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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해도 될까요?
노하라 히로코 글.그림, 장은선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4월
평점 :
2007년 3월에 결혼했으니, 음. 올해 몇 년 차인가. 8년? 세 살짜리 딸 아이 하나가 있다. 결혼 후 늦게 얻은 귀염둥이 녀석이다. 부모를 전혀 닮지 않아 애교가 넘친다. 미스터리한 일이지만, 다행이다 싶다. 너무 무뚝뚝해도 매력 반감 아닌가.
아무리 내가 뻔뻔하고, 염치가 없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시 아무리 봐주고 봐줘서 생각해봐도 지금까지 내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이대며 합리화를 해도 결국 진실은 숨길 수 없다. 난 그리 훌륭한 아빠이자 남편은 아니다.
이는 세속적인 차원과 근원적(!)인 면을 동시에 살펴본 결과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세속적인 면은 뭐, 한 마디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권력과 명예와 부, 이것들 중 나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전무하다. 간신히 빚을 갚으며 하루하루 그렇게 대책 없이 살아간다.
남들이 부러워하는(그들이 속물이든, 겉물이든)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마흔이 다 되어가도록 그리 큰 삶의 성취를 이뤄낸 기억도 없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손녀 딸을 안겨드린 것이 근래 들어 이룩한 가장 큰 효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철없는 아들 녀석이 그저 사람 구실만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사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이런 평균 혹은 평균 이하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아내에 대한, 딸에 대한 감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미안하면서도, 두렵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괜시리 오기 혹은 반항심(!)도 생긴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후회하고 또 후회할 행동을 반복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또 자기연민에 빠진다. 이런 게 삶이고 또한 생활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뜨끔거렸다. 찔렸다. 혹시 나도 주인공 미호의 남편처럼 저도 모르는 사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무의미한 혹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의 행복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무서운 괴물처럼 말이다.
끔찍한 상상이다. 만약 아내가 나를 두려워하거나 증오한다면, 이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책이란 이미 늦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이에게 느끼는 증오는 다른 타인에게 느끼는 그것보다 그 농도가 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희석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미호의 남편은 중소기업을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결혼 9년차. 귀여운 두 아이가 있다. 보기엔 평범하고 평화로운 가정이다. 하지만 미호는 늘 이혼을 생각한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은 남편의 행동이 쌓이고 쌓여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로 응어리졌다. 가끔씩 폭력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아이들을 귀찮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 아내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점점 찾기 힘들다.
여기에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아마도 적지 않은 수의 우리 남자들도 미호 남편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회사 일을 핑계로, 바깥일을 이유로 아내를 무시하고 자녀들에게 소홀한 것을 정당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가. 직장일이 그 무슨 위대한 삶의 임무이자,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렇게 스스로 세뇌시키고, 정작 내 인생을 함께 보듬어주고 있는 아내,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내 자식들에게 소홀히 한 적은 없는가. 혹시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먹고 살기 위해 단순히 일을 하는 것은 비참하다. 때문에 자신의 일에, 직업에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이들은 위대하다. 멋지다. 그런 이들을 볼 때면 삶의 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곤 한다. 난 왜 저런 에너지와 무한 책임의식이 없는 것일까 생각할 때도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최근 느끼고 있다. 그 어떤 일도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다. 헛소리다.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말하는 이들은, 불쌍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아마 본인도 알 것이다. 그런 조직은 없다. 만약 있다면, 곧 무너질 것이 빤하다.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고, 그 처음이자 끝인 것은 맞다. 당연히 내가 사라지면 아무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너무 무질서하게 삶에, 타인에, 이 세상에 적용시키는 것은 어리석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자신의 우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모든 일이 다 위대하고, 또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다. 내 가족과 친구, 날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기필코 내가 이뤄야 할 일 따위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거부할 것이다. 당연한 선택이다.
최근 읽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의 <시작하는 연인들은 투케로 간다>에서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을 꿈꾸는 여자’가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노부부에게 보기 좋다는 이야기를 하니 노부인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노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멋진 거겠죠. 우리가 겪은 풍파마저도 아름다웠으니까.”
행여나 아내가 이 책을 읽고 진지하게 이혼을 고려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아니면 어쩌지?), 그럼에도 당장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은, 어쩐지 구석진, 후미진, 살짝 다른 책 사이에 숨기고 싶은 책이다. 그동안의 미안함과 또한 미안함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딸아이에게, 뒤늦게 들어가 몰래 손을 잡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기습 뽀뽀를 하는 못난 아빠라는 사실도 가슴을 때린다.
투케에서 만난 멋진 노부부처럼 늙어갈 자신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건방진 생각, 오만함은 버리려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저 하찮은 일일 뿐이다. 물론 그 하찮음은 내 가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야기다. 인류가 보기엔 위대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문제이다.
물론 선택은 항상 정해져 있을 것이다. 난 위대한 그 무엇보다, 그리워 할 그 누군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