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 몇 가지. 내가 태어나기 3년 전 현 대통령의 모친이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지 2년 후 현 대통령의 부친이 부하의 총탄에 의해 절명했다. 그리고 이듬 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난 어렸고, 순수했다.

 

나의 유년시절은 전두환 대통령의 시대였다. 아주 어렸으니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사실 많지 않다. 하지만 마치 공기와도 같은, 시대의 일정한 느낌, 분위기는 어렴풋 기억난다. 물론 노태우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역시.

 

그리고 19876. 11번째 생일을 맞았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길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의 함성. 당시 창신동에 살고 있었던 나에게, 당시의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또한 강렬하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조금 들어와야 닿을 수 있었던 우리 집은, 60~70년대 지어진 개량한옥이었는데, 전경에게 쫓겨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온 시위대들은 담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와 다른 집들로 뛰어넘어갔다.

 

아이고, 학생들 위험해! 내려와!”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난 그때 , 기왓장 다 부서지겠군. 아버지가 아시면 난리 나겠다. 설마, 나보고 지붕 위에 올라가 같이 보수 공사를 진행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따위의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워낙 순수해요. 제가.

 

이제 곧 마흔이라는 나이에 접어들 나조차도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치열히 싸워온 선배들의 기억을 100% 알고 있다고, 느껴왔다고, 감히 자신하지 못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이들. 그리고 숨져간 이들. 때문에 내가 그들을 호명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겐 부끄럽고, 죄스러운 행위일 수밖에 없다.

 

10년 단위로 나름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는 느낌이다. 97년엔 IMF의 파고에 휩쓸려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2007년엔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 그리고 다가오는 2017년에는 다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어쩜, 우린 여전히 1987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민의 투표를 통한 대통령 직선제라는 성취를 이뤄냈지만, 그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자면 녹록치 않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과 현 정권 내에서는 민주주의의 퇴보가 선명하다.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눈을 감았고, 남북관계는 파탄이 났으며, 국민의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졌다. 신자유주의라는 형태도 알 수 없는 것에 의해 양극화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가 한낱 정권 연장을 위한 레토릭으로 전락했고, 국민을 쥐어짜는 정부의 모습에 어처구니만 맥없이 찾게 된다.

 

책이 나왔을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로 인해 전 국민이 할 말을, 갈 길을 잃었을 때다. 그리고 용산참사, 미국산 쇠고기 파동 등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명박산성 앞에서, 치가 떨리는 뻔뻔함 앞에서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이 나라를 온 몸으로 느껴야 했다.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논리가 살천스레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바로 그 민주주의를 다시 찾기 위해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섰다.

 

19876월은 이 땅의 민주주의의 진실한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소환되어야 할 기억이다. 단지 역사 속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여전히 현재의 모든 이들을 위한 살아 숨 쉬는 역사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일이 될까봐 작업 착수를 망설였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은 그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보여준다. 만화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살리면서,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시각과 유머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오늘의 퇴보에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책임도 물론 적지 않다. 하지만 당연히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온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후 2년 만에 자화자찬에, 왜곡과 책임 떠넘기기로 점철된 회고록을 펴냈다. 또한 머릿속에 유신이 살아 숨 쉬는 현 대통령은 독재 체제를 지켜내려 했던 이를 대법관 후보로, 군사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를 총리 후보로, 지역갈등 조장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한 이를 비서실장으로 두었고, 두려 한다.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얻어낸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누더기가 되고 있다. 난 과연 거기에 어떠한 역할을 했던가. 애써 외면하고, 입을 다물고, 눈을 감으며 그렇게 비겁하게 내 한 몸의 안위를 챙기지는 않았던가. 감히 먼저 간 이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부끄러움이 치욕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조심스레, 그리고 확고히 믿는다.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끊는다는 것을,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음. 국민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이를 무시하고 우습게 생각했던 모든 권력들이 끝내 스러져 갔음을. 난 오늘도 믿는다. 때문에 비관은 없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란 것, 모두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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