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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터 - 나희덕, 장석남 두 시인의 편지
나희덕.장석남 지음 / 좋은생각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가끔은 진보와 발전이라는 것이 사람을 더 더디고 작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보는 정치적 의미의 그것이 아닌, 과학의 발전을 일컫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편지 쓰기이다. 이젠 편지를 쓰는 것도 앞에 ‘손’을 굳이 붙여야만, 직접 쓰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는 짓이 늘 어설픈 내가, 아주 오랜만에 책들을 정리하고 묵은 먼지를 털고, “잉? 이 책을 내가 언제 구입했지?”하며 한심한 감탄사를 연발하던 중, 아주 오래전 받은 책을 하나 발견했다. 읽은 기억조차 희미한 책, 펼치다 그만 맨 앞장에서 어마어마한 글귀를 찾았다.
“스무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스무 번째 생일이라, 음, 과연 내가 그때 무엇을 했던가. 내 생애 스무 번째 생일은 어떠하였는가, 온전히 기억 날 리 없다. 설마 알코올과 알코올 속에 맺어진 전우들과 광란의 밤을 보냈던가. 아니면 어느 거리 어느 누군가와 함께 마냥 밤길을 걸었던가. 내 청춘의 기억들이 황망히 희미해져간다.
직접 손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어준 그때의 벗은 지금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먼 기억 속에서나마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을까. 아득하고, 아련하다.
더불어 생각해본다. 차디찬 컴퓨터가 아닌, 비록 악필이지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가며, 누군가에게 ‘손’ 편지를 써본 적이 언제였던가. 천방지축 고교시절, 나름 생뚱맞은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쓰고, 문학을 이야기하던, 어설펐지만 아름다웠던, 그때 나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2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옛날 벗의 글귀를 보며, 잠시 딴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당시의 어설펐든 청춘이 그리웠고, 무모함과 치열함이 보고 싶었다.
어마무시한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서 20년 가까이 구르다보니 참 많이도 필기를 했던 것 같다. 판서라고 하지 아마. 선생님이 칠판 빼곡하게 써주시는 글들을 우리는 숨을 죽여 가며, 그대로, 말 그대로 똑같이 베꼈다. 과연 그게 학습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그런 모습은 대학까지 이어졌다. 대학생이 열심히 베끼기나 하고 있었다니, 오호 통재라.
하지만 그 때는 필기 못지않게 이것저것 참 많이 쓰고 지웠다. 오직 나를 위한 일기도 열심히, 어줍지 않은 시와 소설도 열심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도 열심히 끼적거렸다. 누가 부러 읽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나만의 숨을 쉴 공간을 마련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참 많이 변했다. 이젠 손으로 무엇인가를 적는다는 것이,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일들이 되어버렸다. 무언가 해야 하니까 적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런 목적이 없는 글쓰기는, 온전히 내밀하고 비밀이 가득한 글쓰기는 어느 새 종적을 감추었다. 결론적으로, 참 재미없게 살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누군가에게, 기계의 힘이 아닌 나의 손으로 편지를 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린다. 연말이나 명절을 앞두고 연하장에 손으로 인사를 눌러쓰는 것도 버겁다. 그나마 멈추지 않고 하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 책은 눈이 해맑은 두 시인이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았다. 눈이 맑으면 더 많은 것들이 다가오고, 또한 떠나간다. 그 만남과 이별을 덤덤히 적어 내려간 두 시인의 글은, 때문에 아득한 그리움을 전해준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우리들의 지극히 당연한 몸짓이 새삼 눈물겹다.
책을 읽고 책상과 책장과 주변을 더듬거렸다. 곧 조금은 색이 바래버린 편지지와, 원고지 뭉치가 발견된다. 다행이다.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은 나에게 이것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움을, 기계가 아닌 손으로, 애틋함을, 클릭이 아닌 우표 한 장으로 전달할 수 있는, 아직은 나에게 여지가 남아있다.
바쁜 척,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사는 척 하지만, 결국 나는 사소하다. 하지만 내 사소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사소함은 또한 추억이 될 것이고, 함께 한다는 든든함과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제 다시 편지를 써야겠다. 꼭 흐린 가을날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부디 받아주시라.
내가 느낀 시간과 풍경과 눈물과 미소와 그리움을 함께 담아 우표 한 장의 여운으로 그대에게 보내리라. 그리고 아름다웠던 내 청춘에게도. 난 아직 추억을 만들어내야 한다.