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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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습니다. 왜 아이들이 죽었는지, 왜 아이들을 살리지 못했는지, 도대체 누가 잘못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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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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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과 한국현대사를 병렬해 기술한 일기같은 사회과학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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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업무 방식 - 구글 애플 페이스북 어떻게 자유로운 업무 스타일로 운영하는가
아마노 마사하루 지음, 홍성민 옮김 / 이지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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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정말 많을 것이다. 자! 신의 직장, 어른들의 놀이터 구글에 입사하세요. 라고 하면? 당장 출근하세요. 라면 더 좋을 텐데, 입사하세요. 라는 카피만 봐도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구글 직원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착각은 쉽고 간편하다. 상상은 자유니까.

샌프란시스코가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라는 글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LGBT들의 천국이라는 글도 본 적이 있다. 류현진 선수가 LA다저스에서 활약하는 관계로 류현진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 대부분은 LA다저스를 좋아할 것이다. LA다저스의 가장 큰 라이벌은 같은 지구에 속해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다.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두 팀이다. LA다저스는 돈이 만은 구단이다. 많은 돈을 들여 선수를 사들이는 팀이다. 그런데 최근 성적은 샌프란시스코가 더 뛰어나다. 샌프란시스코의 팬들 중 일부는 돈만 무지하게 쓰고 성적은 자신들 보다 못한 LA다저스를 향해 비아냥거림을 담은 피켓을 들고 응원하기도 했다. TV를 통해서 보여주는 LA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두 팀의 차이는 명확하다. 일단 유니폼 색깔부터 팀 분위기, 플레이 스타일까지 완전히 다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팬들은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가장 열광적인 홈응원을 하는 팀으로 유명하다. LA다저스 홈팬들은 가장 조용한 홈응원을 하는 팬들 중 하나다. 그런 것들만 보면 LA가 더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도시라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실리콘밸리는 미국을 넘어선 세계IT의 중심이다. 미국의 재정혼란을 겪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 현대 IT계를 이끌어가는 유수의 기업들이 자리한 곳이다. 나와 같은 문과출신 인물들은 한 번도 ‘구글에 입사하고 싶다.’ ‘입사할 수 있을까?’생각도 안 해 봤지만 만약 내가 이과출신이고 IT를 전공했다면, 정말 구글 입사 내지는 실리콘밸리에 내 회사를 창업한다는 것은 최고의 목표일 것이다.

 

그 곳은 실패의 땅이기 때문이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도 불어 닥친 IT버블은 당장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았다. 다행히 김대중 정부에서 초고속 광케이블망을 전국화 시킨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일상화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등장했던 수많은 IT업체는 지금 사라진 상태다. 대학마다 창업을 붐업 시키는 문구가 가득했다. TV드라마나 광고에서도 그랬다. IT창업을 하면 당장 내 사업을 하고 사장님이 될 수 있고,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주역이 된다는 장밋빛 환상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IT로 쏟아졌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성공하고 살아남은 창업인은 손에 꼽을 만했다. IT버블이 한꺼번에 꺼진 것이다.

 

 

 

“물론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사람이 모두 순풍에 돛 달 듯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되는 예는 학생 1천 명에 한 명 꼴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실패해도 좋다. 실패하면 다음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 (p.98)

 

 

실리콘밸리는 실패의 땅이다.

실리콘밸리와 인근에 위치한 학교들과 기업은 산학협력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부터 실패를 이야기 하고, 실패 이후를 이야기 한다고 한다. 우리들에게는 낯선 문화다. 그렇게 IT산업과 창업을 권유하더니 실패하면 패자부활전은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실패자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국의 IT버블과 그 붕괴를 직면한 후세대는 이공계를 멀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국가기간산업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별다른 지원이나 정책을 마련하지 않으니 이 양상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왜 우리나라에는 구글과 페이스북같은 기업이 없는지 궁금해 했다는 것은 코미디다. 정부 부처 중 과학부 앞에 미래창조가 붙는 기괴한 국가이다 보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미국인을 상대로 일할 수 있을까?”

“영어 실력도 충분하지 않은데....” (p.35)

 

 

혹시 IT를 전공하고 공부한 후 자격증을 취득해 실리콘밸리에 취업하거나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고민일 거라 생각한다. 해외여행을 한다 해도 하게 되는 가장 큰 고민이다.

 

 

 

“구글 사내만 해도 인종이 정말 다양한데, 그 다양성이야말로 새로운 아이디어의 보고라고 할 수 있어요. 충돌이 있지만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치죠.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쉽게 느낄 수 없는 거예요.” (p.23)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해 20년 넘게 사업을 해온 일본인 사업가로서 하는 저자의 말은 들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얽혀 산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영어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버려도 된다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회사 동료가 아메리칸 미국인이라면 공포는 배가 되겠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다인종, 다국가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네이티브 스피커 정도의 영어실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용기와 적극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메일로 쏟아지는 각종 지시와 규정, 계약을 이해할 수 있는 독해능력은 반드시 갖추어야 하지만 회화 실력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딪혀 보라는 것이다. 부딪혀 보라는 말조차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면 실리콘밸리? 구글?에 대한 꿈은 바로 접어야 할 것이다.

 

 

 

“우발적인 상황을 자신의 커리어, 성장으로 바꿔가는 것은 ‘일단 뭐든지 하자’는 성실한 사람이 훨씬 잘한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일본인의 성실함은 미국 직장인이 경이로워할 정도다.” (p.49)

“내가 (일본에서) 벤처를 했을 때도 그랬는데, 일본에서는 벤처라고 하면 리스크가 큰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협력자는커녕 주위의 이해를 얻기도 힘들죠. 그런데 미국은 벤처에 대한 사고방식이 일본과 완전히 달라서 벤처 기업가는 주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요.” (p.72)

 

 

일본인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한국인도 어디 가서 성실함을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일본인 실리콘밸리 창업 사장님의 눈에는 미국 직장인이 경이로워할 정도의 성실함을 가진 ‘일본인’이지만 우리라고 따라가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벤처와 창업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도 일본과 한국이 비슷하다. IT붕괴 이후 창업은 도박으로 인식되는 정도다. 한 번 실패하면 도저히 일어날 기회가 없는 사회가 한국이니까 말이다. 적극적인 사업 마인드가 있고 용기가 있는 IT전문가라면 정말 실리콘밸리로 당장 달려갔으면 좋겠다. IT나 실리콘밸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크흐흐

 

 

 

“물론 전부 계획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행운’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계획대로 진행하면서 기회를 잡는 것이 최선이다.” (p.176)

“개인 차원에서 연결되는 ‘생태계’가 아니라 견고한 종적 사회가 세력을 떨치는 일본이나 한국에서 봤을 때는 낯선 환경이다.” (p.125)

 

 

개인적인 노력에 대해서도 저자의 주장은 분명하다. 일본과 한국 사회처럼 수직적인 사회가 아니라 수평적인 사회인 실리콘밸리에서도 개인의 노력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인적 네트워크를 ‘생태계’로 표현한다. 각종 파티와 모임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언젠가는 내 상사가 될 수도 있고 사업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 앉아 만나거나 전화나 이메일로만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살아있는 ‘생태계’처럼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소극적이라고 낯을 가린다고 몇 개월 후에, 며칠 후에 내게 사업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지 못하는 창업가는 아예 창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실리콘밸리에는 기회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수준에 맞는 실력을 갖추고 전문적인 능력을 기른 후에 있을 일이다. 최소한 한 번 실패한다고 바로 실패자가 되어 다시는 발을 붙일 수 없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큰 회사에 입사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자신의 자리가 안정적일지 모르는 한국사회에서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과 각종 고시에 매달리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실리콘밸리처럼 기회가 열려 있는 사회라면 고시촌은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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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혁명 - 우리는 누구를 위한 국가에 살고 있는가
존 미클스웨이트 외 지음, 이진원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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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경상남도 지사가 도내 무상급식을 전면 중단한다고 한다. “학교에 공부하러 가지, 밥 먹으로 가느냐”라는 논리다. 여당의 한 의원은 적극적으로 환영을 했단다. 정말 대단한 나라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무상급식이라는 복지정책은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민주·개혁·진보 진영이 들고 나온 공약 중 가장 파격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제안이었다. 무상급식으로 선거에서도 이기고 이후 복지정책에 관한 아젠다를 주도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여당에서도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교육 등 이전에는 절대로 입에 담지도 않았을 정책과 공약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지자체장의 의지로 없어져버리는 꼴을 보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런다. ‘그러게 선거를 잘했어야지, 투표를 제대로 안하니 이런 꼴 난다.’라고. 맞는 말이다. 그 비꼬는 정도가 귀여운 수준이지만 뼈아프다.

복지라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수혜의 대상이나 새롭게 세수를 창출해 부담을 가진 채로 들이 붓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지금까지 최소한 국민의 절반 정도가 반대한 여러 가지 정책을 밀어 붙이지만 않았어도 한국 사회의 복지 수준이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 없는 사회이다 보니, 언론에서도 복지와 관련된 이슈를 논란화시킨다. 엄청나게 어렵고 힘든 일인 것처럼 보도하다 보니, 없는 사람들, 복지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아야 할 사람들조차 ‘에이~ 복지는 무슨 복지야’하게 된다. 웃기는 현실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태어난 두 저자의 눈으로 보기에 현재 서구유럽과 미국의 정치·경제체제는 명확한 한계와 문제들로 둘러싸인 골칫덩어리이다.

하지만 극동아시아, 한반도의 남쪽에 살고 있는 30대 평범한 가장인 내 눈에는 여전히 서구 유럽과 미국은 ‘드림 컴 트루?’다.

 

 

 

“뉴욕의 타블로이드판 일간지인 <뉴욕 데일리 뉴스>는 의회를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의 제목을 바꿔서 ‘하우스 오브 터드House of Turds’, 즉 ‘똥통’이라고 불렀다.” (p.310)

 

 

<하우스 오브 카드>. 방영 초기부터 화제였던 드라마다. 시리즈의 전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내용과 출연진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 나는 <하우스 오브 카드>의 열혈팬이 되었다. 시즌2개를 3번 정도 반복해서 봤다. 그전까지 미국 정치에 관련한 가장 훌륭한 드라마로 판단했던 <웨스트윙>과는 완전히 다른 드라마였다. 추악하고 더럽고 비겁한, 인간 본연의 본성과 본능과 탐욕을 가장 깔끔한 수트와 드레스를 차려 입은 정치인과 그 정치인을 둘러싼 인물들이 연기해 낸다. 뉴욕의 일간지가 하우스 오브 카드의 제목을 이용해 미국 의회를 ‘똥통’이라고 비난했다고 하는데, 그런 비난과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하다. <하우스 오브 카드>의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면 말이다.

적어도 한국의 정치, 한국의 의회는 ‘똥통’보다는 더할 것이라 판단된다. 모두들 공감할 것이다. 누구도

 

 

“이야 국회의원들 참 잘해~ 저 당 참 정치 잘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2012년 기준 OECD회원국인 34개국 중 4개국의 정부만 의회에서 압도적인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그리고 마비 현상은 어느 때보다 통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p.312)

“제4의 혁명은 많은 서양인에게 이미 자명한 소유물로 폭넓게 간주되고 있는 두 가지, 즉 복지국가와 민주주의 관행을 제고해볼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그들이 최근 들어 자멸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다. 복지국가는 무질서하게 변했고 민주주의는 방종하고, 지속하고, 종종 타락하게 변했다.” (p.367)

 

 

이 책은 철저히 서구유럽의 시각에서 기술되어 있다. 그들의 눈에 민주주의의 끝단에 가 있는 의회민주주의는 비대해 질대로 비대해져 제대로 신진대사도 하지 못하는 지구에서 최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동물로 보이는 것 같다. 미국의 그리드락과 유로존의 무능은 또 다른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같다. 이런 부분은 사실 납득하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받고 군대 갔다 와 사회생활하며 결혼해 아이를 낳아 기르는 평범하디 평범한 내 입장에서는 정말 ‘배부른 소리’다.

34개 OECD회원국 정부 전부가 의회의 과반이상을 차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근시안적이고 순진하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정부 여당의 의회 의석 과반이상의 실재는 억지와 떼법의 날치기 통과, 혹은 국정농단이었다.

복지국가, 아... 복지국가가 뭐지? 이제는 일반화 되어 모든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무상급식 조차 지자체장의 의지로 전면 중단되는 국가에서 무슨 복지인가?

 

 

 

“1970년대 중반까지 영국 국민소득의 절반 가까이가 공공지출에 쓰였는데, 그중 다수가 복지에 투입되었다.” (p.127)

 

 

담배 값이 두 배로 올라 몇 개월 만에 천억이 넘는 세금이 걷혔다고 하는데, 우리는 도무지 그 증가한 세수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지 알 수 없다. 지금도 한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내는 세금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복지국가로 생각하는 유럽의 일부 국가보다는 훨씬 적은 세금을 내고 있지만 세금을 낸 만큼 복지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소매치기 당하는 것처럼 세금을 꾸역꾸역 내고 있는 것이다. 연일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분노 게이지는 더욱 상승한다. 나보다 훨씬 월급을 많이 받고 1년 소득이 많은 사람이 나보다 훨씬 적은 건강보험료를 납부한다는 보도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런 도둑놈들!’

만약 내가 낸 세금이 얼마만큼 국가 세수를 증가시켰고, 그 증가된 세수가 실질적인 복지혜택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를 경험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세금이 증가해도, 당장은 힘들겠지만 내 자식을 위해 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이 서평을 보고 있는 당신은 그런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책에서는 무분별한 서구 유럽의 복지정책으로 인해 겪은 경제불황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처리즘을 옹호한다. 이것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가 처방한 쓴 약은 영국을 바꿔놓았다...(중략) 1984년에는 위대한 민영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p.133)

“중국은 또한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가난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p.202)

“첫 번째 처방은 민영화다. 복지 혜택 줄이기. 세 번째는 투명성 제고다.”

 

 

대처리즘에 대한 후한 평가. 만연한 복지지출과 경제적 무능으로 인해 장기간 계속되던 영국의 불황을 어느 정도 타개한 측면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영국의 노동자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중국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는데, 맞다. 대규모로 가난을 줄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지역 간 소득격차와 여전히 빈곤한 대부분의 중국 내륙의 상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마치 민영화가 가장 잘 듣는 처방전처럼 기술되는 부분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싱가포르는 특히 정부 주도적 자본주의 면에서 서양 국가들보다 더 권위적이며, 더 간섭적이고, 더 억압적이며, 염치없으리만큼 엘리트주의적이고, 심지어 조금은 왕권주의적이다.” (p.187)

 

 

동양을 향한 눈 돌리기를 시도하는 측면에서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극과 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에서는 되도록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하고 있다. 싱가포르처럼 작고 작은 국가가 대단한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고 당장 유럽과 미국이 싱가포르 모델을 따라갈 수 있나?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미국과 유럽의 한 가지 공통점은 정부 지출이 젊은이들보다 노인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p.170)

“홉스가 꿈꾼 세상의 주연은 자유에 대한 갈구와 파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합리적인 개인들이다.” (p.50)

 

 

오히려 저자들이 비판하는 홉스의 주장과 철학이 제4의 혁명을 가져오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언론에서도 늘 저렇게 이야기 한다. 앞으로 젊은 세대는 정말 힘들어질 거다. 젊은 세대 몇 명이 노인 몇 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올 거다. 겁을 준다. 사실이라도 먼저 들으면 짜증난다. 의지가 약해진다.

국가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않고, 그저 이용할 대로 이용한 후 책임지지 않는 홉스의 비유와는 또 다른 괴물(리바이어던)이 되고 있는 지금, 나와 당신이 기댈 것은 민영화도, 싱가포르 모델도 아니다. 언제 적용할지 알 길이 없는 북유럽의 선진 복지모델도 아니다. 무지막지한 폭풍우 한가운데서 손 뻗쳐 의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개인을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그것이 제4의 혁명을 인도할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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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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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직면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죽음은 어떤 것일까?’라고 자기 몸을 대상으로 실험하려는 무모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고통의 차이가 있겠지만 누구나 자신이 겪는 고통은 아프다. 병원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최신 의료기계로 겨우 삶의 시각을 연장하고 있는 중환자도 괴롭다. 며칠 째 떨어지지 않는 기침 감기로 배와 허리까지 통증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감기환자도 괴롭기 마련이다. 아는 사람이 말기 암 판정을 받으면 아프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아픔과 괴로움과 고통은 내 가족의 말기 암 판정에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현실적 아픔과 고통과 상대적인 비교는 불가하다.

 

당장 내 딸아이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이후 행동과 사고가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아버지가 있을까? ‘아! 딸아이가 죽을 지도 모르는구나. 이렇게 이렇게 연락하고 행동하고 이렇게 판단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지’하는 아버지는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당장 눈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에 파묻히게 된다. 지난 설 명절 내내 10개월 된 딸아이가 감기로 고생했다. 그 작은 몸뚱이에서 얼마나 뜨겁게 열이 나고,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어내고 잠을 자지 못해 하루 종일 고통스러워하는지. 정말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병원에 다녀와도 차도가 없고 열흘을 앓더니 조금씩 나아졌다.

 

딸아이의 납치 소식을 듣게 된 이 소설의 주인공 헤르츠펠트는 정말 소설 속 인물이다. 그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도 문제가 있고 아내와도 문제가 있는 중이었지만 딸아이의 납치소식을 듣고 빠른 판단을 내린다. 물론, 소설에서 다 그려내지 못한 고통과 아픔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꼴에 10개월 된 딸아이의 아빠라고, 헤르츠펠트에 감정이입해 소설을 읽었다. 작가의 전작 「눈알 사냥꾼」과 「눈알수집가」를 이미 읽은 터라 기대를 가지고 몰입했다.

 

 

 

“딸을 잃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젠 내가 경험해야만 하겠군, 그때 자네가 증거를 조작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p.292)

 

 

작가의 전작이 그랬듯 액자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은 깔때기로 물이 모여 들 듯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의 전개가 증폭된다. 여러 가지 사건과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하나씩 풀릴 때 마다 후련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조금 더 사건을 복잡하게 꼬고 비틀었다면 더 재미있을 텐데, 마지막까지 반전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같은 생각.

하지만 이번 작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연방수사국의 전 동료 마르티넥의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딸아이가 납치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후회를 한다. 로또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확률을 계산하고 통계치를 분석해 매달리는 사람들이 매주 하는 후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마르티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선’이었다. 정의라고 바꾸어 부를 수도 있다. 내 판단으로 인해 몇 년 후 내 딸이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질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일상에서 내리는 판단은 무수히 많다. 이것과 관련된 통계수치가 있었는데,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많다. 지금 당장 저 직원에게 이 말을 할까 말까,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순두부백반을 먹을까 갈치찌개를 먹을까.

 

 

 

“세 건의 자살,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판사, 사형에 처해진 사디스트, 그리고 아마도 남은 인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그의 딸. 그가 그때 마르티넥의 부탁을 받아들여 증거들만 위조했더라도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p.433)

 

 

만약 헤르츠펠트가 동료인 마르티넥의 부탁을 받아들여 증거를 위조했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는 문제다. 어렵지 않고, 위조한다고 크게 위험이 되지 않을 행동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피해를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일은 그렇다. 현실에서, 일상에서, 순간의 선택을 돌이킬 수 없다. 절대로. 그런 일은 본 적이 없다. 들은 적도 없다. 그저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사무적으로 내리는 결정과 선택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보기도 한다.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한 번 내린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도로 담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를 범인으로 만드는 전체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오.”

“그것은 모든 실종자 신고접수와 함께 수색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경찰의 문제이고... 사법 당국의 문제이고... 심리학자들의 문제이기도 하오... 그리고 당연히 이른바 법치국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법의학 기관의 문제이기도 하오. 거기서 하는 일이란 게 결국에는 범인에게나 유용한 것이고, 희생자들을 두 번 벌하는 거나 다를 바 없소.” (p.360)

 

 

납치를 주도한 슈빈토프스키의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가 오버랩 되었다. 범죄자에 의해 가족이 죽게 된 사람들에게 <사형제도폐지>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딸아이가 감기에 걸리기만 해도 같이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범죄자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음에도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시스템의 문제. 이것은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러면 피해자를 죽인 가해자는 무조건 사형에 처해야 하나? 간단하게 분류하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처음에 언급한대로 이런 일련의 일들이 나에게, 내 가족에게,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복잡한 문제 말고도 당장 해결해야 할 자신의 골치 아픈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그런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내 문제’가 되면 달라진다. 달라져야 하고.

 

 

 

“그의 딸이 사법제도의 희생자로 보이는 절망에 빠진 부모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자신들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행동으로 복수하길 원했다.” (p.409)

 

 

방법이 잘못된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한미군사훈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찬반은 물론, 여러 가지 형태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그것의 형태가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슈빈토프스키부부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이 제대로 가해자를 처벌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보고 누구보다 답답하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또 다른 아버지의 딸을 납치하는 것으로 해결을 하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정당화 하거나 인정한다면 사회는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레베카의 죽음은요? 아빠도 기름칠이 잘된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에요. 그 더러운 시스템이 잘 돌아가도록 해주는 톱니바퀴요.” (p.440)

 

 

나는 작가의 이런 면이 더 마음에 든다. 구출해낸(?) 한나가 아버지 헤르츠펠트에게 하는 이야기다. 아버지 또한 이 사회 시스템을 그저 돌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느냐?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납치되어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위협을 주지 않았다는 것. 헤르츠펠트는 딸의 스톡홀름 증후군을 의심하지만 결국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생각을 반영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도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세상에 명확한 ‘선’과 ‘악’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을 구분하는 주체는 ‘선’인가 ‘악’인가. 쉽지 않은 문제다.

 

 

 

“메스꺼움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수차례 질식할 듯한 숨 막힘에도 불구하고, 린다는 헤르츠펠트의 지시를 순서대로 따라 나갔고, 사체의 구강에서 절개한 핏덩어리 혀근육을 분리해내어...” (p.157)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체를 해부실로 옮기도록 해요.” (p.194)

 

 

또 다른 위험에 빠진 린다는 헬고란트에 고립되었다. 그녀를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스토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시체보관소에 갇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헤르츠펠트의 전화통화로 시체를 해부하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내는 조력자가 된다. 황당할 수도 있는 사건 전개가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도 무수한 우연과 황당함이 꼬이고 꼬인 채 순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내리는 결론과 보고 있는 현실이 과거의 어느 한 시점, 누군가의 순간적이고 습관적인 판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의 어느 한 시점, 내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무모한 기대와 공포를 안은 채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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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2016-06-2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리영희재단의 권태선 이사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잘 보았습니다.
혹시 제게 한번 연락주시겠어요.
재단 전화 02 710 0285로 전화해서 제가 연락 부탁했다는
말씀 주시면 제 연락처를 알려드릴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