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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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돈과 내 손모가지를 건다.”

배우 김윤석을 일약 톱스타로 만든 영화 「타짜」는 흥행 성공을 거뒀다. “내 손모가지를 건다.”라는 그의 대사는 각종 패러디를 양산하고 실생활에서도 농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되기도 했다. 도박이라고 하면 전혀 관심도 없고 화투도 뭐가 1이고 뭐가 4인지 모르기 때문에 고스톱은 할 수도 없다. 도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도박해서 돈 따는 사람 없다. 도박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 도박하면 부모도 모른다. 등등 도박과 관련한 부정적인 인식과 말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정말 놀란 적이 있다. 결혼 후 처가 식구들과 강원도 여행을 갔는데 숙소가 하이원리조트였다. 하이원리조트 근방에는 강원랜드가 있다. 여름에 여행을 갔던 터라 강원랜드 앞 인공호수에서 밤마다 멋진 분수쇼가 펼쳐진다고 해서 식구들 모두 저녁을 일찍 먹은 후 강원랜드로 갔다. TV에서나 보던 강원랜드였다. 말이 랜드지 카지노다. 카지노에 입장하지 않은 채 들여다보고 싶어 카지노 입구로 갔다. 멀리서 카지노 입구를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분수쇼가 있기 전 30분 정도 카지노 입구에 머물렀는데, 과장이 아니고 30분 동안 100명은 넘게 카지노로 들어갔다. 좁은 입구로 보기에도 휘황찬란하고 딴 세상 같았다. 멋지게 분수쇼를 보고 다음 날 아침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리조트에서 강원랜드를 지나면 사북고한입구가 나온다. 각종 전당포와 모텔이 넘쳐났다. 전당포와 좁은 도로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것은 자동차였다. 좋은 차들이 많았다. 강원랜드에서 가진 돈을 다 잃고 전당포에 자동차를 맡긴 후 다시 찾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차라고 했다. 정말 충격이었다.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했다.

내가 직접 하지 않거나 내 가족이나 친지가 도박에 빠지지 않는 이상 도박이 그렇게 위험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타짜」같은 영화를 보면 멋있게 보인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잘 생기고 예쁜 탓이다. 나도 저렇게 하면 멋있겠지? 우와 재밌겠다. 예쁘다. 물론 영화를 보고 ‘나는 타짜가 될 테야.’라고 도박판에 뛰어든 사람은 없겠지(?)만.



“아저씨가 에이스 투페어로 이길 확률은 26퍼센트고, 저 아저씨가 플러시를 잡을 확률은 6.5퍼센트예요. 그러니 어서 레이즈 하세요.” (p.29)

“딱 보면 아는데...”

“계산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보면 아는데.” (p.31)

정말 이런 능력이 있다면 타짜에 나왔던 고니와 아귀의 마지막 도박판에서도 홀로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정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까? 어린 시절 유리겔라가 나오는 TV를 보면서 정말 신기했다. 숟가락을 엿가락처럼 휘어버리고, 만리장성을 뚫고 지나가기도 했다. 당시 완전히 빠져서 보던 드라마가 ‘600만 불의 사나이’였다. 초능력을 가지고 단번에 악당들을 쳐부수는 사나이의 모습을 봤다. 슈퍼맨 따라하다가 코깨진 친구는 허다했다.

그런데 도박판에서, 카드만 봐도, 상대방의 표정이나 작은 근육의 움직임만 봐도 패를 알 수 있다면, 이건 뭐 로또다. 로또.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용팔, 재휘, 정연, 선영, 강회장, 추마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다수는 갑자기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아니, 뛰어들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어쩌다보니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재휘는 그런 능력을 가졌다. 흔히 말해 타짜정도 되는 것 같다. 아니, 타짜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진 도박의 고수다. 그런 인물이 도박판에 흘러들어가지 않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휘는 아버지 정연이 강회장에 의해 무참히 죽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은 절대로 도박에 손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지만 그가 인생에서 하게 되는 선택은 결국 도박판으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대학에서 관련된 학과를 전공하고 카지노 딜러로 일하게 된 것이다. 재휘와 같이 아버지를 비참하게 도박판에서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선영도 결국 도박판으로 흘러들어 간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야. 지금은 강 회장이 모르니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분명 큰일을 치르게 될 텐데. 그 애를 멈출 사람은 너뿐이다. 무슨 사고 터지기 전에 네가 선영일 꼭 붙잡아야 해.” (p.128)

소설이니까, 허구니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닮은 구석이 많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당한 아이는 성인이 된 이후 그것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을 지켜본 아이 중 상당수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내를 폭행한다고 한다. 흔한 일이다. 나와 내 주변만 살펴봐도 이런 일은 정말 흔하다. 나도 아버지의 성격 중 정말 ‘저것만은 닮지 말아야지. 정말 싫어.’하는 것이 있었다.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똑같은 말과 행동, 기질이 문득 튀어나왔을 때 정말 절망했었다.

재휘와 선영 모두 도박판에서 부모를 잃었다. 자신도 도박판에서 모든 것을 잃은 후 살고 있는 용팔의 눈에 재휘와 선영은 그들의 부모와 자기 자신의 비참한 현재가 보였을 것이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돈을 많이 벌고 도박판에서 이름을 날리겠지만 결국 말로는 비참하다는 것을 용팔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내내 용팔의 만류는 단 한 번도 재휘와 선영의 의지를 막지 못한다.


“오빠를 강 회장 손에서 빼내려면 돈이 필요해. 그리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포커뿐이다. 그래, 포커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어.” (p.178)

“오빠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빠가 아닌 강 회장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복수심,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 (p.225)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오직 포커뿐인 선영의 마지막 수는 어쩔 수 없이 포커다. 자신 때문에 한 쪽 눈을 잃고, 악마 같은 강회장 밑에서 타짜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재휘를 구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다. 슬픈 일이다.

대안이 없는 것이다. 대안이 있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시 그 악마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안이 없는 사회, 다른 방법이 없는 사회는 절망이다.

다행히 이 소설의 결말을 해피엔딩이다. 재휘와 선영은 강회장을 무너뜨린다. 재휘와 선영모두 다치지 않았다. 목숨을 잃지도 않았다. 말기암으로 죽은 아버지 같은 용팔은 곁에 없지만 재휘와 선영, 두 사람의 사랑으로 아이가 태어났다.

모르겠다.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는데, 이 두 사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사회가 세상이, 도박판이 가만히 놔둘지 확신한 수 없다. 만약, 재휘과 사고를 당한 다거나 아이가 보험이 되지 않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면, 두 사람이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면 다시 도박판이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그것밖에 대안이 없으니까.

그래서 대안이 없는, 다른 방법이 없는 세상은 절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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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샨티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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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현주 목사의 책은 독특하다. 나는 대학 때 그의 책을 처음 읽었다. 충격이었다. 내가 읽는 성경과 내가 가진 신앙을 전혀 다른 방향과 감각으로 해석하는 이현주 목사의 독특함에 완전히 매료됐다. 동양과 서양의 종교와 고전을 아우르는 그의 사색과 글쓰기는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알게 해주었다. 개신교 보수교단의 교회에 다니고 복음주의 기독학생회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 탓에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내게 이현주의 책과 글은 새로운 세계였다. 내가 가진 신앙과 신앙관이 무조건 옳은 것, 아니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보수교단에서는 그를 사이비 목사라 칭하기도 하고 이단이라 칭하기도 하나보다. 그러든 말든 이현주 목사의 책은 많이 팔리지 않는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내 책장에 있는 오래된 그의 책을 검색해 봤는데 절판된 책이 태반이다. 만약 어떤 종교학자들처럼 이현주 목사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대단한 압박과 핍박과 공격을 받았을 텐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씁쓸하다.

 

이 책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제자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는 배신에서부터 해골 골짜기 위 십자가에서 죽는 것까지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예수의 눈으로 본 사건의 흐름은 성경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성경은 예수 사후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3인칭 시점인데 반해 이 책은 예수의 눈, 1인칭 시점이다.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독특하고 신선하다. 예수의 눈으로 본다는 생각. 별다른 생각은 아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생각이다.

 

 

“나의 교회는 논리 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과 예산 위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 앞에서 자기의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고 쩔쩔매며 울고 있는, 그것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울고 있는 베드로의 나약한 어깨 위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거기, 인간의 약함에 신은 비로소 임재하기 때문이다.” (p.28)

 

 

이 책은 증보판이다. 유신의 정점, 남발되는 죽음의 춤이던 긴급조치 한가운데 쓰인 책이라고 한다. 민중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고 있을 무렵, 겁 많고 파리한 서른 살 젊은이가 끙끙거리며 쓴 글이라고 머리말에서 이야기한다. 30년이 훌쩍 지난 과거다. 하지만 책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눈에 비친 교회와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은 30여 년 전과 지금 별다른 차이가 없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알 텐데, 매주 일요일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있다. 주보라고 하는 것이다. 당일 예배 순서와 내용, 광고와 교회 소식, 교인 동정 등 깨알 같은 정보들이 있는 종이다. 예배 시간에 목사의 설교를 적기도 하고 지루한 설교 시간을 달래기 위해 낙서를 하기도 하는 종이다. 이 주보는 교회 각 부서마다 있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영아부, 유치부에서부터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성인예배까지.

특히, 중등부와 고등부 주보는 만화나 캐리커처, 웹툰 같은 것을 많이 삽입하기 마련인데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중반까지 유행하던 그림이 있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전국 교회 중등부, 고등부에서 최소한 한번씩은 주보에 실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휘황찬란한 교회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예수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매주 일요일 예배당에 몰려와 예배를 드리고 예수를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교인들과 교회 건물과는 아무 상관없이 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예수의 모습. 현대 개신교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컷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30년 전에도 그랬단다. 너무 약하고 너무 감정적이고 너무 변화무쌍해서 게파(반석)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예수의 사려 깊음이 고맙다. 감사하다. 책에서의 표현처럼 신앙은 그것에서 비롯된다. 강하고 많은 것을 가진 이들에게서 절실한 신앙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실한 신앙도 찾아보기 어렵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숫자였다. 숫자의 소리였다. 숫자가 나를 심판했고, 나는 숫자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p.35)

“‘가이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빌라도는 서둘러 나를 군중에게 내어놓았고, 나는 곧 정치범이 되어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졌다. 아직 때는 오전, 눈부신 햇살이 군중의 ‘소리’와 어울려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p.85)

 

 

총독 빌라도도 분 봉왕 헤롯도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단지 당시 예루살렘의 종교적·사회적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는 것을 두 명의 정치 지도자들은 발견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도 공모자다. 숫자의 소리와 공포에 질려 예수를 내어 준다. ‘가이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옳다거니!”하며 죽음의 춤을 춘다.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만 지정학적으로 그렇게 중요한 속국이 아니었던 예루살렘은 작은 꼬투리 하나 잡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기적을 일으키고, 어마어마한 군중을 끌고 다니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움트고 있는 것은 기득권에게는 늘 불편한 일이다. 오랜 세월 갖춰온 틀 속에서 호의호식하고 적절한 권세와 명예를 누리던 바리사이파와 산헤드린 회원들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게 예수는 정말 눈엣가시였다. 그들이 만들어 온 틀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두 부정하고 전복하려는 강력한 혁명가 앞에 그들은 선동을 준비한다.

 

 

“그렇다. 나는 결국 정치범이(되)었다. 그 길밖에. 내가 죽을 다른 길이 없었다.” (p.102)

 

 

도저히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 총독 빌라도는 흉악한 사형수 바라파를 끌어낸다. 미친 듯이 예수의 처형을 부르짖는 군중들에게 바라파를 보여주면 예수를 향했던 미친 분노가 그에게로 옮겨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군중 혹은 대중의 흐름은 한번 바뀌면 다시 제자리로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현실 정치를 봐도 그렇다. 한번 떠난 민심을 회복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또다시 그들을 압제하고 차별하고 괴롭히던 기득권의 입에 선동된 군중은 미친 상태로 예수를 못 박으라 부르짖는다.

그렇게 예수는 정치범이 되어 십자가에 달린다.

 

 

“하늘이 잠잠할 때, 먼저 그 침묵 속에서 들끓고 있는 미움과 분노를 읽을 일이다.” (p.121)

 

 

2주일에 한 번 친한 친구 가정과 성경공부를 한다. 참 좋은 시간이다. 4명 모두 서로를 잘 알고 오래 봐 오던 사이라 허물없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몇 주 전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왜 이렇게 악하고 잘못되고 뒤틀린 세상을 그대로 놔두시는 걸까? 사회적 정의와 공의가 대지에 흘러넘치는 것이 신의 뜻일 텐데, 왜 이렇게 부정의와 비상식과 부도덕이 판치는 세상일까?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 더 악하게 살고, 더 꼼수를 부리며 살고, 더 편법과 탈법과 속임수로 사는 사람들이 많을까? 또 왜 그런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잘 나갈까?

왜 하늘이 잠잠할까?

이현주 목사의 말처럼 그 침묵 속에서 들끓고 있는 미움과 분노를 읽어야 하는데, 아직 내공과 신앙이 부족한 내게는 무척 힘든 일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이현주 목사의 책 전부가 그렇다. 물론, 내가 읽은 책에 한해서.

새로운 신앙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동화에서부터 동양고전에 이르기까지 이현주 목사의 글쓰기는 다양하고 다채롭다. 기독교 내에 이 정도의 글쟁이·사상가가 있을 까 싶을 정도다. 기독교 관련 책이 언제부터 인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자기계발서처럼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책들. ‘~기도 방법’, ‘성공하는 신앙 습관~’, ‘은혜 받는, 축복받는 ~ 방법’ 등등. 제목만 봐도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그 어떤 것보다 세속적인 책이 넘쳐난다. 그런 책이 잘 팔린다. 다행인 것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 「예수의 죽음」은 내가 이현주 목사와 그의 책을 소개해 준 후배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후배가 이현주 목사의 책을 읽고 받은 감동에 고맙다고 내게 선물해 준 책이다.

모쪼록 많은 개신교인들, 특히 교회 다니는 젊은이들이 이현주 목사의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편협한 신앙에서 벗어나 넓은 신앙의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현주 목사의 책이 절판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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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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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가끔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한다.

“야! 일본이 다시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면 너는 독립운동 할 거야?”

아무도 묻지도 않고, 그런 사명감 끄트머리조차도 없는 우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아니! 나는 바로 일본어를 배우고, 그 쪽에 붙을 거야”

야이 XX야! 그러면 돼! 너는 애국심도 없어? 라고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지막이 읊조릴 뿐이다.

“나는 풀보다 빨리 누울 거야.”

 

 

고재윤, 이억관, 김철수, 양칠성, 김동해, 박윤상, 박창원, 임헌근, 김현재, 문학선, 신경철,

 

이 분들은 독립운동가다. 20대부터 30대까지 나이도, 고향도, 멀리 적도 인근의 섬과 인도네시아로 오게 된 경위도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명백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고려독립청년당>의 당원들이다. 이분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면서 나와 친구들이 나누는 되지도 않는 농담이 부끄럽지 그지없다. 하지만 그 농담에 진담이 반쯤 섞여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보니, 마냥 부끄럽고 썩소를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본 정부가 양칠성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참가하여 독립 영웅이 된 두 명의 일본인 병사에 대해서는 기념식에 맞춰 유족을 찾아내 그들의 희망에 따라 분골의식까지 행하게 했으면서, 조선인 양칠성의 유족에게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p.28)

 

일본이 패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적도의 어떤 곳에 끌려와 일본군의 군무원으로 일해야 했던 끔찍한 과거를 한 번에 씻어 버리고 눈물로 그리고 고대했던 고국,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 군무원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네덜란드의 ‘보복적’전쟁 재판으로 전범이 되었고,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p.21)

“결국 일본이 네덜란드령 인도 지역의 포로수용소 감시원을 조선인에게 맡겼던 것이, 조선인 전범자가 양산된 주요 원인이다.” (p.302)

 

이들은 갑자기 전범이 되었다. 전범. 전쟁범죄자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극악한 마지막 발악에 넘어가 버렸다. 돈을 벌기 위해, 보다 나은 형편을 위해 일본의 군무원이 되었다. 처음 군무원을 모집하기 위해 내건 약속들은 모조리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이들은 태평양 작은 섬 곳곳에 산재한 포로수용소 감시원 일을 해야 했다.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에 대한 동의도, 그것에 대한 사명감도 전혀 없는 조선의 청년들이었지만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딘 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온 터라 조선 땅으로 돌아갈 길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전범이 되어 사형을 당한 ‘고려청년독립당’의 당원들도 있었고, 일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 양칠성씨의 행방에 대한 일본인 학자의 궁금증이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일본인 학자들의 눈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얼마나 골 때리고 이상했을까?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다. 제대로 된 참회와 사죄가 없는 채로 또 다른 대동아공영의 야욕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패망 후 인도네시아에 남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최한 기념식에는 일본인밖에 오지 않았다. 양칠성이라는 조선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그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양칠성과 ‘고려독립청년단’의 존재는 아직도 역사 속에 파묻혀 있었을 것이다.

 

 

“군인·군무원 신분으로 약 36만 4천 명의 조선인이 직접 전쟁터로 내몰렸음을” (p.49)

“군무원 용인은 군대 계급으로 치면 가장 말단 지위였기 때문에 모든 군인에게 경례를 해야 했다. 설사 상대가 이등병이라도 말이다.” (p.168)

“야전 포로수용소로부터 같은 부대 안에 개설된 제16군 포로수용소로 이관되었는데, 그들 포로의 관리가 조선인 군무원들이 담당할 주요 업무였다.” (p.96)

 

 

36만 4천 명의 조선인이 일본이 벌인 전쟁에 끌려갔다. 3만 명도 아니고 36만 명이다. 인도네시아와 적도 인근 섬으로 끌려간 조신인 대다수의 신분은 군무원이었다. 말단 일본인 이등병에게도 경계를 해야 하는 신분이었으니 그 고통과 한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들이 하는 일이 더 큰 고통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온 영국군, 네덜란드 군이 대부분인 포로수용소를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아무런 사명감도 없고, 당위성도 없는 일에 동원되어야 했다.

 

 

“도조 육군대신은 ‘미군은 비행장을 일주일 만에 건설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3일 만에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연구하라.’고 했다고 한다.” (p.132)

“포로들은 잇달아 적리에 걸리고, 영양실조 상태에 빠졌다. 곡괭이로 산호석을 내리찍으면 곡괭이가 도로 튀어 올랐고, 야자나무 한 그루를 넘어뜨리고 뿌리까지 제거하자면 열 명이 일주일 이상 매달려야 했다. 그 야자나무가 포로들의 관이 되었다. 포로들은 제때 관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죽어갔다.” (p.139)

 

전쟁 말기, 이미 패색이 짙고 그들이 벌인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전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던 일본은 마지막 발악을 한다. 남태평양에 흩어진 수많은 섬과 열도에 숨어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고, 아주 작은 섬에도 비행장을 건설해 호주 대륙으로의 침공을 계획한다.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제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일본은 더 잔인했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일본인들만 징용하면 아무도 할 말 없다. 그런데 일본은 조신인, 대만인을 징용했다. 돈을 주고, 전쟁 후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달콤한 말로 청년들을 유혹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군인이 있는 학교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은 조선 청년들에게 군무원 지원은 그다지 부끄럽거나 힘든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3.1 운동 이후 조선 안에서의 독립 운동이 발본색원 된 후 조선 청년들은 엘도라도를 꿈꾸며 만주로 향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돈 벌기 위해 만주로 향했던 청년들과 군무원으로 지원한 청년들의 맥락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군인이 아니니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군이 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미군이 비행장을 일주일 만에 건설한다면 일본은 3일 만에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조선 군무원들은 포로들에게 노역도 시켜야 했다. 되지도 않는 노역 말이다. 최신 기계와 장비로 건설해도 1주일이 걸리는 비행장을 포로들의 손발로 3일 만에 건설해야 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포로들은 수없이 죽어갔다. 어쩌면 일본이 원하던 바 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포로는 많고 전선은 예상치도 못하게 확장되다 보니 관리할 수 있는 인력도 없고 여건도 불비했다. 포로라고 마냥 잡아놓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죽으면 뭐 어쩔 수 없으니 죽기 전까지 일이나 시켜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잔인하고 악마 같은 새끼들.

돈 벌고,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적도까지 온 조선인 군무원들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1944년 12월 29일 밤 11시, 연병장 한쪽 구석의 취사장에 혈맹의 언약을 맺는 열 명의 조선인 군무원이 모였다.” (p.193)

 

조선인 군무원은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오히려 독립의식을 싹 틔운다. 명분 없는 전쟁에 가담한 자신들의 처지를 개탄하고 ‘고려독립청년당’을 창당한다.

 

 

당 강령 1. 아시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어라.

당 강령 1호가 ‘폭탄아가 되어라’

눈물 난다.

총 한 자루, 칼 하나 없는 조선 청년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태평양 한 가운데서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폭탄아’가 되기를 결의한다. 제대로 된 폭탄이 될지 알 수도 없는 청년들이 말이다.

이 청년들은 결국 ‘폭탄’이 되지 못했다. 갑자기 일본이 패망하고 이들은 전범이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군에 의해 끌려 온 조선인 군무원들이 전범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조선인 군무원들이었고, 포로들의 눈에 그들은 일본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서류상으로도 일본인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일본이 벌인 전쟁의 전범이 되고 적도에 묻혔다.

책의 저자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려독립청년당원 양칠성의 고향과 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 생존해 있던 이상문 선생을 만나게 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열여섯 번의 청원을 했지만, 국가보훈처는 증거 자료가 부족하다며 사실 인정을 유보했다. 그때마다 나는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깊은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내게 저자들은 세계 방방곡곡을 다녀서라도 반드시 증거 자료를 찾아낼 테니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로, 네덜란드로, 타이로, 한국으로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략)

2011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고려독립청년단 혈맹 당원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졌다.” (p.371)

 

 

고려독립청년당의 생존자 이상문씨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이들 일본인들이 해낸 것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문씨는 30여 년 동안 열여섯 번 청원을 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증거 자료가 부족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고려독립청년당 깃발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야 하고, 카메라 하나 없는 그들에게서 흑백 사진 한 장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어떻게 더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걸까. 고려독립청년당의 당원이었던 당사자가 생존해 증언하는데 뭘 더 얼마나 강력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까. 저자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고 수집했다. 고려독립청년당이 실재했던 단체고 일본 패망 이후 전범재판을 통해 남겨진 자료도 모았다. 그래서 이상문씨는 독립유공자로 비로소 서훈되었다.

아름다운 나라.

 

 

“독립, 모든 분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했던 조국의 독립, 반드시 완수해주십시오. 저는 저세상에서나마 지켜보겠습니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p.291)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후 마지막 진술을 하는 박정근 선생의 말이다. 적도에 묻힌 조선 청년들의 한을 여전히 풀어주지 못한 나라가 이 나라다.

얼마 전 한국의 수도 서울 한 복판에서 일본왕 생일파티를 여는 나라다. 주요 공직자로 추천된 명망있다고 판단되던 지도자급 인사들의 친일 발언은 이제 경악스럽지도 않다.

이런 나라다.

적도에 묻혀 계신 고려독립청년당 당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편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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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 한국전쟁과 학살, 그 진실을 찾아서
김동춘 지음 / 사계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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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다. 전쟁을 쉬고 있는 중이다. ing다. 그로 인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어져 있는 허리는 언제 접붙여 질지 기약도 없다. 대통령께서는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희대의 명문장을 말씀하셨지만 그 “대박”이 언제 날지는 부연해 주시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횡행하는 나라다. 참여정부 시절 국보법을 철폐하려고 했지만 국회 과반 이상의 의석을 가지고 있는 집권당에서도 밀어붙이지 못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북한, 종북, 빨갱이, 좌익 이라는 말이 주홍글씨처럼 찍혀 버리는 곳이다. 북한이라는 말이 붙으면 겁부터 집어먹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오랜 세월 운동권 진영 중 일부는 한국전쟁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는 설을 신봉했다. 그래서 현대 한국사의 거의 모든 부분을 무시하고 일부 외국의 한국전쟁 전문가의 수정주의 같은 주장을 신봉했다. 휴전 후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구)소련, 중국(당시 중공), 미국의 기밀문서들이 해제되면서 한국전쟁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해제된 기밀보다 아직 해제되지 않은 기밀이 더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한국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우리 땅에서 벌어졌지만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이 국제전의 당사국에 더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돈도 되지 않고 큰 성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연구에 뛰어드는 학자는 많지 않다. 그것도 러시아, 중국, 미국의 기록물에 접근하는 것에서부터 당시 각 국가의 군대 편제와 구조, 시대적 상황과 정치·경제·지리·문화적 차이까지 감안해야 하고, 번역을 해야 한다. 군사 기록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한 줄에서 맥락을 읽어야 하는 시각도 있어야 한다. 이 일을 누가 하나? 국가에서 발 벗고 나서서 연구비를 지원하고 국가 대 국가 간의 협력으로 개인 연구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든지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다.

 

 

 

“여당과 언론에서 과거사위원회들의 활동을 말할 때는 거의 부정 일변도였기 때문에 상당수 국민들은 오직 할 일 없이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조직, 운동권 실업자들 먹여 살리자고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조직 정도로 알고 있고, 시작도 끝도 성과도 한계도 알 수 없고 정치적 의도로 만든 구 민주 정권의 유물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p.9)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이후 위원회가 여러모로 파행을 겪게 되었는데” (p.245)

 

 

한국의 역사 중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반민특위 실패>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실패했다. 반민특위 위원들이 일을 제대로 못했거나 돈이 없었거나 반민족행위자가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 공권력의 부당한 개입과 공격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었고 실패했다. 우리 힘으로 우리 민족과 국가, 국민을 배신한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지 못했다. 반민족행위를 했던 자, 그것에 영합했던 자, 그런 놈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자들로 인해 우리 손으로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 역사는 지금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게 일본에 영합했던 자들이 해방 후 들어선 미군정에 영합하고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다시 기득권을 잡았다. 오랜 군사독재 정권은 그들의 안위를 보호하고 부와 명예와 힘을 안겨 줬다.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 온 가족이 조선 땅을 떠나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후손들은 해방 된 조국에서 끔찍한 삶을 이제까지 이어가고 있고, 기회주의자로 평생을 산 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자기 조상이 친일파로 정확하게 밝혀졌음에도 국가가 환수해 간 조상의 땅을 반환하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탓이다.

민주정부 10년, 어린 나이였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두 명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좋았다. 부끄럽지 않았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두 분이 대통령인 것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두 대통령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었다. 해방 후, 휴전 후 제대로 된 역사청산을 하지 못한 과오를 인정하고 일부 사죄하는 모습이 좋았다. 이름만으로도 긴 여러 가지 ‘과거가위원회’가 만들어져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수십 년 전 실패한 반민특위가 비로소 21세기가 되어서야 부활 해 제대로 된 역사청산을 하는 줄 알고 좋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 돌아보니 그렇다.

 

김동춘 교수는 한국전쟁에 관련된 책을 쓰고 직접 과거사위원회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드문 학자다. 그의 전작 「전쟁과 사회」를 읽으면서 ‘어? 한국에도 한국전쟁 전문가가 있네?’라고 생각했다. 물론, 한국전쟁에 대한 책은 여러 권 나왔지만 학술적이면서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쓰인 책은 많지 않았다. 박명림교수와 서중석교수의 책은 일단 제목만으로도 갑갑하다. 책을 펼치면 더 답답하고. 김동춘의 책은 이전까지 한국전쟁에 관한 한 가장 저명한 책으로 생각되었던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견줄 정도였다. 한국인의 눈에서 본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 특히 그 책에서는 한 챕터로 다루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내용은 다른 책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이 책은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위원회에서 활동한 김동춘의 일기? 내지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실패하고 유야무야 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과 취지, 과정과 한계를 자세하게 알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책이다.

 

 

“제도적 청산보다는 인적 청산에 강조점을 두는 한국 사회의 그간의 관행은 극복되어야 한다. 인적 청산은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고, 제도적 청산은 과거의 공권력 범죄를 가능케 했던 법·제도 등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도덕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대중들에게 가시화할 수 있는 인적 청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p.203)

“진실화해위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법적으로 강력한 조사 권한이 확보되어야 하며, 자료를 소지한 행정기관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p.256)

 

세월호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제대로 활동 하지 못하고 있다. 몇 달 후면 아이들이 억울하게 죽은 지 1년이 되는데, 아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수십 년 전의 반민특위와 민주정부 시절의 각종 과거사위원회들처럼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위원회의 활동에 제약이 있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권한 자체에 있었다. 강력한 조사 권한조차 없었으니, 한국전쟁 때 쓰던 칼빈 소총을 들고 지금 전쟁이 일어난 곳에 뛰어든 것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정권을 바뀌었지만 군과 경찰의 논리는 변하지 않았고 각종 정보당국의 협조는 참여정부 말엽에 이르면서 노골적으로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강력한 조사 권한과 수사 권한까지 더해졌다면 뭘 해도 했겠지. 그래서 세월호 유족들이 그렇게 조사위원회의 조사권과 수사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양쪽 날개를 다 잃은 상태니 역사는 역시 반복되는 건가 보다.

일반 국민들과 유족들이 보는 관점의 차이도 컸다고 한다. 단순히 관련자 몇 명 처벌하고 국가가 배·보상을 하는 것이 마치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고 국가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명예가 복권되며 그로 인해 수십 년 고통을 받아 온 유족들의 삶이 회복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괴리를 잘 이용하는 것이 또 수구기회주의기득권세력이다. “봐라~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한다. 지겹다고 한다. 뭘 더 얼마나 국가가 사과를 하고 돈을 줘야 하는 것이냐고!” 씨발.

 

 

사건 이후 목격자의 산 체험을 침묵시킨 문화적 폭력은 유대인 학살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했다.” (p.62)

“난생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 앞에서 증언을 하는 그들은 대단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유족들의 말문이 트이게 하는 일” (p.112)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대다수의 죄목은 좌익, 간첩, 빨갱이 혹은 그들의 협력자였다는 것이다. 이거 말고는 다른 게 없다. 쌀 주고 밀가루 준다고 가입시킨 보도연맹이 대표적인 사례다. 너나 할 거 없이 가입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족쇄가 되어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군용트럭에 싣고 와 야산이나 깊은 계곡에서 그대로 총살해 버렸다. 이승만의 하야와 4.19이후 거창의 유족들이 대표적으로 국가에 대한 항의를 하고 그들 나름대로 조직을 만들어 오랜 기간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쟤네 아빠, 빨갱이래. 그래서 죽었대.”라는 말이 들리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제대로 취직도 할 수 없고, 평생을 빨갱이의 자식으로 살아야 했다. 혹시 출세해 번듯한 사회인으로 산다 할지라도 본인의 가족사는 철저히 함구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죽은 듯이.

모두가 공범이다. 누군가 나서서 떠들어 주고, 식자들이 나서서 진실을 밝혀주고, 국가가 나서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하는 일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침묵의 문화적 폭력에 동조했다. 나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죽어지낸 유족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조사 위원들에게는 고통이었지만(실제로 우울증에 걸린 조사 위원도 있었다고 한다) 유족들에게는 해방감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가족과 친지들도 쉬쉬 하던 문제를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억울함과 시원함.

 

 

“조사관이 그 분야를 처음부터 공부하면서 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한국의 학계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를 매일매일 뼈저리게 느꼈다.” (p.299)

“잘못된 역사를 의도적으로 묻어버리고, 체험자들의 체험을 왜곡하고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잘못된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p.47)

 

 

앞서 언급했듯이 제대로 된 조사권이 없던 위원회의 활동은 활발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저자도 책에서 여러 번 이야기하듯이 결국 위원회 활동의 가장 큰 의의는 기록이었다. 그들의 이야기, 유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것을 전하고 교육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이다. 현실적인 한계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처럼 과거사위원회의 활동과 결과가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려 학교에서 교육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부분을 가장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원회 설립 이전 이런 문제들까지 고려했다면 이후 세대의 학생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객관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국전쟁, 특히 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은 한국전쟁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상태다. 없어도 너무 없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에 의한 폭격을 주제로 한 연구로 유명해진 김태우의 책「폭격」은 그냥 나오지 않았다. 저자가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와 미공군역사연구실(AFHRA)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전쟁기 미공군 문서 약 10만여 장을 수집·분석했고, 당대의 러시아, 중국, 남북한 문서와의 교차분석을 통해 전쟁기 유엔 측과 공산 측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했다. 그 책을 보면 전쟁 당시 미공군 조종사의 일일임무보고서 단위의 하급문서까지 세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한 학자의 노고를 그대로 느끼면서 읽을 수 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런 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 누가 하나? 한국전쟁 연구를.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고,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우리 후손들의 목을 죄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어릴 적에 들었던 ‘골로 간다’라는 말에는 우리 현대사의 비밀이 담겨 있다.” (p.54)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골로 간다’라는 말.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쓴다. TV에서도 숱하게 쓰인다. 국군과 헌병, 아군인 미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은 ‘골로 끌려갔다.’ 골에서 죽었다. 이 침묵의 공포는 답습된다. 실제로 마을에서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옆 동네, 옆 옆 동네, 옆 옆 옆 동네도 소문은 알았을 것이다. ‘거기 거기 00골에서 또 30명이 총살당했대’, ‘아이구 어쩌나~’ 부모와 아줌마, 아저씨가 하는 수군거림을 들었을 것이다. 00골. 그들에게 ‘골로 간다’라는 말은 가공할만한 폭력이다.

 

 

“권력은 확실히 조작과 망각과 은폐를 먹고 산다. 과거 국가폭력의 은폐는 오늘과 미래의 부정의와 권력 남용, 결국 대중들의 비인간화와 비참함의 씨앗이 된다.” (p.394)

“권력은 자신의 범죄를, 질서라는 이름으로 위장한다.” (p.434)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란 바로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 밀란 쿤데라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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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쓴 음모론과 위험한 생각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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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컨스피러시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번뜩했다. 음모,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음모론이 횡행했다. 사람들은 음모론에 열광했다. 일부에서는 음모론 열광을 넘어서 신봉, 신앙, 빠, 팬덤 현상에까지 이르렀다고 어설프게 계몽하려 든다. 나는 그들을 가장 경멸한다. 음모론의 주체가 되는 국가나 정부, 여당, 기득권, 정보기관에서 부인하고 협박하고 고소하고 고발하고 하는 것들은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음모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는 과정까지 가면 불리한 것은 그들이니까. 그런데 그런 음모론에 무작정 팬이 되고 그것에 휘둘리고 그것에 빠져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인식과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까대는 진보입네 하는 입쟁이들의 비난에는 구역질이 난다. 나꼼수 이야기다. 나꼼수가 엄청나게 큰 인기를 얻고 실제로 정치판의 지형을 새롭게 재편하기도 하고 아젠다 설정 능력을 단번에 획득하기 하면서 사람들은 기존의 언론과 기존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집중하지 않았다. 이것을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 내지는 밥그릇을 뺏어 가는 폭력?으로 인식되었나 보다. 엄청나게 까기 시작했다. 2012년 대선에서 결국 선거에 패하게 되자 이 공격은 노골적이고 집요하게 대중을 갈라놓았다. 그러게 봐라~ 그런 음모론에 빠져 있다 보니까 선거에서 지지 않았냐? 무지몽매한 대중을 음모론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책임을 져라! 지랄도 풍년이다.

그들의 논리의 핵심은 대중의 무지몽매다. ‘대중(국민, 유권자, 시민 모두를 포함한 개념)은 부유하는 존재고 계몽해야 할 존재’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자세다. 음모론만 주구장창 떠들어 내는 나꼼수로 인해 더 이상 그들의 입을 대중이 소구하지 않게 되자, 떼로 달려들어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이 종영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진보 입쟁이들은 나꼼수와 팬덤현상을 가지고 씹고 비틀며 즐긴다. 아니, 팬덤현상의 중심에 있던 팬들이 그렇게 너희들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하거나 몽매하지 않다고!! 이 양반들아! 우리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논리로 충분히 사건과 사안을 구별하고 해석할 줄 안다고!! 입만 놀리는 입쟁이들아!!

아무튼, 나꼼수가 제기한 음모론 중에서 사실로 입증된 것도 있고 여전히 음모론의 범주에 속해 있는 것도 있다. 두고 볼 일이다.

이 책은 제목에 컨스피러시가 들어가 있었지만 결코 음모론만을 다루는 책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내용도 어려웠다. 내가 기대하던 내용이 전혀 아니었지만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도 있고, 미래에 화두가 될 만한 내용도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음모론은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다. 2004년 8월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뉴욕 시민의 49퍼센트가 미국 정부 관료들이 ‘2001년 9월 11일 즈음에 계획된 공격을 사전에 알고도 의도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p.21)

 

 

9.11테러를 슈퍼마켓에서 지켜봤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취방 근처 슈퍼에 들렀다. 뭘 사려고 들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슈퍼에 들어오는 손님에게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인사하던 사장 아저씨가 인사를 하지 않고 TV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TV를 봤다. 처음에는 영화인 줄 알았다. 세계 경제 중심을 상징하는 맨하탄의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은 지극히 영화적이었다. 영화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상상 속에서,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CNN 브레이킹 뉴스를 그렇게 오래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좁은 슈퍼에 들어오는 학생들 모두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9.11테러에 대해서도 뭔가 음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미국 국민이 많다고 한다. ‘진실’이라는 것이 드물게 발견되고, 그것의 힘이 어떤 것인지 모호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쉽게 마주하게 된다. 일단 재미있고, 뭔가 수상하고 미심쩍고 앞뒤의 논리가 잘 맞지 않는 일을 마주하면 아드레날린이 방출된다. 재미있으니까.

 

 

“사람들은 늘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자신의 많은 신념들 간에 모종의 균형 상태를 추구하므로, 음모론의 수용이나 거부도 대체로 둘 중 어느 쪽이 인식의 균형 상태를 유지시켜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p.39)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음모론은 늘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 음모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균형 상태를 추구하므로 별로 결정할 바가 아니라는 것. 한국의 진보 입쟁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앞으로 굳이 나꼼수 같은 방송이 나오지 않더라도 음모와 음모론은 넘쳐 날 것이다. 며칠 전에 있었던 청문회에서도 총리후보자로 지명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라고 했는데, 몇 가지 증거가 나오자 바짝 엎드려 사과하지 않았나? 황우석 같은 사람의 사기사건도 일부에서는 황우석과 그의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게 하려는 집단의 음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수용과 거부는 각자의 균형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옆에서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다.

 

 

동물권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사는 아줌마가 개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개가 이를 그르렁 거리더니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나를 보고 짖었다. 나는 아줌마에게 이야기했다. 공공장소에 개를 데리고 나올 때는 꼭 목줄을 하시라고. 아줌마는 알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는 말없이 자신의 개를 나무랐다. 00야! 왜 그래~ 이리와!. 개를 기르는 것은 자유다. 개를 기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자유다. 개를 공공장소에 데리고 나오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개가 마음대로 뛰어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싫은 일이다. 그래서 목줄을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키울 일은 없을 것이다. 특별히 동물을 사랑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반려동물을 키워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런데 동물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소한 말과 개념이다.

 

 

“2002년에 독일은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에 ‘그리고 동물’이란 문구를 추가해, 유럽 최초로 헌법상 동물권을 보장하는 국가가 되었다.” (p.130)

 

 

‘역시 독일이다’라고 감탄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동성애를 포괄적 인권 개념에 넣는 것조차 불을 켜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물며 동물에게? 헌법 조항에 ‘그리고 동물’이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헌법 조문에 다섯 글자 추가하는 행위 자체는 별거 아니지만 사회적·문화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독일은 그만큼 앞서 있는 것이다.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조항을 헌법에 추가한 공동체에서의 인권은 우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핵심적인 이슈는 육식이다. 나는 식용동물을 온당하게 처우하는 한, 육식이 허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식용동물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이 육식을 삼가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p.139)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육식의 문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 온 인류의 패턴이다. 육식이 죄악시 되는 것도 문제다. 채식의 범위와 규정 자체에 대한 한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채식인지 딱 잘라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류의 육식을 위해 사육되고 가공되며 유통되는 동물의 환경이 처참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에서 표현된 도살장의 모습은 지금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더 많이, 더 빨리 인간에 의해 소비되기 위해 항생제를 맞고 성장 촉진제가 함유된 사료를 먹고, 최소한의 동물다운 아니, 생명체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도살되는 동물들의 권리. 논의가 되고 토론이 되어야 하는 문제다. 어쩔 수 없잖아. 라는 책임 회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연은 실로 가혹한 서식 공간이라, 많은 동물이 야생에서보다 인간과 함께할 때 더 오랫동안 잘 살아 간다. 물론 오래 산다고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동물원은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보호하는 번식 프로그램이 있고, 동물들을 잘 보살펴주며, 사람들에게 자연과 동물의 가치를 교육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동물원에 갇혀 지내더라도 인간의 도움을 받아 본래의 서식지에서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자, 코끼리, 기린, 돌고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p.142)

 

 

이런 견해도 합리적이다. TV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는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사바나에서의 추격전. 굶주린 암사자가 가젤을 사냥하기 위해 벌이는 추격전. 사자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반대로 뛰기 시작하는 가젤 무리. 흙먼지. 가젤의 튼튼한 다리에서 전해지는 근육. 생동감. 같은 것들은 낭만적인 무책임이다. 살기 위해 뛰는 것이다.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뛰는 것이다. 마침내 암사자에게 목덜미를 물린 채 매달린 어린 가젤을 멀리서 지켜 볼 수밖에 없는 비참함은 앵글에 담기지 않는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생활하는 동물이라고, 생각을 전환해 보면 저자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어쨌든 동물원에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사파리 우리를 타고 넘어 가젤이 모여 있는 곳까지 찾아와 사냥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야생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사자, 코끼리, 기린, 가젤의 모습보다 동물원에서의 모습이 더 행복한 걸까? 사실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입장은 달라진다. 주장도 달라질 테고.

음모론과 동물권 말고도 여러 가지 현대 사회의 논쟁거리가 담긴 이 책, 읽을 만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문장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 문장이 어려웠다. 전형적으로 법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그런가? 번역의 문제인가? 문장이 조금 더 쉽고, 딱딱하지 않았다면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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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갈트의기사 2019-09-18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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