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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 정부 10년, 무엇을 남겼나>














소중한 것은 왜 꼭 잃은 후에야 그 진가를 알게 되는 것일까? 어린 시절 학교에서도 배웠다. "여러분~ 공기와 바람, 햇빛 같은 것들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죠~ 이것들이 없다면 어떨까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상상을 했다. 진짜 공기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햇빛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린 아이의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민주 정부 10년!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의 성숙이 단 7년 만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좌절과 절망보다 무기력을 경험했다. 아무런 대안도, 대안 정치구조도, 정치세력도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그때가 참 좋았지" 라며 예전 추억만 하는 것이 암울할 뿐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 망하는 거 아니다. 라고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었다. 순진한 나는 그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 저쪽도 집권하고 이쪽도 집권하면서 성숙해 지는 거지 뭐. 그런데 그런 순진하고 멍청한 기대는 저들의 끈질기고 깨알같은 공격으로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딱히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무기력은 깊어만 가고 광범위하게 퍼져 간다.

오히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아닐가 싶다. 소중하게 얻은 민주정부10년을 다시 돌아보는 일이다. 어떻게 민주정부를 가질 수 있었으며, 민주정부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놓고 분석하고 성찰하는 일이다. 무작정 "까"가 되거나 "빠"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다. 편리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된 대안과 방법을 담보할 수 없다. 객관성의 결여는 합리를 무참하게 잡아 먹으니 말이다.

아무쪼록 15기 신간평가단 첫번째 추천도서로 이 책이 꼭 선정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2. <미완의 청산>














단 한번도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한 국가에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일제 강점기, 일제에 부역해 권력과 명예를 누리고 돈은 돈대로 모으면서 살았던 친일파는 광복 후 지금까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반대로 일제 강점기, 목숨과 청춘과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독립 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제대로 국가로부터 보상이나 명예회복을 받지 못한 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광복 직후 설치된 반민특위의 활동이 제대로 보장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이상한 나라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박정희 시절 대일청구권 협상에서도 고스란히 한계를 드러냈다. 3억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돈을 받고 나서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 협상을 타결했다. 이것은 이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변명거리가 된다. "이야~ 니네들 박정희 때 청구권 협상 타결해서 3억 달러 줬잖아. 그걸로 끝난거잖아."라고. 할 말이 없다. 그 3억 달러 중 얼마 정도의 돈이 실제 일제 강점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에게 전해졌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세부적인 협상 내용도, 협상 경위도 잘 알지 못한다. 

정말 일본과 한국 양국의 국민들이 동의하고 일정 정도의 분위기가 형성되어서 자연스럽게 양국의 대표자들이 만나 협상을 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국민들 모르게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의 결과가 청구권 협상이다. 그래서 이것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완>이다. 




3. <생각이 사라지는 사회>














작년 4월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를 양육하면서 재미있는 일이 많다. 그 중에 하나는 노래다. 일을 하다가도 집에서 그냥 멍하게 있다가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 노래는 아이에게 들려주는 동요다. 사운드 북이나 휴대폰으로 들려주는 동요들. 무의식적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다.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걸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첨단의 첨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생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던 것처럼 지하철과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시내 대형 서점에 가도 서점 바닥이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디지털생태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분석하고 예측한 앞으로의 사회가 궁금하다. 이렇게 흘러간다면 어떤 사회가 될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불과 십 수년전만 해도 이렇게 스마트폰 세상이 될 지 누가 알았겠나? 생각이 점점 사라지면 어떤 세상이 될까? 공상과학영화의 내용처럼 기계에 지배되는 사회가 될까? 궁금하다.




4. <인구 쇼크>














한국의 저출산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점점 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게 마련인데, 눈을 크게 뜨면 인구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증가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쇼크가 올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 2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각국도 나름대로 인구쇼크를 대비한 각종 정책과 대안을 마련하고 있고 그것을 소개함으로써 이 인구쇼크 문제는 특정 몇 개 힘있는 국가가 나서서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려하고 노력해야 할 문제다. 이 책을 통해 함께 그 고민을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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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개 1~3 세트 - 전3권
강형규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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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 사람의 모습일까?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이런 철학적인 문제는 금방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지혜로운 역사상 인물들이 남긴 수많은 문장과 책이 있고, 현세를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들에게서도 각종 정의와 분석을 소개 받는다. 하지만 결론은 개인이 주체가 되어 내리는 것이다. 시대와 기분에 따라, 입장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철학적 담론을 개인적으로 체(體)화 하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한다. 세상은 그만큼 녹록하지 않고 패자부활 같은 배려는 없는 세상이니까.

이 책에서 학수는 ‘악’으로 그려진다. 명동 지하세계를 주름잡는 숨은 실력자 학수. 피도 눈물도 없는 그는 부하들도 무지막지하게 다룬다. 이미 버린 아들에게 “아빠야~”라며 다정하게 말할 만큼 위악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굳이 쓸개와 쓸개의 엄마가 숨긴 금덩어리를 손데 넣지 않아도 될 만큼 돈과 권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끝까지 그 금덩어리를 놓지 못한다.

 

 

학수가 처음부터 악마가 된 것은 아니다. 건실한 청년으로 주변 상인들에게 칭찬받았다. 순진하고 열정적이며 선한 청년에게 잘나가는 상점주인 아주머니는 자신의 가게를 학수에게 넘긴다. 그리고 그녀는 학수를 양아들로 삼는다.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우연찮은 기회에 함께 사업하는 형으로부터 대박 아이템을 제안 받는다. 그것이 ‘악마’가 된 경위다. 눈앞에 금덩어리가 보이고 당장 손만 뻗으면 그 금덩어리를 품에 넣을 수 있다면, 학수처럼 눈이 뒤집히고 ‘악마’가 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 욕심을 끊어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금덩어리에 집착한 학수의 마지막 모습이다. 모르겠다. 처음 이 장면을 책에서 봤을 때는 ‘학수도 악마는 아니야. 맞아. 상황이, 사람 욕심이 다 그렇지 뭐.’ 생각했다. 그런데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잘 모르겠다. 작가는 마지막에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은 학수를 그리고자 했는지 모르겠지만 인자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한 그림에서 나는 오히려 더 무서운 학수의 모습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나와 같은 독자가 마음이 꼬일 대로 꼬여서 작가의 본래 뜻을 왜곡한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런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진리와 같은 이 명제에 고개를 저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진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학수도 과연 변한 것일까? 비로소 그토록 원하던 금덩어리를 품에 안자마자 아들과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이 몰려온 것이 진실일까? 일단 나는 아니라고 보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잠깐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옥에 들어가서 판결을 받았다 손 치더라도 형기를 다 채우고 출소할까? 아니, 형을 받을 수는 있을까?

 

학수가 쫓은 금덩어리에는 다른 불나방도 뛰어 들었다. 강력한 정치인의 오른팔도 뛰어 드는데, 그것은 쓸개가 꾸민 덫이다. 한방에 학수와 정치인의 오른팔도 엮으려던 것이다. 결국 학수는 뜻을 이룬다. 학수와 정치인의 오른팔은 구속된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이 이상하다. 그 정치인은 영웅이 된다. 그들만의 난장판에서 영웅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맞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엄청난 특종이 터지면 그것을 덮는 또 다른 특종이 터지는 것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하게 보여 준 세상의 현실이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판단할 수조차 없다. 학수와 오른팔과 영웅이 된 유력 정치인은 삼위일체다. 금덩어리만 없었다면 자기들끼리 쿵짝쿵짝 하면서 해 먹고 또 해 먹고 봐 주고 또 봐 주고, 끌어주고 밀어 주면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만 영웅이 된다. 아니, 영웅으로 만들어 진다. 익숙하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을 만들어내는 프레임들. 학수와 오른팔은 반드시 만기를 채우지 않고 감옥에서 나올 것이다. 만약 쓸개 4권이 나온다면 그 이야기가 등장해야 한다. 현실적이니까.

 

 

쓸개가 덫을 놓고 그 덫이 성공할 수 있게 만든 1등 공신은 학수의 부하 정환이다. 학수의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을 거는 인조인간 같은 정환은 어쩐 일인지 쓸개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명함을 주면서 나를 “인질로 써”는 주옥과 같은 대사를 남긴다.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다. 이 시대에도 이런 내부고발자(?) 혹은 양심발로자(?)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결말은 모조리 비극이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하던 일을 빼앗기고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잠시 그들에게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이런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돕고 싶다. 등등등. 그러나 잠시만 시간이 흐르면 깜빡! 하고 잊어버린다. 그것 또한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만약 4권이 나온다면 정관계 로비로 일찍 감옥에서 나온 학수에 의해 복수를 당하는 정환의 모습이 담겨야 한다. 그게 현실적이니까.

 

오늘 자 뉴스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며칠 전 대구에서 20대 청년이 뿌린 800만원 상당의 지폐에 대한 사연이다. 정신질환을 겪는 청년의 할아버지가 평생 폐지를 팔아 모은 돈이 800만원이라는 것이다. 사건을 접수한 지구대에서 혹시 그날 그 거리에서 돈을 주운 사람들에게 지구대로 돌려주면 당사자에게 전해줄 거라는 뉴스였다. 5만원권 160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한다. 더군다나 얼마 전 홍콩에서의 경우처럼 돈을 주워가면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라고 하는데, 얼마나 지구대에 돈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나조차도 며칠 전 “800만원 길거리에 뿌려져”라는 기사를 보고 “아~~ 왜 나는 그 시간에 그곳에 없었던 것인가?” 낙담했었으니까.

진짜 연말이고, 내일이면 연시다.

며칠 후 “길거리에 뿌려진 800만원 모두 지구대로 돌아와 주인에게 전해져” 라는 기사를 꼭 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직은 착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고 싶은 요즘이니까.

금괴를 두고 서로 싸우기만 하는 세상은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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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 스캔들 - 저작권과 해적판의 문화사
야마다 쇼지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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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기 반 소리 반>

이 말은 굉장히 유명하다.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K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나온 기획사 JYP의 대표 박진영씨가 한 말이다. 음악 좀 하고 좀 듣고 좀 안다는 사람들은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말을 대부분 박진영을 까고 조롱하는데 쓴다.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알아듣지 못할 박진영만의 표현을 듣고 ‘그러네~ 맞아. 노래는 공기 반 소리 반으로 해야지’하는 시청자가 있을까? 그 소리를 들은 오디션 참가자는 다음번 스테이지에서 또 같은 말을 듣는다. <공기 반 소리 반>이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 수 없는데, 뭘 고쳐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아니! 공기 반 소리 반이 뭔 소리요! 당신이 먼저 그렇게 불러 보든지”하는 오디션 참가자는 없다. 혹 있다 해도 모조리 편집! <공기 반 소리 반>이 인구에 회자되고 이번 시즌 K팝스타에서 유독 박진영의 심사평이 도드라지게 편집되는 건 어쩌면 프로그램 담당자의 욕심일 수도 있다. 워낙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고 어쨌든 살아남고 시청률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만인이 깔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물론, 심사위원 박진영은 함께 하는 두 사람보다 더 프로의식과 전문가의식을 가지고 심사를 하겠지만 말이다. 시청자와 음악 좀 하고 듣고 안다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박진영을 까는 것은 그의 허무맹랑한 심사평과 더불어 박진영 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차이다. 그가 구원파에 연루가 되어있느니, 결혼 생활과 여자관계가 어쩌느니, 기획사가 엄청난 재정난에 빠졌다느니 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사실여부를 알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의 표절 의혹이다. 여기서 의혹이라 하는 것은 국내 발매되는 음반과 음원에 대해 표절 판단을 내리는 주최도 애매하고 그것에 대한 신뢰도 마음껏 보낼 수 없는 골 때리는 음악 환경 탓에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표절>이라고 하고 싶지만 몸을 사려 본다.

그렇다면 박진영의 표절은 나쁜 것일까? 표절이라면 당연히 나쁜 거지! 남의 것 갖다 베낀 거 아니야! 당연할 걸 가지고!

 

맞다. 남의 것을 갖다 베끼는 행위는 잘못된 거다. 그런데 이런 표절 논란 같은 것에 휘말리는 가수나 작곡가들의 변명 중 대다수는 이런 것이다. “아~ 말이죠~ 음악을 잘 모르시나 본데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음악이 존재합니까. 세상에는 말이죠. 창작 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무지하게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 뼈를 깎는 고통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말이죠. 멜로디 라인 몇 개가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하면 말이죠. 어떻게 음악을 만듭니까!!” 라고.

 

 

“책에 씌어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이미 어딘가에 씌어 있는 것이나 들은 것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식에 소유권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예전에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던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 책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무언가에 얼마간을 덧붙여가는 것이 문화 행위이기 때문이다.” (p.302)

 

 

저작권을 비롯한 창작물에 대한 관습·성문법의 시초가 되는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에서 결과적으로 도널드슨이 승리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된 문장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창작은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활동이었다. 출판물을 비롯해 음악·미술, 인류의 삶 전반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창작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다. 정말 아무도 하지 않았고 만들지 않은 순수한 창작물을 만드는 행위가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서 표절을 반복해서 일삼는 이들의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남의 창작물을 베끼거나 가져가는 행위가 아무런 절차 없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도한 카피라이트의 적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컴퓨터 인터페이스나 브라우저와 같은 경우 마이크로소프트와 대척점에 있는 오픈소스집단과 그들의 콘텐츠는 알 만하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정보의 이용으로 사용된다. 인터넷 브라우저가 당연히 마이크로소프트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나와 같은 IT관련지식 문외한에게는 가르쳐줘도 사용하지 못하는 개념과 정보지만 창작물이 어떤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공유의 개념이라는 큰 틀에서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것이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보의 생산과 창작물의 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인류에게 공유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학과 학문입니다. 그것들은 공기나 물처럼 자유롭고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p.191)

 

 

이미 18세기에 이런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으로 인해 카피라이트의 개념이 지금까지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18세기 영국의 대형 서점주는 책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인쇄, 유통, 판매까지 모두 관여했다. 그 무렵의 서점주는 출판문화의 종합 프로듀서였던 셈이다.” (p.24)

“요컨대 이 싸움은 밀러처럼 에든버러에서 일찌감치 런던으로 진출한 서점주와 도널드슨처럼 뒤늦게 찾아온 사람과의 싸움, 즉 선발 업체가 독점한 시장에 신규 참여자가 파고들려고 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p.41)

 

진짜 이유는 기득권 싸움이다. 기득권을 쥔 쪽이 후발주자를 견제하고 자신들의 방으로 기웃거리는 새싹을 짓이겨 다시는 움트지 않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저 멀리 촌구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 서점가에 들어와 자신들의 밥상 한쪽을 차지하려는 도널드슨을 없애버리려는 시도였다. ‘도널드슨 대 베케트’재판의 양쪽 당사자들과 법률 대리인들이 펼친 이야기들은 보편적 인권과 인류의 자유로운 정보교류 등 고상한 것들이 많았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용어와 문장과 단어들 뒤에 숨은 의도는 결국 자기 기득권 지키기였다. 결국 재판에서 승리한 도널드슨도 에든버러에서 서점주로 성공한 후 런던으로 진출해 더 큰 성공을 바란 것이지, 처음부터 영국과 자유국가와 그 시민들의 인권과 공유의 가치 실현을 위해 재판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독점과 ‘해적’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다. 양자는 어디까지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옹호하는 방편으로 저자의 권리나 독자의 편의를 말해왔다. 양자의 힘과 힘이 충돌하고 거기에 법률가들의 인간관계가 뒤얽히며 시대가 움직여갔다.” (p.324)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솔직한 주장이다. 가치 판단은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프다. 오늘 날짜로 정당이 없어진 통합진보당 관련한 대법원의 판결을 가지고 ‘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나? 그리고 17만 장이나 된다는 판결문의 내용만큼 오늘 날짜로 없어진 통합진보당의 구성원들이 ‘악’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 선악의 이분법은 간단한 듯 어렵고 골치 아픈 문제다. 이분법이 간단해 지면 그 틈을 비집고 폭력과 야만이 기어 들어오게 마련이다. 차라리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자 목표다. 권력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다.

 

 

“저작권 연장에 찬성하는 쪽의 논의에는 저작권 사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자란 곧 콘텐츠 유통 사업이다. 저작권이 연장되면 가장 득을 보는 것은 저작자가 아니라 저작권자이고 저작물을 유통시켜 이익을 얻는 회사다.” (p.320)

 

 

한국에서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대형 기획사가 찍어낸 보이·걸그룹은 제외하고)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뮤지션이 한 곡당 가져가는 저작료가 몇 십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음반 시장은 붕괴한지 오래고 음원 시장이 현재 갑인 구조다. 이것 떼고 저것 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돈을 저작료로 받는 다는 것이었다. 그런 현재 한국의 음악시장의 구조를 놓고 보면 저작권 및 카피라이트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창작자는 물론 소비자까지 ‘을’을 지나쳐 ‘병’이나 ‘정’쯤으로 만들어 버린 ‘갑’들에게 있다. 대형 유통 업체. 수백, 수천 곡의 음원을 싸게 사 들여 그것보다는 조금 더 비싼 금액으로 소비자에게 파는 그들의 ‘갑’질에 대해 제재하거나 수익구조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이상 한국의 뮤지션들에게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 판결의 주요 요인이 된 개념을 들이밀며 “에이~ 만인을 위해서 저작권, 카피라이트 따위 매달리지 말고~~ 에이~ 더 만들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폭력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고통의 연속인 창작에만 매달려도 시원찮을 뮤지션들에게 정보의 공유와 오픈소스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

어? 그러면 K팝스타의 심사위원 박진영씨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은 과도한 거 아닌가? 표절의혹이 아니라 단지 너무 허무맹랑한 심사평과 유명한 해외 뮤지션들을 한방에 깎아내리는 절대 신공의 용기가 싫은 건가? 잘 모르겠다. 크흐흐...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의 결과, 카피라이트는 영구적이지 않고 기간이 정해진 권리라는 원칙이 만들어졌다.” (p.10)

 

 

아무튼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은 런던의 기득권 대형 서점주들에게 패배를 안겼다. 그들이 가진 독점적 권리와 자폐적 탐욕은 사라졌다. 물론! 잠시 동안! 카피라이트가 영구적이지 않고 기간이 정해진 권리라는 원칙이 이미 200년도 훨씬 전에 만들어 졌지만 아직도 모든 영역의 창작활동과 창작물에 대해서 표절 논란과 의혹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하게 선을 긋기도 모호하다. 선악의 이분법만 들이밀기에는 골치 아픈 문제다.

 

결론은 공기 반 소리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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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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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되는 적정 수준의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어느 사회학자가 그랬듯이 상식과 양식 또한 그 범주와 개념의 양태를 톺아보며 비교 분석해야 할 대상이지만, 관습적으로 대중이 인지하여 사용하는 상식과 양식의 범위는 사실 어렵지 않다. 개인이 살아온 삶의 기록을 종이에 옮겨 놓으면 그것이 상식과 양식일 수 있는 것이다. 종교·문화·지역·교육을 망라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비슷한 듯 다른 개인 간의 차는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분쟁과 전쟁을 불러 오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편’이라는 강한 연대감을 확인하는 주요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개신교 신자인 내게 이슬람교는 연대나 포용의 감정보다는 적대와 이질감의 감정이 앞서는 개념이다. 이슬람과 무슬림을 구분조차 하지 않던 몰이해를 감추기 위한 자기변명이었음은 근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20대 후반에야 깨달아 알 수 있었다. 상대에 대한 몰이해는 가히 폭력적이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적인 인식과 폭력적인 자기합리화는 얼마 전 12월 14일 새벽에 하나님이 한국 땅에 전쟁을 일으킨다는 예언을 한 미치광이 여자 광신도의 그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앞에 나서서 광신도 흉내는 내지 않고 길거리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것’이 아니면 모조리 ‘잘못된 것’이라는 광신도의 탈을 벗을 수 없다.

 

이 책 「메카로 가는 길」은 한 유대계 유럽인 남성의 이슬람 개종기(記)다. 유럽에서 태어난 백인 유대계 남성.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역사는 이미 중세이전부터이니 새삼스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치에 의한 본격적인 유대인 학살이 있기 전이었다. 그 말은 먹고 사는 데는 큰 문제없는 백인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느닷없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아들, 혹은 친구를 대하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얼마 전 서울시 인권조례 선포를 둘러싸고 보수 기독교계에 박원순 서울 시장이 무릎을 꿇었네 마네 말들이 많았다. 사건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성소수자를 비롯한 차별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인식이 과거보다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지금에도 당장 내 지인 중 하나가 “나 사실 동성애자야”라고 고백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려운 이야기 고백해줘서 고마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니, 이야기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고백 전 그를 대하는 태도와 고백 후 그를 대하는 태도가 똑같을 수 있을까? 나는 똑같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겠다. 이것이 나의 현주소다. 당신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 무함마드 아사드는 그 모든 편견과 차별과 멸시와 비난을 감수하고 이슬람의 원류를 찾아 나선 사람이다. 종교인이기도 하고 모험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가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다. 이 책은 그 길에 대한 여정기다.

 

 

“우리 젊은 세대는 소위 ‘신의 뜻’이 현실과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상황을 목도하고 ‘신이 뜻했다는 바와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신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p.73)

“정말 이상했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맛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낸 민족이 이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른 민족을 부당하게 대우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전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니 고통스러웠다.” (p.114)

 

 

두 번의 세계대전 후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 외상은 짐작할 수 없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만 할 것이라는 낙관이 넘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욕심은 첨단의 기술과 과학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특히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 죽어가는 현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는 현실. 그 절대악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절대악이라고 믿었던 집단의 반대편에 있는 집단 또한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절망감. 이런 것들이 뒤엉킨 시대를 사는 청년에게 희망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이슬람에 대해 그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4년간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확인한 바로는” (p.341)

 

저자는 고민과 물음을 머릿속으로만 하지 않았다. 직접 몸으로 떠났다. 전쟁의 참혹함을 피하려 신대륙으로 간다거나 식민지 어딘가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았던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난다. 4달도 아니라 4년을 돌아다닌다.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체험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의 생활에 자신을 녹인다.

 

 

“팔을 괴고 누워 별이 촘촘히 박힌 사막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똥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치를 그리며 떨어진다. 검은 하늘에 아치형 구멍이 난 듯하다.” (p.63)

 

 

끝도 없어 보이는 사막에서 베두인족을 만난다. 정처 없이 떠돌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가진 베두인들에게서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종교성을 확인한다. 또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사막의 밤하늘에서 잃어버렸던 종교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연이 위대한 것 같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몽골의 작은 고비라 불리는 엘승타슬라헤 사막에서의 일이다. 내가 여행했던 2008년도만 해도 수도인 울란바타르에서 엘승타슬라헤로 가는 도로가 따로 없었다. 그냥 초원을 달리는 것이다. 바퀴 자국이 나 있는 초원을 그냥 달리는 것이다. 겨우 도착한 유목민의 게르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밖으로 나와 보니 생애 처음 보는 암흑이었다. 불빛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암흑.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을 처음 경험한 나는 당장 무섭고 앞이 안 보인다는 생각보다 신기하고 설레었다. 처음 만나는 경험이란 그런 것이니까. 잠시 뒤 사막 저편 끝에서부터 조그맣게 빛이 올라왔다. 지평선에서의 일출이었다. 한국에서 본 일출의 대부분은 바다에서의 일출이었다. 그것도 수평선 저 끝에서 아무런 방해물 없이 온전히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구름에 가려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한국의 지평선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건물이 있고 산이 있으니 말이다. 처음 본 사막 끝, 지평선에서의 일출은 경이로웠다. 처음 만나는 자연의 힘 앞에서 나는 한 없이 감동했다. 제대로 믿고 있지도 않던 신에게 감사를 하기도 했다.

잠시 동안의 여행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저자의 4년 동안의 경험은 어땠을까? 굳이 말하지 않고 책에서 자세하게 풀어내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더군다나 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의 삶 또한 생애 처음 보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탐욕은 계속 커진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다, 깨달음에 다다르기만 한다면

곧 스스로 어떤 지옥에 갇혀 있는지 보일 것이다.

곧 확실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귀중한 인생을 무엇에 썼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찾아 헤매던 답이었다. 갑자기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1300년 전 쓰인 이 책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하고 기계화된 시대의 세태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p.347)

 

4년의 시간 동안, 충분히 이슬람에 대해서 알게 되고 무슬림과 함께 지내며 이슬람으로 귀의 하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내게도 그런 종교적 체험이 있어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나하고 비슷하구나 생각했는데, 그런 종교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또 뭔 얘기야~ 라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안다. 저게 뭔지. 어떻게 보면 참 애태우기도 한다. 4년 동안 사막과 아프가니스탄, 이란의 고원들을 떠돌며 진정한 이슬람교를 찾기 위해 고생 했는데. 그럴 때 멋지게 사막 한 가운데서 현현하셔서 내가 신이다 라고 하셨으면 멋질 텐데. 갑작스러운 체험으로 그는 완전히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간 의식하고 내면화 하고 있었던 종교성이 확신으로 변하게 된 계기다.

 

 

“검은 천으로 덮인 정육면체 건물(‘카바’는 아랍어로 정육면체란 뜻이다)은 드넓은 사원 한가운데 뜬 고요한 섬과 같았다.” (p.412)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 카바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내면에서 마치 노래처럼 느껴지는 희열이 서서히 샘솟았다. 카바 주변 바닥에는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대리석 관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남녀가 그 위에 올라가 검은 천을 둘러친 신전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고 있었다. 흐느끼는 이도 있고, 기도를 하며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도 있고,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로지 걷기마나 하는 이도 있었다.” (p.414)

 

 

모든 무슬림들의 최고 소원이기도 한 메카 방문도 하게 된다. 메카사원에 있는 영물, 카바와 그 주위를 도는 무슬림들을 묘사한 장면이 평화롭다. 며칠 전 있었던 IS의 인질극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파키스탄 총기 난사 사건도 평화롭게 메카 사원의 카바를 도는 무슬림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많다. 나도 그렇다. TV와 뉴스에 등장하는 이슬람교와 무슬림의 모습은 대부분 테러와 폭력, 야만과 전근대성이 대부분이다. 분명 그런 모습이 일부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개신교도들은 이슬람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무슬림들을 전도와 선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라마단 기간에 더 빡세게 기도를 한다거나 이슬람교가 득세한 국가에 선교를 나가는 것을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힘든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TV에 보이는 모습이나 보수 기독교계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기독교, 아니 정확하게는 개신교 목사들이 지금 어떤 취급을 받고 있나? 영화 「쿼바디스」개봉을 막기 위해 서울의 대형교회들이 각 언론사나 대형극장에 협조공문을 보내기도 하는 꼴이다. 이미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하고 그들의 도그마를 비꼬고 있는 현실인데, 자기들만 높고 넓고 큰 교회 건물 속에 자리 잡고 앉아서 딴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개신교인인 나조차 부끄럽고 답답하다. 내가 믿는 예수님과 그들이 믿는다는 예수님이 같다면, 포용하고 사랑하고 죄를 자백하고 행동을 고치고 너그럽게 이웃을 껴안아야 할 텐데. 기대조차 하기 힘들다.

 

모르면 알아야 한다. 모르면 아는 것처럼 떠벌이거나 마음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에 대해서 잘 모르면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마음대로 지껄이고 판단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저자처럼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하나의 대상을 알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여건과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잘 모르는 대상을 알아가는 데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누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떠먹여 주는 것도 아니다. 알고 싶은 것은 찾아서 알아봐야 한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간에 제대로 판단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판단은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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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뭐가 이렇게 슬프고 슬픈 소설이 있나 모르겠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은 독자가 가진 생래적 습성일 테고, 작가가 어떻게 해피엔딩으로 소설 전개를 끌고 가느냐를 궁금해 하며 책을 읽게 마련이다. 그런데 무슨 놈의 책이 해피엔딩이 없다. 하다못해 금철이와 영이와의 풋풋한 뽀뽀 하나도 없다.

어제부터 오늘 내일까지 올해 최고 한파가 몰아친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남쪽에도 아침 기온이 영하 8도를 가리키기도 했다. 이렇게 추운 나날, 70m 공중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이다. 자신들을 해고하고 끝까지 그 해고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소송을 해왔고 종착지인 사법부마저 회사의 손을 들어 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두 사람이다. 그들이 청춘을 바치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잔업과 야근을 마다하지 않으며 일했던 평택의 공장에 있는 높은 굴뚝에 올라갔다. 며칠 전 굴뚝에 올라가 트윗을 남겼다. 이제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고. 내가 일하던 회사, 공장,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있는 곳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공장 안에 들어와 있으니 좋다고. 비바람, 추위 피할 방법 마련해 올라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무슨 이런 놈의 세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회사의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의회도 정부도, 사법부도 노동자들의 손은 기어코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다이나믹 코리아답게 땅콩 부사장이니 십상시니, 국정 농단이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희한한 뉴스가 쏟아지는 곳이다 보니, 그들의 최종 판결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가진 게 몸 밖에 없는 두 사내는 결국 하늘 위로 올라갔다. 조금이라도 하늘 가까이 올라가면 하늘님이라도 이 두 사내를 굽어 살펴 주시리라 망상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아픔과 말로 다하지 못할 서글픔이 밀려온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70m 공장 굴뚝에서 영하 10도 15도 추위를 몸으로 견뎌야, 그래야 신문이라 TV에서 잠시 보도라도 해주니까? 무슨 이런 놈의 세상이 있는 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두 아이는 각자의 서러움에 복받쳐 울었다. 애초부터 계란볶음밥 같은 건 문제도 아니었다. 어린 스파이들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진 것 때문에 울었다.” (p.275)

 

은철과 원은 스파이놀이를 했다. 그 나이, 그 어린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에로틱한 장난도 해 보고, 푹푹 내질러도 어린아이 장난으로 넘겨 줄만 한 어른들의 관용이 유지되는 그런 시간. 은철과 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삼벌레고개 중턱의 스파이가 되었다. 경찰, 검찰, 국정원, 정보요원, 특수요원을 다 합친 것이 두 아이가 만든 스파이다. 은철과 원은 은철의 집이자 원의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우물집에 드나드는 계원들의 신상을 하나하나 파악한다. 임보살, 성계희, 사우디집, 큰 형님, 통장집.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을 어귀를 내려가 뚜벅이 할배, 괴상한, 곰딴지수학자의 신상도 파악한다. 늘 그 곳, 삼벌레고개 중턱에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그들의 이름을 알아낸다. 고도의 수사 기법이나 첨단의 과학 장비가 아니라 오로지 어린 아이 특유의 과감함으로.

“아줌마 이름이 뭐예요?”

하지만 삼벌레고개 중턱 최고의 스파이 둘은 망가진다. 완전히. 은철은 삼벌레고개 중턱 곳곳을 제 집 드나들 듯 뛰어다닐 다리를 잃어버린다. 원은 의뭉스럽지만 따뜻한 아빠를 잃고, 언니보다 더 살갑게 대해주던 엄마를 잃어버린다. 생채기가 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망가진다. 작품에서 그려내는 ‘망가짐의 과정’이 생생해서 슬픔이 더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모조리 망가질 수 있나 싶었다.

 

 

“너도 잘했고 나도 잘했으니 사백 번 잘했다. 느이 아버지도 뭐라고는 못 하실 거다. 그런 위험한 일을 그렇게 허술한 데서들.. 그래, 이번 일 가지고 그이도 더는 뭐라고 못 하겠지. 이제 다시는 안 갈 거니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뜯어낸 거니까.” (p.111)

“과도한 고통이 황홀경을 부르듯이 쓴술을 먹은 새댁의 입에서는 거꾸로 단내가 났다. 영은 원 때문에, 원은 희 때문에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p.267)

 

 

의뭉스런 원의 아버지는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가장이다.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주인집 기분을 잘 맞춰 주는 것도 아니고, 딸 아이와 아내에게 살갑지도 않다. ‘저런 게 무슨 가장이랍시고’라는 말이 곧 튀어나왔다. 그런 작자가 하는 일이라는 것도 작품 속에서는 명확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나중에 경찰인지, 보안요원인지 모를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걸로 봐서는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침술을 하고 경락을 하고 뭐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로 봐서는 시답잖은 사기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가장이자 남편을 둔 원의 엄마는 오롯이 그 고통을 떠안게 된다.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있는 형에게 찾아가 손 하나 벌릴 줄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개밥에 쓸려고 해도 없을 위인을 대신해 어린 원의 손을 잡고 시숙의 가게를 찾아간다. “딱 한 번만 뜯어내고” 시장 통 공중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배설해 버린다. 쿨하다. 이런 쿨한 원의 엄마는 유독 남편에게는 지고지순이다. 남편이 하는 시답잖은 일이 무어 그리 대단한 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그 무어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시답잖은 일을 하는 놈팽이를 굳이 잡아가 송장을 만들어 돌려보내는 선글라스의 아저씨들도 참 희한한 작패를 하는 놈들이다.

영과 원은 끓어오르는 슬픔마저 조절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조숙해 버렸다. 그것이 더 슬프다.

 

 

“내 소원이다. 우리 애기한테 굿 한번 해주자, 부정 타게 더는 말 마라, 새댁.” (p.209)

 

 

우물집 주인 순분이 은철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은 임보살의 굿이었다. 터줏대감처럼 삼벌레고개 중턱을 지키고 있는 임보살의 굿이라면, 혹시라도 은철이 다리에 힘이 생기고 다시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병원이라는 데가 원래 없는 사람들 등쳐먹으려고 이런 저런 검사만 하라고 하고 수술이다 뭐다 시키는 대로 다 해도 막내 놈의 다리는 도무지 낫지 않는다. 딱 봐도 자기보다는 훨씬 더 배웠고 똑똑한 거 같은 원이 엄마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다. 이것은 차라리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어쩌면 순분은 임보살의 굿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그렇게라도 해야 평생을 다리를 절며 살아야 할 막내놈 얼굴 볼 핑계거리가 생기는 거니까. 그러니까. 굿이라도 한번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은철이가 아닌 자신에게.

 

 

“난 죽어도 착한 사람 같은 거 안 될 거야. 돈 벌면 아주 그냥 한 방에 뭉개버릴 거야. 통장집 같은 년, 우리 담임 같은 새끼, 다시는 말도 못 하게 아주 그냥 혀를 다 뽑아버릴거야.” (p.289)

 

 

남편이 죽은 후 영과 원의 엄마는 미쳐 버린다. 정신 줄을 놓는다. 간간이 돌아오는 제 정신에 주인집 순분을 찾아가 입원을 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병원에 들어간다. 영과 원은 졸지에 고아가 된다. 두 아이는 다행인지 불행의 시작인지 알 수 없는 큰아버지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큰아버지 집으로 가는 날, 영은 주인집 금철에게 이야기 한다. “난 죽어도 착한 사람 같은 거 안 될 거야. 돈 벌면 아주 그냥 한 방에 뭉개버릴 거야.” 저주를 퍼붓는데, 나는 오히려 영을 응원하게 된다. ‘그래 그렇게 꼭 됐으면 좋겠다.’ 아마 「토우의 집 2」가 출간된다면 으레 그렇듯 또 다른 슬픈 이야기가 즐비하겠지? 현실이 그러니까. 흐흐흐... 영은 갑자기 가장이 된 큰아버지 집에서 결코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다. 부모 없는 자신과 어린 동생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큰아버지의 호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맞다. 차라리 이런 스토리라면 2권은 절대로 나오지 않아야 한다. “영과 원은 큰아버지 집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라는 정도의 해피엔딩은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여전히 70m 굴뚝 위에 두 명의 사내는 올라가 있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추울 거라는 비극적인 날씨 기사는 시간대로 쏟아진다.

씨발.

 

 

 

“화창한 오월의 첫째 일요일이었다. 우물집 바깥채의 방이 하나 비고 새 식구가 이사를 오기로 한 날이었다.” (p.12)

“정말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할까요?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여보.”

“저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건 우리니까요.” (p.223)

 

 

화창하기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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