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
다니엘 튜더 지음, 송정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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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라디오에서 어느 경제평론가가,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관료들의 문제점을 두 가지로 요약해 설명한 바 있다. 먼저 불필요하고 과도한 비밀주의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꼴값도 이런 꼴값이 없다. 툭하면 국가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기에 공개할 수 없다고 하지만, 국가가 아닌 자신들의 안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숨기려 한다는 것을 이제 시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 하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신들은 오류가 없다, 틀릴 수 없다는 강력한 믿음에 근거한 엘리트주의다. 이 역시 헛소리다. 만약 우리 정부 관료들이 그토록 뛰어났다면, 그토록 대단한 양반들이라면 세월호의 비극도, 메르스 사태도, 국정원 해킹 사태 따위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오만함, 시민을 자신들의 아래로 보는 건방짐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특징을 우리 관료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뛰어나다면, 그토록 자신만만하다면 도무지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별 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성과인양 과대 홍보하고 자랑질하는 것이 정부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치적으로, 성과로 자자손손 남을 것들을 숨길 리 없다. 결국 이들은 형편없는 실력을 숨기기 위해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참으로 몸살이 날 정도로 창피했던 것은 대한민국 관료들의, 지식인들의, 언론들의, 정치인들의 그리고 이제는 슬프지만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체화되어있는 지긋지긋한 사대주의다. 외국인의 시선, 외국인의 평가에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이 뭐 한마디 칭찬이라도 하면 그게 마냥 좋아 개새끼마냥 꼬리치며 애교부리는 작태는 아마도 우리와 일본이 톱을 이루지 않을까.

 

최근 여당의 대표라는 이가 미국에 건너가 그들 앞에서 큰절을 올린 바 있다. 대한민국은 예의를 아는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던가. 그건 예의가 아니라 노예가 주인에게 굴종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우리를 지켜주어 감사하다고 주한미군사령관을 업고 한없이 밝은 미소를 만방에 보여준 인물이었으니, 종주국에 가서는 오죽 황송했을까 싶긴 하다. 하해와 같은 영광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 자리도 한 번 해먹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지독한 노예근성과 사대주의로 말미암아 그 반대의 경우는 오히려 가혹하다. 박노자 교수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날카롭게 드러내자 보수 진영은 물론 일부 진보 진영에서도 강하게 반발했다. 그가 귀화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파란 눈의 이방인이 감히 우리를 씹었다는 감정은 아몰랑식 매도로 이어졌다.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잘 알기에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느냐는 비난이 이어진다. 그런데, 사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는 일정 정도의 상식과 교양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더 심각하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 가능하다. 정부와 집권 여당은 물론 아마 야당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질 것이다. 어쩜 야당이 더 괘심해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야당 비판에 할애되었으니 말이다. 능히 받아야 할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도 큰 능력인데, 현재 우리 야당은 그런 능력 따위 개한테나 줘버렸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피로하다. 역시 지독한 무력감 때문이다. 정상화, 희망, 변화, , 혁신, 창조, 정의, 상식 따위의 말들이 범람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그 단어들과는 매우 상반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희망적이지도 않기에 주문처럼, 웅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더 비참하고, 더 창피하다.

 

저자는 특파원이란 위치에서 바라본 한국사회 그리고 이른 바 고위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만나며 느낀 감정을 솔직히 풀어낸다. 어쩜 외부인 이기에 가능한 비판과 지적질이다. 온갖 부패와 어이없는 엘리트 의식, 그것이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 상황이 민주주의의 퇴보와 회복 불가능한 몰락을 가져온다면? 그땐 상황이 달라진다.

 

사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정치는 진정한 좌파와 우파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진보도 보수도 아니면서 기이하게 고착화돼 양분된 좌우 진영논리는 정작 유권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모든 종류의 의제를 집어삼킨다.’ 물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표면적으로 다른 정당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과연 어떠한 차별성을 느낄 수 있는가. 대북정책에 대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난 그렇게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다. 두 정당 모두 재벌에 관대하고, 기형적 의미의 시장옹호주의자들이다. 복지에 대한 인식도 둘 다 형편없다.

 

게다가 표현의 자유 역시 점점 더 심하게 훼손되어간다. 저자는 다른 국가에서는 이미 사문화되었거나 존재하더라도 형법으로 분류되지 않는 명예훼손죄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한국 사회가 기이하다. 이는 시민과 언론에게 재갈을 물리는 효과를 여전히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략 살펴보면 명예 따위는 이미 없는 인간들이 꼭 명예훼손으로 타인을 고발한다. 꼴값이다.

 

좌파와 종북이 엄연히 다름에도 싸잡아 종북좌파라는 해괴한 말들을 뱉어내고, 이를 이용한 색깔 공세로 반대파들을 공격하는 한국의 보수 진영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툭하면 군사 기밀을 유출하고, 남북정상회담록과 같은 국가적 기밀 사항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종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기들에게 유리하다면 그 어떤 국가 기밀이라도 충분히 이용하고도 남을 무리들이란 걸 이미 증명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어떤 삽질을 하고, 유권자에 대한 그 어떤 배신행위를 한다 해도 이들의 지지율은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조금 과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기초연금 월 20만 원을 약속한 후, 이를 보기 좋게 파기한 이들에게도, 노령층 유권자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 반응하여 지지한다. 묻지마 지지, 아몰랑 지지다. 나도 미스터리인데, 저자의 눈에는 얼마나 신기하게 보일까?

 

아울러 영미권 시장옹호주의자들의 시각에는 우리 재벌들 역시 기형적이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 우선주의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기업이 사실상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업기회가 생겨도 대기업이 차지하고, 그들의 독주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박살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가능하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이비자유시장주의자들은 정부가 허가해주는 독과점 혜택을 누려왔고, 막대한 규모의 정부 계약을 따내고, 국민의 혈세로 제공되는 전기 사용료의 보조금을 받아 돈을 벌어왔음에도, 정작 사회에 기여하라는 목소리에는 사회주의 어쩌구 하며 저항한다. 이는 시장옹호주의자가 아닌 그냥 도둑이 아닌가.

 

국가자본부의, 정실자본주의가 한국 재벌의 모습이다. , 갑자기 기억난다. 메르스 사태 때 삼성병원 관계자는 이렇게 떠들었다. “설사 국가가 뚫린다 해도 삼성은 뚫리지 않는다”. 이미 권력은 넘어가 버렸다.

 

이밖에도 저자는 우리 정치의 발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야당이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떤 삽질을 하고, 헛발질을 해도 현 여당에 대한 지지율은 기본적으로 탄탄하다. 묻지마 투표가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당은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고, 어설픈 네거티브 전략을 그만 사용해야 한다. 욕하는 것도 계속 들으면 지겹다. ‘너나 잘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차기 대선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새정치민주연합이 분리 되거나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시민들이 야당에 대해 분노하고 또한 불신하고 있는지는 알아서 판단하셔야 할 듯하다. 그걸 모르면 영영 패배자로 살 수밖에. 알량한 기득권 지키기나 하면서 말이다.

 

이른 바 삐딱한 서양 좌파가 보여주는 한국 사회는 사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우리가 바로 그 사회에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저자는 더 신기했나보다. 어떻게 그토록 눈부신 발전과 성장을 이뤄낸 나라가 지금 이따위로 엉망인데, 왜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거지? 물론 이야기한다, 우리도. 다만 그 지겨운 희망고문과 무력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뭘 해도 안 되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웅을 기다리지는 말자. 영웅 따위는 없다. 개나 줘버려라. 저자는 안철수 신드롬과 몰락을 이야기하면서, “구세주는 없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을 때라고 말한다. 안철수 개인에 대한 비난은 물론 아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열광하다 또 너무 쉽게 경멸한다. 한낱 연예인이라면 큰 지장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지닌 사람이라면? 난리난다. 우리는 지난 5년 한바탕 난리를 치렀고, 지금도 난리 중이다.

 

욕하는 건 쉽지, 답을 내놓아야 진정 의미 있는 것 아냐?”라고 떠드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요즘엔 욕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단순히 점잖은 척, 자신은 양반인 척, 입 다물고 있는 것 또한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홀로 모두까기 운동을 하다, 한 두 명이 모이고, 집단 모두까지 운동을 하다보면, 문득 정답이 떠오를지 모른다. 또 당장 지혜가 나오지 않으면 어떠랴. 일단 욕먹을 것은 먹어야 하고, 욕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 미치도록 힘겨운 이 세상에서 그나마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법이다.

 

세상에 넘치는 것이 개자식이고, 양아치이고, 점잖은 척 나 몰라라 하는 더 나쁜 종자들이다. 그런 저랩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저자라고 생각한다. 그의 솔직담백한 한국 모두까기 발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충분하다. 그는 모국인 영국의 실패를 꼽으며 우리가 같은 실패의 길을 걷지 말기를 충고한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균형 잡힌 발전을 제안할 때는 솔직히 고마운 마음이다. 이런 제안 쉽지 않다.

 

이젠 좀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보자. 창피하게 큰절하고 업고 놀자 따위 하지 말자. 그리고 부정과 부패를 관례라 받아들이지 말자. 정치인의 공약 파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미친놈들을, 도둑놈들을 사랑하지 말자. 내가 낸 세금으로 거들먹거리며 군림하려 하는 건방진 공무원들에게 주눅 들지 말자. 잘라 버리자, 그런 것들은. 그리고 엘리트라 자처하며 혈세를 낭비하는 것들을 찾아내 반드시 학교로 보내자. 마지막으로.

 

돈 푼이나 받겠다고 한국으로 기어들어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한국을 찬양하는 외국 것들보다는 진정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적질과 비판을 하는, 그런 외국인들을 고맙게 여기자. 외국에서 아무리 코리아 넘버원이라고 외쳐도, 다 필요 없다. 바로 우리가, 시민이, 이웃이, 가족이 행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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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해도 될까요?
노하라 히로코 글.그림, 장은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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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3월에 결혼했으니, . 올해 몇 년 차인가. 8? 세 살짜리 딸 아이 하나가 있다. 결혼 후 늦게 얻은 귀염둥이 녀석이다.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아 애교가 넘친다. 미스터리한 일이지만, 다행이다 싶다. 너무 무뚝뚝해도 매력 반감 아닌가.

 

아무리 내가 뻔뻔하고, 염치가 없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시 아무리 봐주고 봐줘서 생각해봐도 지금까지 내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이대며 합리화를 해도 결국 진실은 숨길 수 없다. 난 그리 훌륭한 아빠이자 남편은 아니다.

 

이는 세속적인 차원과 근원적(!)인 면을 동시에 살펴본 결과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세속적인 면은 뭐, 한 마디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권력과 명예와 부, 이것들 중 나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전무하다. 간신히 빚을 갚으며 하루하루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아간다.

 

남들이 부러워하는(그들이 속물이든, 겉물이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마흔이 다 되어가도록 그리 큰 삶의 성취를 이뤄낸 기억도 없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손녀 딸을 안겨드린 것이 근래 들어 이룩한 가장 큰 효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철없는 아들 녀석이 그저 사람 구실만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사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이런 평균 혹은 평균 이하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아내에 대한, 딸에 대한 감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면서도, 두렵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괜시리 오기 혹은 반항심(!)도 생긴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후회하고 또 후회할 행동을 반복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또 자기연민에 빠진다. 이런 게 삶이고 또한 생활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뜨끔거렸다. 찔렸다. 혹시 나도 주인공 미호의 남편처럼 저도 모르는 사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무의미한 혹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의 행복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무서운 괴물처럼 말이다.

 

끔찍한 상상이다. 만약 아내가 나를 두려워하거나 증오한다면, 이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책이란 이미 늦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이에게 느끼는 증오는 다른 타인에게 느끼는 그것보다 그 농도가 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희석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미호의 남편은 중소기업을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결혼 9년차. 귀여운 두 아이가 있다. 보기엔 평범하고 평화로운 가정이다. 하지만 미호는 늘 이혼을 생각한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은 남편의 행동이 쌓이고 쌓여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로 응어리졌다. 가끔씩 폭력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아이들을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 아내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점점 찾기 힘들다.

 

여기에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아마도 적지 않은 수의 우리 남자들도 미호 남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회사 일을 핑계로, 바깥일을 이유로 아내를 무시하고 자녀들에게 소홀한 것을 정당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가. 직장일이 그 무슨 위대한 삶의 임무이자,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렇게 스스로 세뇌시키고, 정작 내 인생을 함께 보듬어주고 있는 아내,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내 자식들에게 소홀히 한 적은 없는가. 혹시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먹고 살기 위해 단순히 일을 하는 것은 비참하다. 때문에 자신의 일에, 직업에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이들은 위대하다. 멋지다. 그런 이들을 볼 때면 삶의 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곤 한다. 난 왜 저런 에너지와 무한 책임의식이 없는 것일까 생각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최근 느끼고 있다. 그 어떤 일도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다. 헛소리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는 이들은, 불쌍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아마 본인도 알 것이다. 그런 조직은 없다. 만약 있다면, 곧 무너질 것이 빤하다.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고, 그 처음이자 끝인 것은 맞다. 당연히 내가 사라지면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너무 무질서하게 삶에, 타인에, 이 세상에 적용시키는 것은 어리석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자신의 우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모든 일이 다 위대하고, 또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다. 내 가족과 친구, 날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기필코 내가 이뤄야 할 일 따위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거부할 것이다. 당연한 선택이다.

 

최근 읽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에서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을 꿈꾸는 여자가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노부부에게 보기 좋다는 이야기를 하니 노부인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노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멋진 거겠죠. 우리가 겪은 풍파마저도 아름다웠으니까.”

 

행여나 아내가 이 책을 읽고 진지하게 이혼을 고려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아니면 어쩌지?), 그럼에도 당장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은, 어쩐지 구석진, 후미진, 살짝 다른 책 사이에 숨기고 싶은 책이다. 그동안의 미안함과 또한 미안함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딸아이에게, 뒤늦게 들어가 몰래 손을 잡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기습 뽀뽀를 하는 못난 아빠라는 사실도 가슴을 때린다.

 

투케에서 만난 멋진 노부부처럼 늙어갈 자신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건방진 생각, 오만함은 버리려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저 하찮은 일일 뿐이다. 물론 그 하찮음은 내 가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다. 인류가 보기엔 위대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문제이다.

 

물론 선택은 항상 정해져 있을 것이다. 난 위대한 그 무엇보다, 그리워 할 그 누군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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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사건 숨겨진 이야기 민족21 통일이야기 2
정창현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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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남쪽에서 북측 전문가라 자칭, 타칭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북 역시 당연하게도 엄연한 주권국가이기에, 북의 모든 것에 통달한 전문가는, 심지어 북 내부에서조차 존재하기 힘들다. 기껏해야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세밀한 분야로 나눌 때 전문가란 표현을 그나마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자. 얼마나 될까. 남북문제나 통일문제에 평소 관심이 적었던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그 수가 적지 않다. 종편까지 포함한 방송 매체와 언론 매체에 등장해 이른 바 북의 행동을 분석하고, 나름의 전망까지 주절거리는 이들이 꽤 많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런데 그들이 정말 북 전문가란 표현에 어울리는 이들일까. 과연 그 중 몇이나 북의 실체, 작동원리, 본질에 접근하고 있을까.

 

여기에서 김진향 카이스트 교수가 총괄 기획해 최근 펴낸 <개성공단 사람들>의 추천사를 쓴 경북대 대학원 철학과 김성룡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북 사회에서 상당한 고위층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길더라도 인용하겠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글이나 책을 본 적이 없다. 제대로가 아니라 목불인견이었다. 왜곡과 오도의 일반화는 물론, 차마 논문이라고 하기에도, 책이라고 하기에도 가당찮은 글들이 버젓이 인쇄되어 공론화되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총체적 무지가 남북관계와 통일문제 전체를 왜곡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루라도 북한을 욕하지 않고는 이 사회가 온전히 돌아가지 않겠구나라는 것을.”

 

여기에 기막힌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정작 북에서 살다온 사람이 보는 한국사회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북측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김정은 제1위원장에 대해 한마디 씩 떠들 수 있다. 누구나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북을 비난할 수 있다. 듣다보면 마치 살다온 양반 같이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그런데 그 중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이 있을까.

 

남측의 시민들은 대부분 북측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이 말하는 북, 그리고 방송과 언론이 말하는 북을 실체라 믿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이 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할 수 있겠는가. 또한 먹고 살만한 이들이라도, 재미없는 북 문제를 파고들 생각이 전혀 없다. 그다지 돈이 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리하게도 방송과 언론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북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데 왜 굳이 수고를 들여 따로 북을 생각하고 바라보려 하겠는가.

 

때문이다. 북에 대한, 북측 사람들에 대한 허황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이야기들이 판치는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 엉터리 전문가와 야매 언론인들이 만들어 내는 잔인한 북 판타지는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지금 우리들의 발목을 끈질기게 잡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반통일 세력이자 반민족 세력이라 불러 마땅하다.

 

북에 대한 연구나 전망, 언론보도가 형편없는 수준이 된 것에는 물론, 여러 이유가 작용한다. 먼저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었기에, 우리가 직접 북에 가볼 수 없었다. 그러니 어설픈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었다. 생각해보라, 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비록 특정 장소에 한정되었다 하더라도 북측을 마음대로 다녀올 수 있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북측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서로 만나고 접촉해야 온갖 루머와 설이 가라앉는다. 직접 보고 들었는데, 소설을 지어낼 순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북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지어내고 왜곡하고 뒤틀어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숱한 국내 언론이 북에 대한 오보를 양산해왔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독자에게 진정 사과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정정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야말로 아니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평양에는 장애인이 거주할 수 없다는 오랜 전설은 우리 언론이 평양을 직접 방문해 그곳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고쳐질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북 당국의 조작이자 음모라고 헌신적으로 지금까지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북에 대한 기사나 방송을 하는 언론인 중 무책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때로는 굳이 이런 기자들이, 방송인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심각하게 느낄 때도 있다. 아무리 부처를 순환해야 하고, 상대방이 정정 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의 소설과도 같은 기사를 써댈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언론인으로서의 기본적 소양도 갖추지 못한 채 그저 데스크가 닦달하는 것에 못 이겨 꾸역꾸역 글을 끄적거린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달할 수 있음 더욱 좋다. 한심한 수준이다. 물론 뛰어난 기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 수가 적을 뿐이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 잘못된 정보나 지식이 입력되면 결과는 안 봐도 빤하다. 광복 70, 그 세월 중 우리는 고작 10여 년의 시간 동안만 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살렸는지는 아직 온전히 평가할 수 없지만, 적어도 비난 일변도, 조롱 일변도의 이야기들은 덜 생산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어용의 정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부나 그 밖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자주성 없이 행동함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유사 이래 어느 시대에나 어용은 존재했다. 가까운 과거를 생각해봐도, 4대강 사업이 진정 홍수를 예방하고 우리 자연을 더욱 보호하는, 진정한 강 살리기라고 주장했던 학자들이 있었다. 이름 하나 하나까지 다 기억난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 하는 권력에 빌붙어, 되도 않는 논리를 들이밀며, 목줄에 묶인 개 마냥 자신의 지식을 파는 이들이 존재한다.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 때에도 정부와 권력의 편에서 감히 시민들을 훈계하려 한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언론인들이 존재했다. 우습고도 기막힌 모습이다. 개가 사람을 훈계 하는 꼴이다.

 

남북관계나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어용은 존재한다. 아니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패거리를 이루어 상이한 의견이나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핍박한다. 그리고 그들은 남북관계를 말해도, 통일 문제를 다뤄도, 신기하게 모든 결론을 미국, 중국, 일본 등 강대국에게 빌붙어버리는 요술을 부린다. 남북문제도 미국이, 핵 문제도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도 미국이, 이 땅의 빌어먹을 모든 것이 죄다 미국이나 중국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칭 전문가들. 이게 현실이다. 쇼와 같은 현실이다.

 

부패한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진실이 오히려 질식사하곤 한다. 거짓이 화려하고, 진실이 누추한 비정상화가 정상화로 비치게 된다. 현재 남북관계의 오랜 경색국면에 있어, 그 책임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땅의 지식인, 언론인들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더럽고 누추한 것들이 너무나 당당히 떠들고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신경숙과 같은 이들이 대세인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언론인 출신의 학자이다. 때문에 그의 글에는 기자와 지식인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물론 왜곡이나 거짓을 진실로 치장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럴 생각도 깜냥도 없다. 그는 다만 객관적으로 북을 바라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분단을 평화적으로 극복하고 남북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런 이유로, 북의 오늘을 꼼꼼하게 살피고 분석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 정확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장성택 처형의 수수께끼. 아마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사건은 진실을 드러낼지 모른다. 하지만 처형 당시나 혹은 지금까지도 남측에는 이를 둘러싼 온갖 소설이 난무한다. 근거도 빈약하고,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말 그대로 버젓이 전파를 타고 활자화되어 대중에게 전달된다.

 

반면 북의 근현대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는 북의 역사를 되짚고 오늘을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서 내일을 전망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나 전망이 물론 100%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틀릴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그의 말과 글에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어용이 아닌, 부지런한 언론인의 피를 가진 학자이기 때문이다.

 

장성택의 처형은 향후 꽤 오랫동안 북에 영향을 끼칠 중대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강력하다. 언제나 그래왔듯 저자는 객관적 자료와 오랜 시간 바라본 북의 특성을 바탕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전망한다. 이는 북측을 연구하는 이들이나, 북측에 관련된 기사를 쓰고 있는 언론인들 모두에게 좋은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는 어쩜 외눈박이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의 분야가 아닌 부분에선 의외로 무력하고 또한 무책임하다. 하지만 지금의 전문가는 자신의 분야에서조차 당당하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하고 진실 되지 못할 때가 많다. 그것이 어용임은, 분명 스스로도 느끼지 않을까 싶다.

 

모든 직업이 나름의 의미와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꼴이 될 것이다. 분단이 그 무슨 자랑이 아니라면, 광복 70년이 그 무슨 영광이 아니라면, 남북문제나 통일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리고 남북관계나 북에 대한 기사를 쓰며 생계를 꾸려가는 언론인은 그 무거운 책임과 역할을 항상 느껴야 옳다. 그리고 자신의 글이, 자신의 말과 행동이 분단된 이 땅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늘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실력이 없다면 양심과 책임감이라도 가져야 한다.

 

알량한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잘난 특종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평화다. 화해다. 그 지겹도록 단단한 분단 구조를 깨부수고 진정한 상생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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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은 왜 군대 가서 돌아오지 못했나 - 살해당한 인권과 죽음의 배후를 추적하는 휴먼 스릴러
김종대.임태훈 지음 / 나무와숲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199812, IMF의 서슬 퍼런 칼 날 위에서 많은 아버지들이 낙엽처럼 스러져가던 그 때, 나는 입대했다. 대학 2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밴드 생활의 마지막을 불태우겠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무작정 들어간 군대였다. 기울어져 가는 집안에 입 하나 덜겠다는 갸륵한 마음 따위는 물론 전혀 없었던, 그저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 해 논산의 겨울은 얼마나 매서웠나. 찰나에 쏟아지는 온수에 살짝 녹았던 몸은 이내 목욕탕에서 막사로 돌아가는 길, 고래고래 내지르는 군가와 함께 다시금 얼어붙곤 했다. 차가운 논길을 바라보며 무작정 열을 맞춰 행군할 때는, 지나가는 강아지마저 마냥 부러웠던, 역시나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 논산을 떠난 나는 대전에서 육군정보통신학교에 들어가 무선중계반송을 주특기로 후반기 교육을 받았고, 결국은 다시 서울을 지나 비로소 의정부에 자대배치를 받았다. 훈련소 교육을 받고 곧바로 자대배치를 받은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8주라는 귀한 시간을 후반기 교육이란 이름으로, 상대적으로 편하게 보낸 축복 받은케이스였다.

 

의정부의 자대는 3군 직할 통신여단의 직할 대대였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만한 거리에 전문대학이 위치해 있는(그 대학의 여학생들이 그렇게 예쁘다는 이야기가 내내 돌았지만, 당연히 제대하는 그 날까지 그녀들을 볼 기회는 없었다), 결코 외지다고 할 수 없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박이나 휴가를 마치고 복귀할 때면 왜 그리 을씨년스러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더운 날씨였어도 사제 바람부대 안 공기의 온도 차이는 냉정했다.

 

20012월에 제대했으니, 어느새 14년이 되어간다. 지금도 아주 가끔씩 부대 앞을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아직도 그곳에는 그 시절 나처럼 어리바리하기도 하고, 때론 빡끈’(군기가 바짝 들어갔다는 소리다)하기도 한 병사들이 살고 있을까. 행여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지, 아주 가끔은 기특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다 군대 동기 녀석과 고참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나마 대규모(!)로 만난 것은 그야말로 기억도 나질 않고, 달랑 하나 뿐인 동기 녀석이 가끔씩 업무로 서울에 올 때, 역시 서울과 경기지역에 살고 있는 고참들과 연락해 두서넛이 모이곤 했다.

 

각자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군에서는 도저히 지금의 직종에서 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이도 있었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으로(그게 긍정적이든 혹은 아니든), 주위 사람들을 안도케 하는 이도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군에 다녀온 이들은 대략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애써 고통스러운 기억,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들을 스스로 삭제하고(절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이나 에피소드만을 자동 반복 생산하는 부류다. 그들은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하고, 강요하고, 강권한다. 때문에 군에 안 간 부류, 못 간 부류, 애써 빠지려 노력하다 실패한 부류들을, 증오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혐오한다.

 

물론 그 중 제일가는 혐오대상은 당연히 이른 바 으로 군복무를 면제받은, 혹은 소위 당나라 부대라 불렸던 편한 부대로 배치 받는 부류였다. 솔직히 그런 이들을 직접 만날 기회조차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겠지만, 그들은 그런 부류를 정말 헌신적으로 미워했다. 매국노, 쓰레기, 하다못해 빨갱이라는 비난까지 쏟아냈다. 빨갱이라, 그건 좀 심오한 표현이다.

 

나머지 한 부류는 애써 군대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부류다. 가기 싫었던 군대를 어쩔 수 없이 갔고, 일단 왔으니 살아남아야 했기에 때론 누군가를 괴롭혔고, 또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딱 거기까지다. 군대에 가야 사람이 된다는 말 따위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난 어떤 부류였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느 쪽일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단정하기 어려운 것 같다. 갓 제대 후에는 군 생활에 대한 유치한 과장과 무용담이 난무할 때가 있었고, 시간이 지나 남북관계, 통일문제에 비로소 다가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대한민국의 모든 악의 근원이 바로 군으로 보였다. 그 어떤 곳보다 가장 먼저 개혁이 필요한 곳, 필요한 집단이 바로 군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물론 우리 군이 그야말로 천지개벽할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태생부터가 도대체 주체적일 수 없고, 자주적일 수 없는 그 뼈아픈 한계가 너무 서글프다. 최근 주한미군이 일으킨 교통사고에 대한 배상을 우리 정부가 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바 있다. 그런 존재다. 여전히 우리 군이라는 것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깊이 군을 들여다보고 또한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런 마음이 더 굳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군을 지탱하고 있는 사병들, 초급간부들에 대한 생각이다. 그동안 난 너무 거대담론에만 빠져, 그리고 건방지게도 군의 진정한 주인인 사병과 초급간부 그리고 우리 시민들을 뺀 채, 군 문제를 비판하고 비난해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김종대 편집장은(최근 그가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펴내왔던 국방전문지 <디펜스21 플러스>가 폐간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땅이 이런 소중한 잡지 하나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천박하고 척박해졌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슬픔을 금할 수 없다. 감히 내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민족21>의 오랜 휴간이 새삼 더 아프기도 하다.) 내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군사전문가이자, 또한 평화운동가이다.

 

그리고 임태훈 소장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며, 아울러 타인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는, 이 땅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이다. 이들이 말하는 우리 군의 이야기, 우리 장병들의 이야기, 초급간부들의 이야기는 진정 대한민국 군대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케 한다.

 

우리 군은 지금도 전시작전권이 없다. 매년 국가예산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비중을 국방비로 사용하면서도, 정작 사병들의 시급은 500원에 불과하다. 잊을 만하면 끔찍한 사건과 사고가 군대 내에서 벌어지고, 지금도 한 해에 100여 명이 넘는 사병들이 스스로 생명을 버린다. 매년 100여 명이 넘는 사병들이 자살하는 군대, 마치 내전과도 같은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 시기 시작된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는 나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금까지 방송되고 있다. 처음엔 나 역시 신기하기도 하고, ‘이젠 군대마저 예능으로 소비하는 구나라는 애매한 감정이 들었다. 몇 편을 끝까지 시청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군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하려는 그 불순하고도 나약해빠진 메시지에 혐오감이 들었다. 세상에 억지로 애국심을 주입하여 성공한 나라가 얼마나 존재할까? 북이 그렇지 않느냐고? 우리는 함부로 그들을 평가할 수 없다. 그것 역시 건방진 소리에 불과하다.

 

우리 군대의 구성원인 사병들은 세계 최고라 할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다. 반면 우리 군은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전체적으로 부패했다. 이 기막힌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군은 감히 우리가 들여다볼 수도, 봐서도 안 되는 신성불가침한 영역이라는 그 오래된 환상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세금으로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로 운영되는 군을 정작 우리가 들여다보고 감시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우리는 유승준의 해프닝에 분노하면서도, 정치가를 비롯한 고위층 자제들의 군복무 면제에 치를 떨면서도, 정작 우리 사병들의 억울함 죽음엔 무관심하다. 주한미군의 탄저균 반입에 별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국익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드 도입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김진명이라도 떠올리면 다행일까.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나 긴 시간동안 우리 군의 전시작전권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오히려 예비역 장성들이란 이들이 전시작전권의 이양을 극렬히 반대하는 이 기막힘에도 눈을 감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여전히 지겹게도 북이 우리의 위협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직무유기로 모조리 감옥엘 가야 한다. 그게 상식에 맞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주권을 타국에 맡아달라고 간청하는 모습, 그런 비자주적인 비주체적인 국가의 군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이 죽어가는, 그 사이 괴물이 되어가는 우리 자식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 역시 모른 체 살아가는 것이 속 편한가. 그게 맞는가.

 

책을 읽는 내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군의 주체이자 모든 것인 우리 장병들의 생명이 너무도 하찮게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억울한 죽음이 살아있는 권력들에 의해 묻혀간다는 점이었다. 내 상식엔 군대에서 스스로 삶을 버린 모든 장병들이, 구타나 가혹행위 등 지독한 부조리로 인해 생명을 잃은 모든 군인들이 전부 다 국가유공자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다 자살한 여군들, 집단 따돌림으로 인해 자살한 장병들 모두 피해자이자 명예 회복의 대상이다.

 

안보와 애국심을 그렇게 강조하는 보수 정권 시기에 자살한 장병들의 수가 더 많았다는 사실, 그렇게 안보 무능이라 비난받던 진보 성향의 정권 시기엔 오히려 자살과 군대 내 사고발생률이 줄었다는 사실은 무얼 말해주는가. 애국심을 고취하는 영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철책선을 지키며, 그 사이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 받고 있는 장병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최근 보수주의, 보수주의자에 대한 고민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 내 생각에 보수는 값비싼 무기를 대책 없이 사들이기보다 우리 장병들의 복지와 인권에 더 치중하는 것이다. 값싼 애국심을 동원하거나, 군을 미화하는 예능프로그램 따위를 지원하며, 예전 같았으면 군사기밀로 분류되었을 것들을 죄다 보여주기 보다는, 진정한 국민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 먼저 노력하는 것이다. 죽은 군인들을 우상화하기 전에 살아있는 장병들의 삶을 먼저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입으로 애국을 떠들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정치인, 권력집단을 부정하는 것이다. 특별한 사유 없이 군 복무를 면제받은, 그리고 그 자식들도 면제받은 그런 정치인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우리의 주권을 노예처럼 타국에 안기기보다는, 당당히 받아 안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우리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더럽고 치졸한 사대주의를 버리고 진정한 자주국방의 틀을 세워가는 것이 진정 보수주의자가 할 일이다.

 

온갖 부정부패와 사건 사고에 더럽혀지면서도, 끝까지 오만하고 이기적인 우리 군의 책임자들이 반드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어설픈 애국심 팔이를 하며 짓까부는 정치인들이 먼저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자신이 군대를 다녀왔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모조리 한 통속으로 몰아 저열하게 비난하는 어설픈 마초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자식을 군에 보낸, 또 언젠가 보내야 할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이 읽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지겨운 얼뜨기 보수주의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는 전쟁을 잠시 멈춘 채 쉬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 군의 개혁은 절실히 필요하다. 진정한 강군, 이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안보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보수 정권이다. 보수답게 굴자.

 

슬프고 또한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야기들이 적잖이 담겨 있지만,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아울러 두 저자의 변치 않는 건승을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다치지 말고 상처주지 말고 무사히 제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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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독재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리고 있다. 기대했던 북측 선수단 및 응원단의 참가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아쉬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했다. 정부가 그렇게도 부르짖는 광복 70주년이라는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한 번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언론이나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을 살펴보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창피하면서도 애매한 느낌이랄까. 스포츠 강국을 외치며 각종 국제대회 참가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북이 왜 광주대회 불참을 결정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었는데, 문득 북측 불참 결정 소식을 처음 접한 후 내가 보인 반응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이 상황에서 북이 참가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물론 북측의 불참 원인이나 배경에 대한 나의 판단이나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이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언론들이 보였던, 그 중 특히나 싫어했던 모습을 어느 새 내 자신이 따라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 바 후견지명’ ‘사후 확신의 경향이었다. 큰 인재나 사고가 발생하면, 언론은 거의 어김없이 예고된 인재등등을 떠들어댄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이번 메르스 사태에 대한 언론의 보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누적된 부정과 부패, 비합리성과 무사안일주의 등등을 원인으로 들며, 결국은 일어날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담, 그렇게 예견할 수 있었던 사고를 왜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나?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미리 막지 못했나? 마치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이미 알고 있었다와 같은 건방짐인데, 그렇게 똑똑하면 왜 막지 못했느냔 말이다. 여기에 언론은 단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다. 사실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어느 새 내가 따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짝 부끄러움이 들었다. 만약 북측이 예정대로 광주대회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했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무어라 말했을까. 이렇게 말하진 않았을까. “나는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도 북이 대회 참석을 결정할 것이라 이미 알고 있었다라고.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무책임하면서 말이다.

 

사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언론이 특히나 호들갑스러워 그렇지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진 않다. 프로야구에서 어느 팀이 우승을 할지, 총선이나 대선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지, 북이 가까운 미래에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사실 이런 것들은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다. 역술인이 아닌 이상 정확히 예언하기 힘들다. 하물며 사건 사고는 말할 것도 없다. 신이 아닌 우리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매우 뛰어난 동물이기에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외친다. 이미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그 결과를 예측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민망한 일이다. 아울러 혹시나 어떤 결과로 인해 자신에게 튈지도 모르는 불똥을 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예측의 가능성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다. 아울러 한 번의 사고로 인해 교훈을 얻고 미래를 더욱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다면 적절한 수준의 뒷북은 유효하다. 아쉽게도 우리 정부, 우리 언론에서는 찾기 힘들지만 말이다.

 

강준만 교수는 나의 대학 시절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지식인이다. 그의 뛰어난 분석력과 예리한 인물 비평, 근면함으로 인해 갖춰진 해박함은 당시 어린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가 제시한 수많은 우리 사회의 의제들도 흥미로웠다. 월간 인물과 사상은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 읽는 잡지였고 그가 펴낸 많은 단행본들도 필독 리스트에 단골로 오르곤 했다. 그의 근면함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 책을 펴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꼼꼼하게 따지지 않고 곧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버릇이 있다. 실재 그렇게 마구잡이로 덤벼들어 문제해결은커녕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곤 하지 않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 유사한 사례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물론 전임 정부가 애써 만들어 놓은 재난대비 매뉴얼을 뭉겨버린 것이 더욱 크겠지만 말이다. 원인을 정확히 찾지 못한 채, 꼼꼼한 분석과 성찰 없이 도출되는 해답은 대부분 어긋나기 마련이다.

 

저자는 우리가 현재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로 과거보다 더욱 견고한 감정 독재체제하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속도는 감정을 요구하고, 감정은 속도에 부응함으로써 이성의 설 자리가 더욱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은 압도적으로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타인이나 바깥 세계에 대해선 이성에 호소한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꾸짖는다. 좀 우스운 모습이다.

 

왜 현 정부는 저리도 이해 불가한 행동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고 여당은 또 왜 저리도 비굴한 것인지, 야당은 그렇담 왜 저리 존재감이 없는지, 정치인들은 왜 하나같이 저리도 무능하고, 정치는 왜 언제나 24시간 불철주야 개판인지 등등을 감정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해버리면, 속된 말로 답 안 나오는 사태가 지속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당최 왜?’ 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이론이다. 저자는 라는 질문에 대해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을 이론이 있을 때 더 쉽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론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긴 시야와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왜 해병대 출신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는지(노력 정당화 효과), 왜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은 복권을 계속 사는지(몬테카를로의 오류), 왜 대학 입시제도는 대략 310개월마다 바뀌는지(행동 편향), 왜 임금님은 벌거벗은 채로 거리 행진을 했는지(다원적 무지 이론) 50개의 이론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 소개한다.

 

최근 어느 논객이 현 정부의 독선과 무능, 불통과 정상의 비정상화등에 대해 지금 화내지 말자고 표현한 바 있다. 지금 똑같이 반응하고 화를 내면 끝내 우리가 패배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감정으로 대응하면 당장은 속이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현실 세계에선 변화를 추동해내지 못한다는 간절함이 담긴 호소였을 것이다.

 

물론 그 어떤 이론으로도 당최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쓴 것을 이젠 자신도 모르겠다고, 당당히 대통령과 같은 수준의 유체이탈인임을 선언한 예술가도 있고, 3권 분립이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에서 입법부를 그야말로 개무시한 대통령에 대해 오히려 석고대죄하고 몸 둘 바를 몰라 서성이는 여당 대표, 여당 원내 대표도 있다. 여기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마냥 투명해, 존재 여부가 불분명한 야당도 있다. 이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론은 여간해선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정의 식민지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라고 물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마저 이윤창출에 활용하려는 자본에 맞서기 위해서, 또한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조화로 정신 건강을 지키고 보다 후회 없는 선택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책에 소개된 50가지의 이론들을 읽으며 나는 과연 이 중 몇 개의 이론 적용이 가능할지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인간은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다. 설명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불가능하다.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행동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이해가 얼핏 되다가도 당최 속을 모르겠다. 착한 것 같은 데 사악함이 번득인다. , 어렵다.

 

이런 어려운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사회, 게다가 오랫동안 분단되어 살아온 절반 사회에서, 우리는 감정과 이성의 조화가 누구보다 더 필요할지 모른다. 북을 여전히 소멸시켜야 할 대상 혹은 영원한 패배자, 루저로 감정해 버리곤 하는 지금, 이런 감정 독재에 맞서기 보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성과 감정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 그 안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공을 키우는 일,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되겠다.

 

자기이행적 예언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미래에 관한 개인의 기대가 그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경향성이란다. 8, 이희호 여사가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북측을 방문키로 하였다. 이번 방문이 반드시 잘 될 것이라는 자기최면이라도 걸어야 할 듯하다. 그럼 누가 알겠나, 정말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 말이다. 체면 따지지 말고 최면이나 걸자. 분명 남북관계는 기어이 잘 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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