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헌책방 기담 수집가 ㅣ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평점 :
더 이상 종이책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다. E-BOOK이 탄생함에 따라 더는 돈을 주고 종이책을 사고 번거롭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된다고 했다. E-BOOK으로 인해 출판시장은 붕괴에 버금가는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고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E-BOOK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책을 사고 읽는다. 내 돈을 주고 산 새 책의 빳빳한 표지를 넘겨 새 종이 냄새를 맡으며 책장을 넘기는 감성은 E-BOOK이 대체할 수 없었다. 눈과 가슴으로 활자를 따라가고 손때와 기름을 묻혀 가며 넘기는 내 책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9살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이다. TV를 보여달라고 보채지도, 반 아이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를 사달라고 떼쓰지도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나 아빠가 매달 사주는 책을 받아들면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책장을 넘긴다.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줬다. 촉감 놀이책부터 시작해 9살인 지금은 역사책도 곧잘 읽는다. 읽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가 책에 빠져들면 옆에서 나는 내 책을 읽었다. 자연스레 거실은 물론 방 곳곳에도 책이 널브러져 있다. 앉아서도 보고 누워서도 볼 수 있다.
특별한 교육철학이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빠인 내가 책을 좋아하니까 소개해주고 싶고 같이 책을 읽고 싶었을 뿐이다. 책을 통해 인문 소양을 길러 바른 학습관을 정립해 더 나은 인간이 되거나 하는 식의 의미부여도 전혀 없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아빠가 그런 것처럼.
이 책「헌책방 기담 수집가」의 저자와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헌책방에서 찾아야 하는 오래되고 특별한 책을 기억한다는 것은 책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유별난 의미부여가 전제되지 않고는 헌책방을 찾아가고 수수료 명목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이는 없다. 책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공감대를 형성해 버렸다.
“L씨는 표지를 넘겨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메모를 보여주었다.”
“世上(세상)은 네 것이다. 누구도 너의 人生(인생)을 奪取(탈취)할 수 없다. 네 삶을 所有(소유)하고 기꺼이 누려라.” (p.155)
오래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짧은 메모를 담은 책을 발견하는 심정은 어떨까? 이미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들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슴을 뜨겁게 하고 콧날을 시큰거리게 한다.
“책 찾는 수수료를 사연으로 받는 건 알고 계시죠?” (p.28)
오래된 책을 찾는 수고로움과 자신의 사연을 맞바꾸는 기묘한 헌책방은 사연이 많다. 저자의 말대로“한 가지만 밝혀두도록 하자. 우리 주변엔 이외로 기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p.11)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앞서 소개한 부자(父子)간의 사연을 포함해 많은 이야기가 책에 담겨 있다. 마치, 내가 헌책방 사장 앞에 마주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처럼 생생하다.
나의 삶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임에도 공감이 가고 의미부여가 되는 건 나 또한 책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고 내 사연을 실어 보내고 싶었던 책 몇 권쯤은 있기 때문이다.
“서점을 운영하면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책을 찾아주고 사례비 대신 그 책에 얽힌 사연을 받는 특별한 일을 시작한 지도 10여 년이 흘렀다.” (p.107)
10여 년이 담긴 “기담 수집”은 그것 자체로 책이 된다. 애틋하고 안타까우며 때론 답답하고 원망스럽다.
“그때 우리가 만났었나요? 뭐, 사업 때문에 평소에 워낙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요. 제가 수첩에 적어넣지 않은 걸 보니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군요. 아무튼, 미안하지만 책이라면 벌써 다 처분했습니다. 장례 치르고 며칠 있다가 고물상에 다 넘겼어요.” (p.151)
아버지가 평생을 모아온 책이 어떤 자식에게는 짐이 될 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땀과 눈물, 손때와 냄새가 깊게 밴 책들이 그저 처분할 종이 더미가 되는 것이다. 한순간이며 탓할 수 없다. 이것 또한 기담(奇談)이니까.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 상대가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고 내 말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안다. 마치 자신의 사연을 담은 가사에 곡을 부탁하러 만난 의뢰의 시간 같기도 하고 상담사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나를 드러내놓는 상담의 시간 같기도 하다. 책에 소개된 사연보다 더 많은 사연이 가득할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자신의 사연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을 것이고, 너무 기묘해 자체 편집한 사연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않더라도“우리 주변엔 이외로 기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있다.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나에게도 그런 사연이 없는지. 이 책에 실릴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꼭 찾고 싶은 책이 한 권 있다.
한국 현대사의 석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다. 일월서각에서 번역한 책을 대학 때 읽고 받은 충격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한국전쟁과 현대사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줬기 때문이다. 몇 번을 읽었다. 2권이 세트인데 2권은 미출간 되었다. 일월서각 출판사에 문의도 해보았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었다. 역사비평사에서 영문판과 번역판을 모두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1946년 가을 봉기 이후 6.25 발발 직후의 상황이 담긴 2권을 꼭 읽고 싶다. 소문으로는 정식 번역판은 없고 해적판이 몇 권 있다고 하는데, 찾는 게 가능하실까 모르겠다. 내 사연이 기담 축에도 끼지 못해 상담조차 할 수 없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서지 면을 보니 1963년 창원사에서 펴낸 초판, 바로 그 책이다!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p.17)
1963년 이름도 낯선 창원사의 초판을 찾아내는 지니의 요정님. 제 책도 한 번 찾아봐 주시겠어요?
들려드릴 사연은 없지만 넉넉한 책 구입은 가능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