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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ㅣ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평점 :
“이거 시원한 수박인데, 직원들 얼른 맛 좀 보이소.”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날이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께서 관리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할머니 몸집만 한 큰 수박을 내려놓으셨다. 오전에 방문한 세대에서 만났던 어르신이다. 관리소장의 두 손을 맞잡고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나를 가리키며 갑자기 칭찬을 쏟아냈다.
“아이고, 저 젊은 냥반이 그래 친절한 기라. 등 다 갈아주고 씽크대 물 똑똑 떨어지는 거 고치주고, 변기 소리 나는 거도 손봐줬다 아이가. 더분데 땀을 흘리가미 애써줘 가 내 고마바가 이리 안 왔나.”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갑자기 모범사원이 되었다.
사실, 어르신 세대에 방문해 크게 해드린 건 없었다. 형광등 안정기 1개 교체, 씽크수전 헤드 재결합, 변기 수압 조절 정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도다.
한 가지 달랐던 것은 계속 물어봤다는 것이다. “어무이요. 더 불편한 거는 없으세요? 올라온 김에 말씀하이소. 있으면 봐 드리고 갈게요.” 자제분과 동거하지 않는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 늘 하던 일이었다.
고작, 말 한마디. 그것으로 나는 졸지에 모범사원이 되었고 할머니는 집안의 불편함을 해결하셨으며 관리실 직원들은 시원한 수박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독고씨 할 수 있어요.”라는 염여사의 말 한마디는 독고씨와 편의점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곧 날 추워질 텐데 밤에도 따뜻한 편의점에 머물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아요.” (p.50) 오지랖이라 할 수도 있는 말 한마디였다. 염여사의 오지랖은 고스란히 독고씨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을 믿기보다는 개를 믿는 것을” 택한 선숙은 줄곧 편의점 사장인 염여사의 선택(독고씨를 편의점에 취직시킨 것)에 불만을 품었다. 집에 있는 남자 둘처럼 독고라는 남자도 도무지 믿을만한 구석이 없어 보였지만, 그런 독고 씨 앞에서 울며불며 신세 한탄을 한다. “그거에요.”, “뭐가요?”, “들어주면 풀려요.” (p.108) 생면부지의 의뭉스러운 남자 앞에서 속 시원히 마음을 토해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집의 남자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관계의 실타래는 의도치 않은 전개로 향한다.
“성실하게 살아온 마흔넷 인생.” (p.115) 이었지만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설 곳이 없는 경만에게 유일하게 편안한 곳은 편의점 야외테이블이다. 혼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으로 허기와 외로움을 달랜다. 무람없는 독고 씨의 친절에 잔뜩 경계하지만 “따뜻했다. 소주도, 그 소주가 담긴 컵도. 사내가 경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온기를 주는 물건” (p.125)으로 경만은 이내 녹는다. 여전히 편의점은 편한 곳이었다. “경만은 왕따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왕따가 아니었다.” (p.125) 라는 깨달음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곰처럼 커다란 사내가 건네는 옥수수수염차는 그 비주얼의 비대칭성만큼이나 경만에게 어울리지 않는 액체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찌릿함이 위안이었지만, 그것이 거짓 위안이었음을 독고 씨의 오지랖으로 알게 된다.
편의점에 들러봤자 옥수수수염차만 건네는 사내를 피하려다 보니 자연히 술과도 멀어졌다.“젠장, 앓느니 죽지. 경만은 술 따위 안 먹고 곧장 귀가하기로 했다. 경만이 열한 시 전에 술 냄새 없이 퇴근하자 낯설어하던 아내와 딸들도 곧 새해 아빠의 금주 다짐을 지지한다며”(p.129) 예상에 없는 응원을 받기도 한다. 돈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를 위해 편의점에서 알뜰히 원플러스원 상품을 챙기는 쌍둥이 딸들의 얘기를 독고씨에게 건네 듣고는 눈물을 훔친다. “경만은 코트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사내에게 목례를 한 뒤 지갑을 열어 카드를 집어넣었다. 지갑 속에서 딸들이 원 플러스 원으로 웃고 있었다.” (p.133) 꽁꽁 얼어붙어 도무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독고씨가 마련해 준 “온기를 주는 물건”으로 인해 녹아버렸다.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편의점의 독고씨가 건네는 옥수수수염차와 그에 곁들인 처방은 적재적소를 파고들었다. 세상 불편하기만 한 편의점을 매개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독고씨가 있었고, 그런 독고씨를 만든 것은 의도치 않은 호의와 사소한 친절이었다.
“나를 고용한, 마지막 겨울잠을 편히 잘 수 있게 해준 사장님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기 때문이다.” (p.234)
일방적인 것은 없다. 편의점 사장인 염여사에게도 독고씨가 필요했다. 물론, 노숙자 행색인 독고씨에게 가게를 맡긴 건 용기다. 용기로의 한걸음이 없었다면 독고씨는 여전히 서울역을 배회했을 것이고 겨울을 넘기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편의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영웅이자 모범사원으로 둔갑시킨 할머니 댁에 들렀을 때도 그랬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잘 켜지 않으시기 때문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셨다. 낡은 선풍기의 무거운 머리를 내 쪽으로 연신 맞추시고 얼음 두어 개 띄운 보리차를 연거푸 가져다주셨다. 그러니 내가 ‘어르신, 더 불편한 건 없으세요? 올라온 김에 봐 드리고 갈게요.’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없다. “사람은 그런 게 아니. 사람은…. 연결돼 있어.”(p.245)라는 독고씨의 말이 맞다. 아무리 빵빵하게 켜 놓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일을 해도 대하는 태도가 에어컨 바람보다 더 차다면, 나도 그(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고울 수 없다. 나를 ‘좋게’ 만드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상대일 수 있다.
오지랖 아니야? 생각이 들 때, 하면 된다. 말하면 된다. 조금 더 간섭하면 조금 더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무수한 민원으로 지치지만 한걸음 나아가 본다. 최대한 생기발랄하게,
“네~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