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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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런 책 어디에서 찾아?”

 

한창 아내와 연애 중이던 당시, 매번 절판되거나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표지 디자인에 가뿐히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만 골라 읽던 나를 보며 아내가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책을 읽다보면 그 속에 찾아볼 책이 무지하게 많아.”

 

그랬다. 대학교 2학년 초겨울, 고(故) 리영희 선생님의 「반세기의 신화」를 읽은 것이 지금 내 독서 패턴과 삶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8할이 되었다. 온통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로 가득한 그 책을 줄을 긋고, 메모를 해가며 읽었다. 대입 수능 시험 성적표를 받아들었던 그 때의 충격파가 100이었다면, 「반세기의 신화」는 120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이후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있는 대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으면서 책 속에 언급되어 있거나 책의 하단 각주, 책의 마지막에 언급된 참고서적들에 눈이 갔다. 그러고 나서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그 책들의 제목을 입력했다. 절판되거나 일시품절 된 책이 많아서 중고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뒤졌다. 어렵게 찾아 읽게 된 책들은 그대로 보물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참고하고 발췌하고 공부한 책이라 생각하니 마치 「반세기의 신화」를 쓰시는 집필실 한 구석에 나도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선생님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이 재미있었다. 유용하고 도움도 되었다.

지금도 내가 책을 고르고 구입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지금 읽는 책 속에 있다.

 


 

“이곳에서는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내고, 그것이 줄줄이 이어져서 금세 하나의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논스톱으로 이뤄지는 꿈의 도서관 속에서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p.109)

 

정민 교수는 1년 동안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책 속에 빠져들었다. 추사 김정희 연구가로 알려진 후지쓰카 지카시의 컬렉션을 발견하고 18세기 한중 지식인이 나눴던 문예교류를 발견해 냈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의 책 한권에서 완전한 가치판단의 전복을 경험하고 그 한 권의 책으로부터 지금의 책세계로 빠져든 것처럼, 정민 교수도 옌칭해(海)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피곤한 잠을 몇 십 분자고,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은 후 날이 캄캄해진 뒤에 다시 학교로 올라왔다. 빌려 쌓아둔 책을 급한 대로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신청한 책 세 권을 다운로드하여 갈무리해 두었다. 밀린 글을 쓰고 일기를 적은 후 책상을 정리하고 나니 밤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p.156)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민 교수의 태도다. 정말 신나서 책을 찾고 연구하고 기록하고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몸은 피곤하고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자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겠다는 엄살도 부리지만, 이 두꺼운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것은 ‘행복함’이다.



“1766년 2월 한 달 사이에 홍대용과 엄성 두 사람은 북경에서 일곱 차례 만났다.” (p.45)

“1801년 1월 28일, 박제가는 주자서를 구매해오라는 왕명을 받고 사은사를 따라 생애 마지막이 될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p.630)

 

책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 정조시대다. 주지의 사실이다시피 정조는 문장가요 예술가였다. 홍대용으로부터 박제가, 박지원,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북경행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당시 지배계급은 명나라를 숭상하고 이미 패권을 쥐고 대륙의 주인이던 청나라를 무시하고 있었다. 가당치도 않을 북벌론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었다. 정조로서는 그들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젊은 학자들을 유용한 것 같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우연히 북경 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오가다 흔히 마주치는 장삼이사가 아닌 당대 톱클래스의 명류였고, 그들이 단골로 거래한 서점은 중국 서적사에서 손꼽는 양심적 신상의 서점이었다.” (p.427)

 

유리창 거리(류리창, 琉璃厂)는 당대 최고의 서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구글을 찾아보니 보니 지금도 고서적들이 즐비한 관광명소다. 주군인 임금이 자신들을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만 젊은 조선의 학자들의 눈에 비친 유리창 거리의 서점들은 신세계였을 것이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의 책 속에서, 정민 교수가 옌칭도서관 안에서 만난 신세계와 일맥으로 상통한다.

조선에서는 여전히 명을 숭앙하는 꼰대들로 인해 제대로 기를 펴보지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문예가와 학자들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매번 연행길에 당대의 명사들을 만날 수는 없어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에서도 받지 못했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어느 날 <리영희 재단>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와서

“OO께서 블로그에 올리신 리영희 선생님 책리뷰를 읽었는데요. 너무 감동을 받고 흡족해서 재단 관계자분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래서 그간 쓰신 리뷰를 엮어 책을 출간해 드리고 재단 후원금도 지급할 예정이니, 한번 재단에 내방하시죠.”


라고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전화를 받는다면 나는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기쁨과 희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자랑을 할 것이다.

정민 교수가 옌칭도서관의 책바다에서 연거푸 진귀한 보물을 발견해 낸 것처럼.

 


 

“박제가가 네 차례의 연행에서 쌓였던 인맥은 8년 뒤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길에 오른 아버지 김노경을 수행한 24세의 청년 김정희에게 고스란히 인계되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가 마감되고, 19세기 문예공화국의 화려한 서막이 열렸다.” (p.649)

“박제가의 그늘 덕분에 김정희는 단번에 북경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p.703)

“한문은 18세기 문예공화국의 당당한 공용어였고” (p.315)

 

더 중요한 것은 한문을 매개로 한 과거 한중 지식인들의 만남이다. 당대 최고의 명사였지만 청나라 시절 비주류였던 한족 학자와 서얼 출신에 망상에 빠진 기득 보수층에 의해 밀려난 조선의 젊은 학자들의 처지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켰다. 시와 편지, 그림을 주고받으며 계속된 교류는 책 속에 즐비하게 소개된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를 보다 보면 흡사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에 비견될 만큼 애틋하다. 말을 타고 오가는 길이 수개월이 걸리는 그 시대,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나 자신과 상대를 위로했다.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손자들의 대에까지 교류했다고 하니 인연의 깊이와 정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18세기에는 개인 간 왕래와 교류를 통해 한중간 문예공화국의 서막이 열렸고, 19세기에는 단체 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다양한 분야로 그것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 중심에 완당 혹은 추사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만 18세기까지의 이야기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후속편을 기다리던 그때의 초조함과 설렘이 다시 발로한다.

 


 

“내가 <세한도>를 다시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첫째 소전이 조선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함이며, 둘째로는 그대가 이것을 오래오래 간직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놓는다면 지하의 완장 선생이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더구나 우리는 그분을 사숙하는 동문 아닙니까?” (p.664)

 

이 책이 탄생하게 되는데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후지쓰카씨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청을 고증하는 연구를 했다. 당시 조선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 것은 하버드에 임용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교수가 이름 없는 한국의 ‘OUT서울’ 대학교로 자원해 취직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주변인들이 안타까워하며 비난했지만 후지쓰카는 성실하고 꼼꼼한 연구와 취재, 고증과 수집을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아름다운 교류와 풍성한 문예기를 발견한다. 일제의 패전 후 도쿄에 보관 중이던 자료가 대부분 불타고 남아 있던 자료를 그의 아들이 기증하고 팔면서 옌칭도서관에 초빙되어 있던 정민 교수를 만나게 된다. 책에서 정민 교수가 여러 번 언급하듯이, 후지쓰카는 대단한 연구가이자 기록가였다. 메모하고 수정하고 기록했던 성실함이 정민 교수의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컵라면을 먹으며 시간을 아껴가며 연구 해 세상에 내보인 이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을 내가 읽게 되었다.

 

아마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정민교수가 말을 아낀 듯하지만 19세기 한중의 문예공화국은 일본에까지 닿아있던 것으로 읽힌다. 그만큼 한중일 3국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 3개국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못해 위험해 보인다. 3국이 공히 영토문제로 뒤엉켜 있고, 경제·역사·문화 모든 분야에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활시위가 최대로 당겨져 있고 방아쇠에 검지는 오므려져 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이 위기와 긴장 상황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발칸반도, 크림반도, 팔레스탄인에 버금가는 국제적인 긴장지대가 될 지도 모르겠다.

18세기와 19세기까지 자유롭고 아름답게 이어졌던 문예의 흐름이 끊겼던 것도 결국은 전쟁 때문이었다. 이후 100년 동안 각자의 길을 가다가 다시 병목구간에 다다른 것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100년 이전 3국의 문예공화국이 부활하려면 진짜 지혜가 필요하다. 가짜 정책과 외교 전략은 필요 없다. 도움도 되지 않는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으로는 3국이 함께 갈 수 없다.

 

만약 <리영희 재단>에서 진짜로 전화가 온다면 내가 정민 교수의 뒤를 이어 이것에 대한 연구를 해봐야겠다. 로또 당첨되는 확률보다야 조금은 높겠지^^

 

연구 제목은 『21세기 한중일이 만들어 가야만 할 문예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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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고전을 제외한 책 중 단 한 권을 타임캡슐에 넣어야 한다면 타입캡슐에 들어갈 목록 가운데 한 권이 리영희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읽어도 뒤통수에 박히는 죽비 소리가 요란한데 그 삼엄한 시대에 목숨 걸고 읽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 가끔 그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읽으면 감옥 가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제 읽어도 감옥 가지 않는 시대가 왔으나 아무도 읽지 않으려고 하네요. 씁쓸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lmicah 2014-07-23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서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리영희 선생님은 제 인생 최고의 선생님이세요.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계신 선생님과의 전화통화가 생생합니다. 책 한 권 추천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단 한 권도 베스트가 아닌 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발님 말씀대로 리영희 선생님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죠. 그래도 추천하고 추천하고 또 추천할려고요.

CREBBP 2014-07-29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싹쓸이를 하시는군요. 예스에는 조용히 할께요. ㅎㅎㅎㅎ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