 없다.
이
책 「메카로 가는 길」은 한 유대계 유럽인 남성의 이슬람 개종기(記)다. 유럽에서 태어난 백인 유대계 남성.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역사는
이미 중세이전부터이니 새삼스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치에 의한 본격적인 유대인 학살이 있기 전이었다. 그 말은 먹고 사는 데는 큰 문제없는 백인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느닷없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아들, 혹은 친구를 대하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얼마 전 서울시 인권조례
선포를 둘러싸고 보수 기독교계에 박원순 서울 시장이 무릎을 꿇었네 마네 말들이 많았다. 사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성소수자를 비롯한 차별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지금에도 당장 내 지인 중 하나가 “나 사실 동성애자야”라고 고백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려운 이야기 고백해줘서 고마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니,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고백 전 그를 대하는 태도와 고백 후 그를 대하는 태도가 똑같을 수 있을까? 나는
똑같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겠다. 이것이 나의 현주소다. 당신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 무함마드 아사드는 그 모든 편견과 차별과 멸시와 비난을 감수하고
이슬람의 원류를 찾아 나선 사람이다. 종교인이기도 하고 모험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가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다.
이 책은 그 길에 대한 여정기다.
“우리 젊은 세대는 소위
‘신의 뜻’이 현실과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상황을 목도하고 ‘신이 뜻했다는 바와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신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p.73)
“정말 이상했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맛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민족이 이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민족을 부당하게 대우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전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니 고통스러웠다.” (p.114)
두
번의 세계대전 후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 외상은 짐작할 수 없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만 할
것이라는 낙관이 넘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욕심은 첨단의 기술과 과학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특히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 죽어가는 현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는 현실. 그 절대악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절대악이라고 믿었던 집단의 반대편에 있는 집단 또한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절망감. 이런 것들이 뒤엉킨 시대를 사는 청년에게 희망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이슬람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4년간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확인한 바로는” (p.341)
저자는 고민과 물음을 머릿속으로만 하지 않았다. 직접 몸으로 떠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하려 신대륙으로 간다거나 식민지 어딘가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았던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난다. 4달도 아니라 4년을 돌아다닌다.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체험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의 생활에 자신을 녹인다.
“팔을 괴고 누워 별이
촘촘히 박힌 사막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똥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치를 그리며 떨어진다. 검은 하늘에 아치형 구멍이 난 듯하다.”
(p.63)
끝도 없어 보이는 사막에서 베두인족을 만난다. 정처 없이 떠돌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가진 베두인들에게서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종교성을 확인한다. 또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사막의 밤하늘에서 잃어버렸던 종교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연이 위대한 것 같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몽골의 작은 고비라 불리는 엘승타슬라헤 사막에서의 일이다. 내가 여행했던
2008년도만 해도 수도인 울란바타르에서 엘승타슬라헤로 가는 도로가 따로 없었다. 그냥 초원을 달리는 것이다. 바퀴 자국이 나 있는 초원을 그냥
달리는 것이다. 겨우 도착한 유목민의 게르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밖으로 나와 보니 생애 처음 보는 암흑이었다. 불빛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암흑.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을 처음 경험한 나는 당장 무섭고 앞이 안 보인다는 생각보다 신기하고 설레었다. 처음 만나는 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 잠시 뒤 사막 저편 끝에서부터 조그맣게 빛이 올라왔다. 지평선에서의 일출이었다. 한국에서 본 일출의 대부분은 바다에서의 일출이었다.
그것도 수평선 저 끝에서 아무런 방해물 없이 온전히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구름에 가려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한국의
지평선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건물이 있고 산이 있으니 말이다. 처음 본 사막 끝, 지평선에서의 일출은
경이로웠다. 처음 만나는 자연의 힘 앞에서 나는 한 없이 감동했다. 제대로 믿고 있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를 하기도 했다.
잠시 동안의 여행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저자의 4년 동안의 경험은 어땠을까? 굳이
말하지 않고 책에서 자세하게 풀어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더군다나 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의 삶 또한 생애 처음 보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탐욕은 계속 커진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다, 깨달음에 다다르기만 한다면
곧 스스로 어떤 지옥에 갇혀 있는지 보일 것이다.
곧 확실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귀중한 인생을 무엇에 썼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찾아 헤매던
답이었다. 갑자기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1300년 전 쓰인 이 책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하고 기계화된 시대의 세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p.347)
4년의 시간 동안, 충분히 이슬람에 대해서 알게 되고 무슬림과 함께 지내며 이슬람으로 귀의
하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내게도 그런 종교적 체험이 있어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하고 비슷하구나 생각했는데, 그런 종교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또 뭔 얘기야~ 라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안다. 저게 뭔지. 어떻게 보면 참 애태우기도 한다.
4년 동안 사막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의 고원들을 떠돌며 진정한 이슬람교를 찾기 위해 고생 했는데. 그럴 때 멋지게 사막 한 가운데서 현현하셔서
내가 신이다 라고 하셨으면 멋질 텐데. 갑작스러운 체험으로 그는 완전히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간 의식하고 내면화 하고 있었던 종교성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계기다.
“검은 천으로 덮인
정육면체 건물(‘카바’는 아랍어로 정육면체란 뜻이다)은 드넓은 사원 한가운데 뜬 고요한 섬과 같았다.”
(p.412)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카바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내면에서 마치 노래처럼 느껴지는 희열이 서서히 샘솟았다. 카바 주변 바닥에는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대리석 관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남녀가 그 위에 올라가 검은 천을 둘러친 신전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고 있었다. 흐느끼는 이도 있고,
기도를 하며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도 있고,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로지 걷기마나 하는 이도 있었다.”
(p.414)
모든 무슬림들의 최고 소원이기도 한 메카 방문도 하게 된다. 메카사원에 있는 영물, 카바와
그 주위를 도는 무슬림들을 묘사한 장면이 평화롭다. 며칠 전 있었던 IS의 인질극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파키스탄 총기 난사 사건도 평화롭게 메카
사원의 카바를 도는 무슬림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많다. 나도 그렇다. TV와 뉴스에 등장하는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모습은 대부분 테러와 폭력, 야만과 전근대성이 대부분이다. 분명 그런 모습이 일부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개신교도들은 이슬람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무슬림들을 전도와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라마단 기간에 더 빡세게 기도를
한다거나 이슬람교가 득세한 국가에 선교를 나가는 것을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힘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TV에 보이는 모습이나
보수 기독교계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기독교, 아니 정확하게는 개신교
목사들이 지금 어떤 취급을 받고 있나? 영화 「쿼바디스」개봉을 막기 위해 서울의 대형교회들이 각 언론사나 대형극장에 협조공문을 보내기도 하는
꼴이다. 이미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하고 그들의 도그마를 비꼬고 있는 현실인데, 자기들만 높고 넓고 큰 교회 건물 속에 자리 잡고 앉아서 딴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개신교인인 나조차 부끄럽고 답답하다. 내가 믿는 예수님과 그들이 믿는다는 예수님이 같다면, 포용하고 사랑하고 죄를 자백하고
행동을 고치고 너그럽게 이웃을 껴안아야 할 텐데. 기대조차 하기 힘들다.
모르면 알아야 한다. 모르면 아는 것처럼 떠벌이거나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에 대해서 잘 모르면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마음대로 지껄이고 판단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저자처럼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하나의 대상을 알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여건과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잘 모르는 대상을 알아가는 데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떠먹여 주는 것도 아니다. 알고 싶은 것은 찾아서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간에
제대로 판단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판단은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