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사회 -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 아케이드 프로젝트 Arcade Project 2
주창윤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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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향한 과거로의 회귀는 퇴행이며, 이상적 자아에 대한 과잉 동일시는 나르시시즘이고 진정성의 상실은 분노로 표출된다. 이것들은 IMF 이후 진정성의 토대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가 확장되면서 부상했다. 우리는 지금 허기사회에서 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에 대한 저자의 진단에 이의를 제기할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스스로 절실히 느끼고 있는 ‘허기’를 애써 부정할 이유도 여력도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우리는 명백히 지치고 또한 허기져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마치 식탁에서 밥을 먹은 뒤, 빈 밥그릇을 보면서 허기를 느끼는 ‘빈 밥그릇의 허기’가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 허기는 욕구의 배고픔이 아닌 ‘갈증의 배고픔’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의 문화적 특징 아래 깔려 있는 ‘정서적 허기’를 말하고 있다.

 

정서적인 허기는 경제적 결핍과 관계적 결핍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경제적 결핍은 말 그대로 경제적 관계로부터 야기되는 허기이고, 이것은 다시 관계적 결핍을 부르는 토대가 된다. 저자는 지금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관계적 결핍의 현상들을 살펴본다. 그것들은 퇴행적 위로, 나르시시즘의 과잉, 속물성에 대한 분노, 관계 맺기의 집착 등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살아가기 힘든 사회라면, 누구나 무기력증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신의 근면함이나 성실함이 사회 전체의 불의나 부정으로 인해 그야말로 ‘무시 혹은 부정’당한다면, 이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분노와, 또한 그에 못지않은 체념의 모습은 지금 우리네 삶이 어떠한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힐링이라는 문화코드의 확산과 위로의 문화. 또한 가벼운 즐거움에 빠지는 사람들이 첨단 디지털 문화에 빠져 추구하는 ‘스낵 컬처’. 사람들은 ‘초미세한 지루함’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또한 정작 잘못은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채, 힐링과 위로를 받으며 안도한다. 위로의 문화는 언뜻 자상하고 따뜻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을, 혹은 잘못된 문제를 온전히 자아의 성찰로만 극복하라는 또 다른 폭력을 가져온다는 점은 무시된다. 사회적 인과관계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없이 온전히 정서적인 결정으로 그 무언가를 설명하려 하는 것. 이것 역시 명백한 폭력이다.

 

저자는 또한 상대를 배제하며 동시에 모방하는 ‘과잉사회’를 허기사회의 다른 형태 중 하나로 설명한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모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위기감. 이는 사이버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누군가를 그야말로 ‘신상털기’를 통해 매장시켜야 끝을 맺는다. 연예인 타블로의 학력을 둘러싼 어처구니없는 광기와 ‘김여사’ 조롱 등은 사이버 희생양 메커니즘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초고속 광랜보다 빠른 신상털기의 공포 앞에 누구나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상. 이는 최근 방송을 도배하다시피하고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유행을 통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특정 인물과 그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지켜본다. 그게 정작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알면서도.

 

또 하나의 현상은 앞서도 언급한 ‘분노’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속물사회를 만들어낸 우리 스스로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스스로 속물적 지배를 선택했다. 가리려고 해야 도저히 가릴 수 없는 치부를 안고 있던 이를, 단지 부자를 만들어주겠다는 말만 믿고 대통령으로 뽑아버렸다. 스스로 속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경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그 허탈감과 자괴감은 대한민국을 분노와 수치의 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대중은 과거의 불의, 부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며, 정작 오늘의 불의는 외면하려 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듯 한 각종 복고적 문화와 드라마가 유행하고, 수 백 만이 오디션 프로에 참가해, 스스로 불행했던 과거를 경쟁하듯 내보이며 스타가 되려 한다. 승자독식의 룰을 스스로 철저히 추종하며, 이율배반적으로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경제적 결핍으로 오는 관계적 결핍을 SNS를 통한 무의미한 관계 맺기의 확장으로 만회하려 한다. 무의미한 ‘좋아요’ 누르기로는 그러나, 결핍을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과잉의 표출일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신자유주의의 확대와 연관성이 높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양극화,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으로 나타나는 경제적 결핍 현상은 대중의 심리적 억압을 극대화시킨다. 그러면서 “계층, 분야, 지역,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경계와 폐쇄성, 기계적 효율성만을 내세우는 성장주의”는 오늘도 견고하게 대중을 옥죄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게릴라 되기와 눈부처 주체를 말하고 있다. 권력의 허위를 무너뜨리는 게릴라 담론의 형성은 ‘나는 꼼수다’를 시작으로 수많은 팟캐스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에서 확인된다. 세상을 현실의 공간으로 인정하면서도 또한 하나의 놀이터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게릴라 되기의 시작일지 모른다.

 

아울러 희망버스를 통해 새롭게 인식된 눈부처 주체. 이는 상대방의 눈동자를 쳐다보면, 그 속에 비춰진 내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진정한 실체를 상대방을 통해 찾는 인식,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실천적 행위까지를 말한다. 밀양 송전탑을 두고 싸우는 할머니들을 위한 전국적 연대의 움직임,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한 끝없는 연대의 모습에서 우리는 눈부처 주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짧은 분량이지만, 책이 전해주는 묵직함은 남다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철저히 발가벗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허기가 가득한 사회에서는, 결국 연대와 솔직함을 통한 ‘채움’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적이 아닌 ‘우리’로 보는 자세, 불의 앞에 최소한 솔직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는 마음,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그 눈에서 비로소 나를 찾는 연습.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 채워지지 않을까.

 

무언가에 끊임없이 허기져 있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정호승, <눈부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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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웅 제이크맨 VivaVivo (비바비보) 18
데보라 엘리스 지음, 이승숙 옮김 / 뜨인돌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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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낙인의 효과’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편견과 불신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넘쳐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최근 겪고 있는 아픔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는지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누가 죽으라고 했어?” “어린 것들이 놀러 가다가 죽은 것을 가지고, 가당찮게 특별법이라니!” “국가를 위해 죽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의사자야!”

 

도저히 부모라고는, 상식과 이성이 있는 성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들의 저주의 말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깊은 편견과 불신 그리고 무지에 갇혀있는지 알 수 있다.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은 자녀들의 특례입학이나 의사자 선정 등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진실과 재발방지, 즉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보수 세력들로부터, 아니 정부로부터 자식의 죽음을 빌미로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불순한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여기에 사실관계를 명확히 살펴보는 것이 귀찮기만 한 일부 국민들이 로봇처럼 낙인찍기에 동참한다. 유가족들과 생존자 가족들이 느낄 국가에 대한 환멸과 동시대인들에 대한 배반감, 허탈감이 어떨지는 상상하기조차 죄스럽다. 결국 이 나라는 스스로 국가임을 부정함과 동시에, 또한 현 정부는 정부로서의 책임을 고스란히 바다 속에 수장시킨 셈이다.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다. 편견과 불신, 무시로 고통 받는 아이들의 모험담이다. 부모가 범죄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 아이들이, 자신들 역시 존중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할 엄연한 이 사회의 일원임을 알리는 투쟁기이기도 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흑인이거나 라틴 아메리카계이다. 미국 사회 내에서 아직까지 ‘비주류’로 불리는 집단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피부색이나 출신지에 상관없이 분명한 ‘미국인’이자 또한 ‘국민’ ‘시민’의 일원이다. 이 당연한 사실이 수없이 부정당하고, 무시당하는 현실에서, 아이들은 좌절하지만, 그 좌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스스로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여기던 모습에서 벗어나 당당히 자신을 묶어오던 밧줄을 벗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날을 맞아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교도소에 있는 엄마, 친척을 면회하러 가던 아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버스의 핸들을 스스로 잡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이, 사회가 자신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사회복지사의 가방 속에 담겨져 있던 자신들에 관한 서류에는 온통 암울하고 절망적인 미래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바꿀 수 없다고 믿어왔던 세상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다. 엄마를 풀어 달라며 줄기차게 주지사에게 편지를 보내던 주인공 제이크,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미친 것이 분명함. 차단시켜야 함”이라는 답장뿐이었다. 그리고 교도소 측의 늦장 대응으로 아픈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던 아이 할런. 아이들은 이들에 대한 사과를 받기 위해, 또한 자신들의 엄마, 친척을 풀어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판단한 주지사를 만나러 가자고 합심한다.

 

언제나 주위로부터 상처와 편견이 가득한 무시를 당해야 했던 주인공 제이크는, 자신만의 영웅 ‘제이크맨’을 만들어낸다. 제이크맨은 평소에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공격을 받으면 온몸에서 가시철사가 돋아나 악당을 무찌르는 슈퍼 히어로다. 제이크맨은 사회의 편견, 억울한 차별에 대한 제이크만의 저항이었다.

 

오직 스케치북 안에서만 활약할 수 있는 제이크맨. 하지만 아이들은 제이크맨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제이크맨이 제이크는 물론, 모든 아이들을 위험에서 구해줄 것을 믿는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후, 새삼스럽게 우리가 얻은 것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가슴 뻐근하게 아픈 것들이지만, 그 중 소중한 것들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한 공감이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공감의 능력이, 연대의 가치가 평소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 왜 우리는 지옥과도 같은 정글 속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선입견과 무시, 외면, 증오는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증오나 편견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매일 100여 명의 무고한 이들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생지옥을 바라보면, 그리고 그러한 학살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정당화하는 이스라엘을 보면, 또한 그런 이스라엘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정당화하는데 동조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주류들을 보면, 잘못된 증오와 편견이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지옥이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지금이다.

 

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정의를 위해 직접 행동한다. 가능성이 단 1% 뿐이라 해도 이들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반전활동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저자는 작품을 통해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소외된 아이들의 한바탕 소동을 통해 불편한 진실과 또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린 이러한 모습을 현실로 목격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친구와 선생님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오직 진실을 요구하며, 먼저 죽어간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살아남은 부모들은, 생존자의 부모들은 곡기를 끊어가며, 역시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이 거꾸로 되어버린 기막힌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작품이 아님을 느끼며, 책을 덮는다. 그리고 내가 그 누군가의 ‘제이크맨’이 되어,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지,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억압과 차별에 대항해 날카로운 가시철사를 휘두를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내가 묶어버린, 나를 옥죄고 있는 이 무기력, 체념, 포기라는 밧줄을 끊어버리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동안 너무 머물러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 책이다.

 

“아저씨 자신도 잊지 마요. 스스로 묶여 있으니까요. 그게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나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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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샤크
베르너 J. 에글리 지음, 배수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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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1일, 우리 국민은 이역만리 먼 바다에서 들려온 우리 군의 군사작전 성공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군사작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덴만 여명작전’이 그것. 소말리아에 파병된 우리 청해부대가 해적에 피랍된 삼호 주얼리호 선원 21명을 구출한 이 작전을 소재로 한 특별한 책이 발간됐다. 아덴만 여명작전과 소말리아 해적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아덴만의 여명’이 그것.”

 

최근 발간된 어떤 책을 소개하는 기사의 한 구절이다. 매체는 국방일보. “아덴만의 영웅들 소설로 깨어나다”라는 제목이 나에겐 조금 불편하다. 당시 영웅으로 추앙받던 석 선장은 이제 해군에서 안보교육을 맡고 있다고 한다. 안보교육의 살아있는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으리라.

 

내게 남아있는 당시의 기억은 이명박 대통령을 한껏 추켜올리던 언론의 야단법석과 일반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이다. 뭐, 아닐 수도 있겠다. 정말 우리 군의 활약에 감탄하며, 못된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본때를 보여줬다고 만족해한 이들도 있었으리라. 물론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대처는 필요한 것이었고, 정당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당시의 모습은 미안하지만, 나에겐 참 불편했다.

 

소말리아. 나의 무지는 소말리아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내게 주지 못했다. 단지 가난한 나라, 내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는 나라, 중무장한 해적들이 활개 치는 무법지대 정도로만 어렴풋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말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전부일까. 그것이 얼마나 많은 진실과 혹은 거짓을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바로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은 과연 나의 어설픈 지식에 100% 동의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맴돈 생각이다. 난 과연 아무런 선입견 없이 소말리아를 인식하고 있었을까.

 

책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다. 하지만 비단 청소년만을 위한 작품은 아니다. 어쩜 청소년들보다 더 많은 오류와 편견과 오만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우리들을 위한 소설이다. 소말리아라는 작은 나라를 둘러싼 우리 모두의 책임과 죄악과 무관심과 외면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소말리아는 몇 년 전부터 기근에 시달리고 있어. 그런데 그 기근에는 우리 유럽인들도 한 몫을 거든 셈이란다. 왜냐하면 소말리아 앞바다의 어족 자원을 한 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초토화시킨 장본인이 바로 유럽이거든. 예전에는 가뭄이 들어 내륙의 농사를 망칠 경우 고기잡이를 해서 사람들이 먹고 살 수가 있었던 거야. 그런데 오늘은 고기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속절없이 굶고 앉아있는 수밖에. 그 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국으로 가거나 유럽으로 갔어. 슈퍼마켓의 염가 판매 상품이 되어. 우리가 식탁에서 생선을 배터지게 먹는 동안 소말리아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만 하는 거야. 혐오스러운 생각이 안 드니? 말해 보거라, 너는 혐오스럽지 않단 말이니?” - 125p

 

혐오스럽다. 매달 구호단체에 얼마씩 내는 기부금으로 나의 양심이 편안한 척하는 위선도 솔직히 역겨운 짓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정성이 모여 과연 소말리아에 누구에게 전달될 것인지, 수많은 NGO 봉사자들의 땀과 눈물이 아프리카의 오래된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줄 수 있을지, 사실 모든 것들이 암담하고 난감할 따름이다.

 

책은 소말리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해주기 위해 떠나는 배에 탑승한 토미의 눈을 통해 서구의 잘못된 과거와 죄악을 함께 만나게 된다. 아버지를 잃은 뒤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토미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캡틴 루니의 배에 주방 보조원으로 함께 오르게 되고, 아프리카로 향하는 여정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프리카의 ‘맨 얼굴’을 느끼게 된다. 토미에게 요리사 미스터 카터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는 자기가 흘린 피 속에서 익사하고 있는 거야.”

 

아시다시피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를 경계 짓는 국경선은 마치 자로 잰 듯 직선이 많다. 그 이유는 민족과 문화, 인종과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서구 열강 몇몇이 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와 문화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복과 인간으로서의 권리 역시.

 

오랜 식민지 체제 하에서 신음했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독립이 되어도 ‘자유’를 얻지 못했다. 독재와 내전의 반복은 무수히 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굶주림과 강간, 학살이 일상처럼 그들의 삶을 맴돌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면, 과연 무엇이 이성이고 진실이고 정의이고, 또한 그 반대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소말리아의 아이들은 고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피난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아이들은, 자신은 그저 ‘아프리카의 자식들’일 뿐이라 말한다. 아프리카의 아이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풍족하다. 물론 우리의 삶이 온갖 죄악과 위선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프리카를 굶주리게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하고 변명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죽으라고 했어?!’라며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인간 이하’의 것들의 행동과 그리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왜 소말리아에 해적들이 창궐하는지, 왜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오늘도 죽어 가는지, 왜 아프리카는 내전과 독재가 사라지지 않는지, 이 빌어먹을 정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아주 가끔은 소말리아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더 가까운 북한을 생각해야 한다.

 

“내 고향은 아프리카야.”

 

“아프리카에도 나라는 많잖아”

 

“그런 국경을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방인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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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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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 세계에서 1년에 출간되는 책이 100만 종.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은 4만 종 이상. 하루에는 1,000종 이상. 부수로는 1억 부 이상. 그 대부분은 국가자격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을 위한 문제집, 수험서, 참고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서적은 130만종. 한편 보통 사람이 일하고 공부하고 밥 먹고 잠자고 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매일 다섯 권씩 책을 읽는다면 1년에 1,825. 이 짓을 100년간 하면 182,500. (중략)

아무도 읽지 못한, 띠지도 벗기지 않은 11쇄의 책들이, 제지 공장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책의 지옥이죠

 

, 이처럼 자세히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이 지구상에서 매일 얼마나 많은 책이 태어나고 사라질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나마 도중에 멈추지 않고 근면하게(!) 지속하고 있는 유일한 취미가 독서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상엔 저자의 말처럼 하늘의 별만큼 많은 책들이 존재할 터인데, 거기에 매 초마다 또 얼마나 많은 책들이 보태어질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이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최근 어느 사진작가가 자신의 사진을 위해 200년이 넘은 나무를 무참히 베어버렸다는 소식이 자꾸만 겹친다. 그의 무참한 정신상태 역시 심히 측은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을 순전히 우리만을 위해 베어내고 있는지 생각조차하기 두렵기 때문이었다. 저 수많은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가 매일 매일 무심코 버리는 수많은 종이들을 만들기 위해, 또 이런 저런 쓰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지금도 베어지고 있을까.

 

때문이다. 책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겠지만, 우리는 항상 그 별들이 아름답고 또한 다른 이들을 비출 수 있는 것이기를 바라며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책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소중한 나무를 마구 베어버리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당연한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이 될 지도 모르지만, 만약 내가 책을 펴내는 날이 온다면, 부디 그 책은 어둠이 아닌 빛을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함께 갖는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만.

 

이 소설은, 책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위한 찬가이자, 책들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의 이야기이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책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한 곧 사라질 책들, 또 곧 태어날 책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놈의 직업병이 문제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 작가의 길고 긴 문장의 호흡에 적응키 어려웠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무조건 문장은 간결하고, 가능하면 짧은 것이 좋다는 기자로서의 강박관념이 감히 소설이라는 전혀 다른 글에 까지 적용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글에 대한 평가나 기준은 그야말로 엿 장수맘이 아니던가. 그 엿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받아들이고, 달디 달게 먹는가는 다른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책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의 해박함(이 정도의 단어로 표현이 될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독서량을 가늠케 만드는)에 감탄하고, 또한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며 다시 한 번 감탄. 어떤 독자들은 결말이 조금 허무하다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그리 나쁜 마지막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끝은 끝이 아닐 것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확실치 않은 책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전직 책 사냥꾼 반디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소리를 위해 의뢰를 맡게 된다. 그리고 책을 찾아 단서를 찾아 헤매는 동안, 점점 그 책이 또 하나의 책을 찾기 위한 단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곧 무언가 더 큰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만남이 이어지게 된다.

 

그가 찾으려 한 책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반디가 겪은 모든 일들이 애초 일어나기는 한 일이었을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고 그 순간의 존재함.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책에 대한, 출판사 등 책으로 먹고 사는 이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절정을 이룬 때로 표현된다. 출판사들을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책들을 모아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벌어진다. 정부는 강력한 정책으로 출판문화를 규제 혹은 변화시키려 하고, 책이 사라질수록, 오히려 어떤 책들은 더 높은 가격에 어둠 속에서 거래된다. 허구의 시대이지만, 과연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그 허구가 허구인지도 역시 나는 어지럽다.

 

모든 권력은 문화를 통제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 열심히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허영과 욕망을 온전히 다 바치며, 찰나의 존재감, 찰나의 권력에 취한다. 그리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진다.

 

그동안 그리 많은 책을 읽지는 못하였다. 물론 책의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책들을 어설프게나마 읽다보면 쓰레기를 발견하는 일도 가끔 발생하기 마련이다. 정치적 목표를 위한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책, 자신의 어설픈 지식을 늘어놓으며 결국은 되도 않는 훈계나 일장 연설로 마감하는 책, 처음부터 난 돈을 벌고 싶어 미치겠어!’를 노골적으로 선포하며, 독자들의 주머니를 털려는 자기계발서, 투자안내서 등 그리 반갑지 않은 책들도 적지 않게 만났던 것 같다. 물론, 그것도 누가 어떠한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겠다.

 

책을 주제로 이렇게 재미있으면서도, 진지하게 생각게 하는 작품은 적어도, 무지한 나로서는 처음이었다. 책은 과연 나에게 무엇인지, 인간에게 책은 어떤 존재이자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책을 만들고 어떤 책을 버리며 어떤 책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 책이다.

 

작지만 신념을 가지고 의미 있는 책들을 펴내는 소중한 출판사들이 있다. 물론 그 반대가 더 많지만. 돈이 된다면 박근혜든, 박정희든 그 어떤 무엇이 되던, 높이 칭송하고 떠받들며 온갖 역겨운 소리들을 지껄이는 책들, 우리들의 마음속에 욕망과 증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책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펴내는 그런 곳들도 여전히 많다. 그리고 그런 곳들이 그렇지 않은 곳들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책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많고 우리는 그 많은 별 중 하나하나를 우리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언제나 자유로울 것이며, 또한 무거울 것이다. 우리의 선택으로 밤하늘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암흑 그 자체가 될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애증과 욕망과 고뇌가 모두 다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책이라는 화두를 오래 붙잡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책 이야기를 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그의 후속작을 살펴보다 이미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소설이 전해주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그 이후의 난처함까지 온전히 전해준 작품이다. 즐겁고도 난처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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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대충 합리적인가 - 인간의 속마음을 풀이한 현실 경제학
조준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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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주인공은 돈이 아닌 사람이다!]

 

어떤 분야에 대한 것이든, 일단 글은 쉬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아무리 쉽게 설명하려 노력해도, 당최 그 한계가 명확한 분야도 있다. 그런 분야의 전문가들은, 특히나 더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난해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굳이 염려해야 할 부분은 아니다. 아예 시도조차 안 할 테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전공자가 아닌 이상 경제학 서적을 수월하게 읽어 넘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본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할 것이고, 또한 복잡한 그래프, 수식, 표 등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것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당최 어찌해야 할까? 경제나 경제학 등등과는 어차피 처음부터 그랬듯,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며 그냥 모른 척 살아가야 할까? 아니다. 방법은 있다. 바로 내 삶 그 자체가 경제이며, 경제학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으면 된다.

 

이 책은 일단 하나의 명제로부터 시작된다. 즉, 인간은 생각보다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혹은 하지만 그 비합리성이 궁극적으로 최선의 합리적 행동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음. 일단 책을 읽어보시라고 할 수밖에.

이른바 경제학과 심리학의 결합으로 태동된 행동경제학이 우리에게 알려진 지도 제법 된 것 같다. 행동경제학에 대한 책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고, 또한 심리학을 중심에 두고, 여기에 경제학 이론들이 양념으로 첨가된 책들도 제법 본 것 같다. 암튼 행동경제학이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본지는 어느 정도 되었다는 소리.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행동경제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혹은 오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애초부터 경제학에서 출발한 행동경제학을 마치 이전의 주류경제학과는 태생부터 다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거나, 혹은 너~무 어렵게 글들을 쓰셔서 그렇다는 것. 때문에 저자는 처음부터, 가능하면 이해하기 쉽게 행동경제학을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독자의 입장에서 일단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저 머나먼 초딩 시절부터 대학은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학이나 경제학과는 절대 소원하게 지냈던 내가 책을 통해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에 대해 일정한 이해가 이뤄졌음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것. 기존의 주류경제학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 즉 인간은 이기적 동기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의 욕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정의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그런 안이한(!) 착각 때문에 경제위기나 대공황과 같은 위기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상당히 오랫동안 잘못된 믿음이 지속되어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솔직히 지금도 그런 믿음 하에 온갖 경제정책들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저자는 경제 현상의 주체가 인간이고, 경제 활동 역시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경제학은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을 중심에 둔 경제학은 지금처럼 경제 위기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거나, 대응책은커녕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조차 하지 못하는 주류경제학의 어설픔과 오만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해도 내가 날 잘 모르겠던데, 어찌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은 때론 합리적이지만, 때론 어처구니없고, 때론 무지하게 이기적이지만, 의외로 꽤 이타적이기도 한 동물이다.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변화무쌍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경제학은 그나마 제대로 된 답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순전히 비경제학 전공자의 의견이지만 말이다.

 

책은 여러 석학들의 이론들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며 기존 주류경제학이 가지고 있던 굳건한 믿음, 즉 인간의 이기심, 합리성, 자기이해라는 세 가지가 사실 그다지 확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때로 인간은 이기심보다는 존중과 배려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고, 학습과 경험에 바탕을 둔 판단을 한다. 그리고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당연하다. 그게 인간이다.

 

주류경제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행동들이 사실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라는 점. 또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이 오히려 합리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 결국 인간은 대충 합리적이고 대충 무모한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렇게 인간을 이해하면 이 어이없는 세상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 아, 그건 좀 다른 문제인 듯.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엄연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내가 세상을, 또 인간을 알려면 한참 멀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소설가가 말했다던가.

 

“어차피 인생이 한 번뿐이라면 과연 인생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어려운 경제학을 알기 쉽게 소개해준 저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살짝 전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적당히 따뜻한 시선, 그리고 ‘피식~’ 거리게 만든 개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저자의 말마따나, 경제학자가 그 정도 웃기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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