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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평점 :
“내가 가진 돈과 내
손모가지를 건다.”
배우 김윤석을 일약 톱스타로 만든 영화 「타짜」는 흥행 성공을 거뒀다. “내 손모가지를
건다.”라는 그의 대사는 각종 패러디를 양산하고 실생활에서도 농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되기도 했다. 도박이라고 하면 전혀 관심도 없고 화투도 뭐가
1이고 뭐가 4인지 모르기 때문에 고스톱은 할 수도 없다. 도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도박해서 돈 따는 사람 없다.
도박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 도박하면 부모도 모른다. 등등 도박과 관련한 부정적인 인식과 말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정말 놀란 적이 있다.
결혼 후 처가 식구들과 강원도 여행을 갔는데 숙소가 하이원리조트였다. 하이원리조트 근방에는 강원랜드가 있다. 여름에 여행을 갔던 터라 강원랜드
앞 인공호수에서 밤마다 멋진 분수쇼가 펼쳐진다고 해서 식구들 모두 저녁을 일찍 먹은 후 강원랜드로 갔다. TV에서나 보던 강원랜드였다. 말이
랜드지 카지노다. 카지노에 입장하지 않은 채 들여다보고 싶어 카지노 입구로 갔다. 멀리서 카지노 입구를 찍는 것으로 만족했다. 분수쇼가 있기 전
30분 정도 카지노 입구에 머물렀는데, 과장이 아니고 30분 동안 100명은 넘게 카지노로 들어갔다. 좁은 입구로 보기에도 휘황찬란하고 딴 세상
같았다. 멋지게 분수쇼를 보고 다음 날 아침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리조트에서 강원랜드를 지나면 사북고한입구가
나온다. 각종 전당포와 모텔이 넘쳐났다. 전당포와 좁은 도로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것은 자동차였다. 좋은 차들이 많았다. 강원랜드에서 가진 돈을
다 잃고 전당포에 자동차를 맡긴 후 다시 찾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차라고 했다. 정말 충격이었다.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했다.
내가 직접 하지 않거나 내 가족이나 친지가 도박에 빠지지 않는 이상 도박이 그렇게
위험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타짜」같은 영화를 보면 멋있게 보인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잘 생기고 예쁜 탓이다. 나도
저렇게 하면 멋있겠지? 우와 재밌겠다. 예쁘다. 물론 영화를 보고 ‘나는 타짜가 될 테야.’라고 도박판에 뛰어든 사람은
없겠지(?)만.
“아저씨가 에이스 투페어로 이길 확률은 26퍼센트고, 저 아저씨가 플러시를 잡을 확률은
6.5퍼센트예요. 그러니 어서 레이즈 하세요.” (p.29)
“딱 보면 아는데...”
“계산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보면 아는데.”
(p.31)
정말 이런 능력이 있다면 타짜에 나왔던 고니와 아귀의 마지막 도박판에서도 홀로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정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까? 어린 시절 유리겔라가 나오는 TV를 보면서 정말 신기했다. 숟가락을
엿가락처럼 휘어버리고, 만리장성을 뚫고 지나가기도 했다. 당시 완전히 빠져서 보던 드라마가 ‘600만 불의 사나이’였다. 초능력을 가지고 단번에
악당들을 쳐부수는 사나이의 모습을 봤다. 슈퍼맨 따라하다가 코깨진 친구는 허다했다.
그런데 도박판에서, 카드만 봐도, 상대방의 표정이나 작은 근육의 움직임만 봐도 패를 알
수 있다면, 이건 뭐 로또다. 로또.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용팔, 재휘, 정연, 선영, 강회장, 추마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대다수는
갑자기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아니, 뛰어들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어쩌다보니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재휘는 그런 능력을 가졌다. 흔히
말해 타짜정도 되는 것 같다. 아니, 타짜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가진 도박의 고수다. 그런 인물이 도박판에 흘러들어가지 않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휘는 아버지 정연이 강회장에 의해 무참히 죽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은 절대로 도박에 손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살지만 그가
인생에서 하게 되는 선택은 결국 도박판으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대학에서 관련된 학과를 전공하고 카지노 딜러로 일하게 된 것이다.
재휘와 같이 아버지를 비참하게 도박판에서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선영도 결국 도박판으로 흘러들어 간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야. 지금은 강 회장이 모르니 다행이지만 이대로라면 분명
큰일을 치르게 될 텐데. 그 애를 멈출 사람은 너뿐이다. 무슨 사고 터지기 전에 네가 선영일 꼭 붙잡아야 해.”
(p.128)
소설이니까, 허구니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닮은 구석이 많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당한 아이는 성인이 된 이후 그것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것을
지켜본 아이 중 상당수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내를 폭행한다고 한다. 흔한 일이다. 나와 내 주변만 살펴봐도 이런 일은 정말 흔하다. 나도
아버지의 성격 중 정말 ‘저것만은 닮지 말아야지. 정말 싫어.’하는 것이 있었다. 성인이 된 후 아버지와 똑같은 말과 행동, 기질이 문득
튀어나왔을 때 정말 절망했었다.
재휘와 선영 모두 도박판에서 부모를 잃었다. 자신도 도박판에서 모든 것을 잃은 후 살고
있는 용팔의 눈에 재휘와 선영은 그들의 부모와 자기 자신의 비참한 현재가 보였을 것이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돈을 많이 벌고 도박판에서 이름을 날리겠지만 결국 말로는 비참하다는 것을 용팔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 내내 용팔의 만류는 단 한 번도 재휘와 선영의 의지를 막지
못한다.
“오빠를 강 회장 손에서 빼내려면 돈이 필요해. 그리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포커뿐이다. 그래, 포커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어.” (p.178)
“오빠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빠가 아닌 강 회장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복수심,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 (p.225)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오직 포커뿐인 선영의 마지막 수는 어쩔 수 없이 포커다. 자신
때문에 한 쪽 눈을 잃고, 악마 같은 강회장 밑에서 타짜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재휘를 구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다. 슬픈 일이다.
대안이 없는 것이다. 대안이 있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면 다시 그 악마의 소굴로 걸어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안이 없는 사회, 다른 방법이 없는 사회는 절망이다.
다행히 이 소설의 결말을 해피엔딩이다. 재휘와 선영은 강회장을 무너뜨린다. 재휘와
선영모두 다치지 않았다. 목숨을 잃지도 않았다. 말기암으로 죽은 아버지 같은 용팔은 곁에 없지만 재휘와 선영, 두 사람의 사랑으로 아이가
태어났다.
모르겠다.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는데, 이 두 사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사회가
세상이, 도박판이 가만히 놔둘지 확신한 수 없다. 만약, 재휘과 사고를 당한 다거나 아이가 보험이 되지 않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면, 두 사람이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면 다시 도박판이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그것밖에 대안이 없으니까.
그래서 대안이 없는, 다른 방법이 없는 세상은 절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