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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가끔 생각해 본다. 나의 사춘기는 언제였지?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격동의 시간을 보냈었지? 나는 그때 과연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원했으며, 어떻게 사랑했었지? 그리고 그 사랑의 기억은 지금의 나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지? 흠. 시작부터 비장미가 넘친다.
정확히 서기 몇 년 몇 월 몇 일 부터 몇 년 몇 월 몇 일 까지를, 공식적인 나의 사춘기로 규정할 수 있을지, 당연히! 모르겠다.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때는 꽤나 비장하고 가슴 아프고, 매 시간이 불꽃과 같았을 텐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웃지요’, 뿐이니. 내가 영 재미없게 사춘기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폭풍의 언덕에서 맞았고, 끝내주는 사랑도 했으며, 끝내주는 우정도 나누었다. 자랑이 아니다. 누구나 사춘기를 지나며 그런 값진 경험을 하지 않는가. 이것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당장 내일 지구가 사라진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은 느낌. 아, 그것이 무려 사춘기가 아니냔 말이다!
메마르게 말해 ‘기성세대’, 그냥 성의 없게 부를 때 ‘어른들’, 솔직하게 표현하면 ‘꼰대들’. 그래 우리들 말이다(아, 나도 꼰대인가? 처절히 부정하고 싶다). 우리들은(결국 나까지 포함이구나) 우리들의 올챙이 시절을 잊고 아이들의 행동을 마냥 우습게 보거나 일부러 철없게 보려는 아주 몹쓸 습관이 있다. 물론 유사 이래 모든 꼰대들이 그러했겠지만, 그럼에도 역시 그다지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아이들의 우정, 아이들의 사랑은 같은 나이 때 우리들의 사랑, 우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애절함과 소중함에서 말이다. 아이들은 사랑을 나누며 성장하고 우정을 느끼며 성숙한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사랑과 우정 그리고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얻어가고 잃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사춘기, 유년시절은 그 아름답고도 슬픈 여정의 초입인 셈, 아닌가요?
우습게도 난 <천국주식회사>를 읽으며, 나의 사춘기를 떠올렸다. 참 한심하고도 귀엽고도 깜찍하게, 또한 때론 섹시하면서도 저돌적이고 터프하게 한 시절을 보낸 것 같다. 그때 나를 스쳐 지나간 많은 사람들, 많은 시간들, 그 순간, 순간들. 돌이켜보면 한없이 소중하고 애틋하다. 때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모욕감을 감히 던져주었던, 때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이들. 그들이 있었기에,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난 그 시절을 무사히 아름답게 지나올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왜 SF 로맨틱 코미디인 이 책을 통해 다시 느꼈을까. 글쎄, 외형적으로는 뚜렷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원래 나란 인간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다 울어버리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 줄을 쳐가며 각주를 다는 녀석이니, 해석은 애매하다. 하지만 무언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나의 그 과거의 뭐랄까 설명할 수 없는 살짝 멜랑꼴리하면서도 달콤무쌍한 것을 자극한 것이 있을게다. 아, 그니까 고게 뭐냐고~.
결국, 사랑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창조한 지구 관리사업의 회의를 느껴, 태업을 넘어 파업을 지나 폐업을 준비하는 하느님에게, 기적부서에서 근무하는 두 명의 천사(임원도 아닌 일개 사원이!)가 감히 항의한다. 본인이 힘들게 만든 지구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한 순간에 날려버려도 되는 건 갑쇼! 네? 그러자, 하느님 가라사대, “그래? 불만이야? 좋아, 그렇담 저기 저 쌓여 있는 지구인들의 수많은 기도 중 랜덤으로 너희 맘대로 하나만 골라봐. 그리고 그 기도를 한 달 안에 현실로 만들어봐. 그럼 지구의 폭발을 다시 한 번 고려해 볼 테니.”
하느님은 지구를 멸망시킨 뒤, 아시아풍의 고급 퓨전레스토랑을 개업할 생각이시다. 기본 메뉴, 인테리어 준비에 가슴이 마냥 설레고, 지구를 살려보겠다고 나선 천사에게 오히려 동업 제의까지 하신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걸세, 자네는!”
하느님과 일대 승부를 벌어야 하는 일개(!) 기적부 사원 천사 크레이그와 일라이자는 지구인의 소원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 소원은 바로 서로 호감은 100% 있지만, 쉽사리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로라와 샘을 이어주는 것! 공식적인 테이트까지 성사되는 것으로 하느님과 두 천사는 타협에 이른다. 그런데 하느님이 좀 야하시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두 사람이 <커플이 됐다>고 봐야 하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성관계를 가졌을 때?”
크레이그는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그건 별로 공정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가 말했다.
“그럼 한 달 안에 진행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건 어떤가요? 그 인간들이 데이트를 하게 되면 이 기도에 대한 답이 되었다고 여기는 걸로요.”
하느님은 그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성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분이 말했다.
크레이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키스를 하는 시점은 어떠신가요?”
하느님을 턱을 매만졌다. “어떤 종류의 키스를 말하는 건가? 혀까지 들어가는 걸 의미하나?”
간신히 하느님과 타협을 통해 ‘그냥(!) 키스’를 하는 것으로 낙찰을 본 두 천사는 한 달 안에 두 남녀를 이어주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하지만 당최 이 목석같은 두 양반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그 굴뚝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호, 과연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느님의 신장개업 레스토랑은 그 화려한 막을 올릴 것인가!
결국 가장 소중한 기적은 사랑이라는, 어찌 보면 다소 진부한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부한 것을 진부하다 하지 않고, 소중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치명적 오류를 매일매일 저지르며 살고 있지 않나. 당연히 사랑은 너무나 소중한 기적, 기적의 끝판왕이다!
두 천사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이어지지 못하는 두 남녀의 해프닝을 지켜보며, 지금보다 거칠고 서툴렀지만, 그렇기에 더 순수했던 나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깊이 따지지 않고, 끝을 계산하지 않고, 피드백 따위 우리집 복실이에게나 던져주었던 무모한 사랑(이쯤에서 젝키 노래가 BGM으로 깔려야!). 나는 진실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매우 많다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 사랑이 밥 먹여 주냐는 유치찬란한 말들을 내뱉으며, 정작 그 말의 유치찬란함마저도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들. 아니다. 어쩜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이란 불가항력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증언을 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이 황당무계하고 빌어먹게 공포스러운, 당최 상식과 정의가 천연기념물이 된 세상에서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하기에 이렇게 생존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때문에 청춘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 다시 사랑할 지어다. 지금의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할 지어다. 때론 미워 죽을 것만 같은 이에게도 기회를 한 번 쯤은 줄지어다. 당신의 사랑 1센티미터가, 당신의 사랑 1그램이 때론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음을, 기억할 지어다. 우리 모두에게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사랑일 지어니.
즐겁게, 유쾌하게 읽었다. 내 청춘과 함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